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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흔해빠진 세계관 만화 팬픽

2012.10.28 11:06

라온 조회 수:1915

  지니에는 나무로 우거진 숲을 날듯이 달렸다. 얼굴에는 초조함이 숨김없이 드러나 있었고 숨은 거칠었다. 잘 묶어 모자 속으로 감춘 머리가 흘러나와 눈을 찔러대지는 다시 정돈할 생각은 없었다. 그녀는 그저 온통 너무나도 위험한 행동을 하려는 자신의 주군을 막고 싶을 뿐이다. 올라비 왕자는 오랜 금기를 어기고 짧은 귀들과 어울리려 하고 있다.


 그가 짧은 귀에 관심 있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은 아니다. 왕자는 언제나 지니에에게 짧은 귀를 칭찬하며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을 해왔다. 그리고 늘 농담처럼, 진담처럼 우리들의 세계를 뒤바꿔야 한다고 말했다. 그것이 수십, 수백년이나 계속 되었기에 그녀는 최근 서부 숲의 경계 근처를 돌아다니는 왕자의 행동을 말리지 않았다. 하지만...


"왕자님!"


그녀의 주군은 마치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멀디 먼 지평선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니에가 큰 목소리로 자신을 불러도 뒤를 살짝 돌아보고 작은 미소를 지은 뒤 다시 앞을 바라볼 뿐이다.


"왕자님! 돌아가셔야 합니다! 대체 무엇을 하시려는 겁니까? 어째서 야만인들과 만나려는 것입니까?"

"역시 지니에는 대단해. 벌써 눈치를 채다니."

올라비는 지니에의 손을 잡아 끌었다. 자신의 옆에 서라는 것처럼, 하지만 그녀는 왕자와 한걸음의 차이를 둔 채 움직이지 않았다. 왕자는 몇번 더 잡아당겨보다 포기했는지 이윽고 손에서 힘을 뺐다.

 "호위검사인 제가 바로 눈치채지 못하였다는 것이 더 말도 안되는 겁니다. 어쨋든, 빨리 돌아가셔야 합니다! 짧은 귀과 만난다는 것은 중죄입니다! 아직 저말고는 아무도 모르니 늦지 않았습니다."
 

 "싫다."


 왕자는 지니에의 말이 끝나자마자 짧게 말했다. 따듯했지만 더 이상 개입하지 말라는듯한 말투, 그녀는 고민조차 하지 않는듯한 그의 말에 할 말을 잃었다. 그녀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크게 한숨을 쉴 뿐이었다. 안될 일에 매달릴 맘은 없지만 이번 일은 왕자가 저지른 그 어떤 기행보다도 심각한 것이다. 왕자는 지니에가 포기한듯 것을 확인하고는 고개를 몇번 끄덕인 뒤 바닥에 앉았다. 

 "왕자님께서 말을 듣지 않으신다면 전 왕자님과 접촉하는 야만인을 죽일 수밖에 없습니다."

 최후의 경고, 지니에는 애용하는 숏소드를 꺼내들었다. 이 검만 있다면 몇명이 오건 우리들의 존재를 감출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왕자는 그런 건 신경쓰지도 않는듯 엉뚱한 질문을 던졌다.

 "지니에, 검은 언제부터 시작했지?"

"네? 그러니까... 아주 오래됐죠. 아마... 기억이 있을 무렵부터 검을 들었던 것 같네요."

 "그렇군... 그러니까 많은 사람들을 제치고 내 호위가 될 수 있었던 것이겠지."
왕가의 호위가 된다는 것은 단순한 직책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적어도 모든 검사들 중에서도 한 손가락에 꼽을만한 수준의 실력과 건강한 정신을 갖고 있을 때 뽑힐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지니에도 자신의 실력에 대한 자부심과 자신감을 결코 감추지 않았다.

 "그렇게 검을 잘하게 된 이유는 뭐라고 생각해?"

 "오랫동안 꾸준히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검에서 손을 놓지 않았으니까요."

 "그렇군... 그렇다면 말야. 지니에, 너는 자신이 엘프들의 이야기에 나오는  전설적인 검사들보다 강하다고 생각해?"

 또 시작이네.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왕자가 이런 식으로 자신을 곤란하게 만드는 질문을 하는 건 한두번이 아니었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왕자의 맘에 들법한 말들로 맞장구를 치며 적당히 물러났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눈 앞에 있는 왕자가 자신을 설득하기 위해 말을 걸었다. 만약  여기서 왕자를 설득하는 데 성공한다면...

 "아닙니다. 저는 그 분들에 비하면 아직 미진합니다."

 "하지만 몇몇은 겨우 1~20년만으로 정점에 올랐는데? 걸음마 떼기도 버거운 시간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건... 그 분들은 짧은 시간이지만 좀 더 절박하게, 좀 더 열심히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 난 잠깐만 쉴 시간이 생겨도 수련하고 있는 너도 충분히 열심히 한다고 생각했는데."

 지니에는 왕자의 말에 대답으로 쓸만한 말을 골라보기 위해 노력하였다. 하지만 무슨 말을 해야 자신의 대답을 웃으며 기다리는 왕자를 설득할 수 있단 말인가. 결국 그녀는 침묵으로 어중간한 답변을 대신하였다.

 "난 그 이유가 재능의 차이에 있다고 생각해. 지니에, 아, 지니에가 재능이 없다는 건 아냐. 그저 극히 소수지만 좀 더 뛰어난 사람이 있었다는 거지. ...빛이 왜 우리를 쫓아냈는지 알아?"

 "...신의 절대성에 흠을 낼 정도로 저희들이 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이지요."

 지니에는 또다른 금기, 빛을 언급하는 건 최대한 조심스럽게 하라는 것조차도 가볍게 무시하는 왕자의 모습에 어이가 없다못해 실소가 터져나오려는 것을 참으며 대답했다.

 "그런데 말야. 우리는 결코 완전한 존재가 아냐. 이 세상 여기저기에 살고 있는 짧은 귀들과 조금도 다를 바 없어. 조금 더 오래살고 조금 더 아름답다는 걸 빼면 말야."

 "그게 무슨! 우리가 그런 천박한 것들과 같다니요! 그들은 심연의 기운이 깃들기 전엔 한낱 짐승에 불과할 뿐입니다!"

 지니에는 왕자의 말도 안되는 소리에 조금 격양된 목소리로 외쳤다. 하지만 왕자는 그녀의 반응을 예상한듯 화내거나 비웃는 기색도 없이 담담히 말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짧은 귀에게 장애가 생기지 않는 한 심연이 깃들지 않는 일은 없지. 그렇지 않아? 우리에게 생명과 죽음께서 축복을 내린 거나 마찬가지지."

 "하지만 짧은 귀가 불완전하다는 건 틀림 없습니다."

 지니에가 특별히 짧은 귀를 싫어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올라비 왕자에게 거듭해서 그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다른 사람들보다 긍정적으로 생각해왔다. 하지만 그들을 자신들과 동급으로 생각하는 왕자의 말은 인정할 수 없었다.

 "그래. 불완전하지. 하지만 그러면 우리는 완전한 존재라고 생각해?"

 "네. 그렇습니다. 빛이 우리를 창조할 때 우리를 완전하게 만들었죠. 우리는 신들의 창조물 중 가장 강하고 가장 유능합니다."

 그녀의 말에 왕자는 큰 소리를 내며 유쾌하게 웃었다. 핫핫핫, 비웃음으로밖에 들리지 않는 소리와 표정.지니에는 얼굴이 시뻘게진 채 표정만 간신히 유지하였다.

 "그런데 왜 우리는 생각이 다른거지?"

 "네?"

 "우리는 모두 완전한데 왜 너와 나의 생각이 다른 걸까."

 "그건..."

 "모두 완전하다면 왜 정반대에 생각을 할 리가 없잖아. 둘 중 한명은 잘못된 선택을 한 것인데."

  잘못됐다고 말하긴 어렵지만 궤변같은 말. 인정할 수 없었다. 이해할 수 없었다. 가치관이 도전받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니에는 잠시 생각을 정리한 뒤 입을 열었다.

 "...완전하다는 표현은 잘못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야만인들과 굳이 교류해야 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우리에게 대체 무슨 이득이 있다고 만나시겠다는 겁니까!"

 "글쎄..."

 올라비는 잠시 뜸을 들였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일까. 하지만 지니에는 지금이야말로 설득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하고 말을 이어나갔다.

 "왕자님께서 늘 짧은 귀들에 대해 관심을 가지셨죠. 왕자님의 생각을 무시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그들을 돕고 싶다는 마음은 이해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아니야. 돕는 게 아니다. 배우고 싶은 거야."

 "네? 무슨..."

 지니에는 생각도 못했던 왕자의 말에 말문이 막혔다. 상상도 못했다. 그들에게 무엇을 배울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이렇게 말도 안되는 생각을 할 수 있는 지 알 수 없었다.

 "짧은 귀가 우리보다 강인하다거나 지혜로운 건 아냐. 하지만 생각해봐. 우리는 언제나 다른 것들에게서 무언가를 배우지. '어린 아이에게도 배울 것이 있다.'는 말의 뜻. 너도 알지?

 "...네. 압니다. 하지만 그것과 이건..."

 "같아. 누군가 그 말을 한 것처럼 언젠가 했어야 할 일을 내가 하는 것 뿐이지."

 왕자는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상쾌한 표정으로 멀리서 다가오는 흙먼지 구름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지니에에게 그것을 바라볼 여유는 없었다. 왕자의 궤변을 타파해보고 싶었지만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유능한 학자라면 반박할 수 있었을까? 아니, 못했을 것이다. 왕자의 궤변은 그만큼 완벽했고... 어쩌면, 정말로 어쩌면 사실일지도 모른다. 결국 그녀는 짜증을 감추지 못하고 손까지 흔들며 그들을 반기는 왕자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짧은 귀들이 어떻게 이 세상 전체로 퍼졌는지, 어떻게 짧은 삶에서 희망을 찾았는지, 어떻게 문화를 꽃피웠는지, 어떻게 그렇게 열심히 사는지 궁금하지 않아? 정말로 내 생각이 맞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말이다. 맘 같아선 지금 당장 저들을 쫓아가고 싶구나."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하하, 농담이다."

 왕자는 그렇게 말하며 지니에를 향해 미소지어 보였다. 지니에가 그 미소의 의미가 무엇인지 어렴풋이라도 깨닫게 된 것은 엘프의 기준으로도 짧다고는 못할 시간이 흐른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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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본격 토론소설로 쓰려고 이야기 합을 짜놨는데 이걸 다 쓰면 재미없거나 멘붕할 것같아서 포기(...)


루X웹에서 절찬리에 연재되고 있는 만화의 팬픽을 써봤습니다 


정말 추천하는 만화입니다~ 꼭 한번 보세요~


http://bbs2.ruliweb.daum.net/gaia/do/ruliweb/family/216/read?articleId=15469019&bbsId=G005&searchKey=userid&itemGroupId=&searchName=paulbba&itemId=63&searchValue=_hseMpWuVOA0&platformId=&pageIndex=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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