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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사랑은 픽션이다

2011.05.15 20:19

악마성루갈백작 조회 수:1801

우연이라는 건, 마치 따분한 멜로영화 속에서도 스토리의 전개 내지는 자극을 위해서 친절히도 시간과 공간을 원료로 (짧은 명상에 잠기기도 전에) 테이크아웃 커피처럼 빠르게 내 손에 쥐어지는 것이라고 해도 그것은 우리네 인생에 꼭 한 번씩 찾아오는 것이다.
  
  그날이 그랬다.
  
  맞은편 보도에 그동안 내 머릿속을 수차례 노크하며 세로토닌과 도파민이 마중 나가기도 전에 종적을 감췄던, 그냥 흔한 말로 이상형의 여인이 보였다. 햇살은 따사롭게 내리쬐고 있었고 평소보다 많은 차는 속도를 내며 나와 그녀의 사이를 가르고 있었다.
  
  "이봐요!!"
  
  내가 목청껏 발산한 음파가 80데시벨이 넘는 도심의 소음에 의해 반사되거나 회절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행선지 다른 불특정 다수의 사람 속에서 온전하게 그녀의 귓가에 도달하는 것은 '무리'라는 것을 알아차리는 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툭"
  
  그녀에게 시선을 고정하느라 이미 균형을 잃은 내 몸과 지나가는 이름 모를 행인의 단단한 어깨 근육이 부딪히는 순간 브라운 뿔테안경은 온전한 얼굴에서 벗어나 바닥에 나뒹굴었고 렌즈는 파열했다. 그리고 그녀의 모습은 흐려지고 있었다
  
  빵!
  
  초점이 이탈되었다는 것과 50m를 더 가면 맞은편 보도로 건너는 건널목이 있다는 것에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나는 형체가 불분명한 차들이 뿜어내는 경적 속으로 한걸음 내딛고 있었다. 인파들 사이로 사라지는 그녀를 잡을 수 있는 빠른 길은 미련하게도 차도를 무단횡단 하는 것이라고 판단이 내려진 터였다
  
  아슬아슬하게 비켜가는 차량 사이로 정신없이 몇 보를 이어가고 있을 때쯤 귓속으로 일종의 신호음이 잠시 울렸고 발걸음도 멈추어졌다. 소리가 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토해 내는 차량의 경적도, 위험을 알리는 일면식 없는 낯선 이들의 고성도. 세상으로부터 들을 수 있는 소리는 없었다. (아니 듣고 싶은 소리가 없었을 것이다)
  
  유일하게 들을 수 있는 것은 나의 목소리였다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 거지?"
  
  위험천만한 차도 중앙선에 멈추어 서서 그녀를 본 이후에 처음으로 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러나 그것은 사지선다형 객관식 문항도 아니었으며 따분하고 깊은 연구와 근거를 토대로 논리적으로 풀어나갈 필요도 없을 만큼 손쉬운 물음이었다. 나는 여전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고 그녀는 그 뻔한 '답'이 될 수 있었다.
  
  명확한 답을 아는 자의 남은 행보는 여유로운 것이며 정확하고 신속 유효한 것이므로 차도를 건너고 보도의 인파 속에서 어느새 그녀의 뒤에 나를 있게 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녀의 뒤를 따르며 잠시 숨을 고르고 땀을 식혔다
  
  "이봐요!!"
  
  그녀는 뒤돌아 보이지 않았다. 아직 그녀의 시야에 내가 없기 때문이었으리라.
  
  "잠시만요!!"
  
  그녀의 뒤 어깨를 잡고 살짝 돌려세웠다. 이내 그녀가 나를 보았고 나도 그녀를 보았다. 귓속으로 신호음이 잠시 울리더니 소리가 들려왔다. 요란한 세상의 소리가…
  
  
  그녀는 픽션이었다.
  
  
  사랑은 때때로 자신이 만들어내는 극작술에 기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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