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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산다이바나시-주인, 노예, 사랑

2016.02.29 11:31

라온 조회 수:862

“오늘도 늦어?”

나지막한 그녀의 목소리가 귀에 울린다.

 “부탁이야. 오늘만 함께 있어주면 안돼?”

오늘 아침, 누구보다도 아끼고, 사랑하는 그녀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그래… 일하러 가는 건 알아. 그래도 제발… 응?”

억지. 오늘따라 왜 이러는 것일까. 남자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울컥울컥 짜증이 솟구쳤다. 그는 목에 꽉 메우는 욕지거리를 간신히 참고 현관문을 닫고 집에 나왔다.


 “17번 교육생. 표정이 안 좋은데요? 무슨 일 있습니까?”

얼핏 친절하지만 냉담함이 담긴 목소리. 인턴은 그 말에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이런, 교육시간이었다. 그것도 열심히 어필해도 모자른 상사들이 뒤에서 지켜보고 있는.

“저는 한번 봐드리겠어요. 하지만 뒤에 있는 분들은 어떻게 생각할 지 모르겠군요.”

아아, 바보같으니. 그는 속으로 자신을 책망하며 겉으로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듯 강사를 바라보았다.

 “다시 시작해볼까요? 저는 여러분도 잘 알다시피 현성그룹에서 전설로 자리잡은 사람입니다. 20년동안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회사에 나와 일하며 가장 많은 실적을 쌓았죠. 그런 제가 여러분께 하고 싶은 말은 단 하나입니다.”

강사가 잠시 말을 멈춘다. 교육생들은 일제히 그가 말을 하는 순간을 기다리며 잡아먹을듯한 기세로 강사와 눈을 마주쳤다. 물론 그도 마찬가지. 조금이라도 열정을 내비치기 위해, 목숨걸고 일할 준비가 되어있다고 말하기 위해 몸을 들썩 거린다.

“죽으세요. 회사를 위해 죽으세요. 여러분들이 현성그룹에서 목숨을 바치면 저희는 여러분을 안고 가겠습니다. 회사를 위해 죽는 것이 곧 가족을 위해 죽는 것입니다. 충성을 다하십시요.”

짝짝짝… 그는 말이 끝나기가 일어나 무섭게 박수를 쳤다. 뒤를 위어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1등은 자신이다. 그는 자신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상사의 눈빛을 느끼며 더더욱 손에 힘을 주었다.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낡아빠진 책상과 솜이 다 죽은 의자. 2개월째 앉는 이 자리가 지겨울 법도 하지만 인턴인 그에겐 그래도 유일하게 앉아서 쉴 수 있는 공간이었다.

 “얼마 안 남았네.”

그의 자리에 커피 한 잔이 놓인다. 유일하게 그를 챙겨주는 선배였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하려는 풋내기 인턴의 어깨를 눌러 다시 앉힌 뒤 비듬이 떨어지는 머리를 긁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기대하고 있다고. 인턴. 며칠만 있으면 정규직 전환 인원 발표지?”

 “예. 그럴습니다. 선배님 덕분에 잘될 것 같습니다.”

선배는 그의 사탕발림이 싫진 않은 듯 피식 웃은 뒤 그의 책상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액자 하나를 집어들어 그에게 들이밀었다.

 “이게 그 유명한 애인이냐?”

 “아, 예… 그렇습니다. 정규직이 되면 바로 결혼할 생각입니다.”

 “미인이네. 얘기는 들었다만… 힘내라.”

선배는 불쌍하다는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가 했던 이야기 때문이리라. 사법고시를 준비하던 자신을 위해 뒷바라지하다 결국 쓰러져 혼자서는 하반신 마비가 된 여자친구. 그는 회식자리에서 술에 취해 그 이야기를 털어놓았고 덕분에 회사 모든 사람들이 그를 불쌍히 여기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그래. 빨리 교육 끝내고 내 밑으로 들어오라고.”

선배는 그 말과 함께 잔뜩 주름진 셔츠 속에 손을 넣고 어깨를 긁으며 자리로 돌아갔다. 5일째 집에 들어가지 않았다고 했던가? 그는 선배의 뒤를 잠시 바라보다 다시 자신이 익혀야 할 수백장짜리 교육 메뉴얼에 눈을 돌렸다.


[부우우웅… 부우우웅…]

조용한 회의실에 울리는 진동음. 주인공은 아까 자신에게 말을 건 그 선배였다. 모두의 차가운 시선을 받으며 그는 전화기를 끄려다가 화면을 보고는 몸을 뒤로 돌려 전화를 받았다.

 “이봐. 자네! 빨리 안 끄고 뭐하는건가!”

하지만 선배는 부장의 불호령은 안중에도 없는 듯 전화기 너머에 들려오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10분같은 1분, 선배는 전화를 놓고 힘없이 입을 열었다.

 “저 부장님. 정말 죄송하지만…!”

 “죄송하면 전화를 받지 말아야지! 개념없이 말야! 자. 다시 회의를…”

 “어머니께서… 지금 고비라고 하십니다…”

직원들은 그 말에 놀라 다소 높아진 목소리로 웅성거렸다. 얼마나 놀랐느냐. 걱정되겠다. 빨리 가봐야 하는 거 아니냐… 인턴도 놀라 선배에게 위로의 말을 건내기 위해 의자를 뒤로 빼고 다가가려고 일어섰다. 하지만-

 “조용히 못해!”

부장은 날카로운 목소리가 인턴을 다시 의자에 앉혔다.

 “그래서 어쩌라는 겐가? 지금 집에 가봐야겠다고? 그럼 오후 출장은 누가 가나? 내일 있을 바이어 미팅은? 외국어도 모르는 우리더러 하라는건가?”

선배는 당황스러운 눈빛으로 부장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부장은 그 눈을 정면으로 째려보며 이렇게 말했다.

 “맘대로 하라고. 하지만 어머님께서 별 일 없으시면 어떻게 될지는 잘 알고 있을거야. 어렵게 들어온 회사. 이런 식으로 하다가 잘못되면 슬퍼하는 건 자네 어머니일 거라고. 회의 끝! 나가서 일들 봐”

부장이 밖으로 나간다. 직원들도 선배를 안됐다는 눈으로 쳐다보며 한명씩 자리에서 일어났다. 회의실에 남은 것은  선배와 인턴뿐, 그는 한참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다 시체처럼 느릿한 손으로 테이블 위의 서류를 정리한 뒤 밖으로 나갔다.


 [제발… 나도 오늘따라 왜 그러는지 모르겠어.]

 [그럼 제때라도 와줘. 보고싶어.]

 [많이 바빠…? 못올 것 같아?]

 [자기…]

비상구 한 구석, 휴대폰을 켜자마자 20통이 넘는 숫자가 적힌 문자함을 누른다. 인턴을 한숨을 쉬며 메세지를 훑어보았다. 일할 때엔 한번도 없었던 그녀의 문자. 마음 한 구석에 불길함이 스쳤지만 애써 잊기로 했다. 퇴근시간이 한참 지나도록 아무도 나가지 않은 이 사무실에서 나가겠다고 말할 용기는 그에게 없었다.

 “쉬는 중이냐”

선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인턴이 휴대폰을 사용한 것을 보면 좋은 소리는 듣지 못하리라. 얼른 휴대폰을 끄고 선배를 바라보았다.

 “괜찮아 지셨대…”

그는 인턴의 휴대폰따윈 신경쓰지 않은 채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입에선 미소가 피어올랐다. 인턴도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며 말했다.

 “무사하셔서 다행이십니…”

 “아. 다행이야. 내일 출장가는 데 지장은 없겠어. 하하!”

선배는 큰 소리를 내며 말했다. 인턴은 그의 말에 놀라 멍하니 선배를 바라볼 뿐이다.

“이번 일만 성사되면 승진은 확실하거든. 그래서 엄청 초조했지 뭐야! 일단 한시름 놨어.”

그의 입에서 상상도 못한 말이 쏟아져 나왔다. 인턴은 그 말을 정신 못차리고 멍하니 듣고만 있었다. 그리고 머리 속으로 선배와 술을 마시며 했던 말 한마디를 떠올렸다.

 ‘애인 뒷바라지하려고 취직했다고? 나랑 비슷하네. 녀석. 나도 어머니가 편찮아지셔서 돈을 좀 벌려고 들어온 거거든.’

그렇게 말했던 선배는 어디로 간 것일까. 혼란스러웠다. 인턴은 선배로부터 천천히 뒷걸음질쳤다.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것일까. 선배의 모습이 눈에서 사라지자, 그는 뛰듯이 달려 사무실을 지나 엘레베이터로 다가갔다. 그리고

[띵동]

엘레베이터의 하강버튼을 누르고는 두번 다시 사무실로 돌아오지 않았다.


“진영씨! 왔어?”

그녀가 환한 미소로 진현을 반긴다. 진현은 뛰어들듯 그녀에게 다가가 그녀의가녀린 허리를 부숴질듯 껴안았다.

 "응. 왔어! 왔어! 돌아왔어. 겨우 돌아왔다고!!"

그녀는 진영의 겪한 모습을 이해하지 못하고 잠시 어리둥절한 반응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녀도 그의 허리를 함께 껴안으며 그의 체온을 느꼈다.

 "그래. 잘 돌아왔어. 잘했어. 정말 잘했어."

둘은 마치 영원한 이별을 겪은듯한 커플처럼 오래, 아주 오랫동안 그렇게 서로를 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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