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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극성은 붉은 빛을 발하고, 열두 성좌의 빛이 검을 들 자를 선택한다.
  절멸군세의 마왕은 노래하고, 천만파마의 검사는 검을 휘두른다.
  싸우고, 싸우고, 싸우고, 바라지 않는 전투를 하며 서로를 상처 입힌다.
  바뀌지 않는 운명은 잔혹하고, 싸우는 자들은 서로를 간절히 사랑한다.
  최초로부터. 최후까지. 절대로 바뀌지 않을 저주.

  
  Black And Gold
  


  “이름을 물어도 되겠나? 기사.”

  눈앞에 선 붉은 옷의 기사를 향해 질문을 던지는 녹색의 옷을 입은 마법사. 기사는 당황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법의 힘으로 언제나 봄인 왕궁의 후원에는 마법사와 자신을 제외하면 아무도 없다. 기사는 울상을 하고 다시 고개를 돌렸고, 마법사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기사에게 재차 물었다.

  “혹시 이름이 없나? 아, 혹시 다른 사람이 들으면 곤란한 이름인가?”

  “아, 아닙니다, 수석마법사님! 제, 제 이름은 그러니까 에브… 아니, 아니! 에보니 클로버링이라고 합니다! 왕국 불사조기사단 제 4군단, 아니, 4군단이 아니라……죄, 죄송합니다! 2군단 12백부장 입니다!”

  군단지휘관이 봤다면 군기가 빠져도 한참은 빠졌다고 탄식할 정도로 엉망진창인 자기소개를 마친 기사는 속으로 수도 없이 자신을 욕했다. 왕국의 기둥이신 수석마법사님 앞에서 무슨 한심한 꼴이람. 미간을 조금 찌푸리고 기사의 정신없는 자기소개를 듣고 있던 마법사는 그녀를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러니까 정리해보면, 경의 이름은 에보니 클로버링이고, 왕국 불사조 기사단 2군단 12백부장이라는 거군?”

  “예! 수석마법사님! 명쾌하신 해답이십니다!”

  직립부동자세로 선 기사의 우렁찬 대답에 마법사는 조금 기뻐졌고, 곧 자기가 기뻐할 일이 아니란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자신이 왜 기사의 이름을 물었는지를 겨우 떠올렸다.

  “그런데 기사 클로버링 경. 이곳에는 무슨 일이신지?”
  
  왕궁의 후원은 보통 왕족이나 마법사들이 담소를 나누는 곳. 기사단 제복에 검까지 찬 (게다가 조금 소양이 의심스러운) 기사 같은 부류들은 그들의 장난기가 담긴 곤혹스러운 질문을 받는 것을 꺼려 웬만하면 돌아가는 곳이었다. 수석마법사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는 놀라움과 두근거림에 자신을 잠시 망각하고 있던 기사는 마법사의 질문에 정신을 차리고는 황급히 답했다.

  “예, 수석마법사님! 오늘부터 오렘 시어랜드 마법사님의 호위를 맡게 되었습니다만, 그분께서 이곳에 계실 거라는 말을 듣고.”

  기사는 말을 잠시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역시 다른 마법사의 모습은 없었다. 기사는 다시 마법사를 바라보며 말을 맺었다.

  “……왔지만 아무래도 다른 곳으로 가신듯 합니다!”

  “오렘 시어랜드라면 여기 있네만.”

  놀란 마법사의 목소리. 기사는 눈을 크게 뜨고 다시 한 번 주위를 둘러보았다. 붉은색의 백겹화나 우아하게 비행하는 노랑촛불나비가 오렘 시어랜드가 아니라면 아마도 기사의 눈이 잘못된 것은 아닐 것이다. 기사는 울상을 하고 외쳤다.

  “죄, 죄송하지만 마법사 오렘 시어랜드 경! 저는 투명마법이나 변신마법을 알아내는 재주는 없습니다!”

  “그런 마법을 사용하고 있지는 않네, 아니, 잠깐! 혹시 내가 아직 꼬리 두 개 달린 개의 모습을 하고 있나?”

  놀란 표정으로 서둘러 자신의 몸을 둘러보는 마법사. 기사는 갑자기 그런 행동을 하는 마법사의 모습에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에에엣!” 곧 뭔가를 깨달았다.

  “저, 저어! 죄송합니다만 수석마법사님의 성함을 여쭈어 봐도 되겠습니까!"

  “아, 그러고 보니 내 이름을 안 말했던가. 오렘 시어랜드 라고 하는데.”

  자신의 모습이 평소의 모습이란 것에 안도하며 대답하는 마법사. 기사는 그제야 묘하게 웃으며 명령을 내리던 군단장과의 모습과, 마법사가 복잡한 얼굴을 하고 후원으로 가라고 가르쳐 주던 이유를 알아챘다.

  “죄, 죄송합니다! 수석마법사님! 무례를 범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시뻘겋게 익은 얼굴을 하고 연거푸 고개를 숙이는 기사. 마법사는 그런 기사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곧 허리를 꺾으며 즐겁게 웃었다. 쥐구멍이든 개구멍이든 눈앞에 구멍이 생기기만 한다면 들어갈 결심을 하고 바닥을 바라보던 기사의 앞에 가느다란 손이 내밀어졌고, 기사는 내밀어진 손에 당황하여 고개를 들었다.

  “잘 부탁하네. 클로버링 경.”

  고개를 든 기사가 마주친 것은 부드럽게 웃는 마법사의 얼굴. 기사는 그런 마법사의 얼굴을 마주보며 수줍게 웃었다. 장갑을 벗고 마법사의 손을 잡은 기사는 조용히 마법사의 손에 입을 맞추었다.

  “목숨을 걸고 마법사님을 위험에서 지키겠습니다.”

  “나의 목숨을 경에게 모두 맡기겠네.”

  계절을 잊은 후원을 감도는 것은 따듯한 햇살과 꽃향기. 서로의 손을 맞잡은 남녀의 시선이 부드럽게 맞닿았다.



  북극성이 붉은 빛을 뿌리고, 왕궁이 흔적도 없이 불타 없어진지도 한 달이 지났다. 절망은 하늘을 덮어 구름이 되고, 공포는 사방에 흩날려 바람이 된다. 일상이 부서지는 것은 한 순간, 평화가 부서지는 것은 더욱 빨랐다. 마수가 대지를 밟고, 마군들이 노도처럼 밀려왔다. 강은 피가 흐르고, 우물은 시체가 썩어넘친다. 시간을 세는 단위는 절망이 되고, 날을 세는 단위가 지옥이 되었을 때.
  성좌의 봉우리를 기어오르는 여인이 있었다. 바위틈에 몸을 끼운 채 선 잠을 자며 계속 절벽을 오르는 여인. 엉망진창이 된 붉은 제복, 땀과 먼지로 더러워진 흑단 같은 머리칼. 적을 베는 것이 아니라 절벽을 기어오르기 위해 사용하는 검은 온통 이빨이 빠지고 깨진 채였다. 지독한 공복감으로 위장은 찢기는 듯이 아프고, 시야는 흐리다. 수분과 지방이 빠져버린 몸은 여체의 유려한 곡선을 완전히 없애버렸다. 고통을 참기위해 부서질 정도로 다문 어금니에서는 피가 말라붙은 자국, 말라붙은 피부는 금방이라도 갈라질 것만 같았다. 손톱이 빠져버린 손은 피조차 흐르지 않는다. 무언가에 이끌리듯 절벽을 기어오르는 여인은 더 이상 아무것도 느끼지 못 할 정도였다. 그저 팔을 움직여 조금 더 위를 잡고, 다리를 들어 바위틈을 밟는다. 절벽에 박아 넣은 칼에 몸을 힘겹게 지탱하고, 몸을 끌어올린다.
  하지만 수직의 한계까지 치솟아 오른 절벽을 기어오르는 여인의 모습은 안타깝긴 하여도, 결코 초라하지는 않았다. 한도 없이 솟아 오른 것 같은 절벽을 끝도 없이 타고 오른다. 그런 처절하리만치 단조롭고 힘든 짓을 여인은 일주일째 계속 하고 있었다.
  한계라고는 이미 잊어버렸다. 자신조차 잊어버렸다. 타의나 다름없이 수동적으로 움직이는 몸에서 영혼이 사라지지 않게 필사적으로 자신의 목적을 되뇌는 것만이 여인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랬다. 단지 하나의 목적. 절벽의 정상에 오른다는 한 가지 목적만이 여인을 지탱해주고 있었다. 그리고 서서히 해가 저물었다.
  일주일째의 태양이 사라지고, 여인의 손이 드디어 정상에 닿으려는 순간, 어두워진 시야는 그녀의 목적을 방해했다.  
      
  “……!”

  나오지 않는 비명. 허공을 헤매는 오른팔. 여인의 몸이 균형을 잃었다.


  
  “마왕전하. 왜 그러시나이까?”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어딘가를 바라보는 흑암의 마왕의 모습에, 그를 따르던 골드가 걸음을 멈추고 물었다. 멍한 눈동자로 한 점만을 응시하는 마왕에게서 대답은 없었고, 골드는 불안한 마음에 소매를 움켜잡으며 주위를 경계했다.

  “골드.”

  “에, 예! 마왕전하! 하명해 주십시오!”

  갑자기 들려온 마왕의 목소리에 골드는 기겁하며 대답했고, 마왕은 시선을 내려 그녀를 돌아보았다. 흩날리는 금발사이로 칠흑의 눈동자가 골드를 향한 채 움직이지 않는다. 대답은 들었지만 오히려 불안한 마음이 가중된 골드는 조용히 그를 불렀다.

  “마, 마왕전하?”

  “아니, 아무것도 아니도다. 나의 검사여.”

  생기가 돌아온 눈으로 대답한 마왕은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허겁지겁 그의 뒤를 따르는 골드. 눈앞에 펼쳐진 거대한 푸른 산맥으로 향하며 마왕은 다시 한 번 조용히 되뇌었다.  

  “그래. 아무것도 아니다.”



  “쌔애액…….”

  목소리조차 내보낼 수 없을 정도로 갈라진 목은 안도의 한숨 대신 힘겨운 바람 빠지는 소리만을 내보낸다. 절벽에 박아 넣은 검에 한손으로 매달린 여인은, 조용히 시선을 움직였다. 어둠이 내려 아무것도 알아볼 수 없다. 하지만 여인의 행동은 어차피 정해져 있었다. 손을 위로 뻗어 다시 절벽 끝을 잡는다. 그리고 여인의 가녀린 몸이 드디어 정상에 올랐다.

  “…….”

  울고 싶은데 눈물은 나오지 않고, 소리를 지르고 싶은데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기쁨을 표현할 길이 없는 여인은 그래서 대신 굉장히 기묘하게 보일정도의 춤을 추었다. 아무도 없는 황량한 봉우리에서 누더기 같은 옷을 벗어던지며 날뛰는 흑발의 여인. 하지만 단조로운 움직임에만 익숙해져 있던 여인의 몸은 그런 움직임에 난색을 표했고, 여인은 극심한 근육통과 함께 그 자리에 엎어졌다.

  [대단하군. 인간을 보는 것은 3번째지만 그렇게 괴이하게 기뻐하는 경우는 처음 봤다.]

  여인은 쓰러진 자세로 고개만 들어서 밤하늘을 아찔할 정도로 메운 별무리와 봉우리에 머무는 무수한 빛 무리, 그리고 온통 황금색으로 빛나는 그 한 가운데에 고고하게 앉아있는 한 마리의 사자를 바라보았다. 황금의 갈기와 별의 눈동자를 지닌 사자는 놀란 여인의 눈빛을 마주 대하다가 조용히 물었다.

  [여인이여. 이름이 무엇인가.]

  에보니 클로버링. 왕국의 기사.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입을 뻐끔거리며 말한다. 사자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여인에게 걸어왔다. 황금의 갈기가 빛 무리를 휘감아 끌어당기고 별의 빛이 사자가 걷는 앞을 따라 비추었다. 상처투성이에 몸의 기름기가 다 빠진 여인의 몸을 천천히 핥는 사자. 여인은 다시 목소리가 없는 질문을 던졌다.
  당신은 누구신가요.

  [검(劍)은 일곱 번째 성좌의 빛으로 만들어진 사자. 검은 선택하기위해 태어난 열쇠. 검은 용사에게 쥐어지는 것이 존재의의인 병기.]

  차가운 혀로 상처를 핥는 것을 멈추고 대답하는 금빛 사자. 여인은 안도한 눈으로 다시 한 번 물었다.
  저는 당신을 가질 수 있나요.
  빛 무리가 폭풍처럼 회전하기 시작했다. 고고한 사자의 갈기가 빛나고, 별을 담은 눈동자가 빛난다. 휘몰아쳐 오르는 빛 무리와 둘의 몸 위로 쏟아지는 별빛. 빛 폭풍의 눈과 별 소나기의 정점에 있는 것은 황금색으로 빛나는 사자의 성좌. 여인은 조심스럽게 팔을 내밀어 사자의 머리를 품에 껴안았다. 갈기는 날카롭고, 털은 차갑다. 여린 피부에 상처를 입으며, 여인은 사자를 껴안았다.
  제 것이 되어 주세요. 제가 하려는 일을 도와주세요.

  [물론이다. 에보니. 검은 너를 선택했고, 너는 검에게로 왔다. 검은 너의 것이 되어 네가 하는 일이 무엇이든 돕겠다. 네가 하려는 일은 무엇인가. 에보니.]

  제가 하려는 일은.
  여인은 말을 멈추었다. 잠시 누군가의 얼굴을 떠올리고 그의 웃는 소리를 되짚던 여인은 눈을 꼬옥 감았다. 눈을 감으면 선명하게 떠오르는 미소 띤 얼굴. 손을 쥐면 손가락 사이에 느껴지는 부드러운 머리칼의 감촉. 자상한 손길도, 조용한 목소리도 기억하고 있다. 가질 수 있는 시간이 영원할 수 있다면 모두 그에게 주고 싶을 정도로 그를 사랑했다. 마실 수 있는 공기가 그와 같은 것이라는 게 감사할 정도로 행복했다.
  눈물조차 말라버린 눈에서 붉은 눈물이 흐른다. 여인은 피눈물을 흘리며 사자의 물음에 대답했다.
  제가 하려는 일은 사랑하는 사람을 죽이는 일이에요.

  [그래. 검도 알고 있다. 에보니. 그것이 용사의 운명. 녹음의 마왕을 사랑한 붉은 용사의 최초이자 최후의 저주. 검은 너를 돕겠다.]

  봉우리에서부터 밤하늘로 치솟아 오르는 빛기둥. 사자의 성좌가 무엇보다도 밝게 빛나고, 마치 촛불이 켜지듯 별들이 하나씩 밝은 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회오리치며 올라가 수직의 기둥을 만드는 빛살. 사좌의 성좌 주위로부터 차례차례 밤을 밝혀가는 별빛들. 말할 수 없이 밝지만, 눈부시지는 않은 그 따뜻한 빛의 안에서 여인은 자신의 검을 껴안았고 검은 그녀에게 안겼다.

  [일곱 번째 성좌의 검인 사자검 레오는 에보니 클로버링을 검만의 용사로 선택한다.]


  
  불타버린 왕궁위에 세워진 새로운 성은 흑암의 마왕이 지은 것이었다. 보는 것만으로 혐오스러운 암흑의 성은 수십만의 마군이 빽빽하게 둘러싼 채 지키고 있었지만, 정작 성의 주인은 푸른 산맥으로 용을 찾으러 나간상태. 홀로 성에 남은 채 입을 쩍쩍 벌리며 하품을 하고 있던 화이트는 그자세로 굳어 눈을 홉뜬 채 밖을 바라보다가, 곧 테라스로 뛰쳐나갔다.

  “마, 맙소사.”

  태양을 따라잡을 수 없는 달빛을 도와 밤을 대낮처럼 밝히고 있는 별빛들. 그리고 그 어떤 빛들보다도 환하게 빛나며 치솟아 오르는 빛기둥. 화이트가 움켜잡은 테라스가 부서져나갔다. 경악에 빠져 거대한 입을 딱 벌리고 있던, 그는 부서진 테라스의 파편이 손안으로 파고드는 감각에 정신을 차렸다. 그는 대낮같은 하늘에서 힘겹게 눈을 떼고 반대편 테라스로 거칠게 뛰어갔다. 곧이어 마왕이 있는 푸른 산맥까지 화이트의 포효가 메아리쳤다.
  
  캬오오오오오오……
  캬오오오오오오……

  “화이트는 곰이면서 언제나 저렇게 우네요."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흑암성 쪽을 바라보던 골드는 곧 포효의 의미를 알아내고 흠칫 놀라며 마왕을 바라보았다. 아직 아침까지는 많은 시간이 남았음에도 서서히 밝아지는 동쪽 하늘을 바라보던 마왕은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올렸다. 그렇게 하면 치솟아 오른 빛 무리에 손이 닿을 것 같다. 그렇게 하면 그곳에 있는 여인과 손이 닿을 것 같다. 자신이 서있는 곳이 가파른 절벽의 끝자락이라는 것조차 잊고, 앞으로 걸음을 내딛으며 마왕의 입이 자신도 모르게 벌어졌다.

  “에보니…….”

  “마왕전하!”

  허리를 잡아당기는 힘에 정신을 차리는 마왕. 부서진 돌 부스러기가 절벽아래의 광막한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뒤를 돌아보자 긴 금발의 여인이 십년감수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마왕은 멍하니 그 얼굴을 바라보며 물었다.

  “골드. 나는 누구지?”

  “예? 에……그, 그러니까. 제 주인님이시고, 절멸군세의 지배자이시고, 공포와 증오와 절망의 군주시고, 세상 모든 어둠을 휘감으신 흑암의 마왕님이십니다.”

  “하나도 맘에 안 드는군.”

  주저주저하며 대답하다가 마왕의 반응에 놀라는 골드. 마왕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밝아진 하늘은 별을 밝히며 그의 머리 위를 지나치고 있었다.

  “나는 오렘 시어랜드. 한 기사만을 위한 마법사이자, 한 여자만을 위한 남자면 되었다. 공포와 절망을 통솔하는 절멸군세나 세상을 남김없이 불태울 수 있는 무한한 마력 따위는 바라지 않았다. 그런데 어이하여…어이하여. 어이하여! 어-이-하-여-!”

  하늘을 바라보며 비탄에 찬 외침을 내뱉는 마왕. 골드는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고, 한동안 밝은 하늘을 노려보고 있던 천천히 입을 열었다.

  라아라히라라힐라이라
  하이라히히라일라라라
  리히일라라라하이라이

  한없이 슬프고, 한없이 슬픈, 구슬픈 노랫소리. 골드는 그제야 마왕이 울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챘고, 자신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복받치는 감정에 져버린 골드는 그것이 주인에 대한 무례란 것조차 잊고 그 자리에 주저앉은 채 눈물을 흘렸다. 땅을 움켜쥐고 오열하는 마왕의 검사. 심장조차 가지고 있지 않은 금발의 여인을 울린 노랫소리는 바람소리를 타고 울려 퍼졌다.
  흑암성을 지키던 거대한 백곰의 수인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통곡하고, 수억의 마군은 멍하니 푸른 산맥을 우러러보았다. 목소리를 가진 마수는 모두 울부짖고, 울음소리를 가진 마수는 모두 구슬프게 운다. 끝도 없는 밤하늘을 한없이 밝혀가는 별빛.
  그 아래, 울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오렘님.”
  
  주저하며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든 오렘은 자신이 그를 불렀다는 것에 놀라고 있는 에보니를 발견하고 헛웃음을 웃었다.

  “무슨 일인가, 에보니?”

  “엣, 그게 그러니까…최, 최근 오렘님이 너무 격무에 시달리시는 듯 보여, 그만…….”

  기어들어가는 목소리의 에보니. 오렘은 안경을 벗어 책상위에 올려두고는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잡았다. 투박한 장갑위로 마법사의 하얀 손이 겹쳐진다, 조심스럽게 고개를 든 에보니는 오렘의 부드러운 눈동자와 마주쳤다.

  “걱정해줘서 고맙네. 에보니.”

  “그야, 저는 오렘님의 수호기사고…….”

  부끄러운 듯이 고개를 숙이는 에보니. 오렘은 고개를 갸우뚱해보였고, 에보니는 빨갛게 익은 고개를 더욱 깊숙이 숙이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오, 오렘님과 사, 사, 사, 사……랑 하는 사이니까요.”

  스스로가 한말에 격침당해 어쩔 줄 몰라 하는 에보니. 멍하니 그녀의 말을 기다리던 오렘의 얼굴도 순식간에 붉게 달아올랐다. 어색한 연인들 사이로 굉장한 침묵이 흐른다. 에보니는 아주 조심스럽게 장갑을 벗고 수줍게 오렘의 손을 잡았다. 따듯한 감촉에 움찔하며 고개를 든 오렘은 에보니의 수줍은 얼굴과 마주쳤다.

  “음. 아, 그, 그러니까…나도, 그. 그대를, 그. 사…….”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지도 이미 한 달여. 하지만 일평생 책과 살아온 마법사와, 여자이기 전에 군인으로 살아온 기사는 사랑의 밀어를 나누기에도 아직 서툴렀다. 더듬거리는 오렘, 에보니는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한 채, 그의 말을 기다렸다. 손에 겹쳐진 손에 힘을 준다. 여자의 손 같지 않게, 거칠고 단단한 에보니의 손. 가늘고 새하얀 자신의 손을 상처에서 지켜주리라 맹세한 기사의 손. 오렘은 그 손을 양손을 감싸 쥐며 조용히 말했다.
  
  “그대를 사랑……하고 있다. 에보니.”

  부끄러운 표정으로 황급히 서로의 시선을 피하는 남녀. 각각 책상 위와 바닥을 바라보며 어쩔 줄 몰라 하는 기사와 마법사. 아까보다도 농밀한 달콤함이 가득 찬 침묵이 둘 사이를 메운다. 오렘은 맞잡은 손에 살짝 힘을 주었고, 에보니는 조심스럽게 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오렘은 그런 에보니를 곁눈질하다가 부끄러운 듯 한 미소를 지었고, 에보니도 그의 웃음에 수줍은 미소로 화답했다.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서로를 보며 미소 짓는 남녀. 그들이 있는 곳은 비록 곰팡내 나는 서고의 한 귀퉁이지만, 그들에게는 계절을 잊은 왕궁의 화원보다도 아름다운 곳이었다.



  용사가 사자검을 얻고, 마왕이 푸른 산맥에서 잠자던 푸른 뇌룡제(雷龍帝)를 자신의 수하로 삼은 지 일주일째. 마왕의 군단장 중 하나이자, 나이를 잊어버린 마법사 실버는 삼일 만에 흑암의 성으로 돌아왔다. 입에선 불을 뿜어내며 먹구름 위를 달리는 악몽의 기승마가 검은 성의 상공을 두 바퀴 정도 회전한 다음에 내려앉았다. 이글대는 그림자의 갈기를 쓰다듬어주고 악몽에게서 내린 실버는 다급하게 자신에게 달려오다가 넘어져버리는 금발의 여인을 보고 턱뼈를 달그락 거렸다. 혀를 차면 좋겠지만, 실버의 혀는 이미 완전히 썩어문드러져 사라지고 없었으니까.

  “다, 다녀오셨어요! 실버님!”

  자리에서 일어나자 황급히 고개를 숙이는 금발의 여인. 실버는 그녀에게 가볍게 목례하고는 텅 빈 눈구멍을 향한 채 말했다.

  [마왕전하의 옥체에 별다른 문제는 없는가.]

  “예. 몸에는 별다른 문제가 없으시지만, 그 뭐랄까…….”

  [또 넋이 나가셨군.]

  무섭도록 음산한 목소리라 잘 알아챌 수는 없지만, 실버의 목소리는 분명 걱정을 담고 있었다. 여인은 울상이 되어 고개를 끄덕였고, 실버는 다시 한 번 턱뼈를 달그락 거렸다. 악몽의 안장에 매달아 두었던 붉은 두루마기를 꺼내며 실버는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이 노부가 가져온 소식이 오히려 악영향을 끼치는 게 아닐까 모르겠네.]

  “그, 그 정도로 안 좋은 소식이신가요?”

  기겁을 하는 여인에게 무겁게 고개를 끄덕여 보인 실버는 안절부절 못하는 여인의 어깨를 백골의 손으로 짚으며 말했다.

  [그렇다 하여 함구할 수는 없는 일. 친위군단장 골드. 마왕전하께 안내해 주게.]

  “예에…….”

  어깨를 축 늘어트리고 걷는 금발의 여인. 실버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고 기억 속에서 야단맞으러 가는 학생의 모습을 떠올리고 피식 웃었다. 물론 그의 뼈만 남은 구강구조로는 어금니를 부딪치는 것이 표정의 한계였지만.
  흑암의 성은 성이라기보다는 거대한 조형물에 가깝다. 단지 존재하는 것만으로 모든 사람들의 희망을 짓밟아 부수는 절망의 상징. 그곳에 마왕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흑암의 성은 공포의 대상이었다. 어차피 공성전이라는 것을 할 필요가 없기에, 그 외부만큼이나 내부 또한 굉장히 단조로운 흑암성은 온통 검은색의 벽돌과, 수많은 창살들로 이루어져있었다. 그 벽돌이 실은 피와 재로 물든 황궁의 벽돌이고, 그 창살들이 살해당한 인간들의 뼈라는 것은 모든 인간에게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리고 마왕의 옥좌가 있는 곳은 불타버린 아름드리나무가 서있는 새까맣게 불타버린 정원이었다. 원래, 계절을 잊은 왕궁의 후원이 있던 곳에.
  
  [마왕전하. 소신 실버. 지금 돌아왔나이다.]

  마왕의 옥좌에서 몇 발자국 앞. 실버는 그곳에 무릎을 꿇고, 자신의 군주에게 고개를 숙였다. 마왕의 옆에 앉아, 그의 머리칼을 쓰다듬던 푸른 옷의 미녀는 그런 실버를 보고 비웃음 같은 웃음을 흘렸다. 멍하니 옥좌에 앉은 채 미녀의 손에 머리칼을 내맡기고 있던 마왕은 조금 늦게야 실버의 존재를 알아챘다.

  “아, 실버. 언제 오셨소?”

  [방금 도착했나이다. 마왕전하.]

  몸을 일으키고 조용히 마왕 곁의 여인에게 얼굴을 향하는 실버. 푸른 옷의 여인은 사파이어같은 눈동자로 그를 마주보았다. 뿌리 깊은 고고함과, 압도적인 존재감이 내비치는 자신만만한 눈빛. 자신의 텅 빈 눈구멍 안쪽을 더듬는 듯 한 그녀의 눈빛에 실버는 어금니를 탁하고 부딪쳤다. 물론 비웃는 표정이란 걸 알아챌 리는 없겠지만. 실버의 분위기를 읽은 탓인지 여인의 눈동자는 조금 더 날카로워 졌다.

  “내가 아니라, 블루에게 할 말이 있으시오?”

  조용한 마왕의 목소리에 푸른 옷의 여인은 마왕을 돌아보았다. 실버는 조금 고개를 숙이며 정중한 어조로 마왕의 물음에 답했다.

  [송구스럽사옵니다. 마왕전하. 이 노부가 주책없게도 푸른 뇌룡제의 출중한 미모에 넋을 잃었나이다.]

  “하, 늙어빠진 뼈다귀 주제에 보는 눈은 있군 그래.”

  건방진 어조지만 왠지 모르게 뿌듯해 하는 듯한 블루의 목소리. 실버는 속으로 피식 웃고는 고개를 들어 마왕을 바라보았다. 눈앞의 누구도 바라보지 않는 멍한 눈동자. 실버는 자신이 말에 그의 눈에 생기를 돌아오게 할 것을 믿으며, 조용히 말했다.

  [마왕전하. 용사가 열사의 지평선을 손에 넣었나이다.]

  실버의 생각대로였다. 마왕의 검은 눈동자에 엄청난 속도로 생기가 돌아왔다. 순식간에 그의 눈동자를 스쳐나가는 수많은 감정들은 옆에 앉은 블루조차도 다 읽어내기 힘들 정도. 마왕은 옥좌의 팔걸이를 꽉 움켜쥐고 실버에게 물었다.

  “그런가. 에보니가……아니, 용사가 황금의 갑옷을 손에 넣었는가.”

  [예. 마왕전하. 하나의 검과 두 개의 장신구, 이제는 갑옷까지 손에 넣었습니다.]

  “이제 피할 수도, 막을 수도 없다는 것인가.”

  “흥, 피할게 뭐있어? 당신이 원하기만 한다면 내가 당장이라도 가서.”

  고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블루의 손을 거칠게 끌어내리는 마왕. 놀라서 고개를 돌린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새까만 밤이 불타오른다면 저러할까, 깊은 바다의 흑진주가 끓어오른다면 저러할까. 새까만 눈동자를 끔찍할 정도로 번득이며 마왕은 끊어내듯 중얼거렸다.

  “앉아라. 블루. 나는. 가라고. 명령하지. 않았도다.”

  압도당했다. 블루는 그가 명령했다기보다는 완전히 힘이 빠져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압도당했다고? 최강의 뇌룡제, 푸른 산맥의 군주인 내가? 블루는 분노했지만, 그 이상으로 공포가 컸다. 마왕은 굴욕감과 두려움으로 파리하게 질린 블루에게서 이글거리는 시선을 거두고 실버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지금은 어떻게 되었소?”

  자신을 향한 물음에 실버는 겨우 정신을 차렸다. 생명을 버린 군주 No Life King - 언제나 공포의 주체인 리치로서의 삶을 택한 자신에게까지 두려움을 안겨준 자에게 황급히 고개를 숙이며, 실버는 질문에 대답했다.

  [현재는 어째서인지 위대한 숲으로 향하고 있나이다.]

  “불사조 기사단.”

  실버는 놀라 고개를 들었고, 마왕은 이마에 양손을 대고 앞머리를 거칠게 헝클어트리며 중얼거렸다.

  “그들이 거기에 있다. 왕국의 유일한 패잔병들이. 시체가 되지 않은 유일한 왕국의 기사들이. 용사는 그들을 이끌고 나에게 대항할 생각인가.”  

  마왕은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갑작스러운 동작은 딴청을 피우는 시늉을 하며 마왕과 실버를 관찰하던 골드를 놀라게 할 정도였다. 마왕은 그런 그녀에게 성큼성큼 다가갔고 놀란 골드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고 몸을 움츠렸다.

  “따라오너라! 나의 검사여! 너에게 마흔 마리의 마수와 사천의 마군을 주겠다!”

  날카로운 마왕의 목소리. 골드는 거의 반사적으로 몸을 펴며 눈을 떴다. 어느새 그녀를 지나쳐 테라스로 나아가는 마왕. 골드는 황급히 그의 뒤를 따라 걸었고, 테라스에 나선 마왕은 입을 열어 스타카토의 짧은 음을 발했다. 그의 목소리에 따라 일어서는 4천의 정렬된 마군과 시꺼멓게 죽은 땅에서 기어 나오는 마흔 마리의 마수들. 마왕은 고개를 돌렸고, 그의 시선을 받은 골드는 자신도 모르게 변명 같은 목소리를 꺼냈다.

  “하, 하지만 마왕전하. 저는 마왕전하의 친위군단장으로서 마왕전하의 안위가 제일…….”

  “아둔한 검사야! 용사를 제외하면 누가 내 목숨을 탐할 수 있단 말이냐!”

  흑암성을 울릴 정도로 격렬한 마왕의 노호성에 골드는 물론 실버와 블루까지 움츠러들었다. 심지어는 소리친 마왕 자신조차. 그는 자신의 목소리와 겁먹은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골드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알 수 없는 분노에 사로잡혀 테라스의 난간을 내리쳤다.

  “가라, 골드. 내가 살아있는 한 절대로 죽지 않는 황금의 검사여.”

  가라앉은 목소리. 골드는 겨우 고개만 끄덕이고, 조금 뒤로 물러났다가 그대로 앞으로 달렸다. 황금빛 머리칼을 갈기처럼 휘날리며 테라스의 난간을 밟고 도약한 그녀는 날카롭게 휘파람을 불며 외쳤다.

  “대셔Dasher! 코메트Comet! 댄서Dancer! 큐피드Cupid! 프랜서Prancer! 도너Donder! 빅선Vixen! 블리즌Blitzen!”

  긴 휘파람과 그녀의 부름은 흑암성의 무기고 깊숙한 곳에 잠들어 있던 여덟 자루의 검을 깨웠다. 섬뜩한 광채를 내뿜으며 무기고에서 뛰쳐나온 검들은 흑암성의 성벽을 따라 떨어지는 골드의 몸을 휘감았다. 가장 거대한 대검 대셔의 위에 올라탄 골드는 중심을 잡자마자 고개를 숙여 자신을 바라보는 마수와 마군들에게 외쳤다.

  “가자! 마왕전하의 유일무이한 적을 격멸하러!”

  인간의 병사들 같은 우렁찬 함성이나 거친 진군가는 없었다. 마군과 마수들은 엄청난 속도로 날아가는 골드와 그녀의 여덟 검들에 뒤지지 않을 검은색의 섬광이 되어 그녀의 뒤를 따랐다. 검은 탑인 흑암성과 검은 바다인 마군들의 틈새를 달려 나가는 황금색의 절망과 검은 공포. 그의 명령에 따라 위대한 숲으로 달려가는 그들을 비참한 눈으로 전송하며 마왕은 토해내는 것 같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에게 무엇을 바라는 거야, 에보니. 나에게 어떤 선택을 하라는 거야, 에보니…….”

  블루는 복잡한 눈으로 마왕을 바라보았고, 그를 바라볼 눈동자조차 없는 실버는 말없이 손가락 마디를 달그락 거렸다.



  터벅. 용사는 5일 만에 달리는 것을 멈추었다. 용사를 증명하는 두개의 장신구중 하나인 질주의 팔찌의 힘을 사용하면 아직 이틀은 더 전력 질주할 수 있지만, 용사는 모래땅을 벗어난 기념으로 잠시 쉬기로 했다. 목적지인 위대한 숲도 이제는 지척이니까. 그녀는 그 자리에 잠시 멈추어 서서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모래먼지를 수도 없이 뒤집어썼지만 황금빛의 찬란한 광택을 잃지 않는 전신갑옷. 열사의 지평선.

  “이걸 구하려고 모래바람을 사흘이나 뒤집어 쓴 거구나……레오, 이거 수지가 맞는 건가요?”

  [글쎄, 검은 적어도 구한 것이 없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한다.]

  허리에 찬 투박한 사자검의 목소리에 용사는 미소를 지었다. 성좌의 봉우리에서 그에게 선택 받은 지도 일주일여가 지났다. 선대 용사의 무덤에서 두 개의 장신구를 얻고 쉬지 않고 달려 불과 일주일 만에 용사의 무구를 모두 갖춘 그녀였지만 용사는 아직도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선대의 모든 용사들과는 달리 기사였던 그녀는 그녀의 기사단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사람은 원래 무언가를 구하기 위해 잃은 것에만 신경을 쓰거든요. 그리고도 또 끝도 없이 뭔가를 구하려 애쓰지요.”

  [에보니, 에보니는 사람이 아니다. 그대는 용사다.]

  별 감정 없는 사자검의 목소리지만, 용사의 몸은 눈에 띌 정도로 굳었다. 지루하다고 생각될 정도의 긴 침묵이 지나고 나서야 용사는 간신히 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천천히, 지금까지 달려온 속도에 비하면 멈춘 것이나 다름없는 속도로 움직이며 용사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예, 저는 용사지요. 흑암의 마왕을 쓰러트릴 용사.”

  [그래. 검이 선택한 유일한 용사다.]

  사자검은 조용히 수긍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용사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걸음을 옮길 뿐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바라지 않은 구세주, 바라지 않은 영웅이 되어 사랑하는 사람을 죽이는 살인자. 아니, 바라지 않는 게 아냐. 나는 지금 내 의지대로 불사조 기사단에게 가고 있어. 그를……죽이기 위한 병력이 필요해서.
  용사는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억누르기 위해 땅을 바라보았다. 복받쳐 오르는 혐오감 때문에 눈앞이 어질거렸다. 꿈틀거리고 솟아오를 것만 같은 땅. 그냥 그 위로 쓰러져버리고 싶은 충동 때문에 다시 고개를 들었지만, 땅은 그녀의 발을 잡아당길 것처럼 파도쳤다. 용사는 진절머리를 내며 그 자리에 멈추고, 거칠게 고개를 내저었다. 흑단 같은 머리칼에 매달려 있던 모래먼지가 마치 금가루처럼 날렸다. 하지만 오히려 진동은 심해져 지진같이 느껴질 정도였다. 가만히 있어도 머리칼이 흩날린다.
  ……가만히 있는데도? 용사는 흠칫하고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여명의 빛을 검은 악몽처럼 물들이며 달려오는 검은 마군들의 질주가 진동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선두를 달리는 마수들의 이빨이 피로 물들어 있었다. 용사는 이를 악물며 사자검의 자루를 쥐었다.

  “마왕의 권속들!”

  [크아아아아아!]

  용사의 외침을 지우며 토해져 나오는 마수들의 포효. 용사는 양손으로 고쳐 잡은 사자검을 땅에 끌며 마군들에게로 마주 달려가기 시작했다. 선두에서 달려오던 거대한 마수의 발톱이 그녀를 노리고 내리쳐졌다. 굉음과 흙먼지를 밟고 도약하며 마수의 턱을 쪼개버리는 용사. 넘어져가는 검은 마수의 몸을 그대로 달려 올라간 용사는 그대로 도약해 마군들 사이로 내려앉았다. 그녀의 가녀린 몸을 박살내버리고자 내리쳐지는 흉악스러운 병기들은 머리위로 들어 올린 사자검에 남김없이 튕겨나갔다. 황금의 기운을 휘감은 채 포효를 내지르는 사자검.

  [!!!!!]
  
  검은 갑옷이 부서져나가고, 검은 투구가 깨져나간다. 포효를 내뱉어 군단을 헤집어 놓은 황금의 사자는 다시 용사의 손안에서 병기가 되고, 용사는 맹수를 휘두르며 적들의 사이를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걸리는 적을 닥치는 대로 두 동강내며 군단의 후미까지 단숨에 가로지르는 황금의 궤적. 그런 그녀의 등을 노리고 수백 개의 그레이트 보우가 시위를 당겼다.
  빼애애액! 먹이를 노리는 매같이 울며 화살의 비가 대기를 찢는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자신을 노리고 날아드는 새까만 화살들을 등 뒤에 둔 채 용사는 귀에 걸고 있던 영롱한 빛깔의 귀걸이를 손가락으로 튕겼다.

  “신기루의 귀걸이!”
  
  짧은 명령으로 자신의 역할을 깨달은 귀걸이가 빛을 발하자, 빗발치는 화살은 모두 용사에게서 빗나갔다. 귀 옆으로, 허리 옆으로, 발목 옆으로 스쳐 지나간 화살이 거친 황야에 새까만 가시 숲을 만들어냈다. 자신을 가둔 새까만 가시 숲의 허리를 횡으로 베어내며 다시 질주하는 용사. 똑바로 마군을 겨냥한 검 끝에서 일렁이는 황금빛 기운이 대지를 달려 마군들 사이로 뛰어들었다. 투구와 갑주의 틈으로 스며들어가 갑옷을 박살내버리는 황금의 기운. 비틀거리며 그것에 저항하는 마군들의 몸에는 어김없이 사자검의 날이 박혀들었다.

  “존재하지 않는 그 목숨을 나에게 모두 내놓아라! 공포와 절망을 먹고 키운 그 육체를 나에게 모두 내놓아라! 너희들의……마왕에게로 그 저주받은 몸을 돌려주겠다!”

  절규처럼 외치며 검을 휘두르는 용사. 마군들의 검은 피는 그녀의 갑옷에 닿는 순간 사그라들었지만, 그 짙은 피 냄새만은 그녀의 주위를 맴돌며 저주를 내뱉었다. 착용자의 움직임을 제한하지 않는 황금의 갑옷, 그 갑옷이 그리는 동선이 검은 물결 사이를 어지러이 맴돌았다. 착용자에 대한 장거리 공격을 비껴내는 신기루의 귀걸이, 그 귀걸이가 그리는 찬란한 빛이 검은 핏방울 사이에 반딧불처럼 날았다.
  그녀는 마군을 대한다면 세상 어느 보다도 잔인한 살육자. 그녀는 마군을 대한다면 세상 무엇보다도 파괴적인 재앙. 마군을 부수며 뛰어올라 마수의 목을 친다. 거친 마수의 앞발이 뒤집어버리는 지반을 역으로 타고 올라가며 황금의 기운을 사방에 내뿌린다. 사자검의 포효가 마군들을 찌부러트려 사방으로 검은 피를 터트린다. 하이에나 무리에 뛰어든 사자처럼 날뛰는 용사의 머리위로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다.

  “코메트와 댄서! 아래!”

  반사적으로 몸을 빼는 용사의 발치에 박히는 두 자루의 장검. 용사는 놀란 얼굴로 고개를 들었고, 그런 그녀의 앞에 엄청난 크기의 대검이 한 번 더 내리 박혔다. 섬뜩한 칼날에 자신의 얼굴이 일그러져 보인다. 초거대검 대셔의 자루에 앉은 채 다섯 자루의 검을 휘감은 골드는 굳은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용사에게 어색하게 고개를 숙여보였다.

  꾸벅.
  “어, 저기, 에에, 또, 저, 저는 마군 친위군단장. 황금의 검사 골드라고 합니다. 용사님.”
  인사를 받아서 마주 꾸벅.
  “아, 응, 예. 난 그러니까……사자검의 주인이고, 용사인 에보니에요.”

  자신도 모르게 마주 인사를 하고 에보니는 골드에 대해서 떠올렸다. 순록(馴鹿)의 이름을 딴 여덟 개의 검을 자유자재로 휘두르는 불사의 여검사. 혼자서 왕국의 모든 기사단을 전멸시킨 금발의 검마(劍魔). 용사는 조금 뒤로 물러나며 사자검을 들어 올렸고, 골드는 다섯 자루의 검중에서 빅선과 블리즌을 낚아채고는 대셔의 자루에서 뛰어내렸다. 어느새 뒤로 물러난 마군들은 용사와 골드를 둘러싼 채 검은 띠를 이루고 있었다. 급조된 검은 투기장에서 서로를 향해 검을 겨누는 두 황금의 여인.
  용사는 양손으로 쥔 사자검을 눈앞에 세우며 왼발을 뒤로 끌었다.
  골드는 빅선과 블리즌을 쥔 양손을 늘어트린 채, 고개를 들어 용사를 겨냥했다.
  전의를 실은 모래먼지가 둘 사이를 가른다. 날카로운 바람이 대셔의 자루 끝에 매달아 놓은 용 모양 장식을 울리며 스쳐갔다. 차랑, 하고 맑게 울리는 풍경(風磬)만한 장식물.

  “하아아아아!”

  그것을 신호로 삼아 두 여인의 함성이 겹쳐 터져 나오고,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땅을 박차며 뛰어올라 있는 힘껏 사자검을 내리치는 용사. 골드는 이를 악물며 검을 들어올렸다. 쇠가 갈리는 끔찍한 소리가 나며 맞물리는 검. 찰나의 순간이나마 사자검을 묶어놓은 골드는 주저하지 않고 휘파람을 불었다.

  “큐피드! 프랜서! 도너! 뒤쪽으로!”

  대셔의 주위를 돌던 세 자루의 반월도가 골드의 명령에 따라 용사의 등을 덮쳤다. 포효하는 사자검. 용사는 왼손으로만 검을 틀어쥐고 오른손을 뻗으며 그대로 몸을 틀었다. 큐피드와 프랜서가 그녀의 건틀릿에 맞고 튕겨나갔지만, 기묘하게 방향을 튼 도너는 그대로 용사의 뺨을 스치며 긴 상처를 남겼다. 그와 동시에 사자검을 튕겨낸 골드는 두 자루의 검으로 찌르기와 내리치기를 동시에 감행했다. 회전의 기세를 살려 오른손으로는 찌르는 검을 튕겨내고 사자검으로는 내려치기를 막아낸 용사는 거대한 사자검을 거의 반 바퀴나 회전시키며 다시 한 번 골드를 내리쳤다. 황급히 몸을 뒤로 빼낸 골드대신 땅을 내리친 사자검이 거칠게 포효했고, 그 포효는 골드의 상반신 갑옷을 완전히 박살내버렸다. 다시 한 번 휘파람을 부는 골드. 이번엔 다섯 자루의 검 모두가 용사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쉴 새 없이 검들이 맞부딪치는 격렬한 싸움. 용사는 일곱 자루의 검이 정신없이 덮쳐오는 상황에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사자검을 휘둘렀고, 골드는 일곱 자루의 검 모두를 공격과 방어 양방으로 활용하며 용사에게 반격했다. 둘의 검이 남김없이 공기를 태워버려 호흡곤란에 휩싸인 대지는 미친 듯이 경련하고, 한낮의 위치까지 떠오른 태양은 둘의 열기를 이기고자 안간힘을 쓴다. 자연을 멋대로 유린 하는 황금의 전투. 그곳에 사람이라고는 단 한명도 없었다.  
  골드는 빅선과 블리즌을 용사에게로 집어던지며 그대로 돌진했다. 익숙해진 동작대로 검을 튕겨내버리는 용사의 몸. 그 때문에 예상에서 일탈해버린 골드의 행동에는 속수무책이었다. 세 자루의 검을 한손에 몰아 쥔 골드는 사자검의 괘도를 피하며 그대로 용사의 목에 검을 내던졌다. 그야말로 당황스러운 상황. 하지만 당황보다 빨리 용사의 반사 신경이 움직였다. 상반신을 완전히 눕혀버린 자신의 몸에 용사는 뒤늦게 당황했고, 자신의 발이 돌진하던 골드의 턱을 그대로 차올릴 때는 더욱 당황했다. 어떡해, 갑옷 부츠로 차이면 무지 아플텐데. 휘청거리는 골드와 그대로 땅에 쓰러져버리는 용사. 골드는 뒤로 젖혀졌던 몸을 탄력적으로 되 튕기며 코메트와 댄서를 공중에서 낚아채 아래로 박았지만, 이미 용사는 그곳에 없었다, 머리칼 몇 가닥을 턱의 상처대신 골드의 검에 바치며 옆으로 몸을 굴려 일어난 용사는, 양손으로 쥔 사자검을 온몸으로 있는 힘껏 휘둘러 골드의 옆구리를 베어버렸다. 넘어가기 직전의 나무만큼이나 옆구리가 파인 골드의 몸은 폭발적인 황금의 기운에 휩싸여 그대로 마군들을 부수며 틀어박혔다.

  “하아악……하악…….”

  사자검을 땅에 박고 거친 숨을 내쉬는 용사. 머리칼을 타고 흘러내린 땀방울이 아롱져 바닥에 떨어진다. 용사는 한 번 더 깊게 숨을 들이쉬고는, 그대로 사자검을 가슴 앞으로 들어올렸다. 길이 4미터, 너비 2미터의 초거대검 대셔의 돌진을 사자검으로 막아내는 것은 애초에 무리. 용사의 몸은 창끝을 세우고 있는 마군들 쪽으로 대책 없이 밀려나기 시작했다.

  “열사의 지평선! 멈춰!”

  황금의 갑옷은 용사의 명령에 따라 허리춤의 사슬들을 바닥에 쏘아냈다. 바닥에 단단히 박힌 사슬들이 팽팽히 당겨지며 용사의 몸을 끌어 당겼고, 용사는 팔에 힘을 주어 대셔를 있는 힘껏 밀어냈다. 튕겨나간 대셔의 말도 안 되게 두꺼운 자루를 한손으로 잡아 공중에서 멈추는 금발의 여인. 자루가 워낙 두꺼워 기둥에 손을 댄 것 같이 보이는 가녀린 골드의 손을 바라보며 용사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불사의 검사라더니. 세상에, 정말로…….”

  “아, 예. 심장을 마왕전하께서 맡아주신 탓에 죽지 않아요. 하지만 아픈……건 정말 굉장히 아프…….”

  피한방울 나지 않기에 더욱 그로테스크한 옆구리의 상처를 움켜잡으며 식은땀을 흘리는 골드를 바라보며 용사는 열사의 지평선에서 튀어나간 사슬을 거두고 검을 고쳐 쥐었다. 오른손으로는 대셔를 힘겹게 쥐고, 왼손 손바닥위에 나머지 일곱 자루의 검을 모은 골드는 상처의 고통 때문에 얼굴을 찌푸리며 한걸음을 내딛었다.

  빠밤……빠밤빠밤……!
  둘의 전투가 재개되기 직전, 우렁찬 진군 나팔소리가 울려 퍼졌다. 위대한 숲에서 달려 나온 붉은 기사단이 들고 있는 깃발은 날개를 펼치고 있는 두 마리의 불사조.

  “불사조 기사단!”

  용사의 입에서 탄성처럼 터져 나온 외침. 불사조 기사단의 선두는 언제나 그렇듯 붉은 갑주를 입은 여신. 다른 누구도 볼 수 없는, 오직 불사조 기사단에게만 보이는 전장의 여신이 고고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전쟁의 미소를 띠우고 자신을 바라보는 여신의 모습에 용사는 벅찬 감동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한때가 용사가 몸담았던 불멸의 기사단. 마왕의 손길이 미치지 못한 마지막 기사단이자 골드가 없애지 못한 왕국최후의 기사단인 불사조 기사단이 마군에게로 돌격해오고 있었다. 용사는 사자검을 머리위로 치켜들고는 있는 힘껏 외쳤다.

  “날개에 담을 것이 정의가 아니라면 차라리 날개를 꺾으리라! 살아가는 이유가 정의를 위한 것이 아니라면 차라리 불길 속에 몸을 던지리라!”

  언제나 부르던 진군가. 저들의 틈에서 부르던 진군가. 그리고 불사조 기사단은 그들의 옛 동료의 노래 소리에 화답했다.

  [우리는 정의의 곁을 달리는 불사조의 창! 여신을 따르기에 패배를 모르는 하나의 검!]

  폭풍처럼 터져 나온 노래 소리는 사자검의 포효보다도 크다. 선두를 달리는 붉은 여신은 고고한 미소를 지은 채 손을 뻗었고, 곧 달리는 기사단의 옆구리로 비죽이 붉은 단창이 준비되었다. 여신의 아름다운 입술을 따라 용사의 목소리가 따라 나온다.

  단창 투척 “단창 투척!”

  하늘을 매우는 붉은 비가 마군의 몸을 꿰뚫는다. 단창의 소나기가 마수들의 몸을 고슴도치로 만들어 버렸다. 들어 올렸던 손을 날카롭게 옆으로 던지며 움직이는 여신의 입술. 용사는 실버를 무시하고 기사단 쪽으로 달려가며 다시 한 번 그녀의 목소리를 따라했다.

  돌격 대형으로 “돌격 대형으로!”

  밀집대형의 붉은 기사들이 양옆으로 퍼지는 과정은 마치 장미의 개화, 아니. 날개를 펴는 불사조의 모습과도 같았다. 지축을 울리고 대지를 튀기며 달려오는 기사단의 선두에서 달리는 붉은 여신을 향해 용사는 맹렬히 달렸다. 자신을 막는 모든 마군과 마수들을 베고 그녀의 목소리를 따라해야 한다는 열망에 휩싸인 황금의 여인. 일곱 자루의 검을 그런 용사의 등에 집어던지려던 골드는 끝내 옆구리의 고통을 참지 못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거창준비 “거창준비!”

  차라라라랑. 들어 올리며 스치는 기사들의 창끝소리가 마치 여신의 연주처럼 전장에 울려 퍼졌다. 그것은 기사들에게는 진군가요. 마군들에게는 진혼곡. 폭풍처럼 오르막을 달려 오른 기사들의 말이 거칠게 투레질한다. 돌격을 위한 최후의 한 순간, 그 압도적인 정적감속에서 움직일 수 있는 것은 단 하나. 마군들의 옆구리를 관통하고 나온 용사는 불사조 기사단에게 똑바로 달려가며 마지막으로 여신의 목소리를 토해냈다.

  “불사조 기사단! 돌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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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사에 글써보는 것도 오랜만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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