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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춥네

벚꽃여우 2015.04.23 03:04 조회 수 : 21

그 광경을 지켜보던 두 마스터는 그저 입을 다물고, 그들의 모습을 필사적으로 쫒는 것이 한계였다. 시각을 강화한 쿠로의 안구는 뇌에 상당한 부담을 안겨주면서 이미 두 발로 서있는 것이 고작이었다. 한편 영체를 포착할 수 있는 촬영 장비를 지켜보던 마르코 역시 상황은 다르지 않았다. 컴퓨터는 한참 전부터 발열로 인한 비명을 호소하였고, 마르코는 마술로 기계의 온도를 보존하기 바빴다. 그런 마스터들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2기의 서번트는 그 속도를 줄일 마음이 조금도 없어보였다.

라이더는 버서커의 몸에 자신의 다리가 닿을 때마다 전신이 타오르는 듯한 감각에 사로잡혔다. 두근 두근, 하고. 가슴 속에서 들려오는 고동 소리는 점점 커지면서 그칠 줄을 몰랐다. 온몸에 비늘이 돋아난 건 실은 자신이 아닐까 착각할 정도로 라이더는 미처 겪어보지 못한 흥분에 자연스레 미소가 번졌다.


'얼마 만일까? 싸우는 것을 즐겁다고 느껴본 건…….'


지금 틀림없이 자신은 미지의 강적과의 조우에 긴장하고 있다. 그런데도 웃음이 멈추질 않는다. 살아생전, 리스크를 관리, 회피한다는 개념은 본래 라이더에게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애당초 승패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라이더에게 있어서 전장이란 싸우는 곳이 아닌 살육의 장소. 그저 죽이고, 빼앗는 게 전부인 장소다. 그곳에 존재하는 것은 자신이 뒤집어쓰는 적의 혈액 뿐. 그저 창을 휘두르는 것만으로, 방패로 후려치는 것만으로, 그들이 몇 십년 동안 노력해왔던 성과를 처음부터 없었던 걸로 만들어버린다. 라이더에게 있어서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 시대에 소환되기 전까지는.


'우물 안의 개구리라는 건 마치 나를 위해 있는 말 같네.'


라이더는 처음부터 성배는 관심 밖이였다. 그런 진위도 알 수 없는 모조품 따위에 연연하는 것은 마술사들이나 하는 짓이다. 그들의 손에 의해 모든 시대에서 불려지는 신화, 전설 속에서 위업을 쌓은 영웅들. 솔직히 말해서 그들조차 라이더에게 있어서 우상무상과 다르지 않았다. 어떤 서번트가 소환되더라도 결국은 자신이야말로 최강의 자리에 어울린다고 라이더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정말로 라이더가 바랬던 것은, 마스터의 소환에 응한 진짜 이유는───그런 오만한 자신의 생각을 180도 뒤집어버릴 정도의 강적, 순수하고 아름다운 힘을 이 눈으로 확인하는 것 뿐.


'아아, 세계는 여전히 내가 알지 못하는 미지로 가득해!'


그 순간, 라이더는 동작을 멈추고, 무장을 해제했다.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이가 경악을 금치 않을 수 없었다. 투구 속에 감춰진 얼굴은 그야말로 여신의 현현. 양갈래로 묶은 긴 황갈색 머리카락은 마치 잘 만들어진 두 자루의 쌍둥이 검을 연상케 했고, 빛나는 녹색 눈동자는 항해자들이 마지막의 순간 가슴에 품는 세상 끝의 바다와 닮아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한 시대를 풍미한 영웅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가련한 자태. 그러면서도 강적을 앞에 두고 결코 물러서지 않는 불굴의 주먹과 맞물려 뭐라고 표현하기 힘든 그녀의 양면성을 더욱 뚜렷하게 만들었다.

버서커의 눈썹이 미약하게 파르르 떨렸다. 물론 그 입에 떠오른 것은 여전히 여유를 머금은 부드러운 미소였지만.


"호오, 수비를 포기하고 장갑을 더욱 얇게 했나."

"그만큼 더 빨리 움직일 수 있거든."

"나도 얕보여졌군. 아무리 약한 공격이라도 닿으면 죽는다. 제정신인가, 라이더."

"착각하지 마. 이건 당신에게 이기기 위해서야."

"과연, 피할 수 없는 공격이라면 여분의 힘을 다른 곳에 돌린다는 건가."


버서커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라이더는 있는 힘껏 대지를 박차고 크게 도약했다. 그러나 움직임을 포착하기 힘들었던 지금까지와는 달리 라이더는 곧장 버서커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그 궤도는 이미 그들의 싸움을 지켜보고 있던 두 명의 마스터도 읽을 수 있을 정도로 단순했다. 그 우직함에 버서커는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그것은 실책이었다, 라이더."


버서커는 소매로 입가를 가리고 우아하게 회전했다. 버서커에게 있어서 그것은 봄바람에 흩날리는 꽃잎에 흥이 겨워 저절로 몸이 움직이는 정도에 불과했으나 그 변덕스러운 춤사위가 몰고 오는 후폭풍은 결코 무시할 만한 것이 못 됐다. 그녀의 춤사위는 대지를 흔드는 지진의 충격파 그 자체였으며, 고체, 액체, 기체를 불문하고 모든 것을 투과하는 마(魔)의 손길은 이미 피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그걸 모르는 라이더가 아니였다. 하지만 버서커의 충격파가 미처 몸에 닿기도 전에 라이더의 모습은 일순간 세계에서 완전히 소실했다.


"뭣이───"


버서커의 공격은 사정 범위는 짧더라도, 일단 그 안에 들어오기만 하면 절대로 먹잇감을 놓치지 않았다. 무수히 떨어지는 꽃잎에 닿지 않으며 벚나무 길을 걸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적어도 버서커라고 하는 나무에 접촉하기 위해서는 전방의 충격파를 뚫고 오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라이더의 존재가충격파에 닿는 순간, 일시적으로 세계에서 소멸한다. 그리고 마치 충격파 따위는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그 질주를 멈출 줄 모른다. 버서커는 유쾌하게 웃었다.


"과연, 순간적으로 다른 공간으로 도약했구나. 그 재주, 이미 신업에 다가섰으렷다."


그렇지만 라이더의 접근을 허용했다고 해서 현재의 전황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용의 피를 잇는 버서커의 몸은 비늘로 둘러쌓여 있어서 자신보다 신비가 낮은 공격을 모조리 무효화시킨다. 라이더가 공격을 내지른 그 순간을 노려서 버서커의 일격이 라이더의 목을 노릴 것이다. 말하자면 지금의 라이더는 아무런 전략도 없이 그저 돌진하는 것과 다를 게 없었다. 그 용기를 어리석다고 비난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가상하다고 높게 평가해야할 것인가. 어느 쪽이든 유쾌한 녀석임이 틀림없다고 버서커는 생각했다. 이윽고 라이더의 주먹이 버서커의 몸에 닿기 일보직전.


"───하늘을 달리는(케이론)."


변화는 극적이였다.

아무것도 없던 곳에서 갑자기 나타난 폭풍이 버서커를 집어삼켰다.

지금까지 그 징조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저 라이더가 그 보구의 진명을 입에 담은 순간,

거대한 소용돌이와 함께 두 서번트의 모습이 그 안으로 사라졌다는 결과 밖에 남지 않았다.


"황금의 미각(스텝)───!"


휘몰아치는 폭풍 속을 라이더가 달린다. 바람을 넘어서. 소리를 넘어서. 빛을 넘어서. 시간을 넘어서. 역사를 넘어서. 마음을 넘어서. 그 앞에 있는 미래마저도 넘어서. 그곳에는 대지 위에 발을 묶는 중력도, 대기를 부드럽게 감싸는 공기도 없고, 그저 이물질을 제거할 뿐인 속도의 괴물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 타격 하나 하나는 보잘 것 없다. 분명 A랭크에 비견될 만한 위력이지만 방심하지 않으면 피할 수 있는 레벨이다. 하지만 0.000001초 동안 성립되는 무수한 공격이 이어지면서 버서커의 재생 능력을 따라잡기 시작했다. 이윽고 절대로 벗겨질 수 없는 용의 비늘에 금이 가면서 버서커는 아주 약간의 조바심을 느꼈다.


"바람이 좀 차구나."


마치 이대로는 감기에 걸릴지도 모르겠다는 무미건조한 한마디와 함께 버서커는 신의 폭풍을 간단히 찢어버렸다.


"뭣───"


이번에는 라이더가 놀랄 차례였다. 장지(壯紙)를 찢는다는 수준의 얘기가 아니다. 저 여자는 순간적으로 2배의 충격파로 대기 그 자체를 잘라버린 것이다. 라이더가 만든 폭풍은 여전히 그 자리에서 휘몰아치고 있었다. 그런데도 버서커가 서 있는 부분만 마치 구멍이 뻥 뚫린 것처럼 허전했다. 머지 않아 폭풍은 중심을 잃고, 위태롭게 흔들거리다가 그대로 소멸해버렸다. 그와 함께 라이더는 고개를 푹 떨구었다. 보구란 그 영웅이 가지고 있는 필살의 무기. 그걸 저리도 간단하게 막아버리는 버서커의 존재는 지금까지 라이더가 품고 있던 긍지나 자신감을 순식간에 무너뜨려 버렸다.


그 광경을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쿠로가 큰소리로 쾌재를 불렀다.


"야호! 역시 내 서번트는 최강이야! 두근이 가슴가슴거려, 휘유! 브라보!"


쿠로는 옆에 있던 마르코를 향해 손벽을 치면서 해맑게 웃음을 터트렸다. 지금까지 저 전투를 직접 보기 위해 뇌를 혹사시킨 덕분에 다리가 후들거리고 있었지만, 마음만은 날아갈 것만 같다는 후회 없는 얼굴이었다.


"저기, 지금 어떤 기분이야? 자신의 서번트가 어이없게 당해서어, 손가락을 빨아야 되는 건 어떤 기분일까아? 나는 잘 모르겠는데!"


순간, 마르코는 손에 들고 있는 노트북으로 쿠로의 후두부를 강하게 치면 어떨까 진지하게 고민했다. 자신의 승리에 들떠서 난리법석을 떠는 모습이 뭔가 짜증난다는 감정적인 이유는 아니었다. 여기서 라이더의 보구가 통하지 않는 이상, 무방비한 버서커의 마스터를 먼저 처리하는 게 유리할 거라는 지극히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특히 마술사란 인종들은 자신들의 학문에 심취한 나머지, 과학을 경원시하는 자들이 적지 않았다. 여기서 하이 테크놀로지의 결정체인 자신의 노트북으로 이자요이 쿠로를 처리한다면 협회 녀석들도 조금쯤은 과학에 대한 시각이 변할지도 모른다는 지적 호기심이 그를 움직이게 만들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그거 단순한 완력이거든, 이라고 태클을 걸어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마르코가 자신의 작전을 미처 실행에 옮기기도 전에 쿠로는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어라, 뭔가 버서커랑 함께 날아가고 있는데요, 저───?!"


그렇게 이자요이 쿠로는 저 하늘의 별이 되었다. 아직 낮이지만.


"……."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도통 알 수 없는 마르코는 다시 노트북을 펼쳐서 감시 카메라 영상을 확인했다. 영상 속에는 버서커가 폭풍을 찢고 나온 뒤, 라이더가 낙담에 빠진 것도 잠시, 순식간에 버서커의 등 뒤로 돌아선 라이더가 멋진 이단 옆차기로 대상을 폭발적으로 날려버리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었다. 버서커는 그대로 호를 그리면서 날아가다가 머리카락을 뻗어 습격당하기 직전인 자신의 마스터, 쿠로를 감싸고 같이 이탈했다.

마르코는 상황을 이해하고 싸움의 여파로 생긴 크레이터 주변을 빙 돌아서 라이더의 곁으로 다가갔다. 라이더는 여전히 고개를 떨군 채 그 자리에 서있었다. 라이더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마르코는 건네야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격려? 위로? 그 어떤 말이 지금의 라이더에게 위안이 될 수 있을까? 아니, 정말로 지금 이 순간 말은 필요한 것일까? 한참을 고민하던 마르코는 용기를 내서 입을 열었다.


"일단……."

"푸핫!"


라이더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배를 잡고 정말로 유쾌한 것처럼 미친듯이 웃어대기 시작했다.

눈물까지 훔치면서, 세상에서 이보다 더 재밌는 일은 없다는 것처럼.


"바보 같아! 폭풍을 찢고 나오다니, 정말로 미친 거 아냐!"

"……아아, 확실히 강적이었다."

"강적도 저런 강적이 없을 걸! 저 서번트를 쓰러트리려면 등골 좀 휘겠네, 마르코?"

"그건 네가 감당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만."


"그렇네."


"다음에 만날 때는 절대로 안 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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