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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를 달리는 바람이 나무를 쓰다듬었다. 나무는 바람의 속삭임에 간지러운듯 몸을 흔들었다. 하지만 나무 그늘 아래에서 목검을 맞대고 있는 두 아이의 이마에는 굵은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아이들의 목검이 맞닿을 때마다 경쾌한 소리가 숲 속에 울려퍼진다. 그들의 대련은 이미 몇 시간 동안 이어지고 있었다. 이윽고 키가 큰 소년이 상대의 움직임을 읽고 가벼운 동작으로 상대의 목검을 쳐서 날려버렸다. 무기를 잃은 조그마한 아이는 원통스러운 듯 주먹을 바닥에 내리꽂으면서 자신의 패배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제길, 또 졌어!"


어지간히도 분한 것인지 바다를 연상케 하는 소녀의 깊은 녹색 눈동자에는 커다란 물방울이 맺혀있었다. 귀가 보일 정도로 짧게 자른 황갈색 머리카락은 소녀를 사내아이처럼 보이게 했다. 하지만 안목이 있는 사람이라면 언젠가 이 소녀가 세월이 지나서 보는 이의 혼을 쏙 빼놓게 만들 정도로 아름다운 처녀로 자랄 것이라는 확신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지금의 소녀에게 있어서 자신이 조신한 여성이 된다는 미래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지금은 그저 친구와의 승부에서 지고, 분해서 어쩔 줄 모르는 다섯 살짜리 어린아이에 불과했다.


"이걸로 500전 500승 달성이네. 슬슬 단념하는 게 어때? 아킬레스."

"웃기지 마! 아직 499번 밖에 안 졌거든!"


자신을 도발하는 친구, 파트로클로스의 목소리에 아킬레스는 언제 울었냐는 듯 소매로 눈가를 닦고 씩씩하게 일어섰다. 확실히 파트로클로스는 아킬레스보다 나이도 많았고, 키도 더 컸으며, 무엇보다 영리했다. 철이 들기 전부터 부모 곁을 떠나 숲의 현자에게 맡겨진 아킬레스에게 있어서 파르토클로스는 유일한 친구이자 형제였다. 그들은 무엇을 하든 언제나 함께였다. 하지만 아직 단 한 번도 파트로클로스에게 이겨본 적은 없다. 오랜 세월을 함께 보낸 파트로클로스에게 있어서 아킬레스의 행동 패턴을 읽는 것은 일도 아니였고, 승부에 있어서 먼저 목검을 놓아버리는 것은 항상 아킬레스였다. 같은 스승 밑에서 훈련을 받고, 침식을 함께 했는데도 아주 약간 먼저 태어났다는 이유로 자신보다 한 발 앞서는 이 소년을 아킬레스는 인정할 수 없었다.


"다음에는 꼭 이길테야!"

"몇 번을 해도 똑같아. 포기할 줄 모르는 건 너의 나쁜 버릇이라구, 아킬레스."

"됐으니까 어서 검을 들어! 아직 승부는 시작했을 뿐이야."

"휴, 어쩔 수 없지. 먼저 걸어온 결투를 받아들이는 건 챔피언으로써의 의무니까."


부들부들... 언젠가 저 얄미운 놈한테 본떼를 보여주고 말리라. 아킬레스는 그렇게 다짐하며 다시 한 번 파트로클로스를 향해 달려들려고 했던 그 때였다. 바람의 움직임이 바뀌었다. 그들은 춤추는 듯한 들뜬 발걸음으로 아킬레스의 주변을 정신없이 돌아다녔다. 마치 주인의 귀환을 반기는 것처럼. 숲의 현자가 돌아왔다.


"스승님께서 돌아오셨어."


아킬레스의 말에 파트로클로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두 아이는 목검을 내려놓고,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나무 사이를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에메랄드 빛으로 물든 초원은 순수한 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저멀리 그의 모습이 보였다. 말의 모습을 한 하반신 위로는 건장한 육체를 가진 사내의 모습이 있었다. 아킬레스의 얼굴에는 화색이 돌면서 땅을 박차는 발걸음이 점점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어느새 파르토클로스를 앞지른 아킬레스는 숲의 현자의 품 속으로 달려들었다. 반인반마의 사내는 살짝 놀란 듯 주춤거렸으나 자신을 향해 반갑게 달려오는 소녀를 부드럽게 맞아주었다.


"스승님, 어서 오세요!"

"씨발, 이 좆같은 애새끼야. 갑자기 달려들지 말라고 몇번을 말해야 말귀를 알아쳐듣겠니, 증말."

"왜 이제 오신 거예요! 제가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아세요?"

"아휴, 그랬어요? 난 그 못생긴 면짝 두번 다시 보고 싶지 않았거든. 음식물 쓰레기나 쳐먹어라, 이 썅년아."


자상한 손길이 아킬레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야말로 숲의 현자이자 수많은 영웅들을 키워낸 걸로 유명한 히어로 인큐베이터, 케이론.


"1박 2일 동안 꼬박 달려오다가 내 사랑스러운 털들이 다 죽어버렸어. 케이론 쨩, 쇼크. 세계적인 손실이야."

"스승님, 이번에는 어디에 다녀오셨어요?"

"그딴 걸 꼭 물어봐야겠니? 진짜 눈치하고는... 빨리 가서 당근 쥬스나 갈아오지 못해! 이래서 닝겐들이란... 툴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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