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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호랑이와 규방아씨 <下>

2006.03.09 10:45

느와르 조회 수:283




  잠시 말을 멈추고 품에 안고 있던 목련꽃을 곁에 내려놓은 아씨는 말을 이었다.

  “걷지를 못합니다.”
  “예?”
  “서방님이 돌아가셨을 때 저도 두 다리를 못 쓰게 되어, 이곳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못
하게 됐습니다. 사람들이 저를 규방아씨라고 부르는 건 그래서지요.”

  그러고 보면 아씨의 규방 댓돌에는 신발이 놓여있지 않았다. 깔끔한 성격이라 신발도
안에 보관하나 했건만 그게 아니었다.

  “미안하오. 난 그런 줄도 모르고.”
  “도령이 미안하실 게 무어 있겠습니까. 그늘이 져 꽃조차 제대로 피지 않는 이곳에 꽃
을 가져다주신 것만도 고마우십니다.”

  쓸쓸하게 말하는 아씨의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속이 저릴 듯이 아팠다. 그녀는 따듯
한 볕도 들지 않고 꽃도 피우지 않는 이 규방에서 벌써 몇 년을 홀로 지낸 것일까. 낮이
면 그저 하염없이 나갈 수 없는 바깥만 바라보고 밤이면 다시 볼 수 없는 서방님이 그리
워 한숨만 헤이면서.
  정신을 차려보자 나는 규방 마루에 올라서서 아씨의 손목을 잡고 있었다.

  “도, 도령?”
  “걸을 수 없으시다면 내가 업고 가겠소!”
  “아. 아니되옵니다! 혼인한 아녀자가 어찌 다른 사내의 등에 업혀서…….”
  “나는 사람의 사내가 아니니 괜찮소이다! 그저 돗가비에게 홀렸다 치십시오!”

  아씨의 대답은 듣지도 않고 그대로 그녀를 들쳐 업었다. 놀라서 내 어깨를 붙잡는 아
씨의 간지러운 손아귀를 느끼며 나는 그대로 규방마루를 박차고 단번에 담을 뛰어 넘었다.

  “꺄악!”
  “겁먹지 마시오! 절대로 떨어뜨리지 않습니다!”

  아무렴, 아버님은 삼년상 지내는 효자들을 등에 태우시고 30리길을 바람처럼 달리셨
어도 등에 탄 사람을 떨어트리신 적은 한 번도 없으셨다. 죄지은 놈은 타지 못해도 죄
없는 이를 떨어트리지 않는 것이 우리 같은 범의 등이다. 하지만 아씨는 절벽을 타고 넘
느라 쏜살같이 지나가는 발아래의 풍경이 무서운지 내 목덜미를 꼭 끌어안고 얼굴을 파
묻고 있었다.
  목련향을 닮은 아씨의 향기가 코를 간질이고, 등에 붙어있는 아씨의 온기가 내 염통
을 사정없이 두들겼다. 기쁜 마음에 포효를 내지르려다가 등에 있는 아씨 놀랄까 사람
목소리로 힘차게 내뱉었다.

  “내말 들어라, 돗가비 놈아! 내말 듣거든 산광대패 데리고 신령님 동굴로 썩 날아오너
라! 게으름 부리고 오지 않았다간 네놈이 돗가비라도 골짜기에 처박아 버릴 테다!”

  테다……테다…….
  메아리가 꼬리를 끌고 온산에 퍼져간다. 놀라서 고개를 드는 아씨의 모습에 헤벌쭉 웃
은 나는 다리에 힘을 주어 동굴 앞에 멈추었다. 푸른 바위로 막혀있는 동굴 문에 기세
좋게 외쳤다.

  “문 열어라 버들 도령아! 이 몸 오셨다!”
  “밤에는 잠이나 처자거라! 이 화상아!”

  역정을 내는 새된 목소리와 함께 바위 문이 열리는 모습에 아씨의 눈이 휘둥그래진
다. 나는 그 모습에도 괜스레 웃음이 나서 껄껄 웃고는 열린 바위문 안으로 발을 들여놓
았다. 후욱 끼쳐오는 꽃향기에 더욱 놀란 표정을 짓는 아씨를 업고 동굴 깊숙이 들어가
자, 눈에 보이는 곳 가득 펼쳐진 꽃밭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아…….”

  멍하니 탄성을 내뱉는 아씨. 근처의 바위에 가만히 아씨를 내려놓은 나는 그저 놀란
눈으로 꽃밭을 바라보기만 하는 아씨에게 물었다.

  “어떠시오?”
  “굉장……합니다. 어떻게 이런 곳이…….”
  “다 내가 잘 돌보니 그렇지.”

  고개를 돌려보니 버들 도령이 서있다. 언제나처럼 왈패처럼 옷을 입고 불만 섞인 눈으
로 나를 바라보던 놈은 허, 하고 혀를 차고는 고개를 내저으며 주절거렸다.

  “여기가 짐승들 쉬라고 만든 곳이지 아무나 데리고 들어오라고 만든 곳 인줄 아냐.”
  “그럼 네 녀석이 지금껏 계집질 하려고 들인 건 다 토끼나 살쾡이냐?”
  
  내 말에 이를 갈며 노려보던 녀석은 곳 흥, 하고 코웃음을 치며 어디론가 사라졌다. 아
직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아씨의 모습에 나는 뒷목을 긁으며 대답했다.

  “저 녀석은 여기를 돌보는 버들 도령이라는 놈인데 별로 신경 쓸 필요는 없소이다. 그
보다…….”

  옆에 있는 감나무에서 빠알갛게 익은 홍시를 따 아씨에게 건넨 나는 마침 쭈뼛거리며
들어오는 돗가비와 모가비 놈의 모습을 발견하고 소리쳤다.

  “잘 왔다, 이놈!”

  냅다 달려가서 돗가비 놈의 두꺼운 목덜미를 감아 아씨 앞으로 끌고 왔다. 놀란 얼굴
로 돗가비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곧 그 얼굴을 알아보고 눈을 날카롭게 뜨는 아씨. 놀란
눈으로 아씨를 쳐다보는 건 돗가비도 마찬가지 황급히 나를 돌아보는 놈의 모가지를 뒤
틀어서 아씨에게로 돌려놓고 말했다.  

  “자, 어서 사과하거라! 메밀묵 훔쳐 먹어 죄송하다고!”
  “미, 미안하우, 아씨. 난장을 친 건 사과드리우. 근데 도령…….”
  “자, 모가비놈아! 걸판지게 놀아봐라!”

  어이가 없는 얼굴로 도깨비 목을 조이고 있는 나를 바라보던 모가비 놈은 아씨를 바라
보더니 왠지 한숨을 내쉬며 재주를 넘었다. 꼬리가 둘 달린 놈이라 여우귀도 여우꼬리
도 숨기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제법 사람다운 모습으로 변하는 건 가능하다.

  “노는 곳은 고를 수 없어도 노는 판은 고르는 게 광대외다! 이 비루먹은 광대 놈은
100년에서 한해 빼고 나이를 먹어 꼬리가 두 개! 태생이 여우이니 사람 놀다시피는 놀
을 수 없사온데 어쩌시겠소!”
  “광대주제에 말이 많구나! 줄이 없어 그러느냐? 멍석이 없어 그러느냐!”
  “멍석이 없으면야 쐐기풀로 짜고! 줄이 없으면야 거미줄을 꼬아 만들면 되오만은! 보
는 분이 적어서야 놀 맛이 안 나오!”

  놈이 건네면 나는 받는다. 아버님은 범이란 놈이 체신없이 재주를 넘고 논다고 진저리
를 치셨지만 산에 올라서 쩌렁쩌렁 소리를 치는 것도, 이놈들 농지거리에 대꾸해주는
것도 즐겁기는 매 한가지 아닌가.

  “예끼, 성미 급한 여우 놈아! 네놈이 놀면 보는 눈이야 어련히 생기겠지! 요사스런 주
둥이로 잡소리는 그만하고 노래나 부르거라!”
  “내 도련님 믿고 놀겠사오니 노는 판 끝나고 재미없다 면박이나 긁지 마시오!”

  고개를 내저으며 소리를 치고는 아씨 머리 위로 재주를 넘는다. 내려앉은 모가비 놈
은 캬웅, 하고 길게 울고는 허리춤에서 꽹과리를 꺼내 부산스럽게 치며 외치기 시작했다.

  “오슬오슬 오소리! 넉살좋은 너구리! 수단 좋은 수달 놈에 영특 맞은 여우 놈까지 냅
다 튀어 나오거라! 도련님이 놀라시니 어디 한 번 놀아보자!”
  “얼쑤!”

  여기저기 꽃잎 휘날리며 튀어나온 산광대패 놈들은 저마다 장구에 피리에 울리며 덩
실덩실 춤을 추기 시작했다. 모가비는 귀를 쫑긋거리고 꼬리를 살랑살랑치면서 놈들 사
이를 뛰어다니며 빙글빙글 돌고 꽃잎을 뿌려대며 눈웃음을 치기 시작했다. 옷자락을 펄
럭이며 빙글빙글 맴을 도는 그 모습에 아씨는 홀린 것 같은 말투로 중얼거렸다.

  “굉장히 아름다운 아가씨로군요.”
  “수컷이오. 저 녀석.”

  놀란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는 아씨의 얼굴도 보기 좋았다.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로
나랑 아씨를 바라보던 버들 도령 놈도 어느새 산광대패 노는 모습에 꺼내 온 거문고를
타고 있고, 날리는 꽃잎에 흐르는 풍악소리가 꽃밭에 울려 흥겹기가 그지없는 광경.
  그걸 정신없이 바라보며 웃고 있는 아씨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어느새 모가비 놈
이 등 뒤로 다가와서는 내 허리를 감고 끌어당겼다.

  “도련님 뭐하시오! 달밤에 춤추지 말고 풍악이 있을 때 추시지요!”
  “오냐, 이놈아!”

  모가비 놈의 뒤를 따라 신나게 춤을 춘다. 어이가 없어 한숨 쉬는 버들 도령 보고도 춤
을 춘다. 즐거워하는 아씨의 얼굴을 보며 신나게 춤을 춘다. 코에는 목련향. 눈에는 규
방아씨. 춤을 추며 도는 지금이 행복하기 그지없었다.
  아씨를 바라보는 돗가비놈의 얼굴이 이상했던 것은 조금 맘에 걸렸지만.


  아씨를 다시 규방에 데려다 준 것은 새벽녘이 다되어서였다. 슬슬 나이 먹어 아침 잠
없는 종들 깨어날 참이라 규방에 모셔 주고 후딱 가려는데 아씨가 등 뒤에서 말을 걸어
왔다.

  “도련님. 덕분에 진기한 구경을 했사옵니다.”
  “다 사과하려고 그런 거니 신경 쓰지 마십시오.”
  
  괜스레 멋쩍어서 머리통을 긁으며 그렇게 말하고 있자니, 인기척이 들리기에 서둘러
담 위로 뛰어 오르는데.

  “그간 정말 고마웠습니다. 이제 더 이상은 오지 말아주시어요.”

  청천벽력보다도 큰 소리가 귓가에 와 닿았다. 채 돌아보기도 전에 소리를 내며 닫히
는 규방 문에 가려 아씨의 얼굴조차 볼 수 없었다. 그만 처음 왔을 때처럼 발이 걸려 담
밖으로 굴러 떨어졌는데 머리가 부딪쳐 눈앞에 별이 튀었다.

  “커흥!”

  압에서 튀어나오는 소리가 범의 소리다. 놀라서 몸을 돌아보니 어느새 발은 네 개에
몸에는 얼룩 털, 터오는 동에 비친 그림자가 범의 것이다. 서둘러 앞발을 보니 묶여있
던 달억새는 시들어 바싹 마른 채 끊어져 있었다. 그저 망연한 표정으로 그걸 바라보고
있자니, 아씨의 목소리가 귓가에 메아리 쳐왔다.
  다시는 오지 말아달라는 그 목소리가.

//

  시간이 흘러 어느새 내일이면 아버님이 돌아오시기로 한 날이다.
  나는 그저 동굴에 누워서 하릴 없이 시간만 죽이고 있었다. 새삼 앞발을 들여다봐도
거기에는 달억새가 없다. 재주를 넘어보아도 모습은 바뀌지 않는다. 달억새가 끊어진
밤에 돗가비놈을 찾아가 새로 만들어 내라고 했었지만, 어차피 시냇가의 달억새도 몽
땅 시들었을 거라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간 잘 썼으니 됐지 않수.”
  “그거야 그렇다만…….”
  “규방 아씨 생각에 그러는 거라면 관두우. 도령은 범이우. 사람한테 그리 마음을 줘서
어쩌자는 거요?”

  물론 나도 알고 있다. 나는 범이지. 네발로 뛰며 토끼를 잡아먹고 노루를 잡아먹는
범. 사람의 암컷과는 맺어질 수 없단 것쯤은 잘 알고 그럴 생각조차 없다. 하지만 그래
도 아씨가 보고 싶다.
  분을 바르지 않아도 백옥같이 고운 얼굴에 굵은 눈썹 아래 달밤처럼 빛나는 눈동자.
또랑거리는 말투처럼 바르게 솟은 콧날 아래 예쁘게 그린 것 같은 발그레한 입술. 그리
고 잊혀지지 않을 정도로 곱고 고운 그 미소.

  “보고 싶구나. 다시 한 번.”

  앞발에 머리를 올린 채 그냥 한숨처럼 내뱉었다. 하지만 그만두어야지. 사람 모양으
로 둔갑도 못하는 마당에 최가댁 담을 넘어봤자, 아씨가 놀라 까무러치지나 않으면 다
행이다. 목소리도 으르렁 거리는 소리가 섞이니 알아들을 리도 만무하지.
  그래, 잊자. 내일이면 아버님도 돌아오시니 이제 잊어버리자. 아씨는 사람이고 나는
범이다. 잊어버리고 다시 예전처럼 살자. 예전처럼…….

  “도련님. 기침(起寢)하셨소?”
  “그럼 해가 중천인데 아직 자겠느냐.”

  고개를 들어보니 모가비놈이 긴 주둥이를 빼꼼 내밀고 동굴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들어올까 말까 주춤거리는 폼이 똥마려운 강아지 모양 수상쩍다. 나는 이빨을 드러내
고 놈을 바라보며 으르렁 거렸다.

  “할 말이 있으면 들어오고 없으면 냉큼 꺼지거라.”
  “드릴 말씀이 있긴 있사오만…….”
  “그럼 뱉어! 아가리에 넣고 우물거리지 말고!”
  “저, 그게, 그…….”
  “커흐으으으으응!”

  우물거리는 꼬락서니에 역정이 나서 거칠게 울었더니 모가비놈은 놀라서 털을 세우고
는 바닥에 납작하게 달라붙은 채 외친다.

  “규, 규방 아씨에 관한 겁니다요!”
  “네깟 놈이 아씨에 대해 뭘 할 말이 있다는 거냐!”

  화가 나서 다그치자 모가비놈은 내 안색을 살피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돗가비 형님은 도련님께 말하지 말라고 하셨지만, 아무래도 말해야겠소.”
  “뜸 좀 그만 들이거라. 할 말이 대체 뭐냐?”
  “실은…….”  

  모가비놈의 이야기는 이러했다.
  내가 아씨를 동굴에 데리고 왔던 그날. 돗가비가 이무기에게 바칠 음식 훔쳐 먹으려
감투 쓰고 마을에 내려갔더니만 저잣거리에 방이 하나 붙어있더란다. 호기심 많기로는
도둑괭이 못지않은 이놈이 그 내용을 읽어보니 까다로운 이무기 비위 맞추느라고 올해
부터는 음식뿐만 아니라 젊은 아녀자로 인신 공양까지 해야 한다고 쓰여 있다더라. 하
지만 제 새끼 귀한 줄 아는 사람들이 어찌 꽃다운 자기 딸을 이무기 드시라고 내다 바칠까.
  그리고 그런 사람들의 생각을 아는 사또가 본보기로 삼으려고 양반 댁 아녀자들 중 하
나를 뽑아 바치기로 했는데 그게 하필 최가댁이니 뽑혀나간 아녀자는…….

  “규방아씨라고!”
  “뻔할 뻔자지요. 서방님도 일찍 잃고, 다리도 못 쓰니 며느리가 아니라 애물단지일 마
당에 사또는 아녀자를 내놓으라 하니 어쩌겠습니까. 그나마 아씨 바치면 마을입구에 떡
하니 열녀문을 세워준다 사또가 말했더니 최가댁에서는 두말 않고 그리하라고…….”
  -이 노오오오오오옴들!

  나도 모르게 벼락처럼 포효가 튀어나왔다. 동굴을 울리는 청천벽력에 꼬리를 말고 몸
을 웅크린 모가비는 ‘이래서 도련님께는 말하지 말라고 하였는데.’ 라고 끙끙거리며 떨
고 있다. 그놈을 이글거리는 눈으로 노려보며 외쳤다.

  “네놈이나 돗가비놈 모두 잘한 거 하나 없느니라! 내 당장 가서 최가댁 놈들을 다 물
어 죽이고서라도 아씨를 데려올 것이다!”
  “도, 도련님! 지금 어딜 간다고 그러십니까! 아니, 가셔도 늦습니다요!”
  “이 주둥이에 꿍꿍이만 들어찬 모가비놈아! 뭐가 늦었다는게냐!”
  “오늘이, 서, 섣달 보름이옵니다! 벌써 아씨 태운 꽃가마가 대망 양반 처소로 가고 있
을 거예요! 그래서 돗가비 형님도 도련님께는 고하지 말고 오늘만 넘기라고…….”

  더 이상 듣고 있을 필요도 없었다. 뒤에서 뭐라고 외치는 모가비놈의 목소리는 이미
들리지도 않았다. 염통이 뜨겁다. 빌어먹게도 뜨겁다. 덕분에 몸을 도는 피까지도 뜨겁
다. 발에 차이는 눈송이까지도 거추장스럽다. 몸에 부딪치는 바람까지 거추장스럽다.
가로막는 나무를 부러트리고 골짜기를 뛰어넘으며 포효한다. 몸이 느리다. 달리는 게
느리다. 빨리 가지 않으면 아씨가…….
  그래서 밤마다 우셨소. 잡아먹히는 처지가 슬프셨소.
  그래서 꽃이 보고 싶으셨소. 꽃필 때 까지 살지도 못하는 걸 아셨소.
  그래서 그리 고마워 하셨소. 마지막으로 즐겁게 해주었다 웃으셨소.
  
  “그래서 오지 말라 하셨소! 이제 죽을 목숨이라고! 다시 보지 못할 테니 오지 말라고
하셨소!”

  고래고래 소리치며 이무기 사는 호수에 거의 다다랐을 무렵, 눈앞에 꽃가마를 들고 가
는 가마꾼 몇 놈이 눈에 들어왔다.

  -크허어어어어어엉!
  “어, 어이쿠야!”

  내 포효에 놀라서 가마를 내팽개치고 그 자리에 고꾸라지는 가마꾼들을 무시하고 냅
다 가마의 발을 들춘 나는 그 안에 아씨가 없는 것을 깨닫고 가마꾼 놈들한테 눈을 부라
렸다.

  -이놈들! 아씨는 어디 있느냐!
  “호, 호수, 이, 이무기님 호수에…….”

  사시나무처럼 떨며 겨우겨우 말을 뱉어놓는 가마꾼 놈 하나. 나는 이를 갈고는 그대
로 몸을 돌려 달렸다. 방금 아씨를 내려놓고 왔다면 아직 아씨가 잡혀 먹지는 않았을
터. 앞을 막는 나무들을 분지르며 호수 앞에 도착한 나는 음식이 산처럼 차려진 커다란
바위 앞에 장옷을 둘러쓴 채 앉아있는 가녀린 뒷모습을 발견했다.
  의연한 모습으로 다소곳이 앉아는 있지만 그 어깨가 떨리는 것은 멀리서도 잘 보였
다. 다행히 이무기가 아직 나오지 않았기에 나는 재빨리 아씨에게 다가가 외쳤다.

  -예서 무엇 하느냐! 어서 내려가지 못할까!
  “꺄악!”
  
  놀라서 뒤로 몸을 빼며 나를 바라보는 아씨의 겁에 질린 눈동자에 가슴이 타는 듯이
아팠다. 지금이라도 내가 도령이라고 밝히고 싶지만 지금은 그런 걸 설명할 여유가 없
다. 나는 아씨에게 등을 내밀며 소리쳤다.

  -잡혀 먹히기 싫으면 썩 내 등에 타거라!
  “그, 그리는 못하옵니다! 제가 이곳을 떠나면 이무기님께서 마을에 해코지를 하실 터
인데 그리는 못하옵니다!”

  겁을 먹어 창백해진 얼굴로 온 몸을 떨면서도 단호하게 고개를 젓는 아씨의 모습에 어
금니를 악물었다.
  아녀자를 죽여 마을이 산다고? 이무기에게 젊은 처자를 바쳐 마을을 지킨다고! 사람
바쳐 일군 곡식이 피 냄새를 풍기고, 이무기 먹이로 먹힌 아녀자들의 피가 강을 타고 흐
를 텐데 그것을 먹여 아이를 키우고, 그 아이를 다시 이무기에게 바쳐서 연명을 하겠다고!
  내가 억지로라도 아씨를 등에 태워 도망치려는데 호수가 소용돌이치고 주위의 나무들
이  바스락 거리고 떨며 등골을 쑤시는 듯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샤아아아아앗! 왔느냐! 이 몸의 주리신 배를 채울 음식이 왔느냐!

  풍겨 나오는 역한 피 냄새에 코가 막힐 지경이다. 아씨의 앞을 막아선 채 콧등에 주름
을 잡고 호수를 노려보고 있자, 대낮인데도 새까만 호수 속에서 두 개의 금색 눈동자가
희번덕거리며 모습을 드러냈다.

  -네 놈 주린 배는 네놈이 잡은 사냥감으로 채워야지! 어찌 죄 없는 사람들 손을 더럽혀
서 채우려 하느냐!
  -쉬이이이, 샤아아앗. 네놈은 분명 산주인 자식 놈이렷다. 새파란 얼룩괭이가 이 몸 무
서우신 줄을 모르는구나!
  -병신처럼 발 달린 구렁이 놈이 뭐가 무서울까! 헛소리하지 말고 냉큼 튀어 나오거라!
크허어어어어어엉!

  한발을 앞으로 나서며 이빨을 드러내고 포효한다.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노려보던 이
무기의 눈동자가 흐릿해진다고 생각하는 찰나 호수의 물이 통째로 용솟음치며 다리 넷
달린 이무기가 길다란 몸을 내밀었다.
  길이는 10척인 나보다도 세 배는 길고, 밤처럼 새까만 비늘은 창끝처럼 날카롭다. 매
처럼 날카롭게 갈라진 발이 그 길다란 몸통에 앞으로 뒤로 네 개가 붙어 있는데, 그중
좀 더 긴 두 앞발에 영롱하게 빛을 발하는 여의주를 하나씩 꽈악 움켜쥐고 있었다. 밖으
로 굽은 녹용처럼 생긴 흉악한 뿔이 구렁이처럼 생긴 얼굴에 달려있고, 쩍 벌린 아가리
에 길게 내민 시꺼먼 혀는 끝이 여섯 개로 갈라져 저마다 꿈틀 거리고 있었다.
  그 흉악한 모습에 완전히 겁에 질려 혼절해 버리는 아씨를 감싼 채 나는 몸을 부풀리
며 외쳤다.
  
  -양민을 괴롭히고 욕심이 깊어 승천도 못하는 네 놈은 내가 이 자리에서 물어 죽여주
마! 어흐으으으으응!
  -산신령도 못 건드리는 나를 네놈이 어찌하겠다고? 어디 할 수 있으면 해 보거라! 이
건방진 놈! 샤아아아아악!

  피로 물든 이빨이 촘촘하게 박힌 아가릴 있는 대로 벌리고 쏘아져오는 이무기의 대가
리를 옆으로 뛰어 피하자, 호수에 잠겨있던 놈의 꼬리가 채찍처럼 휘둘러져왔다. 땅에
닿자마자 몸을 웅크려 머리위로 꼬리를 보내고 그대로 호수를 뺑 돌아달려 이무기의 등
위로 뛰어올랐다.
  번들거리는 비늘에 있는 힘껏 발톱을 찍어 넣고 그 속을 후벼 파내며 모가지까지 오른
다. 거칠게 몸을 흔들며 나를 떨어내려는 이무기의 몸을 뜯어낼 각오로 물며 버텨낸다.

  -쉬이이이이……샤아아아아!

  이무기의 거친 외침에 그 앞발에 쥐고 있던 여의주가 빛난다 싶더니만, 곧 그 시꺼먼
몸이 시뻘건 불길로 물들기 시작했다. 놀라서 물고 있던 몸을 놓고 뒤로 뛰어 몸을 피하
려다가 이무기가 휘두른 꼬리에 옆구리를 얻어맞았다.

  -커흐으으으응!
  
  날아가 처박힌 몸 위로 이무기의 꼬리가 사정없이 내리쳐졌다. 등골이 부서지고, 속
이 뒤틀리는 것 같은 느낌에 자신도 모르게 피를 토해낸다. 불길에 휩싸인 꼬리에 맞아
그슬린 털들이 타는 냄새가 역겹다. 필사적으로 다리에 힘을 주어 또다시 내리치는 꼬
리를 피해 옆으로 구르자 놈은 아가리를 벌리고 거칠게 독기를 내뿜었다.

  -샤아아아아아아앗!

  눈이 따끔거리고 숨을 쉬기가 어려워  비틀거리는 틈에 이무기의 꼬리가 다시 한 번
몸을 후려쳤다. 미처 대비도 못하고 날아간 몸은 나무들을 부수고 숲속에 처박혔다. 부
러진 나뭇가지가 온몸에 박혀 참을 수 없이 아프다.

  -샤아아, 샤아아앗! 쉬이이이……어찌 된 게냐. 얼룩무늬 괭이 놈아. 나를 물어죽이겠
다 하지 않았느냐?

  부서진 나무 들 사이로 미끄러지듯 몸을 움직여오며 기세 좋게 지껄이는 이무기. 나
는 피투성이 몸을 겨우 일으키고 이빨을 드러냈다. 후들거리는 다리에 다시 한 번 힘을
주어 땅을 박차고 뛰어오른다. 나무들을 박살내며 휘두르는 이무기의 꼬리를 피해 놈
의 목덜미에 이빨을 박으려는 순간, 그 앞발에 들린 여의주가 다시 한 번 빛나며 맹렬
한 광풍이 온몸을 때렸다.
  저미는 것 같은 바람이 온몸을 쓸어 상처를 입힌다. 속절없이 쓸려간 몸은 깎아지른
것 같은 절벽에 끝에 걸려 간신히 멈추었다. 다리에 힘이 빠지고 흐르는 피에 눈앞이 어
지럽다. 일어나기 싫어하는 몸을 겨우겨우 일으키자 이무기의 긴 몸이 허리를 옥죄어왔다.

  -어흐으으으으응!
  -쉬이이익. 네깟 놈이 나를 죽여? 2000년을 묵은 나를? 샤하하하하하! 샤하하하하하!
  -커흐흐으응!

  조각난 몸을 부숴낼 것처럼 조여 오는 이무기의 몸통. 힘이 들어가지 않는 몸으로는
발톱을 세우고 그 비늘을 긁어도 그저 미끄러질 뿐이다. 허리가 졸린 채로 이무기가 내
뿜는 독기를 맡아 점점 숨이 막혀온다. 역시나 내가 이무기를 잡는 건 무리였나. 이대
로 죽는 건가. 내가 죽으면 아버님은……아씨는……아씨는……!

  -크허어어어어엉!
  -샤하하하! 쓸데없는 발악을 하는 구나. 지금 곧 죽여 줄 테니 가만히 있…….

  크허어어어엉……크허어어어엉…….
  어흐으으으응……어흐으으으응…….
  산을 돌며 범의 울음소리가 메아리친다. 내가 뱉은 포효소리가 아니다. 더 크고 더 힘
찬 다른 범의 울음소리가 몇 개고 겹쳐서는 온 산을 쩌렁거리며 들려온다.
  크허어어어엉! 어흐으으으응!
  크허어어어엉! 어흐으으으응!
  산이 울린다. 산노인의 포효에 새가 하늘을 날고 눈밭에 내린 눈이 거꾸로 날아오른
다. 그 목소리에 놀라 주위를 돌아보는 이무기. 나를 조이고 있는 몸통의 힘이 늘어지
는 것이 느껴졌다. 절호의 기회다. 지금 밖에 없다. 내가 죽으면 아씨도 죽는다. 나는 남
은 힘을 끌어 모아 놈이 앞발에 쥐고 있는 여의주를 후려쳐 떨어트리며 그 모가지에 이
빨을 박아 넣었다.

  -커흐으으으으응!
  -샤아아아아아악!

  거칠게 울부짖으며 몸을 뒤트는 이무기. 날카로운 비늘에 무조건 박아 넣은 이빨은 놈
이 요동칠 때마다 빠져나갈 것처럼 아프지만 그럴수록 더욱 이를 악물어 놈의 몸속으
로 이빨을 밀어 넣었다.

  -샤아아앗! 샤아아아악! 놓아라! 놓아라! 이놈! 샤아아아아아악!

  용도 못된 놈이 용틀임을 하며 엉망진창으로 절벽 위를 뒹군다. 튀어나온 돌에 등이
부딪고, 이무기의 몸과 땅 사이에 끼인 머리가 문대질때마다 피가 튀고 몸에 격통이 달
렸다. 그래도 절대로 이빨을 빼지는 않았다. 이무기의 발악이 점차 거칠어질 무렵 콰르
릉하고 천둥이 치는 것 같은 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이무기의 발악에 버티지 못한 절벽이 무너져 내리는 소리. 돌과 흙이 폭포처럼 쏟아지
는 소리. 단말마를 내뱉는 이무기의 포효가 아득하다. 이무기의 몸과 한 덩이가 되어 한
없이 추락하는 동안에도 이제 아씨는 살겠구나. 죽지 않아도 되는구나, 하는 생각만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그 예쁜 미소와 향긋한 목련향이 느껴져서 나도 모르게 히죽 웃고 말았다.

//

  …우…수……겠는데…….
  ……잘…름 피우……고…….

  귓가에 들려오는 웅성거리는 목소리에 눈을 뜬 규방아씨는 주위에 펼쳐진 광경에 눈
을 깜빡이다가 놀라 몸을 일으켰다.

  “아, 이 가시나 인제 정신 들었네. 아제요! 가시나 인났심더!”
  
  그녀가 일어나는 모습을 보고 꼬리에 댕기를 묶은 암범 한마리가 쩌렁쩌렁 외치는 목
소리에 황급히 고개를 돌린 아씨는 마치 사람처럼 턱에서 자란 긴 수염을 하얗게 늘어
트린 늙은 범의 모습에 숨을 삼켰다. 산 아래 마을 사람이라면 범 본적 없는 삼척동자
도 다 알고 있는 그 모습.

  “산주인 어르신…….”
  “네가 부르지 않아도 내가 누군지 잘 안다. 정신이 들었다면 여기서 내려가거라.”

  바위틈을 가르는 폭풍이 목소리를 가졌다면 그러할까. 세월의 깊이를 살갗에 직접 문
지르는 것 같은 굵은 목소리에 압도당한 그녀는 한참 후에야 겨우 입을 열어 산주인에
게 대꾸했다.

  “소, 소녀는 다리가 불편해 걷지를 못하옵니다.”
  “진짜가? 다리가 풀린 게 아이라 아예 못 일어나는 거였고마.”

  옆에서 낄낄거리는 댕기 묶은 암범을 슬쩍 쳐다본 산주인은 눈을 가늘게 뜬 채로 아씨
에게 코를 들이밀었다. 완전히 굳어 움직이지도 못하는 아씨의 몸을 위아래로 훑으며
천천히 냄새를 맡던 산주인은 미간을 찌푸리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이 머저리 같은 놈이 무슨 짓을 어떻게 하고 다녔길래…….”
  “와 그러시는데예? 이무기 냄새라도 나십니꺼?”
  “여기 주위 온통 이무기가 패악 질을 쳐놨는데 안 난다면 그게 이상하지. 다른 냄새가
나 이런다.”

  산주인은 아까부터 발밑에 굴리고 있던 여의주를 아씨의 앞에 굴려 보내며 혀를 찼
다.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로 여의주와 자신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는 아씨의 모습을
좀 더 바라보던 산주인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조용히 말했다.

  “아침저녁으로 그걸 다리에 문지르거라, 이무기 천년도력이 깃든 여의주니 네 다리 낫
게 해주는 건 물론이요. 간직하고 있기만 해도 네 가문이 망할 일은 없을게다.”  
  “이, 이리 귀한 걸 어째서 저에게 주시는지요. 산주인 어르신.”
  “너를 구하자고 이무기한테 달려든 머저리가 그걸 바랄 테니 주는 게다.”
  “큰아버님! 다행히 절벽 아래가 물이오! 이무기놈 시체만 바위틈에 처박혀 있수!”

  젖은 몸을 이끌고 나타난 새로 나타난 범 한 마리의 목소리에 다시 소스라치며 어깨
를 움츠리는 아씨. 새로 나타난 젊은 범은 그런 아씨의 모습에 눈가의 흉터를 일그러트
리며 장난스럽게 입을 열어보였다. 산주인은 그런 범의 머리를 앞발로 후려치고는 말했다.

  “하류까지 가자. 범이 아니라 똥개 같은 놈이니 운이 좋으면 살아 있겠지.”
  “아아, 이거야 원. 큰아버님이 이무기 잡게 해준다고 해서 신나서 따라왔더니 김빠지
게 이게 뭐요? 괜히 잔뜩 소리만 치고 돌아가게 생겼소.”
  “니는 그래도 가까운 데에서 왔응께 다행이다 안 카나. 내는 기운 쏙 빠진 채로 다시
갈 생각을 하면 벌써부터 수염이 처진다.”
  “시끄럽다. 나야말로 이무기 잡으려고 신령님까지 안모시고 일찍 돌아왔다가 이게 뭐
하는 꼴이냐.”

  저마다 농을 주고받으며 절벽을 돌아내려가는 세 마리의 범을 바라보던 아씨는 멀리
서부터 들려오는 목소리와 부산스러운 발소리를 들으며 다시 정신을 놓았다.
  산주인이 주고 간 호랑이 발톱자국 남은 여의주를 품에 꼭 껴안은 채.


  -세월은 속절없이 흘러 3년이 지났다.


  “마님! 너무 깊이 가시면 안 되옵니다!”
  “요 근처만 돌 셈이니 힘들면 게서 쉬거라.”

  엄살을 피우는 계집종의 목소리에 작게 웃으며 치맛자락 들고 꽃신으로 땅을 디딘 아
씨는 꽃향기 섞인 향긋한 봄내음을 콧속깊이 받아들이며 가만히 웃어보였다. 이무기의
여의주 덕에 다리가 나았음은 물론이요. 산주인이 말한 대로 가문, 아니. 마을 전체가
요 3년간 풍작이 아닌 날이 없을 정도였다.
  이게 모두 그때 자신을 구해주었던 커다란 범의 덕이다. 아씨는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
고 있었다.

  “마님! 쇤네는 예서 잠깐만 쉴 테니 너무 깊이는 들어가지 마세요! 겨 참, 제대로 걷지
도 못하시던 분이 뭐 저리 다리 힘이 좋아지셔서는…….”

  엄살을 피우며 근처의 바위에 주저앉는 계집종의 대충 고개만 끄덕인 아씨는 풍겨오
는 꽃내음을 따라 좀 더 걸음을 옮겼다. 생각해보면 그 범뿐만이 아니다. 자신에게 꽃
을 가져다  주던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도령 덕도…….
  바스락.
  풀을 밟는 소리에 고개를 든 아씨는 눈앞에 나타난 커다란 그림자에 놀라 뒤로 조금
물러섰다. 온몸을 뒤덮은 자잘한 흉터투성이에 이마에는 눈에 도드라질 정도로 커다란
흉터가 있는 커다란 범. 그저 가만히 서서 자신을 바라보는 범의 모습에 아씨는 긴장했
던 어깨에 힘을 풀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여의주를 돌려받으러 오신건지요?”

  범을 본지가 세 번째라 그런 건지 제법 의연한 목소리로 말하는 아씨의 목소리에 흉터
투성이 범은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고 보면 아씨에게 그 범은 왠지 모르게 낮
이 익었다. 좀 더 자세히 범을 바라보던 아씨는 눈을 가늘게 뜨며 외쳤다.

  “그러고 보니 그때 저를 구해주셨던 분이시군요! 이 은혜를 어떻게…….”

  반갑다는 듯이 말하는 아씨의 앞에 천천히 다가온 범은 그 입에 물고 있던 것을 그녀
의 발치에 내려놓고는 몸을 돌렸다. 이상한 눈으로 발치를 내려다 본 아씨의 눈이 커다
래졌다. 황급히 고개를 들어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을 느낀 건지 숲속으로 사라
져가던 범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아씨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아직 목련을 좋아하고 계신지 모르겠소.”

  비록 온통 흉터투성이 범이라지만 부드럽게 눈가를 일그러트리며 웃어 보이는 그 모
습은 조금도 무서워 보이지 않았다. 분명 낮선 모습일 텐데도 너무나도 익숙하고 너무
나도 그리운 그 웃는 모습은…….

  “도…….”

  목소리가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그런 아씨를 조용히 바라보던 범은 고개를 돌려
숲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손을 뻗은 채 안타까운 얼굴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아
씨는 잠시 후, 조용히 허리를 굽혀 범이 두고 간 새하얀 목련 꽃가지를 집어 들었다. 바
라보는 그 눈에 맺힌 눈물 한 방울이 뺨을 타고 흐른다.

  “저를 위해서……아아, 고맙습니다. 도령. 도령…….”

  목련가지를 품에 안고 눈물 흘리는 그녀의 귓가에 숲속 깊숙이 어디선가 들려오는 범
의 소리가 와 닿았다. 어흐으으으응. 하고 길게 꼬리를 끄는 울음소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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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에 열린 모 공모전에 냈던 글인데 보기좋게 물을 먹었습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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