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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르시아 제 1 부 1 화 - 심판자 完

2004.02.22 23:23

슈안 조회 수:292

제 1 화 심판자 - 3 사투 후편


그녀는 적의를 가득 실은 두 눈으로 머리위의 상대를 노려보았다.
노려볼 뿐, 그 이상의 저항은 하지 못한다.
레버넌트와의 싸움에서도 상처하지 입지 않았던 그녀는 지금 자신을 내려다보는 붉은 머리의 사내에게 너무나도 간단히 제압당해버렸다.
백발에, 순백의 드레스를 걸친 소녀가 불가시(不可視) 결계를 전개함과 동시에 붉은 섬광이 내달렸다.
인간의 상식 밖의 운동능력을 가진 그녀가 채 반응하기도 전에 붉은 섬광은 그녀의 팔과 다리를 찢고 지나갔다.
절로 쓰러지는 몸을 어떻게든 지탱해보려고 하지만, 팔과 다리는 말을 듣지 않는다.
그렇게 전도. 자신이 아무런 저항도 못한채로 쓰러져버렸다는 것에 대한 당혹과 자신을 쓰러뜨린 상대에 대한 분노를 담은 시선을 상대에게 부딪혀보지만, 상대는 그것에 일절 개의치 않고 자신의 애창을 들어올려 그녀를 살해, 아니 소멸시키려 했다.
그 순간, 하얀 소녀가 만든 공간, 결계안에 다른 누군가의 존재감이 느껴졌다.
이 공간에서 그 누구보다도 진한 존재감을 풍기는 난입자. 그의 어깨까지 늘어뜨린 침흑같은 긴 머리카락 탓에 얼굴은 잘 안 보였지만 옷차림을 봐서는 분명히 조금 전에 병원으로 오던 길에 심장을 꿰뚫어버린 이 광현임이 분명했다.
왼쪽 가슴께에는 검붉게 핏자국이 선명하게 번져 있었다.
체격도 분명히 그와 일치한다.
그러나 그는 이 광현이 아니라고 붉은 사내는 인지하고 있었다. 붉은 사내, 크림슨 울프는 그를 향해 창을 고쳐 잡았다.
그리고 상대에게 질문했다.

"너는... 누구냐?"

상대는 답하지 않았다.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이쪽으로 다가왔다.
그가 이 광현이자, 이 광현이 아니라는 것은 바닥에 길게 누워 있는 그녀, 유라역시 인지했다.
그리고 그가 이곳으로 돌아온 목적이 결코 자신의 구원이 아니라는 사실도 눈치챘다.
강한 바람이 불어닥쳤다.
강풍에 나부끼는 광현의 묵빛의 장발. 그 아래에서 드러난 그의 머리카락과 같은 묵빛의 두 눈동자에는 희열과 소년의 호기심과 닮은 감정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한참을 크림슨 울프를 관찰하듯 쳐다보던 그의 입가가 길게 일그러졌다.
그리고 그는 웃음소리 섞인 말투로 말했다.

.

.

.

"크림슨 울프라고 했던가? 조금전에는 한 방 먹었어. 카카캇.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한 방 먹고도 기분이 꽤나 좋은걸. 최고조야."

이 마음을 지배하는 감정은 즐거움. 눈 앞의 붉은 사내는 강하다. 터무니 없이 강하다.
그래. 그가 강하면 강할 수록 즐거울 것이다. 약한 놈을 죽여도 재미는 없으니까.
크림슨 울프는 아무 말 없이 이쪽을 경계하고 있다.
당혹스럽겠지. 분명 심장을 꿰뚫었을 터인 상대가 멀쩡하게 살아서 쫓아온데다가 그 본질까지 완전히 바뀌어서 나타났으니까.
이쪽을 경계하던 크림슨 울프가 질문했다.

"...네 놈... 어떻게 살아 있나. 이 창은 분명히 네 놈의 심장을 꿰뚫었을 터."

그런 질문을 해 온 그가 왠지 바보같이 보였다.

"헤. 헛소리. 너는 내 심장따위 꿰뚫지도 않았어. 네가 꿰뚫은 것은 폐가 고작이지. 심장만 무사하면 폐가 뚫려도, 팔이 날아가도 지금의 나라면 간단히 수복할 수 있어."

그제서야 상대는 내가 죽지않고 자신의 뒤를 쫓아온 이유를 안 듯 두 눈을 부릅뜨고 이쪽을 노려봤다.

"심장이... 네 놈의 심장은 오른쪽이었나."

정답. 놈에게 씨익 웃어보인다. 그의 말이 정답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 오른쪽 가슴을 엄지손가락으로 쿡쿡 찔러보였다.
나의 그 제스츄어에 대한 그의 실소. 놈은 피식 웃었다.

"과연. 방심했던 것은 네가 아닌 나였나. 설마 심장이 오른쪽에 있을줄이야. 상식이라는 것은 무섭군."

더 이상 대화는 필요 없었다.
서로간에 존재하는 것은 필살의 각오뿐.
전광석화처럼, 그의 창 끝이 내 오른쪽 가슴을 노리고 날아든다.
그 창날을 왼손으로 후려 올렸다.
상식적으로는 날아오는 창날을 맨손으로 막아낸다는 것 자체가 바보스러운 일이겠지.
그러나 창날에 손이 닿는 그 순간, 손등에 새겨진 주식(呪式)이 푸른 빛을 내며 금속음과 함께 창을 튕겨냈다.

키잉!

그와 동시에 오른손에 마나를 주입하며 상대의 안면을 향해 날렸다. 붉게 빛나는 오른손의 주식.
순식간에 통상의 300배이상에 달하는 마나가 대기중에서 오른손으로 밀려들어 마나가 하얀 아지랑이처럼 가시화된다.
녀석의 안면을 향해 돌진한 그 응집된 엄청난 양의 마나가 폭발함과 동시에 녀석은 손에 든 창을 빠르게 회전시켜 그것을 막았지만, 그의 몸은 폭풍속의 종이짝처럼 순식간에 뒤로 날려갔다.

꽈르릉!!!

저 멀리 어둠속으로 날려가는 크림슨 울프의 모습을 보다 순간적인 현기증이 일어나 한쪽 무릎을 꺾고 잠시 그 자리에 주저 앉았다.

"하......아....!"

아무리 뭐래도, 이건 좀 심했나. 인간의 육신은 마나를 받아들여 무기로 사용하기 위한 마법 회로로는 결코 적합치 않다.
전설이나 이야기속에 나오는 마법사들이 지팡이나 그 밖의 촉매를 사용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인간의 육신으로 허용불가능 한 양의 마나를 다루면 그 육신은 파괴되니까.
그것을 몸에 새긴 주식을 이용해 육신에 가는 부담을 대폭으로 줄이고는 있다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는 법이다.
크림슨 울프를 날려보낸 직후, 숨이 갑자기 막혀왔다.
인간, 아니 생물체로서 너무도 당연한 행위인 호흡이 불가능하게 되어버렸다.
이대로는 놈을 쓰러뜨리기도 전에 호흡곤란으로 죽어버릴테지.
하지만 지금의 나라면 상관없다. 전신으로 마나를 받아들여, 몸속의 묵은 마나를 배출한다. 이 몸의 주식에는 그것에 관한 공식역시 새겨져 있다.
숨을 쉴 필요도 없이 주식을 발동시켰다. 그와 동시에 양손과, 원래는 하얀 색이었던, 지금은 먼지투성이가 된 셔츠 밑으로 녹색 광채가 뿜어져 나왔다.
주식은 손등에만 새겨져 있는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손등부터 팔을 거쳐 어깨, 가슴팍까지 이르는 길고 복잡한 주식.
그 힘을 빌어 나는 전신으로 호흡을 개시했다.
곧 고통은 깨끗이 가셨다.
육신을 마법 회로로 사용하는 것이 아닌 단순히 대기중의 마나와 몸안의 마나를 교체하기 위한 것. 이것이라면 확실히 육신에 전혀 부담을 가하지 않고 호흡이 가능했다.
그 사이에 결계 끝까지 날려갔던 크림슨 울프가 순식간에 눈앞까지 육박해왔다.
7회에 걸친 찌르기 연격이 날아들었다.
거의 동시에, 창이 마치 분열이라도 한 것처럼 느껴지는 속도.
그것을 양팔을 크게 휘둘러 모두 튕겨냈다. 양팔에 새겨진 주식의 일부가 녹색빛에서 푸른 빛으로 변했다가 그 직후 맹렬한 붉은 빛을 띄었다.
팔을 덮고 있던 옷이 순식간에 갈기갈기 찢겨버렸지만, 그에 개의치 않고 다음의 공격에 나섰다.
놈과 똑같은 궤도로 7회에 걸쳐 주먹을 날려줬다.

펑! 펑! 펑!

허공을 가르며 날아가는 주먹에 꼬리잇듯이 폭발하는 마나의 덩어리들.
방금전의 내 일격으로 창으로 내 공격을 그대로 받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은 깨달은 듯, 녀석은 내 공격에 맞서 똑같이 창을 찔러왔다.
내 주먹에 실은 마나의 양에 필적하는 양의 놈의 창에 감도는 마나.
놈의 마법 촉매는 틀림없이 저 창이리라. 과부하의 염려때문에 몸 전체로 호흡하지 않으면 전투행동을 계속할 수 없는 나와는 달리 놈은 사뭇 여유로은 모습이었다.
실체화 된 고농도의 마나의 집약체와 마찬가지로 막대한 마나를 머금은 녀석의 창날이 충돌하며 공간에 끊임없이 왜곡을 그려낸다.

우웅... 웅... 우웅...

점차로 그 정도를 더해가는 공간의 왜곡.
그 결과는 대폭발로 나타났다.
소리없는 폭발.
막대한 마나의 파동이 지근거리에서 나와 크림슨 울프를 덮쳤다.
순식간에 눈 앞이 붉게 물들었다.
시야를 붉게 가린 것은 피. 나름대로 마나에 대한 방벽은 순간적으로 만들었지만, 그에도 불구하고 몸 여기저기의 혈관이 터져나간 듯한 느낌을 받았다.
얼굴의 구멍이란 모든 구멍에서 피가 조금씩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그 뿐만이 아닌 팔 다리의 땀구멍에서도 차츰차츰 피가 배어나왔다.
이 정도라면 녀석도 무사하진 못하리라.
그런 내 기대를 무시하듯, 붉은 섬광이 달려들었다.
그것을 지금까지처럼 퉁겨내려했지만, 일부 신경도 상처입은 모양인지 움직임이 조금 늦어졌다.

푸욱.

주식이 발동하지 않았다.
아니. 주식따위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그 증거로, 순간적으로 창을 쳐내려 든 팔에 크림슨 울프의 붉은 창이 깊숙히 박혀 있었다.
그리고 그 팔에는 주식의 흔적다운 흔적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 다음 순간 또 다시 숨이 막혀왔다.

"가........ 아...."

뭔가 뜨거운 것이 가슴깊숙한 곳에서부터 솟구쳐 올라왔다.
내 순간적인 변화에 놀란 것은 크림슨 울프역시 마찬가지였는지, 잠시 눈썹을 모아 미간을 찡그리던 그는 아무런 망설임 없이 내 가슴을 걷어차 내 팔에 박혀 있는 창날을 뽑아냈다.
가슴과 팔에 불타는 듯한 통증과 함께 몸이 허공에 뜬 느낌.
그 직후 내 몸뚱아리는 가상적으로 만들어진 병원의 주차장 바닥에 용서없이 등으로부터 내리꽂혔다.
그에 가슴까지 올라왔던 뜨거운 덩어리가 입을 통해 배출되었다.
피. 핏덩어리가 왈칵 쏟아져나오는 것과 동시에 시야가 온통 붉게 물들었다.
그와 동시에 막혀있던 호흡이 재개되었다.
아무것도 보이지도 않고, 몸도 꼼짝도 안하는 마당에 의식만은 뚜렷하게 상대를 포착하고 있었다.
그래. 어서 일어나서 나를 죽이려고하는 적을 맞이해주지 않으면 안돼.
여전히 앞은 보이지 않았지만, 몸이 일으켜지는게 느껴졌다.
서서히 밝아지는 시야. 그러나 여전히 눈 앞에 펼쳐지는 세상은 온통 붉은 빛이었다.
거꾸로 매달렸을 때 처럼 피가 모조리 머리에 쏠리는 느낌. 두근두근하는 심장의 박동소리가 약간은 불규칙하게 머릿속에 울려퍼졌다.
몸은 이미 세간에서 흔히들 말하는 반죽음 상태에 빠졌지만 이 몸은 눈 앞의 적을 쓰러뜨린다는 일념만으로 그 다리를 대지에 뿌리박고 있었다.
다시금 사라졌던 주식이 팔에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늦었다.
내 가슴을 향해 날아드는 늑대의 붉은 어금니.
그렇다. 놈은 처음부터 그렇게 필살의 공격만을 가해왔다.
방어따윈 전혀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의 공격 그 자체가 최강의 방어이자 필살의 공격이었던 것이다.
그 누가 그랬던가. 공격은 최선의 방어라고.
놈의 공격을 쳐 막아낸 그 순간부터 내 패배는 결정나 있던 것이다.
눈 앞을 푸른 바람이 가로막았다.
그에 놈의 공격의 궤도가 흐트러졌는지, 창의 끝날만이 내 왼쪽 가슴에 아주 얕게 박혔을 뿐이다.
누군가가 내 어깨를 움켜잡는게 느껴졌다. 내 어깨를 붙잡은 그 상대는 힘겹게 고개를 들어 내 눈을 똑바로 응시해왔다.
그 상대의 오른쪽 가슴을 꿰뚫은 창날이 흉흉하게 붉은 빛으로 물들어 지금도 빠른 속도로 그 인물의 가슴에서 흐르는 피를 창날을 따라 내 가슴으로 전달하고 있었다.
점차로 내 어깨를 잡은 두 손에서 힘이 빠져갔다. 가쁜 숨결.
초점이 흐려져 가는 두 붉은 눈동자는 그래도 내 모습을 그 두 눈에 새겨넣으려는 듯, 필사적으로 날 쳐다보고 있었다.
다시 몸에 드러나기 시작한 주식이 거짓말처럼 그 모습을 감췄다. 그리고 조금 전까지 얼굴을 덮고 있던 검은 머리카락은 순식간에 도로 원래대로의 백발로 바뀌어있었다.
뒷통수를 망치로 두들겨 맞은 듯한 느낌. 그와 함께 내 앞의 상대의 오른쪽 가슴에서 붉은 늑대의 어금니는 모습을 감췄다.
크림슨 울프는 내 앞을 가로막고 선 그 인물을 의외라는 듯 잠시 지켜보고는 또다시 실소를 터뜨렸다.

".....이다지도 예외가 많아서야 예외라는 단어가 무색해지는군. 하루에 심장이 오른쪽에 있는 녀석을 둘씩이나 만나기도 힘든데 말야."

고개를 저으며 창을 거두는 크림슨 울프.
그동안에도 내 앞의 인물의 가슴에서는 벌컥벌컥 피가 쏟아지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그 인물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유라."

백옥처럼 고운 빛의 얼굴은 온데간데 없이 온통 피에 얼룩진 창백한 돌덩어리처럼 보였다.
아름다운 비단결 같은 하늘빛의 머리카락은 피에 물들고, 그것이 굳어 서로 엉겨붙어 검붉은 덩어리로 보였다.
방금 찔린 왼쪽 가슴의 상처가 지끈지끈 아팠다.
아니, 마음이 아픈 것일까.
지끈 지끈 아파오는 가슴속. 제대로 움직이지도 않는 손을 들어 그녀의 양뺨을 감쌌다.
처음 만진 그녀의 얼굴은 놀랄만큼 차가웠다.
나의 이 두 손은 그 감촉으로 그녀의 죽음을 읽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에는 죽음같은 것은 담겨져 있었다.
안도감이 가득한 미소. 지금껏 그녀의 미소는 몇번 보지도 못했지만 그녀가 보여줬던 그 어느 미소보다도 지금의 이 미소가 이다지도 아름다워보이는 것은 왜일까.
마치

'아아... 다행이야...'

라고 내게 말하는 듯한 그녀의 두 눈.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그녀가 뭔가의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녀의 뺨을 타고 그녀의 눈물이 그 뺨을 감싸고 있는 내 손을 적셨다.
내가 알지 못하는 그녀의 세계의 언어로.

"heshiruda... ahderude... demendero... tsurahgerede... ru... shia."

아니. 정확히는 노래가 아니었다. 그것은 주문. 금기의 주문. 결코 깨서는 안되는 주문.
스스로의 몸을 붕괴시키는 절대 금주.
그 아득한 노래와도 같은 주문이 끝나는 순간, 무시무시한 힘에 몸이 들어올려져선 허공에 붕 뜨는 감각과 함께 빠른 속도로 그녀의 모습이 멀어져갔다.
그녀가 나를 뒤로 내던진 것이다. 이제부터 펼쳐질, 자신의 흉행에 말려들지 않게 하기 위해.
낙하의 충격을 그리 크진 않았다. 공중에 떠 있던 그 짧은 시간 동안 나는 그보다도 더한 충격을 받았기에.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카아아아아아아아아!!!"

귀를 찢는 비명소리. 온몸을 두들기고 지나가는 마나의 파동.
그와 함께 그녀의 몸이 퉁겨져 나가듯, 이쪽을 계속 방관하던 크림슨 울프에게로 돌진했다.
그 가녀린 팔이 크림슨 울프를 움켜잡으려는 듯 뻗어져나갔다.
그에 맞서 크림슨 울프는 나에게 그리 했듯이, 공중에서 덤벼드는 그녀에게로 일섬을 가했다.
그러나 크림슨 울프의 애창은 유라의 일격에 엿가락처럼 휘어졌다.
무시무시한 괴력. 나와 유라를 죽음 직전까지 몰아넣었던 저 창조차 휴지 조각처럼 뭉개버리며 그 주인을 십여 미터 날려보내는 그 광경을 마지막으로 나는 지면과 충돌했다.

"후우... 하아... 우우... 아아아아아아아!!!"

괴성.
고작 10초간의 대치후에 양자는 또 다시 충돌했다.
크림슨 울프는 구겨져버린 자신의 창을 아무런 망설임 없이 빈 캔 내버리듯 휙 내버리고는 맨손으로 유라에게 맞섰다.
놀랍게도 그 표정은 일점의 변화가 없이 아까부터의 그 여유만만한 표정 그대로였다.
다시 자신의 적을 찢어발기겠다는 의지 하나만으로 뻗어져 나가는 유라의 손.
크림슨 울프는 그것을 끝까지 응시하다 자신의 몸에 닿기 직전 유라의 뻗어진 팔을 붙잡아선 어깨너머로 그녀의 몸을 넘겨 바닥에 내리꽂았다.
뒤이어 바닥에 그녀의 몸이 완전히 처박히기 전에 그녀의 몸통을 발로 걷어차 올렸다.
별달리 힘을 실은 느낌은 없는 동작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유라의 몸은 다시 허공에 떠버렸다.
그런 상황에서 유라는 놀라운 운동감각으로 허공에서 자세를 바로잡았지만, 거기에 크림슨 울프의 추격이 가해졌다.
먹잇감을 물어뜯 듯, 그의 올려차기가 유라의 안면에 클린 히트 되었다.
그리고 그 먹잇감을 다시 바닥에 내리 꽂듯, 그대로 올려찼던 다리를 아래로 차 내렸다.
크림슨 울프의 다리에 마치 [물린 것 처럼], 그녀의 몸은 주차장의 단단한 시멘트 바닥을 완전히 박살내며 처박혔다.
물이 흐르듯, 늑대가 자신의 먹잇감을 사냥하듯, 한점 허투른 자세가 없는 그의 연계기에 유라의 최후의 저항은 허망하게도 끝났다.
애시당초, 그녀에겐 더 이상 싸울 힘조차 없었다.
뭔가의 금주를 사용해서 자신의 리미터를 해제한다 한들, 여전히 만전의 상태인 크림슨 울프를 상대하기엔 무리가 있었던 것이다.
움직이지 않는 몸에 필사적으로 박차를 가해 몸을 일으켰다.
토할 것만 같은 기분과 함께 지금 내가 서 있는 것인지 누워 있는 것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 현기증.
내 기척을 느꼈는지 크림슨 울프가 내 쪽을 돌아봤다.
그의 등 뒤로 유라가 재차 몸을 일으키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그것을 저 남자, 크림슨 울프가 모를리가 없다.
거침없이 뒤로 돌아서 유라의 머리를 움켜잡고는 그녀를 내게로 내던졌다.
미처 피할 틈도 없이 날려온 그녀에게 부딪혀 다시 바닥을 굴렀다.
이젠 더 이상 움직일 힘조차 없었다.
그것은 유라도 마찬가지. 분명 그러할 터인데도.
이 우직한 바보는 그래도 몸을 일으켜 쓰러진 채 움직이지 못하는 나를 감싸듯, 크림슨 울프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 대지를 디디고 선 가녀린 두 다리는 볼품없이 떨리고 있었지만, 두 팔을 펼쳐 막을 수 있을리가 없는 적을 막으려 했다.
그러나 적은 그런 그녀를 보고는 못 박힌 듯 꼼짝도 않고 그 자리에 서서 이쪽을 잠시 응시하고선 내게 말했다.

"그녀에게 감사하는게 좋을거다. 애송이."

그렇게 말한 그는 아까 내 버린 부서진 창을 집어들고는 말을 이었다.

"비록 이단자 처형역의 심판자라는 저급한 임무를 맡고 있다한들, 나도 로헨바르드의 기사다. 최선을 다해 싸운 상대에의 예우다."

형체도 없이 일그러졌던 창이 그의 말과 함께 다시 자신의 모습을 되찾아갔다.
그것을 지켜볼 틈도 없이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밤의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그 뒷모습이 마치 뭔가에 쫓기듯, 도망치는 것 처럼, 너무나도 위태하고 쓸쓸해보였다.
그리고 지금껏 일절 개입 없이 우리의 싸움을 지켜보던 하얀 소녀, 에루아는 그의 뒤를 쫓지 않았다. 어째서인지, 그저 그의 쓸쓸한 등 뒤로 작별 인사 같은 것을 할 뿐.
문득 유라를 올려보았다.
그녀는 선채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선채로 의식을 잃은 것이리라.
아까의 그 상처를 생각하면 죽었으리라는 생각도 날 법이었지만, 어째서인지 내게는 그녀가 죽었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녀의 존재감이 아직 확실하게 살아있었다.
이 가슴이 그녀의 생명을 느끼고 있었다.
아아... 다행이다. 흐려져가는 시야로 하얀 소녀가 이쪽으로 다가오는 것이 보였지만, 그녀에게서는 일절의 악의라던지, 적의가 느껴지지 않았다.
몸이 피로를 호소했다. 여전히 몸은 여기저기 쑤시지 않는 곳이 없었지만 그것이야 말로 내가 아직 살아있다는 증거이리라.
눈이 절로 스르르 감겨왔다. 지금은 그저 잠을 자고 싶다는 욕구만이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었다.

.

.

.

그는 그때만큼 심판자라는 자신의 직위를 저주했던 적이 없었다.
그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자신의 주군에게 반역한 자의 딸이자 자신의 연인이기도 했던 그녀의 피를 뒤집어 쓴 그날을.
자신의 상처투성이의 아비를 지키겠다는 양, 부들부들 떨리는 두 팔을 뻗어 자신의 앞에 버티고 선 그녀의 눈물을.
그리고 책무를 다 하라는 그녀의 상냥한 목소리와 그 미소를.
그러나 그는 그녀를 차마 죽일 수 없었다.
기사가 되면서, 심판자의 직위를 얻으면서 임무라면 그 누구가 되더라도 처단할 것이라는 그 맹세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향한 그의 창끝은 볼품없이 떨릴 뿐이었다.
그러나 그 다음순간 그의 창은 그녀의 심장을 꿰뚫고 있었다. 그에 그녀는 그에게 만족스러운 미소를 향했다.
그녀는 숨이 끊어지는 그 순간까지도 그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녀의 결사적인 희생을 기려 로헨바르드의 기사도에 따라 그녀가 [지켜낸] 그녀의 아버지는 그 목숨을 부지하였다.
그것이 바로 로헨바르드의 기사들이 가지는 단 두가지의 계율이자, 마음가짐 중 가장 중요한 것.
자신의 목숨을 걸고 무엇인가를 지키려 한 자가 지켜낸 것을 역시나 자신의 목숨을 걸고 지켜낼 것.
주군의 명에 거역하지 않는 것. 그것보다도 우선되어지는 계율이 바로 전자의 것이었다.
그는 이 계율, 이 기사도를 이때만큼 저주한 적이 없었다.
자신의 연인이 죽게된 계기를 만든 인물, 그녀의 아버지를 죽이고 싶어도 죽일 수 없는 입장.
결국 가슴속에서 끝없이 불타오르는 증오를 참지 못하고, 그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기사도를 등졌다.
그에 대한 참죄로서 자신의 이름과 성을 자신의 주군에게 바치고, 자신의 얼굴에 칼로 그 죄를 새겼다. 그 이후, 그는 피를 먹는 늑대, 피보라를 일으키는 늑대라고 불리게 되었다.
크림슨 울프. 그게 지금의 그의 전부였다.
조금전의 애송이를 지키려는 듯, 두 팔을 펼치고 자신의 앞에 버티고 선 유라의 모습이 그 날의 그녀의 모습과 겹쳐보였다.
자신의 앞에 버티고 선 유라의 미소가, 그 날의 그녀와도 너무나도 닮아있었다.

그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의 눈앞에서 피를 쏟으며 절명한 그의 연인의 피의 따뜻함을. 그 상냥함을. 그 미소를.


제 1 화 심판자 - 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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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신 호흡!
지렁이 인간 광현! [저 하늘의 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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