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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밤의 종막, 새벽의 서막

2007.11.17 06:58

붉은환상 조회 수:179

"심심해."

태양이 저물고 다시금 세상에 나오자마자 그녀가 투덜거렸다.

아무도 없는 마을의 광장을 홀로 거닐며 심심함을 달래보려하지만 쉽지 않은 모양이다.
이 세상의 누가 봐도 신화에도 감히 나오지 못할 절세의 미녀라 부를만한 외모의 그녀지만
이렇게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어서는 얘기가 되지 않는다.
그녀가 입고 있는 새하얀 드레스 역시 칠흑같은 밤의 장막마저도 삼키는 것이 버거운지 거리를 은은하게 밝히고 있다.
하지만 이 역시 그 누구도 봐줄 사람이 없다.

모두들 밤의 장막이 드리우기 무섭게 사라져버렸다. 빛의 시간에는 그렇게나 활기차던 마을의 광장도 지금은 고요하기 짝이없다.
거리를 걸어보기도 하고 이것저것 살펴보기도 했지만 그녀의 무료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결국, 오늘도 그녀는 약속을 깨고 말았다. 틀림없이 얌전히 있기로 약속을 했지만 그녀가 약속을 지킨 적은 사실상 단 한번도 없었다.

사실 그녀가 이제부터 저지르는 언제나의 행동은 장난의 일종이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녀의 기준하에 있어서 장난의 범주에 속한다. 그녀의 아래─, 즉 인간이라 불리는 생명종을 비롯한 모든 생명종에게 있어서 그것은 재앙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천재지변, 세상의 종말, 대재앙. 무엇이라 불러도 좋다. 빛이 저물고 난 이후부터 칠흑의 장막이 펼쳐져있는 한 밤은 그녀의 시간이다.

아무런 의미 없이 휘두른 그녀의 손짓 한번에 수십만의 생명들이 죽는다는 사실조차 자각하지 못하고 사라져갔다. 그녀의 아무 생각없이 내지른 발걸음 하나에 인간이 자신들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쌓아놓은 모든 것이 파괴되었다.

세계를 지워간다. 그녀가 다녀간 자리에 남은 것은 단지 밤의 장막으로 뒤덮인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세계뿐. 깨어난 인간 하나가 비명을 지를법도 했지만 단 한명의 인간도 그렇게하지 않았다. 그들은 단지 은신처에 틀어박혀 다시 아침이 밝아오길 기다렸을 뿐.
그리고 사라져갔다.

수많은 생명을 지워나가며 소란을 떨었지만 단 한명의 인간도 나와서 그녀를 바라보지 않았다. 어느새 그녀의 감정은 무료함에서 투정으로 변해 있었고, 장난에서 본격적인 화풀이로 그녀는 마음을 고쳐먹었다.

단 한명의 인간이라도 좋으니 자신을 봐줬으면 하는 마음에서.
빛이 사라지고 어둠이 지배하는 밤이더라도 자신이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은 마음에서.
어째서 자신이 있으리라 생각하지 못하냐고.
자신은 여기에 떳떳하게 존재하고 있다고. 자신을 봐달라고.

그녀의 투정은 이젠 슬픔으로 변해 있었다. 그렇게 마지막으로 남은 생명마저 지워버렸고 그녀는 흐느끼기 시작했다.

이젠 아무도 자신을 봐주지 못하게 되버렸으니까.
더 이상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버렸으니까.

얼마나 울었을까. 이젠 아무것도 남지 않은 세계의 동쪽 끄트머리에서 조금씩 빛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동시에 여전히 울고있는 그녀를 향해 명랑한 인사가 전해졌다.

"안녕~! 이제 교대 할 시간이지? 오늘은 약속 지켰어?"

그녀가 눈물을 닦으며 황량한 세계를 가리키자 인사를 건넨 청년이 머리를 싸매며 한탄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또 약속을 안지켰구나. 이걸로 몇번째지? 단 한번도 지킨적이 없다구 약속?"
"몰라!! 아무도 나랑 안놀아준단 말이야!!"

어린아이같은 투정. 청년은 곤란한듯 머리를 긁적이며 황폐화 된 세계로 눈길을 돌렸다. 그도 그녀를 이해하고 있다. 다만 어쩔수 없을 뿐이다. 그녀와 그가 만나는 이 잠깐의 시간을 제외한다면 그녀는 계속해서 혼자서 있어야하기에, 그 외로움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결국, 오늘도 청년은 그녀를 달랠수밖에 없었다.

"알았어, 알았어. 내가 다 알아서 해놓을테니까 이젠 그만 돌아가."
"이번엔 좀 제대로 만들어줘. 언제나 난 외톨이란 말야."
"에... 뭐, 노력해볼게."

자신없어하는 청년의 대답이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그녀로선 어쩔수 없었기에 그녀는 지켜볼수 밖에 없었다.

청년이 앞으로 나선다. 의미 모를 한숨을 내쉬곤 언제나처럼 일을 시작했다.
그녀가 소거해놓은 세계를 복원한다.
이전과 똑같이. 자신들이 사라졌음을 인지하지 못하기에 인간은 또 다시 빛을 칭송하며 한정된 시간을 유유히 살아갈 것이다.
그 모습을 그녀는 울것만 같은 얼굴로 바라보고 있다.

이윽고 세계의 복원이 끝났다. 그녀가 하룻밤 동안 소거한 모든 것을 청년이 복원하는데는 짧은 한순간이 걸렸을 뿐이다.
모든 생명은, 기억하지 못한다.

청년이 웃으며 말한다.

"이번엔 조금 더 나은 세계일거야. 너에게든, 나에게든."

새침해진 그녀가 답한다.

"별로 기대는 안하지만."

뜻 모를 의미를 담아 웃는다.

그렇게, 청년은 동쪽으로.
그렇게, 그녀는 서쪽으로.

그녀를 지나쳐가며 청년이 말한다.

"빛을 여는 존귀한 존재. 그것인 나. 태양의 시간을 열겠다."

청년을 지나쳐가며 그녀가 말한다.

"어둠을 밝히는 존귀한 존재. 그것인 나. 달의 시간을 폐하겠다."

그리곤, 결국 그녀는 웃어버리며 말한다.

"선수교대. 내일만큼은 약속을 한번쯤 지켜보도록 하겠어.

사라지는 은백의 아가씨.
그렇게 오늘도 세계는 새벽을 맞이한다. 생명을 이어나간다.

그리고 오늘도 세계엔 밤의 장막을 무대삼아 은백의 아가씨가 돌아온다.
작은 소원을 가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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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안녕하세요. 여태껏 유령회원으로 존재하던 붉은환상이라 합니다.
알바 중에 심심해서 예전에 썼던 습작들 중 기억에 남는걸 다시 한번 써봤는데 어떨런지 모르겠네요. 왠지 더 문장 표현이 어색해진거같기도 하고... 이것참 써놓고보니 곤란하기 짝이 없군요.
테마가 심심해서 세계를 소거하는 달님의 이야기...라는 극단적 방향은 아니었습니다만 쓰다보니 요렇게 되버렸습니다. 이젠 원래의 버전은 어땠는지도 긴가민가하네요.
요즘 시간이 없어 글을 못쓰다보니 가뜩이나 없는 실력도 떨어지는 기분이라 좀 슬프군요. 솔직히 실력이 떨어지나 안떨어지나 거기서 거기긴 합니다만.
그럼 요즘 날도 추워지는데 감기 조심하시라는 말을 끝으로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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