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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07. 01 초회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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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는 거의 다 져버렸다. 저 멀리 산기슭에 약간의 붉은 기운만을 남겨놓은채, 하늘은 맑은 보라빛을 물들어갔다. 벌써 보이기 시작한 별들이 여럿. 삭(朔)의 밤, 달이 없기에 별들은 조금 더 자신의 빛을 뽐낼 수 있다.
그리고 약감의 이상함. 이미 미즈루에게서 백업이 들어올 시간이 됐다. 백업이라고 해봐야, 자신이 리겔, 데스와 관련된 사건이 발생됐던 곳을 위주로 그들의 흔적을 찾는동안, 발로 가볼 수 없는 곳, 혹은 그녀가 있는 곳과 떨어진 곳에서 일이 발생할시 혈해의 공간 안에서 이 도시에 펼쳐진 기운을 감지하는 것이지만. 배라도 고파서 뭔가 먹고 가냐고 늦는거겠지, 라며 카미루는 자신을 안심시키며 발걸음을 옮겼다.

 

지하. 어두운 곳이지만 빛을 비춰지고 있었다. 다만, 그 광원이 불분명하게 돌로 된 벽과 천장의 틈 사이에서 새어나오는 것이라는 것만 제외하면, 횟불정도의 밝기로 어느정도 볼 수 있는 정도였다.
그리고 한쪽 벽면. 그곳에 있는것은 역시 거대한 돌로 된 거대한 구조물이었다. 원형의 문. 혈해의 공간으로 들어가는 입구이다. 그 앞엔 미즈루가 문을 기대고 앉아있다. 아니, 쓰러져있다.
피부는 땀으로 젖어있다. 가벼운 옷차림도 몸에 달라붙어있다. 상당히 관능적인 모습일 수도 있었겠지만, 그녀의 상태를 본다면 그런 생각도 사라질 것이다. 얼굴은 창백해져있고 입술은 파랗다. 온몸에 식은땀이 흐르고 있고 호흡은 거칠다. 딱 보더라도 몸 상태가 매우 좋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 가능성은 있다고 생각했지만, 정말..."
미즈루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한다. 차가워진 피부에서 촉각이 둔감해진걸 느낄 수 있지만 다행히 아직 시각에는 문제가 없는듯 싶다.
그녀가 바라보는 건너편. 그곳엔 그녀를 마주보는 한쌍의 붉은 눈동자가 있었다. 홍옥과도 같은 색상. 빛이 있다고 해도 이 어둠 속에서 그 존재를 나타내는 것은 그 붉은 눈동자밖엔 없을것이다. 너무나도 어두은 잿빛이기에, 눈을 감아버린다면 그 존재를 잃어버릴것만 같은 외모. 하지만 절대 떠나가지 않을것같은 기운. 죽음 그 자체를 나타내는 향기. 그런 공기를 뿜고 있었다.
"데스...레지라고 했던가요?"
킥, 하고 웃는 데스.
"그 이름을 기억해주다니, 영광이군. '녀석'에게도 좋은 선물이 될거야."
"...? 무슨 소리죠?"
"아니, 이건 다른 얘기. 오늘의 이 일과는 전혀 관련 없는거야."
데스는 입꼬리만을 일그러 트리며 미소지었다.
"그래서, 코야마가의 가장 깊은 이곳까지 무슨 일이죠? 전 계단 중간에서 쓰러졌을텐데. 당신이 옮긴건가요? 아니, 애초에 제가 쓰러진 것도 당신 때문이라고 전 생각하는데."
"응. 전부 정답. 너무 당연한 얘기지?"
그가 짓는 미소는 무어라고 표현하면 될것인가.
동물원에서 우리안 동물들을 바라보는 표정? 아니다.
검투사들이 싸우는 것을 즐기는 귀족의 표정? 아니다.
모든 생명들의 종착점인 죽음. 그 정점에 서 있는 자로서 자신 아닌 자들의 모든 것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자의 여유로움, 비웃음. 이걸로도 부족하지만 그나마 가장 근사한 대답일 것이다.
지금까지의 경어가 없어진것은 단순히 막의 바깥에서 바라보던 자들을 자신이 직접 무대 위로 올라와 상대하는 대등함 때문일까.
"그래. 역시 그때의 공격은 애초에 절 노린거였군요?"
"그렇지. 지금 네 몸 상태도 그것 때문이야.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나라는 존재에 대해 극한까지의 '공포'를 느껴 미치지도 발광하고 있는거지. 여태 정신을 유지할 수 있는것은 피 안에 녹아있는 마력덕분이겠지."
"그래서, 그 공포의 대왕께선 제게 무슨 일로?"
미즈루는 여전히 거친 호흡으로 말을 이었다.
"알고싶지않아?"
"무엇을?"
"이 일의 배경이 된 과거를."

 

역시, 이상하다.
미즈루와 헤어진지 한참 되었다. 그로부터 이미 두시간이 지났다. 배라도 고팠나보지, 하는 하찮은 변명도 통하지 않을 시간이다. 혹시 잠이라도 들었을까-아니, 미즈루는 그러지 않았을거라 생각한다. 이런 중요한 일에서 자신을 내버려두고 그럴리가.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어쩌면 연락이 되지 않을뿐, 미즈루는 자신의 위치에서 차분하게 역할을 다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저, 연락 할 만한 일이 없어서 그럴뿐.
하지만,
"하지만..."
걱정된다. 설마 그럴리는 없지만, 코야마가로 직접 들어온다는 일도 있기 힘들다.
"미즈루..."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느껴졌다. 그와 같은 느낌을!
미즈루가 걱정되긴 하지만 이쪽 일이 더 먼저이다. 카미루는 발걸음을 빠르게 옮겨갔다. 장소는 도심의 한 건물의 옥상. 그곳에서 그, 리겔의 기운이 느껴진다.
언제라도 혈해의 공간에서 혈해를 꺼낼 수 있도록 손을 한쪽 허리춤으로 옮긴 후 빠른 속도로 계단을 올라간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것보다 훨씬 빠르다.
'또, 이 건물...'
이 건물에 오는것도 이걸로 벌써 세번째이다. 처음 이상을 깨닫고 와 봤을땐 쓰러진 십여명의 사람들과 검정색 공책이 있었다. 두번째 왔을땐 리겔이 있었고, 그리고...
'이번엔...!!'
옥상문을 열어젖혔다. 그곳엔...
"아, 왔군요."
"그것봐요. 내가 뭐라 그랬어요?"
사람과는 매우 동떨어진 두 사람이 있었다.
검은 사람. 까마귀와 같이 검은 날개를 달고 검은 옷에 수 많은 보석으로 치장한 미청년. 사실 얼굴은 헬멧처럼 커다란 가면으로 가리고 있어 보이지 않지만.
그리고 망토. 망토를 뒤집어쓴 사람일지도 모르지만, 그렇지않다. 가면인지 방패인지 모를 무언가를 중심으로 늘어진 망토는 바람에따라 아무렇게나 흔들리고있었다. 안에 사람이 있었다면 이렇게 펄럭이지 않았을 것이다.
카미루에겐 느껴진다. 리겔과 매우 비슷한 이들의 기운. 실제로 그 기운에 이끌려 여기까지 왔다. 하지만 막상 이렇게 가까이에 와서 보니, 분명 다르다. 매우 근본은 유사하지만, 결과물이 다르다.
"당신들...은?"
"처음뵙겠습니다. 신도관, 아스모데우스라고 합니다."
망토가 말했다. 젊은 목소리지만 노파처럼 쉰 여자의 목소리였다.
"신인관, 말파스라고 합니다."
까마귀와 같은 청년이 대답했다.

"우리가 이곳에 온것은,"
아스모데우스라고 칭한 여자...망토가 쉰 목소리로 말했다.
"주군의 뜻과는 어긋나지만 그분을 그냥 보고 있을 수 없었기에 움직인것입니다."
"주군?"
"당신이 생각하는 바로 그 사람입니다."
리겔.
당연히 그 사람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이들에게서 리겔과 비슷한 기운이 느껴진건 그가 이들의 주군이라서 그런것인가.
'아니, 그보다 주군이라니...'
카미루는 점점 더 리겔에 대해서 알 수 없어졌다. 거대한 성도 그렇고, 자신을 주군이라 부르는 자들도 있고...
"사실 주군께선 저희들에겐 다른 임무를 내려주셨지만."
"그분은...생각보다 여린 부분이 있으시거든요. 뭐, 저희도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요."
아스모데우스는 쿡쿡 웃으며 말했다.
말파스가 말을 이었다.
"그런것보단. 우린 당신을 찾아서 온 것입니다. 느껴지지 않으십니까? 이 세상을 뒤집어놓은듯한 역겨운 피냄새가."
"뭐?"
카미루는 정신을 집중해 공기를 느꼈다. 확실히. 지금까지는 너무 급한 마음에 긴장해 움직이냐고 느끼지 못했지만, 느껴진다. 실제 피냄새가 흩어지는것은 아니지만, 피에 깃든 수많은 감정이 흩어지며 뿌리는 역한 기운. 이건...
"저희도 이것이 무엇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주군께선 당신의 집. 코야마가로 향하셨습니다."
"코야마가?!"
확실히 이 피의 냄새. 이 기운. 이것은 혈해의 공간이 열렸을때의 기운이다. 자신이 들어갈땐 혈해를 통해 올바른 통로로 들어갔기에 이런 일은 없었지만, 누군가가 억지로 혈해의 문을 열려고 했기에 일어난 부작용일 것이다. 설마 미즈루에게 연락이 없는것과 무슨 관련이...
"어서 가보십시오. 주군께선 이미 도착하셨을 시간입니다."
"당신들은...리겔은..."
"그 이상은, 주군께 들어주십시오. 저희에겐 아무것도 말할 자격이 없습니다."
......
대화는 거기까지였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고맙다고 말해둘게요."
그리고 카미루는 발걸음을 돌렸다. 다시 코야마가를 향해.

"괜찮...은 거겠죠?"
"응...뭐 어떻게든 되겠지."
아스모데우스의 망토가 크게 펄럭였다. 뒤집혀 안쪽이 보일 정도로. 그리고 그 안에선, 절대 있을리 없다고 생각된 사람이 있었다. 어두운 저녁 하늘 아래에서 명확히 보이진 않지만 그 분위기만으로도 매우 매력적이고 섹시한 여성이라는 분위기를 보이고 있었다.
"지크프리트. 다 들었죠? 이제 돌아가요."
아스모데우스가 허공에 망토를 몸에 대충 두르고 허공에 팔을 뻗으며 말했다.
"음. 수고했어, 둘 다. 아누는 이쪽에 있으니 둘만 돌아오면 돼."
굵직한 남성의 목소리가 아스모데우스와 말파스의 귓전에서 울렸다.
"그럼 지금부터라도 우리의 임무에 충실하자고. 주군의 다음 싸움을 위해서."
말파스가 한쪽 팔로 아스모데우스를 껴안은채 까마귀같은 날개를 크게 펼쳐 밤하늘을 날아올랐다.

 

리겔은 피냄새를 따라갔다. 이미 먼 거리에서도 너무나도 짙었던 피의 냄새는 가까이 가도 더 진해지거나 하는 느낌은 들지않았다. 그래도 방향은 알 수 있어 빠르게 향했다. 도심을 지나 익숙한 길가에 접어든다. 그리고 그 앞에 들어온 곳은.
너무나도 낯익은 커다란 대문. 양 옆으로 길게 뻗은 담장. 자신도 한때 살았던 공간. 데스의 공격에 기억을 잃고, 타쿠미라는 이름으로 살았던 곳.
코야마가.
이곳에 다시 들어가는 것은 꺼려지지만, 그래도 멈출 수는 없다. 리겔은 높은 담장을 간단히 뛰어넘어 코야마가의 부지 안으로 들어갔다.

조용함. 적막.
그가 있던 시절의 코야마가와는 전혀 다르다. 공기가 가라앉아있다. 사용인들을 전부 해고하기라도 한 것인가, 라고 생각하는 가운데, 쓰러져 있는 사람들을 발견했다. 놀라 다가가보니 별 문제는 없는듯. 그저 잠든듯 싶었다. 이곳 외에도 다른곳에도 쓰러져 있을거라 생각했지만, 모두들 괜찮을거라 생각했다. 리겔은 안심하고, 피냄새가 이어지는 방향을 따라, 코야마가의 지하로 향했다. 돌계단으로 이어진 곳. 자신도 이곳에 살면서 단한번도 내려가본적 없는, 아니, 심지어 지금 이 피냄새를 따라기 전까진 있는지 조차 몰랐던 곳을 향해.
그런 리겔이 한가지 놓친것이 있다면 잠든듯 쓰러져있던  사용인들중 몇명의 호흡이 흐트러지고 있었다는것이다.

빛은 사라졌다. 어디까지 이어지는 것일까. 자신의 성에 비하면 크다고 할 수 없지만, 가정집에 이런 지하실을 짓는 일은 없을것이다. 아래쪽에선 피냄새와 함께 강렬한 감정들이 풍겨온다. 처음 맡았을땐 리겔마저 역겹게 만들었던 그 부정적인 기운. 이젠 익숙해졌지만 리겔은 경계하면서 허공에 팔을 뻗었다. 잡힌것은 한자루 검. 아무런 장식도 없이 그저 반듯하게 생긴 검, 염혈. 뽑진 않았지만 한손에 염혈을 쥔 채, 지하실의 마지막 계단에서 내려왔다.

"무슨..."
리겔은 순간 할말을 잃었다. 광원을 알 수 없는 빛이 들어오는 지하실. 그 끝에 있는 것은 거대한 원형의 문. 그 앞엔 피투성이의 미즈루가 있었다.
"미, 즈루씨?"
응? 하며 미즈루가 고개를 돌렸다.
"아, 리겔씨!"
그리고, 밝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리고 피.
온몸에 피를 뒤집어 쓴 모습. 상처투성이 오른팔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였다. 피부가 뜯겨나가고 근육이 끊어지고 혈관이 터져 피가 솟구쳤던 흔적. 더이상 흐를 피가 없는것인지 피는 거의 흐르지 않고있지만.
피는 돌로 된 거대한 원형의 문에 사정없이 튀어있었다. 마치 그걸 목적으로 뿌리기라도 했다는듯이.
"여긴, 무슨, 일로 오셨나요?"
즐거운 투로 말하지만 그녀의 목소리에선 중요한 무언가가 결여되어있었다. 대신 깃들어있는것은 절대 아니길 바랐던 자의 기운.
"아, 또 언니를 괴롭히려고 오신건가요?"
"아니, 미즈루씨, 나는..."
미즈루가 한발짝 한발짝 리겔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하지만 어쩌지? 언니는 지금 없어요. 어딜 갔냐 하면요, 바로 리겔씨를 찾으러 갔어요. 그런데 리겔씨는 여기서 이러고 있어도 되나요?"
차갑다. 리겔은 미즈루의 목소리가 차갑게 느껴졌다. 다만, 그것은 냉정의 목소리가 아닌, 그저 무언가가 어긋났기에 나오는 저온.
"내가, 리겔씨를, 언니에게 데려다줄게요. 다만, 이번엔 언니를 괴롭히지 못하도록, 죽-여, 서."
리겔에게 다가오던 미즈루의 발걸음이 멈췄다. 그리고 들어올린 오른팔. 상처투성이. 움직일 수나 있는건지 의심될 정도로 너덜너덜해진 팔을 들어올렸다. 멈춘듯한 상처에서 다시 피가 솟아나오고, 미즈루는 그 팔을 휘둘렀다.
흩어진 피는 리겔을 향해 날아가는 피의 검날이 되었다. 하지만 리겔은 살짝 몸을 흔든 정도로 피했다. 정확히 그를 향해 날아왔고 리겔은 발은 전혀 움직이지도 않았는데 피의 검날은 그의 뒤쪽으로 날아가버렸다.
"...데스!"
리겔은 그 이름을 부르지만, 대상은 이미 이곳에 없다.
"어머. 너무 그렇게 쉽게 피해버리시면 안돼요. 제가 전력을 다하게 되잖아요."
미즈루의 오른팔의 상처는 아물어가고 있었다. 겨우 형체나 알아볼 수 있었던 팔이 어느새 원래대로 돌아왔다. 옷과 피부에 남아있는 핏자국만이 상처의 흔적.
"코야마가엔 각성자와 초월자라는게 있어요."
미즈루가 역시 웃으며 얘기한다. 웃고있지만, 명백하게 감정이란 것은 깃들어있지 않는 웃음이다. 그저-데스가 세겨놓은 공포의 흔적만이 남아있는 모습.
"혈해를 쓸 수 있게 된 자들 중, 혈해를 가지고 있다면 그 힘을 이끌어 낼 수 있는 자들이 각성자. 언니와 같은 경우이지요."
리겔은 대답 없이 듣고만 있을 뿐.
"그리고 초월자는, 태어날때부터 혈해에 맞는 몸을 가지고 있어 처음부터 그 힘을 사용할 수 있고, 혈해가 없이도 능력 일부를 사용할 수 있는 자들이죠. 바로, 저같은..."
미즈루가 땅을 박찬다. 바닥에는 물 웅덩이를 밟은것처럼 피가 튀기고, 맹렬한 속도로 리겔을 향해 날아간다. 방금 전처럼 몸을 흔든것 만으론 아니지만, 리겔은 미즈루를 간단히 피해 섰다.
"그만둬 주세요...미즈루씨, 당신은 지금 데스때문에...그것보다는 저 안쪽이..."
그리고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혈해의 문. 안쪽에 어떤 것이 있는지는 리겔로선 알지 못하지만, 이 피냄새의 근원이 저곳이라는 것은 틀림 없다.
"아, 그럼 한번 열어보시죠."
리겔이 다가가 혈해의 문에 손을 데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파열음. 오른팔의 피부가 찢어지고 근육과 신경이 찢어지며 혈관이 붕괴되는 소리.
"큭,"
미즈루씨의 팔도 그래서였군, 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다시 미즈루가 달려들었다.
"아하하! 거긴 그런 곳이에요!"
미즈루는 손톱을 세워 공중에서 리겔을 찍어내리듯 할퀴었다. 리겔은 그 순간 피의 장벽을 펼쳐 공격을 막아냈다. 그렇지만 리겔의 가슴팍이 찢어지며 피가 튀었다. 분명 닿지 않은 거리였지만 공격은 들어왔다.
"잔월...같은 공격인가."
검으로 베면 그 검날이 지나간 위치보다 좀 더 앞쪽에 검의 궤적을 더 만들어 검의 거리를 늘리고, 방어한 적마저 베어내는 공격. 마력을 이용할 수도 있고 체술로도 만들어 낼 수는 있다. 아마 미즈루가 사용하는 것은 체내에서 방출된 피를 이용해 잔월과 같은 형태를 만들어 내는것. 귀찮은 기술이지만 무엇인지 알았다면 대응책도 찾아낼 수 있을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지금은 빨리 끝내는게 좋겠군..."
리겔은 혼잣말로 중얼거린뒤, 왼손의 염혈을 뽑았다. 그와 동시에 안그래도 빠르게 회복되고 있던 오른팔이 순식간에 나았다. 녹슬고 이가 나가, 과연 제대로 베이기나 할지 의문이 갈 정도의 날이었다.
"헤에. 검을 뽑는거에요? 하지만 그런다고..."
"미즈루씨."
리겔이 미즈루의 말을 끊었다.
"지난번 학교에서 싸웠지만, 당신은 그것때문에 날 너무 얕보고 있는것 같군요."
리겔의 말은 거기까지. 그리고 그는 염혈을-
날 깊숙이까지 자신의 목에 찔러넣었다.

리겔이 입을 움직인다. 기도가 찢어져 소리는 나오지 않지만, 보는 사람은 누구라도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것 같다.
"그 향기는 강철보다도 비리게."
리겔은 염혈을 염혈을 찔러넣을때와 마찬가지로 단숨에 목에서 빼냈다. 그리고 어느새 목의 상처는 아물고 그는 입을 열었다.
"그 열기는 염옥보다도 뜨겁게."
염혈의 날이 녹듯이 사라졌다. 리겔은 손잡이만 남은 열혐을 들고
"그 빛깔은 선혈보다도 붉게."
리겔의 등에서, 염혈의 손잡이와 같은 제질-자신의 뼈로 된 ㄷ자형 구조물 다섯쌍이 나왔다.
"함께 춤추자, 염혈(焰血)."
분출. 손잡이밖에 남지 않은 염혈에서 붉은 날이 나왔다. 마치 피와 같은, 아니, 리겔 자신의 피로 이루어진 붉은 날. 아무런 무늬 없이 그저 반듯하고 곧는 날. 그리고 등의 다섯쌍의 구조물에서도 피가 솟구쳐 나와 10장의 피의 날개를 만들었다.

"에...?"
미즈루가 그의 모습을 보고 그 이상을 인지하기도 전, 리겔은 그녀의 등 뒤에 와 서 있었다.
"미안, 합니다."
왼손바닥으로 그녀의 등을 민다. 살짝 닿은듯 싶었지만, 큰 충격을 받고 앞으로 날아간다.
"데스의 공포를 푸는 방법은 저도 모릅니다만."
날아간 그녀를 추격해 염혈을 겨눈다.
'저주를 벨 수 있을거라 생각되는 방법은, 하나 있기에...'
그대로 염혈을 휘두르지만, 그의 검은 무언가에 의해 막힌다.
"리겔...!!!!!"
그의 검을 막은 것은 분노에 찬 카미루의 혈해. 경어도 없어진 것은 여동생을 향한 애정과 리겔에 대한 분노때문.
"카미루씨?!"
리겔은 검을 거둬들여 뒤로 빠지지만, 카미루는 피의 날개를 만들어 그를 뒤쫓는다. 카미루가 혈해를 휘두르고, 리겔이 염혈로 막는다. 카미루의 공격은 하나하나가 무겁고 날카롭다.
"잠깐, 카미루씨!!"
리겔이 검을 거두고 거리를 두며 대화를 시도했다.
"이제와서 무슨. 이제 다 알았잖아? 그렇게까지 해놓고, 이번엔 미즈루까지...얼마나 더 사람을 헤쳐야 만족하는거야!!!"
카미루의 분노가 폭발한다. 오른팔을 이루는 유사혈체의 밀도도 더욱 강해졌다.
"됐어. 난 리겔을 막을거야. 설령 죽이게 되더라도. 물론 리겔, 당신이 강하다는건 알 수 있어. 하지만, 나도 그걸 위해서 힘을 길렀어."
카미루는, 검을 고쳐 쥐며 리겔을 노려봤다.
"리겔...당신을 사랑했어. 지금도...그렇다고 생각해. 하지만, 난, 그런것보다..."
"미안, 언니."
카미루가 말을 다 끝내기 전, 미즈루가 끼어들어왔다. 그녀는 카미루의 오른팔을 살며시 감싸듯 쥐었다. 그런데,
"아, 어?"
카미루의 오른팔-유사혈체로 이루어진 그것이 한순간에 풀어지며 사라져버렸다. 동시에 혈해가 떨어지고, 카미루 등 뒤에 피의 날개도 사라졌다.
"이런!"
리겔이 놀라 달려오지만, 미즈루는 이미 혈해를 손에 쥐었다.
"미안, 언니. 하지만 나, 해야하는 일이 있어서."
미즈루는 리겔을 피해 혈해의 문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혈해로 자신의 왼손을 찌르고-그 피를 혈해의 문에 뿌렸다. 미즈루의 피가 문에 나 있는 수 많은 요철들로 퍼져나가고. 이윽고 거대한 돌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미즈루...?"
카미루는 어안이 벙벙해져 그녀의 이름을 부르고,
"이건..."
리겔은 문이 열리자 부정적인 기운들이 사라져 놀라 바라보았다.
한참동안 문이 열리고, 그 끝으로 보이는 것은 붉은 바다. 길고 긴 역사동안 수 많은 사람들을 그 안으로 빨아들여, 축적한, 피의 바다.
"아, 됐다."
문이 열리자, 미즈루는 혈해엔 아무런 관심이 없다는듯이 땅에 떨어트린뒤 그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미즈루!!"
카미루도 미즈루를 쫓아 그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칫, 뭐가 어떻게 된건지."
리겔은, 염혈과 피의 날개에서 피로 된 부분만을 없앤뒤 그녀들을 따라 들어갔다.

"여긴..."
"이게 혈해의 본체. 검의 혈해는 이 피의 바다에서 오는 힘을 방출해주는 도구일 뿐죠."
카미루가 리겔에게 대답해준다. 안으로 들어왔지만, 미즈루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찰박 찰박. 발걸음을 옮길때마다 바닥에선 물을 밟는것같은 소리가 난다. 애초에 피로 된 바다 위를 걷고있는 것이기에.
사방이 탁 트인 공간. 이런 곳에서 보이지 않는다면.
"역시, 아래인가."
"카미루씨..."
"따라와요. 아직, 용서한건 아니니까. 다만 나도 어떻게 된건지 모르겠어서...지금은 미즈루가 더 중요하니..."
"...네."
카미루는 발을 옮겼다. 마치 수영장에 발을 넣는듯이. 그리고 방금전까진 평범한 땅처럼 밟았던 수면에 발이 들어갔다. 그리고 물이 튀기는 소리가 들리고, 그녀가 피의 바다 속으로 빠졌다. 리겔 역시 그녀를 따라, 발을 옮겼다. 물속으로 들어간다는 느낌을 가지고. 그리고-그 역시 피의 바다 안으로 잠겼다.
피의 바다 속이지만, 피처럼 탁하지않고, 마치 맑은 물에 약간 붉은 색소를 타놓은듯 했다. 상당히 깊이 들어갔는데도 밝다. 그리고-눈도 전혀 아프지 않을 뿐더러, 숨도 쉴 수 있고, 수압도 느껴지지 않는다. 마치 공기속에 있는듯. 이런 공간에 중력이라는게 있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아래쪽을 향하는 인력을 향하여 두 사람은 내려갔다.
한참을 내려간 뒤 보인 것. 그것은 무너진 사당이었다. 그 뒤쪽에는 동굴. 동굴을 지키던 사당인듯 싶었다.
두 사람은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동굴 안으로 길게 이어지는 길. 양 옆으론 수많은 양초가 쓰러져 있었다. 하지만 이것들 역시 물속에 있는것처럼 둥둥 떠다니지않고 있다. 안쪽엔 사람이 앉아있을만한 자리. 하지만 미즈루는 없다.
"아니었나..."
카미루는 실망과 불안을 감추며 동굴에서 되돌아 나왔다. 그런데, 한발 늦게 도착한 것인지, 미즈루가 동굴 입구 앞에 있었다.
"미즈루!"
"?!"
미즈루는 그저 놀란듯 돌아보더니, 급하게 수면 위로 올라가 버렸다.
"리겔씨, 어서!"
카미루는 재촉하며 리겔과 함께 수면 위로 올라갔다. 하지만 도착했을때, 이미 미즈루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밖으로 나갔나보군. 카미루씨."
리겔이 카미루를 향해 돌아보는 순간, 드르륵-하는 무거운 소리와 함께 혈해의 문이 닫혔다.
"뭐?"
"너인가?"
카미루가 말했다.
"네?"
"네가, 카미루가 무리하게 힘을 얻으면서까지 싸우려 한 상대인가?"
카미루의 목소리. 하지만 그 분위기는 전혀 달랐다. 날카롭고, 차갑고. 그 목소리 만으로도 사람을 공격할 수 있을것 같은.
"카미루...씨?"
"만나서 반갑군. 나는 코야마 타쿠미. 코야마가의 초대 당주라네."
카미루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곳엔, 타쿠미가 짓던것과 같은, 너무나도 차갑고 예리한 미소가 담겨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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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는...
후기를 썼다.
안녕하세요, 이틀 연속으로 찾아뵙게된 코드입니다.
(블로그에 제일 먼저 올리니 블로그 업데이트 시간만 보면, 24시간도 지나기 전입니다...)
...시험기간입니다. 시험기간이군요.
...소설을 썼습니다.
...어쩌죠 이거...

아 모르겠어요 저도 이제...
공부같은거...

진도가...나간건가요, 이거? 나간거겠죠.
어쨌든.

오늘은 주절이 생략하겠습니다.
당장 내일이 될지, 또 몇달 후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다음편을 기다려주세요.(꾸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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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4 [미얄 팬픽] 담소 [2] 카와이 루나링 2008.07.10 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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