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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묘한 이야기-Repetition (3)에서 이어집니다.



매점에서 산 빵 봉지를 손에 들고 문예부실 문을 살그머니 열었다. 그러자 창 쪽으로 등을 돌리고 노트북을 마주한 채 앉아 있는 시현 선배가 보였다. 안녕하세요, 라고 말을 걸려던 순간 목소리가 목구멍에 걸려 버렸다. 왜냐하면 시현 선배의 얼굴이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본 적 없을 정도로 험악했기 때문에.


노트북 화면을 노려보며 한숨을 쉬는 모습은 학술회가 시작하기 전에도 여러 번 보았다. 신작이 슬럼프에 빠져 잘 되지 않는 것이려니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보다도 훨씬 귀기 어린 무시무시한 얼굴로 화면을 노려보고 있다. 내가 문가에 서 있는 것도 전혀 깨닫지 못한다.


눈에는 고통스러운 빛이 떠올라 있고 이를 악물었으며 키보드 위에 얹힌 손가락은 꼼짝도 하지 않은 채 그저 화면만 뚫어져라 보고 있다.



#



나는 모든 사랑은 기본적으로 짝사랑이라고 믿고 있다.




누군가를 좋아하면서 품게 되는 연모의 감정. 그리움과 고독. 소유욕과 허무함. 
과일이 썩으면서 나는 달콤하고도 신 냄새와 거기에 꼬이는 벌레들처럼, 사랑은 언제나 자질구레한 잡다한 감정의 소모를 동반한다.
전해지지 않는, 전해지지 못할 무수히 많은 깊은 감정들.

누군가에게 사랑받을 때도 늘 외로운 까닭은 모든 사랑의 방향이 일방통행이기 때문이다.
내가 좋아하는 이에게서 사랑받는다고 느낄 때의 행복감은 로또에 당첨된 것보다도 기쁘고, 두카티나 BMW 스포츠카를 타고 달릴 때보다도 설레이지만 그건 정말 기적과도 같은 일순간의 대단한 착각일 뿐이다.

상대방이 내 전화를 받지 않거나 문자에 답 하지 않으면 괜시리 속상하다.
내 일방적인 감정의 화살이 빗나간 기분에, 나는 상대방에게 대답을 독촉하지 않고
내 마음 속에서 샘솟는 그 사람에 대한 그리움의 새싹을 뽑기 위해 노력한다.

눈을 감지 않아도 그릴 수 있는 상대의 얼굴선이며 목소리와 체취. 말랑한 살갗과 서늘한 눈매 따위를 혼자 그리워 하다가 만다.
그녀는 나의 것이 아니다. 아무리 그녀가 나를 사랑한다 말하고 내가 아무리 그 사람과의 미래를 품고 꿈꾼다고 해도-
이 모든 감정과 사랑이라 이름 붙인 지금의 목소리가 짝사랑일 뿐임을,
그저 일방적인 한 쪽의 날개일 뿐임을 알고 있다.

한 쪽짜리 날개로는 날아오를 수 없듯,
충족되지 않는 공허한 사랑의 감정으로는- 심장은 부풀어오르다 꺼지기 마련이다.
기다림이 만남보다 더 길 것을 알면서도 시작했지만,
그렇기 때문에 빨리 접는 것이 두 사람에게 다 이로울 것이라는 것 또한 알고 있다.

내 특기는 짝사랑의 감정에 빠져 허우적 대기가 아닌, 좋아하는 사람에게 예쁨 받으며 기뻐하는 것이라고 늘 생각했었는데 요즘은 포기하고 있다.


하지만, 애정은 살의나 증오로 쉽게 바뀔 수 있다. 사랑했기 때문에 더더욱 용서할 수 없는 것이다. 너무나 깊이 사랑했고, 소중히 여겼기 때문에 더욱 상대를 믿었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에게 비밀이 있다는 걸 알았을 때… 자기가 생각하던 그런 사람이 아니었을 때…

왜 그걸 자신에게 숨겼는지 경악했을 때… 조각난 시체를 주워 모으듯 슬픔이나 아픔, 고통이나 절망, 그 감정들을 접붙여, 인간의 마음속에서 괴물이 태어난다.



#



그 얼굴에 점점 분노가 차오른다. 이윽고 노트북 옆에 놓아두었던 리포트 용지에 붉은 펜으로 무언가를 적기 시작했다. 눈에 칙칙한 빛을 띤 채 펜 끝을 뭉개 버릴 기세로 한참 선을 긋거나 글자를 적더니, 입술을 깨물고 작게 신음 소리를 낸 뒤 펜으로 책상을 두드리며 리포트 용지를 구겨 버렸다.


"……!"


심장이 아플 정도로 덜컹 내려앉았다. 시현 선배는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리포트 용지를 짝짝 찢는다.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눈빛으로 거기에 쓰여 있는 문자를 증오하듯 거친 숨을 내쉰다. 책상 위며 바닥에 종잇조각들이 마구 날렸다. 시현 선배는 완전히 지친 얼굴로 그 잔해를 내려다본다.


그러나 한숨을 쉬더니 여기저기 흩어진 종잇조각들을 쓸어 모으기 시작했다. 바닥과 책상을 깨끗하게 정리하고, 모은 종잇조각들을 허망한 얼굴로 쓰레기통에 버린다. 쓰레기통을 집어 들고 입을 굳게 다문 채 딱딱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 올렸을 때서야 겨우 내 존재를 깨달았다.


"…나래니?"


나는 몸을 움츠렸다.


"저, 저기요. 갑자기 선배랑 같이 점심을 먹고 싶어져서…."


허둥지둥 말했다.


"제, 제가 방해…됐나요?"


선배는 난처한 얼굴을 구기다 애매하게 미소 지었다.


"아니, 어차피 글도 안 써지던 참이었으니까."


"들, 들어갈게요."


내가 파이프의자에 앉아 시현 선배도 내 정면 의자에 와서 앉았다.


"선배, 점심 드셨어요?"


"응…. 먹었어. 미안."


진짜 먹었을까, 안 먹은 것 같은데.


"그럼 이거 식후 디저트로 드세요."


크림빵을 내밀자,


"고마워, 잘 먹을게."


하고 받아들었다. 나도 카레빵 봉지를 뜯어 우물우물 먹기 시작했다. 분위기는 여전히 무겁다. 온통 책밖에 없는 문예부실 안에 정적이 흐른다. 노트북 화면은 켜진 채다.


"…선배, 지금 어떤 소설을 쓰고 있나요?"


크림빵을 뜯어 입에 넣으면서 시현 선배가 조용히 대답한다.


"괴로운 과거를 가진 청년과 명랑한 소녀가 만나는 이야기야. 두 사람은 사랑에 빠지지. …청년은 소녀의 명랑함에 치유 받게 돼."


"와아, 로맨틱해요."


선배의 눈동자에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하지만, 소녀는 비밀을 품고 있었어. 청년은 그것을 배신이라고 받아들이지. 그래서 증오에 사로잡힌 청년은 사랑하는 사람을 죽여 버려."


말이 나오지 않았다. 소설 이야기 맞지? 하지만, 시현 선배의 표정과 눈빛이 너무나 선명해서… 몹시 감정이 이입되어 있어서…. 마치 선배 자신이 그 청년처럼 보인다. 화면을 노려보며 리포트 용지를 찢던 때의 처절한 분노가 눈동자 뒤쪽에 뚜렷하게 각인되어 있다.


사랑은 증오로 변한다는 건, 본인의 경험담이었나?

어느 날 갑자기 괴물이 태어난다는 것, 사람이 괴물이 된다는 것도─.


등골이 오싹했다. 그건 마치 시현 선배가 수연 선배에게 살의를 품고 있는 것같잖아! 대체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서둘러 머릿속에서 이상한 생각을 떨어낸다. 내가 겁먹은 것을 눈치 챘는지 선배가 금세 엷은 미소를 지었다.


"…소설 이야기야."


"그, 그렇겠죠, 아하하."


나도 웃는다. 슬슬 강의 시간이 되었다고 시현 선배가 말해서, 우리는 문예부실을 나와 함께 걷다가 복도 중간에서 헤어졌다.


"그럼 마치고 보자, 나래야."


"네. 아, 선배! 다음에 같이 식당에서 밥이나 먹어요!"


선배가 부드럽게 웃었다. 하지만, 선배의 모습이 사라진 순간 가슴속에 다시 답답한 먹구름이 낀다. 나, 아무래도 진짜 시현 선배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나봐…. 선배가 그렇게 원수라도 보는 눈으로 노트북을 쳐다보며 소설을 쓰고 있는 줄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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