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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세월을 같이해온 동료의 부제는 생각보다 너무
큰 모양이었다.  
흐트러져 버린 검은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며, 소녀는 손에 쥔
환검을 더욱더 굳게 쥐어잡았다.
너무 나도 많은 적의 공격에 그녀의 하얀 볼엔 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긴장감, 적막감, 그리고 공허함이 겨울이 아직 가시지
않은 공터에 그 보이지 않는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었다.
바람을 가르는 한 줄기의 섬광, '살아있지 않지만 움직이는 것'의
절명, 그리고 침묵.
초조함과 늘 같이 해오던 동료의 공백으로 생긴 미묘한
불안정함, 그녀의 표정은 평온하지 않았고, 그녀의 검은 눈동자는
한곳으로 고정 되어있지 않았다. 적들은 활시위에 얹혀진 화살 처럼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한숨. 거칠은 숨결과 차가운 바람이 만들어
낸 하얀 깃털이 공기중에 스스러질 정도의, 짧으면서도 긴 찰나.
흑단같이 검은 머릿결이 다시 바람속으로 섞여 들어간다.
그와 동시에 활 시위에서 튕겨져 나온 '화살'들이 그녀를 노린다.
하얀 검이 다시 하늘을 향한다. 그리고 무수히 많은 적들의 사이에서
한 줄기의 빛이 그 사이를 가른다.


그리고 또 다시 침묵이 찾아왔다.
아니....
침묵이 찾아왔다고, 소녀는 지레짐작을 했었는지도 모른다.
아직도 공터엔 하나의 살아있지 않지만 움직이는 존재가 남아 있었다.
그 하나 남은 존재는 몸속에 복 받치는 감정을 제어 할수 없는지
부들부들 떨면서, 붉은 눈동자로 정제되지 않은 분노를 소녀에게
표출 하고있었다.

"넌, 도대체....누구냐?! 어째서? 어째서, 우리와 대등하게 싸울수
있는 거지? 인간 따위가.... 인간 따위가!!!"

질문의 형식을 하고 있는 절규에 소녀는 대답 대신 그녀의 환검을 들었다.
분노에 떨던 존재의 감정은 서서히 절망으로 바뀌었고, 그것은 체념으로
이어졌다. 고개를 숙인 적에게 소녀는 처음으로 자신의 입을 열었다.

"난 인간이 아니니까."
"..."

검은 눈을 갖은 소녀와 붉은 눈을 갖은 살아있지 않지만 움직이는 존재의
시선이 맞닿았을 때, 소녀는 거침없이 검을 내려쳤다.
무수히 퍼지는 붉은색의 환영속에서 소녀는 자신에 뺨에 묻은 피를 엄지
손가락으로 훔쳤다. 그리고는 그것을 혓 바닥에 갖다대었다.
맛은 없었다. 단지 하늘에서 내려온 눈 처럼 차가웠을 뿐.
하늘에서 비가 내리는 지, 그녀의 볼에 다시 물방울이 떨어졌다.



"난 추억저사니까."


소녀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비는 내리지 않았다. 한순간 생겼던 망설임
은 떨어진 물 방울 처럼 지면에 흡수되어 버렸다.
그녀는 다시 앞으로 걸어갔다.


자신의 동료를 찾기위해.


자신의 공백을 매꾸기 위해.










-추억저사 프롤로그 종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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