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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04. 10 1차 수정본
*기존 12편은 삭제했습니다.
*카미루의 시험대상을 다섯명에서 세명으로 줄였습니다.
그 외의 내용 변화는 없습니다.
*후기는 그대로 놔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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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은 지하이다.
거대한 공간. 이곳까지 내려오는데도 계단을 상당히 내려가야한다.
아마 지하 5층 정도의 깊이는 될 것이다. 집을 지을때 지하실을 파도, 이정도는 아닐것이다.
여성은 거대한 문을 바라보고 있다. 아니, 문이라기 보다는 벽 같다. 벽에 궁글게 조각이 되어있는듯한 모습. 이게 문이라는걸 모르고 본다면 그저 벽이라 생각할 것이다.
건물 두 층의 높이는 되어보일만한 둥글고 거대한 돌 문. 문은 세로로 요철의 형태로 금이 가 있다. 열릴때 그곳이 반으로 갈라져 열리는 것이다.
그리고 그 거대한 문 앞엔-간단한 단 위에 얹어져있는 검 한자루.
언뜻 보기엔 정말 아무것도 아니다. 그저 평범한 검. 아니, 평범하진 않다. 일본도의 굽은 날을 가지고 있으면서 날밑과 손잡이는 서양검의 형태이다. 게다가 은백색의 금속 날은, 어쩐지 붉은 빛을 띄는듯도 싶다.
그런 검이 간단한 단 위에 올려져 있는것 같지만, 마력이라든지 힘의 흐름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라면 의견을 달리 할 것이다.
엄중하게 봉인되어있다.
그것 만으로 표현은 충분하다.
검 자체의 마력도 굉장하다. 그곳에 있는것만으로도 주위에 존재감을 방출하고있다. 그리고, 지맥이 흐르는 지하까지 땅을 파고들어가 그 흐름을 이 한곳에 집중, 정체시켜 함부로 검을 만질 수도 없게 해놓은 것이다. 지하 5층 정도의 깊이까지 땅을 파 놓은 이유는 그것 때문일 것이다.

코야마 카미루는 검에 다가간다. 여기까지 와서 돌아갈 수 없다. 이미 결심했기 때문이다.
'녀석을, 막겠어!'
카미루는 손을 뻗어 혈해(血海)의 손잡이를 잡았다. 지하의 밀폐된 공간에서, 집중된 마력이 소용돌이 친다. 카미루의 머리칼도 그때문에 휘날린다.
보통 사람이라면 혈해를 잡는 순간, 아마 즉사했을것이다. 온 몸이 폭발한다거나, 몸의 혈핵이 전부 역류한다거나. 정말 운이 좋은 경우는 혈해의 손잡이 자체를 잡을 수 없는 경우. 카미루의 오른팔이 피에 젖는다. 오른팔은 폭발하거나 심한 화상을 입은것처럼 피부가 한점도 남아있지 않다. 감색 블레이져 마저도 한눈에 보기에도 '피에 절었다' 라는 느낌이 나도록 젖었다. 피투성이, 라기보다 핏덩이 그 자체.
아픔같은 감각은 없다. 애초에 팔이 그 원래 모습으로 돌아왔을 뿐이니.
어렸을적. 혈해를 처음 들고, 각성자로서 눈을 떴다. 하지만 그 힘을 주체하지 못해 혈해에게 지배당했다. 날뛰었다. 죽은 사람은 없었지만, 집안의 고용인 몇 사람인가가 다쳤다고 들었다. 날뛰는 그녀를 붙잡지 못해, 어쩔 수 없이 그녀의 동생 미즈루는 카미루와 맞섰다. 그리고-이미 초월자로서 힘을 쓰던 미즈루는 카미루의 오른팔을 잘랐다. 혈해를 떼어놓게 할 수 없었기에 팔 자체를 잘라버렸다. 한동안은 그렇게, 팔이 없이 지냈지만, 어느정도 혈해를 다룰 수 있게 된 후엔 유사혈체로 팔의 형태를 만들어 사용하고 있던 것이다.
팔이 잘렸을땐 아프다는것도 몰랐다. 그저-뇌가 부서질것 같아서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고통이란건 있었지만 뇌가 그것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래도-미즈루에게 고마웠다. 다른 사람들을 더 해치지 않도록 해준 미즈루에게 고맙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카미루는 이제 그를 막으려고 한다.
자신의 오른팔이 잘렸어도 다른 사람이 다치는걸 막고 싶다.
그렇기에 카미루는-사랑하는 사람을 다치게 하려고 한다.


오른팔은 아직도 피투성이이다.
'리겔의 그 성. 결코 내가 상대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야. 분명 그정도의 것을 만들어 내려면 준비 기간도 오래 걸렸겠지만, 그래도 그런걸 만들 수 있다는것 만으로도...엄청나.'
카미루는 생각한다. 방금 보고 온 그 커다란 기척을.
하늘엔 거대한 성이 떠 있었다. 지면은 그만큼 엄청나게 파여있었다.
아무리 준비를 철저히, 오랫동안 했다 하더라도-그정도의 질량을 한번에 변환시키는건 굉장한 일이다.
그렇기에, 혈해의 힘을 더 끌어낼 필요가 있었다.
'어머니께서...말씀 하셨었지. 혈해의 '공간' 가장 깊은 안으로 들어가면 혈해의 더욱 강대한 힘을 이끌어 낼 수 있을거라고.'
카미루는 돌 문 앞으로 다가간다. 그녀의 옷소매는 아직 피로 젖어있었지만, 오른팔은 이미 정상적으로 돌아와 있었다.
오른손으로 검을 들고, 왼손으로 검의 날을 감싼다. 그리고 검을 당긴다. 붉은 피가 검날을 타고 흐른다. 피가 흐르는 왼손을 펴서 문에 가져다 댄다. 피가 흐른다. 거대한 돌문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카미루의 손바닥에서 흐르는 피로 족하지않고, 더욱 피를 빨아낸다.
잘 깎여져 대리석처럼 매끈하지 않다. 그저 평평하게 깎아놓은 문일 뿐. 표면엔 돌 자체의 고유한 금이 무수히 많다. 그곳으로 카미루의 피가 퍼져나간다.
요철 하나 하나.
구멍 하나 하나.
카미루의 피가 계속해서 퍼져나가고-이내 회색의 거대한 돌문은, 붉은 색을 띄고있다. 마치 핏덩어리로 만든 문 같다. 그리고 문이 열렸다.

가운데의 요철이 갈라졌다. 드르륵, 이라는 표현으론 나타내기 힘든, 거대하고 무겁고 둔탁한 소리를 내며 문은 옆으로 천천히, 점점 속도를 높이며 열렸다. 문이 완전히 열리자, 안쪽엔 또 하나의 문이 있었다. 이번엔 요철이 가로로 나 있었다. 겉의 문이 완전히 열리자, 안쪽의 문도 열리기 시작했다. 위 아래로 열리는 문. 그 안엔 문이 더 있었다. 역시 세로로 갈라진 문.
그 문이 열리고, 그 안엔 문이 하나 더 있고, 그 안엔 문이 하나 더 있고, 하나 더, 하나 더...
거대하고 둔탁하고 무거운 소리를 내며 문들은 그렇게 한참동안 계속 열렸다. 그리고 드디어 마지막 문이 열렸다. 지독하리라 느껴지는 비린내. 쇠의 냄새.
카미루가 서 있는 입구쪽에서, 마지막 문이 열려 반대편의 빛이 보이는 곳까진, 어림잡아도 수백미터는 됐다. 반대편에 둥글게 잘려 보이는 둥근 공간은, 손바닥 보다도 작아보인다. 카미루는 그 안으로 발을 내딛었다.


마음을 조급히 가질것 없기에, 카미루는 한발 한발 신중히 안으로 들어갔다. 이윽고 그 끝에 도착하여 나타난 곳은-피의 바다(血海) 였다.


하늘마저도 핏빛의 노을처럼 붉다. 이런 혈해의 '공간'안에 와 본 적은 몇번인가 있다. 부모님을 따라서 한두번. 미즈루와 호기심으로 한번. 그리고 집안 일 때문에 몇번.
부모님과 왔을땐, 혈해에대해 알아야 한다며 견학차. 미즈루와 왔을땐 말 그대로 호기심으로. 그땐 금방 돌아갔다. 일 때문에 왔을때도 깊이 갈 일은 없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왔을때와는 피부에서 느끼는 감각이 다르다. 아마 온 목적이 다르기 때문이리라. 지금 이 안에선, 알 순 없지만 분명 강대한 '무언가'가 느껴졌다.
등 뒤에서 거대하고 무겁운 소리가 나며, 둥글게 잘려나간 공간이 닫였다.

발걸음을 옮긴다. 피의 바다에 발이 빠지진 않는다. 마치 평지를 걷는것같다. 그저-1, 2mm정도 물이 고인듯, 한걸음마다 찰박 찰박하는 소리가 날 뿐이다.
"가장 깊은 곳-이라고 해도 말이지..."
혈해는 말 그대로 '피의 바다'이다. 들어온 입구부터 바다 한 가운데 위이다. 물론 나가려면 어디서든 다시 입구를 불러낼 수는 있지만, 이렇게 있으면 방향 같은건 전혀 알 수 없다.
끝없이 펼쳐진 붉은 바다와 붉은 하늘. 멀리 본다면 구분이 가지 않는다. 수평선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하지만 달리 방법도 없기에 카미루는 계속 발을 옮긴다.
애초에 혈해의 '공간'자체가 이계의 공간이다. 현실엔 존재하지 않는 공간이라는 것이다. 아까부터 계속 같은 장소를 맴돌고 있는 것일 수도 있고, 정말 끝없이 펼쳐진 곳을 걸어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다.
그렇다고 기척을 찾아 가자니, 강대한 기척은 사방에서 균일하게 몰려오고 있다.
"어쩌면 되는거지..."
맥이 빠진다. 애써 각오해서 이 안까지 들어왔는데, 시작은 커녕 방향조차 모르겠다. 그냥 이대로 나가기엔 더 김이 빠질것같다.
"가장 깊은 곳이라..."
카미루는 생각했다. 그리고. 웃었다.
"나는 바보로구나..."
그녀는 발을 내밀었다. 찰박-하는 소리. 하지만 지금까지완 다르다. 신발을 신은 카미루의 발이-피 속으로 잠긴다.
신발이 들어가고, 발목이 잠기고, 무릎이 젖고, 치마가 흔들리고, 가슴, 이내 온몸이 들어갔다.
혈해는 '피의 바다'이다. 바다에서 가장 깊은 곳이라 하면 보통은 수면 아래를 생각한다. 카미루는 그저-어렸을적 부터 이 혈해의 '공간'에선 피 위를 자연스럽게 걸어다닐 수 있었기에 그것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한것이다.

피의 바다 속.
눈을 감고 숨을 참은 카미루는, 한참 중력(혹은 다른 인력일지도 모르지만)에 이끌려 수면 아래로 내려갔다. 발이 땅에 닿는 느낌이 들고,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생각과는 다른 풍경이다. 붉은 세상인건 동일하다. 하지만 투명하다. 피처럼 탁하지않고, 마치 맑은 물에 약간 붉은 색소를 타놓은듯 하다. 상당히 깊이 들어갔는데도 밝다. 그리고-눈도 전혀 아프지 않을 뿐더러, 숨도 쉴 수 있다. 아니, 숨을 쉰다기보다 체내의 세포 기관들이 바깥의 '피'와 직접 물질교환을 하고있다는 느낌이랄까. 아무튼 움직이는데 전혀 지장이 없다.
내리막의 길이다. 더 깊은 곳으로 이어진다는 느낌이랄까. 카미루는 다시한번 쉼호흡을 하고, 그 길을 따라 내려갔다. 피부에 느껴지는 물, 이 아닌 피가, 미풍처럼 부드럽게 느껴졌다.
한참을 걸어갔다. 아까보다 훨씬 어두워졌다. 이제 몇미터 앞도 구분하기 힘들 정도이다. 약간이나마 호흡도 힘들어졌다고 느껴지는것은 기분탓일까. 그런데 그 앞에 무언가가 나타났다.
사당. 그런 형태의 무언가였다. 금줄과 방울등이 결계처럼 지키고 있는듯 싶었다. 그 뒤론 급경사로 지면이 더 낮았고, 동굴이 있었다. 저 동굴을 지키는듯한 모습의 사당이었다. 그리고 말소리가 들렸다.
-이리로 들어오거라.
아니, 들렸다고 생각이 들었다. 마치 뇌에 직접 생각을 넣는것처럼.
카미루는 왼손을 뻗었다.
파직.
하지만 결계는, 그녀를 막아섰다. 손에는 통증이 생기며 들어가는것을 거부당했다.
"그렇다면."
이번엔 오른팔을 뻗었다. 혈해와-그 능력 유사혈체로 만들어진 팔. 예상대로 이쪽은 아무 문제 없이 들어가졌다.
마치 막을 거둬내는듯한 느낌이었다. 터지지않는 비눗방울이 그 앞을 막고있고, 오른손으로 거기에 구멍을 내서 여는듯한 감각. 구멍을 몸이 들어갈만큼 크게 넓히고, 그 안으로 들어갔다. 뒤에선 다시 막이 닫혔다.
이형의 공간 안에 더욱 이형의 공간이 있는듯 싶다. 강대한 기운은...이 동굴 안쪽에서 나오고 있었다. 이곳에서 나오는 기운이 저 결계를 통과하며 혈해 전체에 고르게 퍼졌던 것이다. 약간의 오한이 들었지만, 여기까지 와서 돌아갈 수도 없다.
"들어가야지."
카미루는 마음을 다시 잡고 동굴 안으로 발을 내밀었다. 차가운 공기가 와 닫는다.
깊은 동굴이 아니라는건, 발자국이 울리는 소리로 느껴졌다. 얼마 가지않아 안쪽에서 빛이 보인다. 그 조금 더 나아가니 빛은 매우 밝아졌다. 촛불의 빛이었다. 이 액체-피의 바다 속에서 초는 빛을 내며 타고 있다. 하지만 한두개가 아니다. 수십, 수백개의 새하얀 초가 양쪽으로 몇줄씩 늘여져 불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끝엔

"여어, 어서오라고. 20여년만의 손님이로군."

살을 애는듯한 차갑고 날카로운 목소리.
코야마가의 초대 당주. 코야마 타쿠미가 앉아있었다.

"당신은?"
"음. 코야마 타쿠미라고 하는데. 이름은 들어봤지?"
타쿠미라면.
"설마, 초대 당주님?!"
음음. 이라며 고개를 끄덕이는 타쿠미. 어머니가 말씀하셨던, 혈해의 더욱 강대한 힘 이라는건 이 초대 당주 타쿠미의 힘인가.
"얼굴은 본 적 없지? 나는 초상화 한점 남기지 않았으니까. 만나서 반갑다. 나의 후손, 코야마 카미루여."
아...카미루는 무언가 얼이 빠진듯 타쿠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딘가 리겔을 닮았다 생각했다. 미형의 얼굴에, 검은 눈동자와 살짝 긴 흑발. 그리고 날카로운 눈매. 하지만...이쪽이 훨씬 차갑고 날카롭다는 느낌이다. 심지어 처음 만난 날의 리겔보다도.

"어떻게...초대 당주님이..."
"뭐 말하자면 그거-뭐랄까. 정령? 아니, 조상신이랄까? 아, 그게 좋겠군. 그런거야."
타쿠미가 미소지으며 말했다. 그의 미소는 날카롭기 짝이 없다. 마치 그것만으로도 종이를 벨 수 있을것 같다.
"혈해는 내가 만든 무기라는건 알지? 그리고 그 혈해에 내 정신이 남아 코야마가를 지킨다...뭐 대충 그렇게 생각하라고."
"아, 네..."
별로 신도에는 관심이 없던 카미루기에, 그냥 그러려니 하고 납득했다.
"아무튼, 여기까지 왔다는건-내 힘이 필요하다는 것이겠지?"
바로 본론이 나왔다. 카미루는 고개를 끄덕였다.
슈욱,
무거운 무언가가 바람, 아니 피를 가르는 소리. 붉은 색으로 투명한 '액체'를, 진한 붉은색의 '피'의 파도가 가르며 덮쳐왔다.
"읏,"
카미루는 재빨리 몸을 뒤로 뺐다. 이렇게 좁은 동굴에선 옆으로 피할 수 없다. 퍼억, 양 팔로 몸을 막았지만 피의 파도는 그대로 덮쳐왔다. 뒤로 빼면서 충격을 줄였지만, 상당히 묵직하다.
카미루는 그대로 몸이 날아가, 동굴 밖까지 밀려나-사당에 부딛쳤다. 등쪽에도 충격이 오고, 와직-하는 소리와 함께 사당이 부숴졌다.
그리고 게속해서 붉고 진한 '피'의 공격은 계속되어왔다. 바닥으로부터 분출되듯이, 붉고 투명한 '바다' 자체에서 송곳같이 피가 공격해왔다. 카미루는 빠르게 발을 굴러 뛰어올랐다. 바닥에 있을땐 그냥 바깥 같더니, 이렇게 뛰어오르니 진짜 물처럼 한번에 빠르게 올라간다.
피의 공격은 멈추지 않았다. 카미루는 그 공격들을 간신히 피하며 수면 위로 올라갔다.
"푸핫!"
별로 숨이 찬건 아니지만, 습관적인 행동일것이다. 피의 바다 밖에 나오자, 공격은 멈추었다.
"기습에대한 반응속도는 좋은데, 위력면에서 부족한건가."
피의 바다 밑에서 타쿠미가 천천히 올라오며 얘기했다.
"이건?!"
"내가 힘을 그냥 내줄거라고 생각했어? '혈해'는 위험한 무기야. 적합한 자격도 없는 자에게 더 강한 힘을 내 줄 순 없지."
웃고있는 타쿠미. 여전히 차갑고 날카로운 미소이다.
"자격시험이다. '혈해'안엔 지금까지 모든 혈해의 사용자의 기억이 담겨있다. 난 그중 가장 강했던 세명의 기억으로 변할거야. 그들의 힘 전부를 완벽히 재현해낼 수는 없지만, 날-이겨라."
피의 바다에서 타쿠미의 몸을 감듯이 피가 올라왔다. 그리고 그 안에서 나타난건-금발에 붉은 눈동자를 가진 청년. 동양의 느낌과 서양의 느낌을 모두 가지고있는, 혼혈의 외모를 가진 사람이었다.
"코야마 스테너!"
카미루가 놀라며 외친다.
그리고-타쿠미의 목소리가 아닌. 부드러운 남자의 목소리가 말했다.
"음, 반갑네. 내 후손이여. 이름이-카미루라고 했나?"
카미루 역시 알고있다. 코야마 스테너는 외국인과의 혼혈이다. 덕분에 코야마가의 역사에, 그의 서양식 초상화도 남아있다.
코야마 스테너로 변한 타쿠미의 허리엔 검이 한자루 차여 있었다.
"그리고 네 팔-유사혈체도 내가 만들어낸 기술이지."
스테너는 카미루의 오른팔을 카르키며 말했다. 그리고 그는 천천히 검을 뽑았다. 일본도의 날에 서양검의 날밑과 손잡이. 매우 특이한 형태의 검. 코야마가의 혈해.
"그럼. 첫번째부터 시작이다."

스테너는 빠르게 카미루에게 달려왔다. 카미루도 혈해를 제대로 고쳐쥐었다. 검을 잡는 폼부터, 둘은 매우 비슷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두 혈해가 부딛친다.
챙 하는 맑은 소리와 함께, 주변으로 마력이 파도친다. 피의 바다가 그 파동에 넘실거린다. 검을 한번 맞댄건만으로도 엄청난 위력. 그정도의 힘이 혈해엔 깃들어있다.
첫 수는 인사 대신과 같다. 한번 검을 부딛친 두 사람은, 다시 뒤로 물러났다.
스테너는 혈해를 아래로 낮게 내려, 피의 바다의 수면을 쳐 올린다. 튀어오른 피는 높은 파도처럼 일어나 카미루에게 덮쳐왔다.
'피하는건 의미가 없다. 이대로 베어 파고든다.'
처음 검을 맞부딛쳤을때 이미 느꼈다. 스테너의 실력은 뛰어나다. 자신이 전력으로 나가지 않으면 버티기조차 힘들 정도로. 그렇기에
'틈을 주지않고, 몰아붙인다!'
밀려오는 피의 파도를 향해 카미루는 달렸다. 옆으로 잡은 혈해로 파도를 베고, 그 순식간의 차이를 이용해 파도에 가려졌던 스테너의 위치를 확인한다. 그리고 검을 고쳐잡아 아래서부터 스테너를 향해 베어 올린다.
"이얏."
스테너는 몸을 간단히 빼는 것 만으로 그 공격을 피했지만-그의 몸이 베였다. 카미루 역시 아래서 베어올릴때 수면의 피를 쳐올려, 검기처럼 활용해 공격의 범위를 늘린것이다.
스테너의 몸은 옆구리부터 어께까지 크게 베였다. 보통 사람이라면 즉사. 단련을 해 최대한 급소를 피해도 중상일 공격이다.
"장난, 치지 말아주시죠."
하지만 카미루는 그렇게 말한다. 코야마 타쿠미가 변한거라지만, '그' 코야마 스테너가 이렇게 쉽게 당할리가 없다고 생각했기때문이다.
"장난이 아니야."
스테너가 그렇게 말하고, 그의 모습은 안개처럼 흩어져 사라졌다.
"유사혈체는 전술. 그것을 이용해 적의 실력을 가늠하고 자신의 안전을 확보하는건 당연한거야."
스테너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공간'의 전체에서 퍼져나왔다. 그리고 수면에서, 인간의 머리처럼 둥근 것이 올라왔다.
"나는 혈해의 힘으로, 피를 이용해 자신과 동일한 형체를 만들고 전술로 활용 가능한 수준까지 이끌어냈다."
카미루도 알고있다. 코야마가의 역사엔 태어난 아기의 수, 죽은 사람의 수, 집안에서 일한 사람의 수, 이름등이 모두 적혀 있다. 하물며 혈해의 사용자이며, 한때 당주였던 스테너를 모를리 없다. 그렇게 강력한 혈해의 사용자라면 그 업적등도 남아있다.
코야마 스테너는 코야마 가에서 세번째로 강하다고 알려진 자이다. 현재 전해지는 코야마가의 검술 역시 그가 창시한 것이다. 물론 중간에 변형이 있었지만.
수면에서 올라온 둥근 것은, 이내 사람의 머리 모양을 이루고, 색마저 스테너의 색깔을 띄었다. 조금씩 나타난 스테너는 다시 혈해를 바르게 쥐고 카미루와 대치했다.
유사혈체를 사용하는 동안 사용자는 그 모습을 감춘다. 보통은 피의 안개를 짙게 뿌려놓고 자신의 존재를 그 안에 녹이는 방법이 주로 쓰인다.
'하지만 그 방법은...'
그 술법은 개발된지 그리 오래되지 않은걸로 알고있다. 정확하진 않지만, 분명 스테너가 유사혈체의 창시자라면 그 술법은 모른다는것. 게다가 지금은 피의 안개도 껴있지않다.
"그렇다는건!"
카미루는 외치며 눈 앞의 스테너를 무시했다. 그리고 그대로 뛰어올라 피의 바다 속으로 뛰어든다. 아까와는 다르다. 타쿠미를 찾으러 갈땐 투명한 액쳉 숨도 쉴 수 있었지만, 지금은 정말 끈적끈적한 '피' 그 자체이다. 선명하고 진한 붉은색. 눈도 뜰 수 없고 숨도 쉴 수 없다.
하지만-분명히 느껴졌다. 피의 바다 속에서. 스테너의 기척이.
헤엄치는건 느리다. 카미루는 날개의 이미지를 형상화하여, 주변의 피들을 등 뒤로 응축시킨다. 날개죽지쪽에서 위화감이 느껴지고, 그 위화감은 곧 몸과의 일체감으로 바뀌고, 카미루는 피의 날개를 힘차게 휘둘렀다.
마치 노를 젓듯이. 하지만 더욱 강하게. 카미루는 보이지않는 피의 바다 속을 뚫고 지나갔다. 혈해를 잡은 손을 앞으로 내밀고-기척이 코앞까지 가까워진 순간 찌른다!
챙, 하는 소리. 그리고 무언가 깨지는듯 빠직, 하는 느낌이 든다. 카미루는 몸의 방향을 위쪽으로 틀고 다시한번 크게 날개짓을 한다.
첨벙, 하고 수면이 크게 흔들리며 스테너가 뛰어올랐다. 그의 몸 주변엔 둥근 구체같은 투명한 것이 있었다. 보통이라면 빛의 굴절때문에 그게 있다는것만을 알아차릴 수 있겠지만, 지금은 깨진듯이 금이 가 있었고-이내 그 균열은 구체의 전체로 퍼져 깨져버렸다.
수면에 다시한번 첨벙 하는 파문이 일며 카미루가 날아올랐다. 붉은 액체로 뒤덮인 그녀의 등 뒤엔, 피처럼 붉은 날개가 펄럭이고 있었다. 카미루의 몸을 적신 피는 어딘가 이끌리듯 그녀의 오른팔에 가서 모두 흡수된다. 곧 그녀의 옷들은, 주글주글 하긴 하지만 얼룩 한점 없이 깨끗이 말랐다.
"본체를 노리는것도 당연한건가. 뭐-이젠 낡은 수법일까, 이것도."
스테너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말한다. 이국적인 외모가 섞인 멋진 웃음이다.
"잔수법은 통하지 않습니다. 첫번째 공격도 유사혈체를 만들며 숨기위한 속임수였죠?"
스테너는 대답 없이 미소지을 뿐이었다. 카미루의 등 뒤엔 이미 날개는 없었다.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스테너를 향해 달려갔다. 어께 위로 들어올린 혈해를 내리치듯 휘두른다. 스테너도 혈해를 비스듬이 쥐어 그 공격을 막는다. 부딛친 검은 순간 다시 주인들에게 돌아가고 그들은 다음 공격을 준비한다.
이번엔 스테너가 빨랐다. 카미루의 공격을 막은 검을, 거의 움직임 없이 방향만 바꾸어 그대로 찔러온다. 카미루는 몸을 낮춰 피한뒤, 구르듯 돌아 스테너의 뒤로 몸을 옮겼다. 그리고 발을 박차며 뛰어올라 베어 올린다. 베는 느낌은 있었지만 아니다. 스테너는 카미루가 등 뒤로 가는 순간 검을 찌르던 관성을 이용해 앞으로 쓰러지고, 등 뒤엔 그의 유사혈체가 나타나 대신 베인것이다.
쓰러진 스테너는 왼손으로 바닥을 집고 재주부리듯 공중에서 몸을 한바퀴 돌려 착지했다.
"등 뒤로 돌아가 기습을 노리는건 내 검술이 아니었는데 말이지. 역시 전승되면서 여러모로 변한건가?"
스테너는 약간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카미루는 틈을 주지않는다. 이미 상당히 벌어진 거리. 그런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카미루는 검을 높이 들었다가 몸을 숙이며 크게 베었다.
검이 지나간 궤적 위로-피의 검기가 엄청난 속도로 스테너를 향해 날아갔다.
몸을 피하기에는 검기의 속도도 빠르고 크기도 너무 크다.
"크윽,"
스테너는 자신의 앞에 유사혈체를 만들어 그 검기를 일차적으로 막고, 혈해를 들어 막으려 했다. 검기는 혈해에 막혀 소멸됐지만, 완전히는 무리였는지 그의 어께에 상처를 내고 손에선 우두둑, 하고 관절이 괴로워하는 소리를 냈다.
"그래...아무리 약해도 이런게 코야마의 힘이지. 내가...너무 잔기술에만 의지했나."
후우...하며 한숨을 쉬는 스테너. 그는 자신의 검술을 '잔기술' 이라고 말했다. 그곳엔-'코야마가엔 그 이상의 힘이 있다'라는 의미가 담겨있었다.
"카미루, 나의 후손이여."
스테너가 카미루를 불렀다.

스테너의 왼쪽에서 유사혈체 하나가 생겨났다.

"너는 분명-유사혈체를 쓸 능력이 됨에도 쓰지않고있어. 그건 이미 네 잘린 오른팔 대신 그것을 이용한것을 달고 있기 때문이겠지."
"말도 안, 돼."
그리고-카미루는 놀랐다.

스테너의 오른쪽에서 유사혈체 하나가 더 생겨났다.

"유사혈체 하나를 만드는 것 만으론 그렇게 강하지 않을지도 몰라. 봤듯이 너에게 이렇게 상대도 안되고."
카미루는 더욱 믿기지않는 광경을 보았다.

스테너의 뒤쪽 비스듬한 곳에서 유사혈체 하나가 더 생겨났다.

"너는 이미 유사혈체를 쓰고있어 더 쓰지 못한다고 생각하지만...유사혈체는 한체만 만들 수 있는게 아니야. 물론 사용자의 역량에따라 다르겠지만."
네명의 스테너-한명의 본체와 세명의 유사혈체가 카미루를 쳐다보고 있었다. 외모는 완벽히 똑같다. 눈으로만 봐선 절대 구분할 수 없다. 기척으로-구분을 해야한다. 분명 네명중 한명은 희미하지만 그 '느낌'이 다르다.
"혈해의 기억 속에서 재현해내는건 세체가 한계인가. 생전엔 5체까지 가능했는데."
스테너는 부드러운 웃음을 지으며 카미루에게 말했다.

"자. 계속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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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입니다.
...아니라고 생각하시는분, 후기 맞아요.

안녕하세요, 코드입니다.
n번째 세계-코야마가 12번째 이야기 입니다.
어느새 여기까지 왔군요.
...힘들었습니다.
저, 전투 묘사라는게 이렇게 힘들다는걸 다시한번 깨닫는 현실이었습니다!
앞으로가 걱정돼요...
양은 좀 길어졌습니다만, 그냥 즐겁게 읽어주세요...

드디어 카미루가 리겔에게 등을 돌리기로 했습니다.
키스한지 얼마나 됐다고...ㅠㅠㅠㅠㅠㅠ
랄까-리겔 네놈은 혼나도 싸다 ㅇㅇㅇㅇㅇㅇㅇ
라는겁니다(←)
스테너에대해선...여기 말고-다른 작품에 잠깐 언급만 될겁니다.
어떤 작품인지는 예상되시죠?
타쿠미에대해선 이 뒤로 좀 더 얘기가 나올테니 그때를 기다려주세요.

음...
뭐랄까-의미없는 말들만 끄적였군요.
별로 할 말도 없네요.
그러니 이만 줄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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