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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도대체 뭘 잘못했기에?'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그녀는 비에게 마구 맞으면서도 꿋꿋하게 걸었다. 멈출 수 없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겠지만. 그녀는 쫓기고 있었다. 사람에게 쫓기는 것은 아니었다. 사람에게 쫓기고 있다면 이렇게 걷는 것이 아니라 숨이 턱 밑까지 차오를 정도로 뛰어야 했다. 하지만, 그녀는 여유롭게 걷고 있었다. 외관상으로 그렇게 보일 뿐이었다. 그녀는 지금 자기 자신에게 쫓기고 있었다. 멈춰 있으면 자신을 잃어버릴 것만 같았다. 하지만, 움직이면 자기 자신을 잊어버린다.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이나, 자신을 잊어버리는 것이나, 실상은 다를 바가 없으면서도 그녀는 계속 걸었다.



'아니, 난 잘못한 거 없어. 그 녀석이 멋대로 그랬잖아!'



비는 계속 그녀를 구타했다. 사람들의 시선도 그녀의 심장을 두들기고 있었다. 그녀의 옷도 그녀의 살갗을 태우려 발버둥치고 있었고 높이 솟은 건물도 그녀를 난자했다. 아스팔트 가득 깔려 있는 길이 갑자기 그녀의 앞으로 솟아올랐다. 그녀는 으악 비명을 질렀다. 사람 살려 라고 외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잊혀진 존재에게 시간을 할애할 만큼 한가한 사람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녀는 정신을 잃었다.



'나도 그동안 힘들었어. 그러니까 난 잘못없어!'



정신이 들었을 때나 쓰러져 있을 때나 상황은 같다. 그녀는 비를 맞고 있는 채로 아스팔트 특유의 차가운 감촉과 내음새를 맡으며 정신을 잃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벌떡 일어나, 옷을 툭툭 털고 갈 길을 간다. 사실 갈 길이 없지만서도. 옷은 계속해서 그녀의 피부를 때린다. 너무나 아프다.



'이건 다 그 녀석 때문이야….'



#



특유의 활동성을 잃고 싸늘히 식어버린 거리, 시름에 겨워 보이는 한 청년이 허공을 응시한 채로 말없이 우두커니 서 있다. 늦은 밤 칙칙한 우울함이 그의 육체에조차 스며들어, 그 몰골은 마치 되살아난 카데바처럼 공포스럽고 불길하기까지 하다. 간헐적으로 번쩍대는 네온 간판의 감질나는 불빛이 이따금씩 그의 좌절스러운 안면을 확인하듯 비추는데, 그가 입고 있는 점퍼의 칙칙한 국방색만큼이나 그 광경이 실로 비참하고 암울하다.



창백한 시체처럼 멀거니 제자리에 서 있던 청년은 이윽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어둠 탓에 시야가 막연해진 밤거리를 경쾌히 뚜벅대며 걸어 나간다. 널찍한 걸음 폭이 무척이나 새삼스럽다.



정처 없이 걸었다. 걷다가, 문득 지하철역으로 향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자신이 왜 지하철역으로 가는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이것도 그의 목적에 몸이 반응한 것이리라. 이렇게 쉽게 생각해 버리고는 청년은 그의 몸에 의지를 맡겼다. 그는 이 길을 왜 걸어가는지 그 이유를 알지 못한다. 다만, 걸어가야 한다는 것만을 알 뿐이다.



지하철역, 사람들이 그리 많지가 않다. 당연하다. 이 시각에 사람들이 많다면 그것이 더 이상한 것이다. 출근 시간도 아니고, 퇴근 시간도 아니다. 엄밀히 이야기하자면 퇴근 시간에 가깝기는 하지만 이곳에는 사람들이 일할 만한 회사도, 공장도 없다. 퇴근 시간이라고 해도 그리 붐비지는 않는다. 표를 사고 지하철 타는 곳까지 비틀비틀 걸어갔다.



어느덧 청년은 지하철이 오는 곳 앞에 서 있게 되었다. 그의 옆에는 온갖 귀금속으로 치장한 중년의 여자가 눈처럼 희고 살이 적당히 올라서 꽤나 귀엽게 생긴 고양이를 안고 서 있었다. 이런 희미한 지하철 역 안의 불빛에도 보석들은 휘황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자신이 저 여자의 위치였다면, 지금 그는 이 심정으로 이곳에 서 있었을까? 아마 아닐 것이다.



청년이 언뜻 뒤를 돌아보니, 팔꿈치가 다 낡아 해진 회색 재킷과 자색 체크무늬 면바지의 ‘부조화’를 걸쳐 입은 한 중년의 신사가 천천한 속도로 다가오고 있다. 그 모습이 하도 우스꽝스러워서 청년은 고개를 돌린 채로 가볍게 조소하는데, 마침 신사가 그 앞을 지나며 그 비열히 웃는 낯에다가 퉤 하고 침을 뱉는다.



‘아.’



차가운 타액의 감촉이 느껴지기가 무섭게 청년은 말문이 막힌 입을 오물거리며 그 쓸쓸한 민망함을 얼버무린다. 어찌 할 도리가 없다. 쫓아가기엔, 현재 청년의 모양이 옳지 못하다.



청년의 모양? 청년의 모양이라니?



그에겐 현재 청년의 모양이 없다. 모든 것에 좌절하기를 좋아하여 이미 그 푸릇했던 열기가 우울하게 식어버렸다. 말하자면 길다. 단지 요약적인 사실은, 좌절하기를 선호하는 이 청년의 삶은 현재 철저히 피폐해 있다는 사실이다. 청년의 인생을 세심히 관찰하고 있노라면 그에게선 도무지 인간의 양면성이란 것을 찾아볼 수가 없을 정도로, 일방적으로 좌절하는 판단 하에 삶을 살아왔다. 그 반대적인 양상은 그의 삶에서 찾아볼 수가 없다. 없을 것이다.



청년은 얼굴에 묻은 끈적이는 침을 팔소매로 닦아낸다. 꽤나 울상이다. 이미 그가 왜 지하철역에 오려 했었는지조차 잊어버린 것 같고, 지금은 집에만 돌아가고 싶을 뿐이다. 하지만, 그는 집으로 돌아갈 수가 없다. 아니, 가지 않는다. 그가 이 오밤중에 밖으로 뛰쳐나온 이유이기도 하다.



"지금 신평, 신평행 열차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손님 여러분께서는 한 걸음 물러서 주시기 바랍니다."



무미건조한 여자 목소리. 저 목소리를 낸 인물은 누구일까? 분명히 얼굴은 반반하지만 가슴에 온정이라고는 존재하지 않는 그런 여자일 것이다. 언제나 일만 하는 여자. 혹은 남을 의식해 자신의 치장에 모든 돈을 쏟아 붓는 사람. 그래, 그런 여자임에 틀림없다. 아아, 청년이 아주 싫어하는 부류의 인간이 아니던가.



기회를 잘 노리자. 지금 뛰어들면 안 된다. 지금 뛰어들면 생각이 바뀌면 죽을 수가 없다. 그런 상황은 원치 않는다. 생각이 바뀔 겨를이 없도록, 한 번 만에 뛰어들자. 제대로 뛰어들자. 하나, 둘, 세…



"키야옹!"



뛰어들려던 청년은 돌연 들린 고양이의 울음소리에 다리에 힘을 바짝 주고는 잠시 사태를 관망하기로 했다. 그래, 지금 죽지 않아도, 다음 지하철이 있으니까.



"나비!"



저 여자의 목소리인가. 저 뚱뚱한 몸에서는 저런 목소리밖에 나올 수가 없겠지. 참으로 그의 청각을 이상하게 마비시키는 목소리였다. 그리고 이름이 나비라니. 어느 시절 이름이냐.



사람들이 웅성거린다. 아마 그가 뛰어들려고 하는 찰나, 고양이가 선수를 쳐서 지하철로 뛰어내린 모양이다. 미친 고양이인가. 인간이 미쳐가니 이제는 그들이 기르는 애완동물마저도 미쳤단 말인가, 하고 생각해 보았다. 그래, 그럴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어쩌면 저 고양이도 자신과 같은 신세일지도 모른다.



저 고양이도 청년처럼 세상에 권태를 느끼고, 매일 먹는 똑같은 밥, 매일 자는 똑같은 침대, 매일 하는 똑같은 행동에 지루함을 느끼고 그 지루함을 탈피하고자 뛰어내린 것일 수도 있다. 저 고양이가 과연 불빛으로 뛰어들면 자기의 몸이 제대로 토막 나면서 처참한 죽음을 맞이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까? 글쎄, 알고 있었을 것 같지는 않다. 이미 고양이가 아니니까 말이다.



갑작스러운 고양이(나비라는 촌스러운 이름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짐작되는)의 투신자살에도 불구하고 지하철은 멈추지 않았다. 아니, 멈추고 있었던가. 그래, 지하철은 멈추고 있던 중이었다. 고양이가 죽었다고 해서 변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다만 평소와는 다르게 지하철 앞부분이 빨갛게 칠해져 있을 뿐이다. 아주 실력이 없는 페인트칠 하는 자, 자연에 의해 칠해진 빨간 액체. 피. 고양이는 어디로 사라졌는지 찾아보기도 힘들다.



붉은 색이 자신의 눈을 뒤덮으니 이상한 생각이 든다. 만약 청년이 저기에 뛰어들었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최소한 이것보다는 훨씬 많은 양의 붉은 액체를 쏟아낼 것이다. 지금 이 상황에서 뿜어져 나온 액체만 해도 상당한데, 그가 쏟아낼 피는 얼마나 될 것인가? 그렇다면 이곳을 치우는 사람들도 있을 텐데, 그 사람들은 얼마나 고생할 것인가?



쓸데없는 걱정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그는 죽어서까지 피나 튀겼다고 욕 듣는 것은 원치 않았다. 그런 이유로 욕을 들으면 얼마나 기분이 더러워질까. 아마 상상할 수도 없이 더러운 기분이 될 것이다. 그는 그런 기분을 느끼기 싫었다. 적어도 이곳에서 죽는 것은 보기 좋은 죽음도 안 될 것이고, 자신의 기분도 찝찝해질 것이다. 고양이가 뛰어내리지 않았다면야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겠지만, 지금 이렇게 된 이상 이 곳에서 죽고 싶지 않았다.



청년은 조용히 지하철역에서 벗어났다. 아무도 그를 쳐다보지 않는다.



그는 집과 정반대의 방향으로 길을 걷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한 미술점 유리벽 앞에 섰다. 벽 너머에는 청년이 그토록 동경하던 어느 화가의 그림이 걸려 있다. 청년은 속으로 중얼거린다.



‘실레…….’



아무래도 그 화가 혹은 그 그림의 이름인 듯싶다. 아마빛 캔버스 위에 붉은 천 옷을 입은 짧은 머리의 초췌한 남자가 풀리기 직전의 눈을 애써 치켜뜨고 있다. 이 그림은 왠지 청년에게 모멸감을 준다. 그 이유는 알 수가 없다. 



청년은 유리벽 앞에 고개를 푹 숙이고 서서, 안 그래도 어두운 표정에서 좀 더 좌절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그리고는 살며시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보이더니, 갑자기 유리벽에다 가차 없이 이마를 들이받고 여린 두 주먹을 번갈아 내지른다.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듯, 그 엽기적인 행동의 반복이 쉴 틈이 없다. 외부로부터 내부를 보호할 책임이 있는 유리벽은 그리 쉽게 깨어지지 않는다.



이윽고 제풀에 못 이겨서 벽에 등을 기대고 나약히 스르르 쓰러진다. 물감 같은 선혈이 유리벽에 낭자하고, 주먹은 금세 피로 딱지가 지고 퉁퉁 부어버려서 마치 붉은색 글러브 같다. 이마에서 흐른 피가 그 무딘 턱에 이르러서 방울져 뚝뚝 떨어진다. 그것이 오늘 밤 그의 최후였다.



이른 새벽, 동이 튼다.



청년은 어제 밤의 그 광기에서 눈을 떠 보인다. 가만히 유리벽에 기대어 앉아, 자기도 모르게 숨을 죽이고 새벽의 고요에 귀를 기울인다. 고요 속에 동이 터오는 소리를 들을 수가 있다. 그 소리는 그에게 실로 오묘하게 느껴진다. 시각에서 청각으로 전이되는 이 새삼스러운 경이를, 청년은 혼자만 지켜보고 있을 수가 없다. 하지만, 묘연히도 이 거리엔 단지 그 밖에, 아무도 없다. 또다시 몇 번이고 이 냉랭한 거리를 둘러보지만, 새벽의 싸늘함과 함께 그 홀로 남았을 뿐이다.



청년은 조용히 눈을 감고 완전한 아침이 되길 기다린다. 누군가 자신을 깨워주는 이가 있겠지 하는 기대감에 부풀어서. 혹여 급박하게 살아오느라 보살핌이 부족했던 어린 삶, 모성의 결핍에서 연하는 행동일 런지도 모른다. 너무 어설픈 추측일까.



아침이 되어도 거리의 잠잠함은 변함이 없다.



청년은 처연히 쌀쌀한 아침 바람을 마시며 허기를 채운다. ‘너무’ 산뜻하다. 수많은 어떤 이들의 숨통을 거친 이산화탄소의 찝찝함─이것은 그에게 어머니의 모성처럼 뜨거운 것으로 다가오는 소중한 것─을 느낄 수가 없어서 청년은 못내 아쉽다. 그러고 보니 아침이 되었는데도 거리는 무척이나 조용하다. 생명의 기척을 일체 느낄 수 없는 정체된 고요함이 계속된다.



그렇게 십여 분이 흘렀을까, 청년은 미술점과 그 맞은편 청과상을 배회하다 가로변 중앙에 위치한 석상 분수대에 머릴 콱 박고 돌연 죽어버리는 것이다.



#



그 사람을 그렇게 만든 건 언니야, 라고 친구에게서 그렇게 들었다.



그래, 그 사람을 그렇게 만든 건 나지. 그 사람을 비겁하게 만들었던 게 나라는 건 나는 쭉, 알고 있었어.
...그래서 나는, 그 사람 인생의 오점. 내가 죽는 편이 그 사람 인생에 훨씬 도움이 되었을 텐데.


알고 있어. 응, 알고 있어. 2000년 그 날에 죽었더라면 최소한 그 사람은 좀 더 평온한 인생을 살았을 텐데.


응. 그랬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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