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ip to content

단편 귀로(歸路)

2011.02.28 15:13

악마성루갈백작 조회 수:1322

그녀는 차창 밖을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 역시 말없이 운전을 계속했다. 무어라 말을 하면 좋을까. 이 숨 막히는 답답함을 깰 말을 열심히 떠올렸지만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게다가 어색한 말을 꺼냈다가 분위기를 더 악화시키지는 않을까 두려웠다.

평소에는 그렇게나 즐거운데, 분위기 좋았을 때는 전화기 수다로 밤을 새운 적도 있었는데. 이렇게나 한마디 하는 것이 어려울 줄이야.

"목 안 말라?"

그는 애써 한 마디를 건넷다. 약 5초… 숨 막히는 분위기에서의 5초는 상상 이상으로 긴 시간이다. 어색함이 둘 사이에 장벽을 완성해버리기 직전 그녀가 대답했다.

"안 말라."

그녀의 답에는 지루함과 깊은 건조함이 배어 있었다. 최악이었다. 그는 다시 말없이 운전을 계속했다. 차라리 이런 시간이라도 지속되었으면 좋겠다. 슬슬 다 와 간다. 5분여만 더 가면 그녀의 집이다.

'…흠'

지금 창 밖을 바라보고 있는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이별에 대해 생각을 하고 있을까. 자신의 미래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까.

"무슨 생각해?"

애써 밝음을 가장한 그의 목소리에 그녀는 말했다.

"아무 생각도."

사실 그래, 이야기하기 싫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항상 여자들에게 갖는 불만이 이것이었다. 아무리 본인이 이야기하고 싶은 기분이 아니더라도, 아무리 단단히 화가 났다고 하더라도 상대가 애써 말을 붙이고 기분을 돌리려 애를 쓰면 그에 대해 최소한… 아니다.

애당초 자신이 잘했으면 됐을 일이다. 구차하게 그런 이야기는 하지 말자. 애써 마음을 달랜 그는 그녀에게 말했다.

"미안해."

그녀는 그제야 그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뭐가 미안한데."

여자라는 존재들은 어쩌면 이렇게 백이면 백 반응이 똑같을까… 하는 생각이 순간 뇌리를 스쳤지만 그런 생각은 곧 털어버렸다. 오늘따라 왜 이리 병신같은 잡생각이 자꾸 머리를 어지럽힌단 말인가. 그는 곧 정신을 집중하고 마음을 담아 말했다.

"오늘 일, 그리고 그동안 잘못했던 전부, 또… 예전에 한번 이야기 나왔는데도 또 이 얘기 나오게 한 것까지."

문득, 그 이야기를 하면서 감이 굉장히 안 좋았다. 살짝 옆 자리를 곁눈으로 살피자 그녀가 울고 있었다. 왜 울어, 울지마, 미안해 등등 순간적으로 여러 말이 입안에서 맴맴 돌았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순간 자신이 아주 무기력하게 느껴졌다. 머리가 어지러우면서 멍해졌다.

끝을 느꼈다. 가슴이 터지기 전에 그녀가 무언가 말을 해주길 바랐다. 나 같은 녀석을 만나지 않았다면 그녀의 삶이 더 행복할 수 있지 않았을까, 괜히 자신이 그녀를 좋아해서 이렇게 되어버린 것이 아닌가, 그냥 바라만 봤더라면, 그래서 이렇게 사귀지 않았다면 당신은 행복하지 않았을까.

거기까지 생각하지 그의 눈에서도 눈물이 났다. 서둘러 눈물을 지우고, 어느새 도착한 그녀 집 앞에 차를 세웠다. 눈물을 흘리고 혼자  없이 다시 차창 밖을 바라보던 그녀가 무어라 말했다. 잘 들리지 않아 "어?" 하고 다시 물었다.

그리고 그렇게 잠에서 깨었다. 너무 생생한 꿈이었다.

등을 구부정하게 옹송그리고 책상에 붙어있던 청년은 고개를 들었다. 그 허핍하고 눈물 젖은, 그러나 쓴웃음이 담긴 그 얼굴은 청년이 얼마만큼의 세월과 회한을 아로새기고, 봉투마냥 야트막한 거짓말로 껍질을 덧씌웠는지 전부 일러주었다.

맑아진 눈으로 제 한 몸을 깃들인 단칸방을 휘 둘러보던 청년은 느지막하게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찢어진 벽지 위에 얼굴을 묻고, 책상에서 반쯤 절하던 것도 모자라 아주 무릎을 꿇어 흐느꼈다.

그것은 꿈이었다.

그것이, 꿈이었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1308 나락 ImImImch 2022.11.14 25
1307 산다이바나시-주인, 노예, 사랑 [1] 라온 2016.02.29 862
1306 천로역정 컨셉 #금비은비 [1] 비렌 2014.04.15 885
1305 산다이바나시-겨드랑이, 에로망가, 질내사정 [1] 라온 2012.10.28 5554
1304 흔해빠진 세계관 만화 팬픽 라온 2012.10.28 1915
1303 [멀티노벨「하트헌터」] 5일-1일째(1) 라온 2012.03.16 1380
1302 천로역정 if... - 하늘비 bad end [1] 카와이 루나링 2012.03.13 1689
1301 멀티노블[하트헌터]5일-서장 라온 2012.03.01 1590
1300 사랑은 픽션이다 악마성루갈백작 2011.05.15 1801
1299 "세상에 그 어떤 상황에서 화 안 낼 여자 없어." 악마성루갈백작 2011.05.02 1473
1298 [H.C SS] 오빠가 있으니까 괜찮아 [3] 心吾 2011.03.24 2478
1297 당신에게 보내는 유서 [1] 악마성루갈백작 2011.03.18 1198
1296 [HC SS] 그렇게 검을 거머쥔다. [4] 사이네 2011.03.13 1224
1295 HC S.S 기억의 단편 [1] 니츠 2011.03.13 1121
1294 기묘한 이야기-Repetition(반복) 번외편 [1] 악마성루갈백작 2011.03.12 1222
1293 [HC SS] 그녀만의 사정 [2] 낙일군 2011.03.11 3150
1292 그 사람을 그렇게 만든 건 언니야 [2] 악마성루갈백작 2011.03.04 1445
1291 환세동맹-사신의장2막 [3] 사이네 2011.02.28 1083
1290 환세동맹-사신의장1막 막간. [3] 사이네 2011.02.28 1205
» 귀로(歸路) [1] 악마성루갈백작 2011.02.28 1322

Powered by Xpress Engine / Designed by Sketchbook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나눔글꼴 설치 안내


이 PC에는 나눔글꼴이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사이트를 나눔글꼴로 보기 위해서는
나눔글꼴을 설치해야 합니다.

설치 취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