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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산중제왕전 - 호랑이와 구미호

2005.11.18 18:39

느와르 조회 수:407 추천:2

호랑이와 구미호



  “아버지. 저 장가가겠습니다.”

  냇가에서 세수를 하고 있는데 귓가에 이상한 소리가 들려와서 냅다 옆에 있던 놈을 물가에 집어던져 보았
다. 풍더엉. 음. 내 귀는 아직 멀쩡하군. 고개를 흔들어 물을 털어내는데 물에 처박혀있던 놈이 벌떡 고개를
들었다.

  “아버지!”
  “아비 아직 귀 안 잡수셨다. 방금 확인해 봤지.”

  눈을 들어 앞을 바라보자 새파랗게 젊은 아들놈이 있다. 처음 사냥에서 사슴을 한방에 잡았다고 으스대고
다니다가 강 건너 곰탱이들한테 쥐어 박히고는 세상 다 살았다는 듯이 축 늘어져 다니던 놈이 갑자기 뛰어와
서 장가를 들겠다니. 저놈이 분명 대가리를 얻어맞고 온 게 틀림없다.
  
  “장가를 들어, 이놈아? 너 암컷냄새나 맡아 본적이 있냐?”
  “아버지는 대체 절 뭘로 보십니까?”
  “곰 앞발에 맞아서 맛이 간 불쌍한 아들놈으로.”

  물에 이빨을 비춰보며 솔직하게 대답한다. 내 솔직한 대답이 맘에 안 들었는지, 바보 아들놈이 물을 첨벙거
리며 튀어나왔다. 놈은 짐짓 진지한 표정을 짓고는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앉으며 입을 열었다.

  “아버지, 전 맛이 간 것도 아니고. 젊은 혈기로 아무렇게나 말을 꺼내는 것도 아닙니다. 저는 정말 혼약하
고 싶습니다.”

  말투가 사뭇 단호하다. 나는 혀를 차고 아들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놈의 어머니는 내 조카뻘 되는 암컷이었다. 서로 죽일 지경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형제랑 사이가 좋은 산
주인은 거의 없다시피 해서, 처음 그녀가 왔을 때는 자는데 목이라도 따러온 건 아닐까하고 생각할 정도였다.

  “네가 이 산의 산주인이고 내 아버지의 오른발을 못 쓰게 만든 건 잘 알고 있어. 하지만 그건 너와 아버지
일이고 내 일이 아냐. 내가 원하는 건 그저 너를 닮은 강한 자식들뿐이니까.”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는 나와 밤을 보냈다. 아들놈을 낳은 후에도 한동안은 곁에 있어 주었지만, 곧 자신
이 낳은 자식들을 데리고 자신의 골짜기로 돌아갔다.
  동물은 간악한 사람이란 것들과는 틀려서 발정기가 지나면 암컷 욕심은 없다. 하지만 하도 많이 산에서 뒹
굴고 사람이랑 부대끼고 살아서 사람 잡아먹는 범인지 삼년상 도와주는 범인지도 모르게 된 나 같이 늙어빠
진 산주인은 조금 틀린 건지 가끔 그녀 생각이 나기도 한다.

  “그래. 얘기나 좀 들어보자. 어디 암컷이냐?”
  “이 산에 있습니다.”

  만면에 희색을 띄우고 입을 여는 아들놈. 나는 조금 고개를 갸우뚱하고 불을 붙이려던 곰방대를 입에서 떼
며 녀석에게 물었다.

  “이 산에 있다고? 이 산에 남은 암컷이라고는 네 어미 아니면 네 동생들 뿐일텐데?”
  “범 암컷이 아닙니다. 여우암컷입니다.”

  나도 모르게 입에 물고 있던 곰방대를 떨어트려버렸다. 이 자식의 어미가 이 자식만 남겨주고 간 건 이 자
식이 이런 터무니없는 자식이라서였나. 자식을 네 번이나 붙여도 황당한 건 역시 황당했다. 범새끼가 여우암
컷이랑 장가를 들어? 냅다 곰방대를 휘둘러 아들자식의 콧잔등을 후려쳤다.

  “예라이, 정신 빠진 놈아!”
  “깨갱!”

  콧잔등을 잡고 주저앉으며 내는 소리는 흡사 똥강아지다. 아주 가지가지 하는군. 그 꼴을 보니 부아가 더
치밀어서 그대로 그놈의 대가리를 연거푸 곰방대로 두들겼다.

  “얼마나 맞아야 정신을 찾을러냐! 네 녀석이 범이냐! 살쾡이나 시라소니도 여우랑은 장가를 안들 텐데 그
러고도 네가 범이냐, 이놈!”
  “보, 보통 여우 암컷이 아닙니다!”
  “보통이 아니면 뭐냐! 호피를 뒤집어쓰고 이마에 왕(王)자라도 있더냐!”

  더 들을 것도 없었다. 나는 안 그래도 물에 젖은 강아지 같은 그놈을 다시 한 번 호수로 내던졌다. 깨갱하
는 볼품없는 소리와 함께 날아가 호수에 처박힌 아들놈은 물을 처먹어서 어푸어푸 거리면서도 외쳤다.

  “구, 구미호라고요!”

  난 인내심이 없다. 녀석이 다시 기어 나오기를 기다리다간 복장이 터질 것 같아서 그대로 호수로 뛰어 들어
가 녀석의 대가리를 앞발로 후려갈겼다.

//◆

  사람이란 놈들은 아가리에서 진동하는 구린내가 이루 말할 수 없다. 혀도 세치밖에 안 되는 것들이 하는 소
리를 들어보면, 열에 일곱은 코웃음 나오는 소리요. 백에 일흔이 콧방귀 나오는 소리뿐이다. 하지만 그 중에
서도 제일 어이가 없고 화가 나는 소리를 들자면 여우가 사람을 홀린다는 것이다.

  “어이, 있나.”
  
  젖은 몸을 대충 털어내고 머저리 아들놈과 함께 숲속 깊숙한 곳의 여우 굴을 찾았다. 머저리 같은 놈이 혀
를 빼고 꼬리를 흔들기에 머리통을 몇 대 더 후려갈기고 있자, 새까만 굴속에서 사향 냄새 짙은 암컷이 한 마
리 걸어 나왔다. 여우암컷이 사향 냄새라니, 아들놈이 정신 못 차릴 만도 하군.

  “산주인께서 여긴 어인 일로…….”

  가느다란 눈으로 이쪽을 경계하는 암컷. 아홉 개나 되는 탐스러운 꼬리는 바닥에 부드럽게 늘어져서 피기
직전의 봉오리 달린 꽃이나 날개 접은 꿩의 꼬리 깃처럼 고왔다. 물론 보기에 아름다워도 그것은 눈앞의 암컷
이 천년이나 살아 영물이 다 되었다는 증거지만. 영기가 도는 눈은 한도 끝도 없이 깊어서, 그것이 호수인지
수렁인지조차도 알 수 없다.

  “중요한 일은 아니지만 혹시나 아들놈이 귀찮게 굴지는 않았나 싶어서.”

  내 뒤에 있는 아들놈을 슬쩍 바라본 구미호는 가느다란 눈으로 웃으며 꼬리를 내저었다.
  
  “산주인님 자제분이 굴 앞을 서성거리기는 했어도 딱히 해코지를 하신 적은 없습니다. 오히려 사슴이니 토
끼니 물어다 주신 통에 이 비루한 몸이 지내기에 편했지요.”

  ……이 머저리 같은 놈이 굴에 쌓아둔걸 빼간다 싶더니만 여기다 가져다주고 있었군. 찔끔 놀라는 녀석한
테 일일이 화를 내기도 귀찮아서, 뒷걸음질 치는 아들놈은 관두고 지나가는 말처럼 물었다.

  “그리 지내기 편하다면서 소 간(肝)은 왜 잡수시나.”
  
  가느다랗던 눈이 날카롭게 찢어져 이채가 도는 여우의 눈동자가 드러났다. 보기만 해도 간을 빼 먹힌다고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그 눈동자. 하지만 나 같은 산주인한테는 무섭지도 근질거리지도 않는다.

  “아무리 구미호라도 멀쩡한 여우가 사향 냄새라니 당치도 않지. 뭔가 비린내가 진동하는 걸 자셨으니 다
른 냄새를 풍기는 거 아닌가?”
  “비록 산주인이라 하셔도 천년호의 일에 간섭하실 이유는 없으실 터, 하물며 산 아래의 가축을 해친 걸로
흠을 잡으려 하시옵니까?”
  
  천천히 몸을 뒤로 숙이며 꼬리를 세운다. 아홉 개나 되는 꼬리가 천천히 펴지는 그 모습은 그야말로 만개하
는 꽃과 같으나, 피어서 좋을 꽃이 아님은 불 보듯 뻔하다. 주위의 풀이 몸을 눕혀 떨고 자라다 만 잔가지가
말라붙어 떨어지는 모습에 나는 앞발로 땅을 구르며 크게 포효했다.

  -커흐으으으으으응!

  구르던 바위도 놀라 멈춘다는 산주인의 고함이다. 요기를 뿌리며 내 눈을 홀리려던 구미호는 깜짝 놀라 뒤
로 물러서며 컁컁하고 날카롭게 짖었다. 등을 구부리고 꼬리를 바늘처럼 세운 채, 치뜬 눈으로 나를 바라보
는 구미호. 이미 넋이 빠진 얼굴로 땅바닥에 배를 깔고 있는 아들놈은 무시하고 나는 천천히 말했다.

  “이 몸이 산에 들인 구미호는 자네까지 해서 세 마리째. 범이 여우처럼 꼬리가 달린다면 이 몸의 꼬리는
빗자루로 쓸 정도로 가득일진데 어디서 수작을 피우나. 이 몸이 온건 이야기를 하고자 함이지, 멀쩡한 여우꼬
리를 자르러 왔음이 아니야.”
  
  수염을 만지면서 그 얼굴을 바라보고 있자, 구미호는 조용히 꼬리를 눕히며 그 자리에 앉았다. 체념한 듯
이 목을 늘어트리고 바닥을 바라보던 구미호는 조용히 입을 열어 말하기 시작했다.

  “산주인님. 말씀대로 산 아래에 내려가 소 간을 빼먹은 건 틀림이 없사옵니다. 하지만 천년호에 대해 아신
다면 이 비루한 것이 왜 그러시는지도 아시리라 믿습니다.”

  한숨처럼 중얼거리며 구미호가 꺼낸 이야기는 이러했다.
  두어달쯤 전, 달빛 때문에 잠을 이룰 수 없던 구미호는 밤에 물을 마시러 냇가를 찾았다가 골짜기 아래 떨
어져 신음하고 있는 나무꾼을 발견했다. 보통의 짐승이라면 그냥 지나치고, 내 아들놈 같은 머저리야 이게
왠 떡이냐 하면서 물고 돌아왔겠지만, 구미호는 사람을 그리는 영물이라 보통 짐승과는 틀리다. 도술을 부린
다, 약초를 뿌린다, 해서 한차례 호들갑을 떨고 그 나무꾼을 살려낸 구미호는 그 뒤로 궁금함에 산 아래 마을
로 내려갔다가 마을에서 노모를 모시고 힘들게 사는 나무꾼의 모습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고 한다.

  “다음은 안 들어도 알겠군.”
  “어, 아버지. 아버지도 실은 구미……깨갱!”

  헛소리를 하는 아들놈의 대가리를 후려갈기고 허리춤에서 곰방대를 꺼내 물었다. 대통에 연초를 꾹꾹 쑤셔
넣으며 구미호가 아니라도 알 수 있는 일을 모르는 머저리 범새끼한테 설명해 줘야했다.

  “이 멍청아. 구미호가 사람이 되려면 방법이 뭐가 있더냐.”
  “사람 간을 백 개 빼먹거나, 사람의 남자와 아이를 낳고 1년을 같이 지내면 되는 게 아닙니까?”
  “산주인 일도 모르는 놈이 구미호 일은 잘도 아는구나. 그럼 뻔하지. 네가 좋아 죽는 저 암컷은 지금 사람
의 아이를 가지고 있다 이거다.”
  “뭐-라-고-요-오-!”

  둔한 아들놈치고는 드물게도 순식간에 반응이 나왔다. 가뜩이나 수염도 없는 놈이 수염 빠지게 고개를 돌
려 구미호를 바라보더니만 벌린 아가리를 다물지 못했다. 지금이야 사람의 씨를 받은 지 얼마 안 되서 여우
의 모습으로도 있을 수 있겠지만, 배가 불러오기 시작하면 더 이상 여우의 모습으로는 있을 수 없을 것이다.
  
  “혼약은 하셨는가?”
  “달포쯤 지났습니다.”
  “그럼 친정에 간다는 핑계라도 대고 마지막으로 산에 올라왔겠군.”

  조용히 고개만 끄덕이는 구미호의 모습에 담배 맛이 썼다. 나는 솔직히 말해서 구미호가 사람이 된다는 게
탐착치 않다. 그것이 풀포기건 짐승이건 태어난 모양을 버리고 다른 것이 되고자 함은 어려운 일이다. 등용문
을 타넘어 잉어가 되는 것만도 지느러미가 닳아빠질 만큼 힘든 일이고, 여의주 욕심에 끝내 용이 못되는 이무
기도 수 없이 많다.
  하물며 짐승으로 태어나 사람이 되다니, 그 방법이 힘들기 이루 말할 수 없음이요. 되고난다 하여도 그 성
정을 버리는 데에는 사람이 될 때보다 오랜 시간이 필요함을 알고 있다. 물론 사람보다 총명한 구미호들이 그
것을 모르지는 않을 터. 그럼에도 수많은 구미호가 사람이 되고자 사람의 간을 빼먹다 하늘의 벌을 받아 죽
고, 남자에게 속아 등골뼈골을 다 빼먹히고도 끝내 사람은 되지 못한다.
  여우가 사람을 홀린다고? 그럼 여우를 홀려서 몰래 소간이나 파먹고 살아야하게 만든 건 뭐냔 말이다.

  “한번 산을 내려서 사람냄새를 묻히기 시작하면 산도 자네를 받을 수 없네. 사람 새끼를 낳으면 두말할 것
도 없지. 그래도 갈텐가.”

  느릿느릿 땅거미가 져가는 산을 조용히 돌아보고, 마지막으로 내 바보 같은 아들놈을 바라본 구미호는 자세
를 바로 하고 앉아서 조용히 고개를 조아렸다.

  “그간 고마웠사옵니다. 도련님.”

  수척한 몸을 이끌고 조용히 산을 태려가는 꼬리 아홉 달린 뒷모습. 산의 영기를 받아 금빛으로 번쩍이는
그 털도, 천년을 살아 도술을 간직한 그 꼬리들도 모두 포기하며 한낱 사람의 아낙이 되고자 하는 구미호. 가
난히 사는 효자는 죄가 없다만, 그 착한 마음씨에 자기가 쌓은 모든 걸 포기하려는 저 여우의 괴로움은 누가
알아준단 말인가.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아버지.”
  “힘들겠지. 힘들어도 별수 없지.”

  아들놈과 나란히 서서 어느새 사람 계집의 모습으로 변해 산을 내려가는 구미호의 모습을 쫓는다. 갑자기
추워진 날씨 탓인지 청승맞게 뿌리는 눈송이. 남겨진 아들놈의 눈가에는 아쉬움인지, 안타까움인지 모를 표정
이 달라붙어 있었다.



  그 뒤로도 가끔 굴에 놔둔 멧돼지나 사슴 같은 게 사라지기도 하고, 밤늦게 굴을 나갔던 아들놈이 수염에
이슬을 달고 돌아오기는 했지만 그냥 눈감아 주었다. 나는 나대로 산 넘어 과부랑 배를 맞추려드는 양반인지
조반인지 하는 놈을 찾아가 꾸짖어주느라 바쁘기도 했으니까. 높은 산 넓은 숲에 산을 타면서 흉악한 짓을 해
대는 놈들을 쫓아내고, 때로는 그 목덜미를 물어뜯어주려면 몸이 하나가지곤 모자라다.
  그러느라 산 아래 일은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하루가 멀다 하고 절벽에 올라 마을을 바라보던 아들놈이 눈
에 핏발을 세우고 굴로 뛰어 들어왔다.

  “아버지! 산 아래에 내려가야겠습니다!”

  하늘은 감질나게만 눈송이를 뿌리고 바람은 에어내는 것처럼 차가웠던, 구미호가 떠난 날로부터 1년이 다 됐을 쯤 이었다. 왠 호들갑이냐고 되물을 새도 없이 제 할 말만 쏟아낸 녀석은 그대로 몸을 돌려 바람처럼 달
렸다.

  “야 이놈아! 내려가서 뭘 하려는 거냐!”

  어느새 서낭당의 적삼처럼 하얗게 휘몰아치는 눈발을 뚫고 달리는 놈의 귓가에는 내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
듯 했다. 발목을 삼키려드는 눈밭에도 발자국이 남지 않고, 떨어지는 눈발조차 맹렬히 달리는 아들놈의 몸에
는 닿지 않았다. 분기탱천한 얼룩무늬의 짐승이 벼락처럼 달린다.

  “저거야말로 비호(飛虎)로군.”

  무심코 그렇게 중얼거리며 녀석의 뒤를 따랐다. 스스로 늙은 몸뚱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는데, 에어내게
추운 눈밭을 쏜살같이 달리는 아들놈의 뒤를 따르고 있자니 삭신이 쑤시기 시작하는 게 세월을 속일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산중제왕인 이 몸이 연유도 모르고 개 꼬랑지 같은 아들놈 뒤만 따라가기만 하는
건 좀 그렇군.

  -크허어어어어어어엉!

  무리를 해서라도 앞질러볼까 하는 생각을 하는 순간, 아들놈은 그 자리에 멈춰서며 온산이 떠나가라 고함
을 질렀다. 내가 놀라서 멈춘 건 물론이요. 눈밭에 몰려 있던 사람놈들은 오금이 저린지 그 자리에 풀썩 주저
앉았다. 주저앉지 않은 건 이미 눈밭에 무릎 꿇려져 있던 피투성이 몰골의 여염집 아낙네 하나뿐. 별 생각 없
이 그 부어오른 가느다란 눈매와 피가 맺힌 입매를 슬쩍 내려다보던 나는 머릿속에 벼락이 치는 걸 느꼈다.
짐승의 기운은 이미 옅어질 대로 옅어져 있지만 분명 아는 얼굴이지 않은가.

  -네 이놈들! 연약한 처자에게 무슨 짓이냐!

  눈만 뿌리는 마른하늘에 천둥이 치니 눈송이가 어쩔 줄 모르고 사방으로 흩어진다. 격노해서 털을 세우고
쩌렁거리는 목소리를 토해내는 아들의 모습에 이미 넋을 놓은 계집들도 있고, 도망가야 하는 데 다리가 풀려서 바닥에서 비척거리는 놈팽이들도 있다. 그중에서 짐짓 양반이라고 엉덩방아를 찧고서도 감투를 덜덜대는
손으로 붙잡은 채 외치는 놈이 하나 있었다.

  “여, 연약한 처자라니! 저 간악한 것은 여우외다! 산주인께서 그걸 모른다 말하실 참이시오……!”
  -더러운 아가리 닫지 못할까, 이 물어 죽여도 시원찮을 놈! 나무꾼이 집이 비울 때마다  길쌈하는 아낙네
홀로 있는 방에 짚신발로 올라서서 수작을 부리던 놈이 누구를 간악하다고 지껄이느냐!

  호통을 치는 아들놈의 목소리에 질린 건지, 감투 썼다는 놈이 동네 무뢰배 같은 짓을 한 것이 부끄러웠던
건지 양반 놈은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그 뒤에서 도리깨를 들고 여우의 등에 피멍을 늘리고 있던 장정 하나
가 떨리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소간을 빼먹고 멀쩡한 짐승들을 픽픽 나가떨어지게 한 요망한 게집입니다요! 그, 그대로 둘 수는…….”
  -이 놈! 이 간사한 백정놈아! 제 손으로 멀쩡한 농군 집의 황소 다리 심줄을 끊어놓고 여우의 농간이라고!
어디 그 피투성이 손으로 바른 하늘을 가리려 드느냐! 당장 그 도리깨 버리지 못할까!
  “제, 제 시아버님의 무, 무덤을 파헤쳐서 패물을 앗아간 시귀(屍鬼)같은 계집입니다! 용서할 수 없사옵니
다! 산주인님!”
  
  놋그릇에 자갈 굴리는 것 같은 쇳소리로 쪽을 찐 아낙 하나가 지껄이자, 아들놈은 달도 없는 밤하늘에 시퍼
렇게 번득이는 눈을, 화톳불보다도 이글거리게 뜨며 그 계집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발을 굴러 얼어붙은 땅을
뒤집어엎으며 외쳤다.

  -이 녀언! 어디 이 몸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느냐! 무덤을 파헤쳐 패물을 앗아갔다고! 인정이라고는 제비 오
줌만큼도 없는 네년이 언제 네 시아비의 묘에 그리 많은 패물을 넣었더냐! 저 처자가 늙은 시어미를 호강시키
고자 자기 여의주를 쪼개가며 만든 패물에 눈독을 들여 죄를 뒤집어씌운 게 네년이 아니더냐!

  그 서슬에 질려 거품을 물고 쓰러지는 뒤룩뒤룩한 계집. 아들놈의 눈길이 닿을 때마다 제 죄를 아는 사람
놈들이 제풀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뒤로 물러나갔다. 아들놈은 그 커다란 몸으로 구미호의 몸 앞을 막아서더
니 염라대왕을 등에 진 것 같은 목소리로 으르렁 거렸다.

  -이 더러운 놈들! 제가 지은 죄를 쌓아도 지옥에서 평생 불 바퀴를 돌려야 할 것들이, 늙은 시어미를 지극
정성으로 모시고 가난한 지아비에게 신세타령 한번 한적 없는 아낙네를 구미호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금수처
럼 도리깨로 패다니! 네놈들은 저승사자가 오기 전에 이 몸이 모두 물어 죽여 버릴 것이야!
  -어어어어어어흐으으으으으응!

  때를 놓칠 새라 구성지게 한바탕 목을 놓아 울어주었다. 물론 산중제왕이야 이 몸인 것이 자명하지만, 모처
럼 범 구실을 하는 아들놈의 뒤를 봐주는 것도 나쁜 일은 아니리라. 저승문턱에 선 얼굴로 혼비백산하여 도망
가려는 사람 놈들을 휘휘 둘러보던 아들놈은 시퍼래진 얼굴로 갓난쟁이를 안고 있는 사내놈 하나를 발견하고
악귀 같은 얼굴로 호통을 쳤다.

  -네 이노오오오오옴! 이 비열한 나무꾼노오오오옴! 노모가 늙어 죽자마자 네 놈을 정성으로 섬긴 처를 여우
라고 사람들에게 넘기다니!
  “소, 속아서 한 혼약이오! 아무리 정성이 있다 하여도 금수를 데리고 살수는 없지 않소이까!”
  -금수! 금수라고! 병든 노모는 등한시한 채 처가 길쌈하여 힘겹게 번 돈을 투전판에 퍼부어놓고, 바른말을
하는 처에 손찌검을 하는 놈이 누굴더러 금수라고! 이 놈! 네놈을 물어 죽여 그 피를 진짜 금수의 먹이로 주리라!

  사실 아들놈의 대책 없는 성격에 저렇게 오래 말한 것만도 놀라운 일이었다. 하지만 당장 나무꾼놈의 목덜
미를 물어 부수려고 자리를 박차려던 아들의 동작은 뒤에서 튀어나온 새된 목소리에 벼락 맞은 돌멩이처럼 멈
추었다.

  “아니되오! 도련님, 아니되오!”

  피투성이 몰골에 마른 나뭇가지 같은 팔을 겨우 뻗어 아들놈의 꼬리를 잡은 구미호는 힘겹게 고개를 내저으
며 중얼거렸다.

  “그래도……이 계집의 지아비요, 내 새끼의 아버지이옵니다…….”
  -저 놈이 한 짓을 그리 당하고도 아직도 그런 말을 하시오!

  애가 탄다는 투로 구미호에게 외치는 아들놈. 하지만 구미호는 그저 고개만 조금 젓고는 지친 몸을 눈밭위
에 뉘었다.

  “……비록 사람이 되지 못하였다 하여도…….”

  꽃이 진다.
  폭설에 핀 설중난(雪中蘭). 사향 냄새가 향긋하던 꽃이 진다.
  내리는 눈발이 피투성이 구미호를 덮어, 가녀린 몸을 희게 물들여 꽃이 진다.
  꽃이 진다. 근본이 짐승이라기에 되고자 했음에도 사람이 되지 못한 꽃이 진다.
  꼬리 아홉 달린 천년 영물이, 되지 말아야 할 것을 그린 죄로 덧없이 진다.
  애타게 그려 지은 죄가 없음에도 다른 이가 지은 죄 뒤집어쓰고 독이 퍼져 힘없이 진다.
  망연한 표정을 짓는 것은 사람이요, 범이다. 추운 겨울에 어미를 잃어 아직 젖먹이에 지나지 않는 갓난아이
가 우는 소리를 들으며, 꽃이 사그라진다.

  -크허어어어어엉! 어어어어어어어헝! 어어어어흐으으으응!

  구미호의 시체 앞에 앉아 범이 울부짖는다.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 버린 어미를 알아보지 못할 텐데도 갓
난아이가 목이 찢어져라 운다. 몹시도 추운 겨울날 산을 대신해 우는 범 한 마리와 사람을 대신하여 우는 갓
난아이 하나. 속절없이 내리는 눈조차 그 울음만은 덮지 못하였다.



  그리고, 두 해가 지났다.

  “아버지.”
  “뭐냐. 이번엔 암사슴에게 장가를 들려는 거냐. 아니면 까투리냐?”

  아들놈과 나란히 풀숲에 배를 깔고 누워 사냥감으로 눈독들여둔 수사슴이 지나가기를 기다리고 있자니, 절
로 하품이 나왔다. 아들놈은 뜨악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는 침울한 말투로 우물거렸다.

  “대체 하나뿐인 자식 놈을 뭘로 보시는 겁니까.”
  “글쎄다. 범으로는 안보지.”

  앓는 소리를 내며 턱을 땅에 대는 녀석의 대가리를 앞발로 짓눌러서 고개를 들게 했다. 나뭇가지 밟는 소리
도 풀잎 스치는 소리도 아직은 멀기만 하다. 어차피 모습이 보이면 사냥은 금방. 첫 방에 목을 꺾는 편이 여
러 가지로 편하다.

  “아버지. 산 너머 사는 박씨네 효녀 있지 않습니까.”
  “다리 저는 아버지 봉양하려고 산삼을 찾으러 다니는 그 계집아이 말이냐.”
  “굴에 남는 산삼이 한 뿌리 있는데 그걸 가져다주면 어떨……깨갱!”
  “자식 놈이란 게 틈만 나면 아비가 모아 놓은 걸 빼다가 사람 놈들 몸보신 시킬 생각뿐이로구나! 예끼 이놈아!”

  갈수록 기가 차서 하품도 안 나온다. 이 녀석 어미는 분명 이 녀석이 이런 정신 나간 놈인지 알고 있었을
것이다. 곰도 아닌데 사람한테 쓸개를 빼 먹혔는지, 아주 정신머리 빠진 놈 같으니. 그날 구미호가 죽은 걸
보고 사람에 대한 정나미가 다 떨어졌을 줄 알았는데. 이 정이 깊은 놈은 빽빽거리며 어미 앞에서 울던 갓난
아이가 끝내 눈에 밟히었나 보다.
  사람한테 정을 주는 짐승은 팔푼이나 다름없는데도 말이다.  

  “가련하지 않습니까. 그 작은 계집아이가 늙은 아비를 낫게 한다고 조막만한 손에 바구니만 끼고 깊은 산
을 헤매는 모습이요.”
  “후우……정성이 지극하면 네 놈이 물어다주지 않아도 찾지 않겠냐. 산삼은 관두고 이 까불거리는 사슴 놈
을 잡으면 그놈이나 갖다 주니라.”
  “나리님들? 누구를 잡으신다굽쇼?”

  까불거리는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놀란 나와 아들이 고개를 돌리자 긴 다리를 방정맞게 디디며 까
부는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는 수사슴 놈의 대가리가 나무사이로 비죽이 드러나 보였다.

  “이거야 원, 나도 늙기는 늙었나 보군. 방정맞은 사슴 놈 기척도 놓치고.”
  “쇤네가 원체 좀 발이 날래서 말입죠. 호락호락하게는 안 잡혀드리지요.”
  “풀만 먹는 놈이 능글능글……기름내 나는 소리를 하는 구……나, 이놈!”  

  기세 좋게 외치며 몸을 틀어 사슴을 덮치는 아들놈, 하지만 기세만 앞선 그 앞발질은 애꿎은 나무만 분지르
고 사슴 놈 대가리는 제자리에 그냥 두었다. 까불거리는 발놀림으로 숲속으로 사라지는 사슴 놈의 뒤태에 대
고 기세 좋게 고함을 내지르며 쫓아가는 녀석의 뒤에 대고 외쳤다.

  “이 놈아! 그리 뛰어서야 사슴이 너를 잡겠다!”
  “나이가 몇인데 사슴한테 잡히겠습니까! 슥삭 잡아서 아까 말한 박씨네 마당에 던져 둘 테니 아버님은 구
경만 하시지요!”
  
  사냥하면 열에 아홉은 제가 다쳐오는 놈이 말을 잘하는군. 저런 녀석이 산주인이 될 생각을 하면 앞이 깜깜
하지만……그게 아니라면 한 마리쯤은 있어도 좋지 않을까. 짐승이 정을 주는 사람은 분명 간악하지만 그날
죽은 구미호의 말처럼 모두가 그러지는 않으니.




  “……비록 사람이 되지 못하였다 하여도……제 배로 낳은 아이의 웃는 모습을 보았으니……후회는 없사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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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써서 구리구리하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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