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ip to content

단편 [수필] 행복하니?

2005.01.28 02:49

격랑[激浪] 조회 수:189

[수필] 행복하니?

by 격랑 (A.T regain)


  수능을 마치고 생긴 여유시간. 그 틈을 이용해 절친하게 지냈지만 연락이 끊겼던 중학교
동창을 만났다. 처음 만났을 땐, 당연하듯이 어색함이 자리 잡고 있었고 머뭇거리게 만들었
지만, 역시 순수하게 친구를 좋아했던 그때라 그런 불편함은 씻은 듯이 사라졌다. 우리는
평범한 코스로 노래방, 게임방에 가며 즐겁게 노닥거렸다.
  저녁식사 후, 친구는 갑자기 술을 마시자고 내게 말했다. 나는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고민은 몇 초 만에 풀리고 말았다. 술을 못 마시는 나의 개인적인 일 따윈 이 소중한 시간에
비할 바가 아니지 않은가? 나는 쾌히 승낙했고 친구는 기쁜 기색을 띠며 나를 안내했다.
  술집은 아늑했다. 짙은 주황 불빛이 장소를 은근하게 비추어 주었고,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기 좋았다. 나는 친구에게 마음에 드는 장소라고 말해주었고 친구
는 그 말에 크게 기뻐했다. '나도 이곳을 좋아해.'라며 푸근한 미소를 짓는 그 녀석을 보며
난 생각했다. 여전히 사람다운 미소를 짓는 녀석이라고.
  자리에 앉자 곧 술이 나왔다. 우리는 웃으면서 간간이 이야깃거리를 나누었지만, 어느 정
도 취하자 약속이라도 한 듯, 말이 없어졌다. 조용하게, 빨개진 얼굴로 술만 묵묵히 마셨다.
  그렇게 시간이 지났다. 친구는 어느새 사람다운 미소가 사라져 있었다. 굳은 표정으로 술
을 마시던 그는 어느 순간 숙였던 고개를 들곤 나를 바라보았다. 놀랍게도 그 녀석의 눈은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행복하니? 우리 중에 지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사는 놈. 너밖에 없잖아? 그렇게 좋아
하는 음악을 하면서 사니까, 행복하냐구?"

  그것은 가슴 언저리에 달고 있었던 자그마한 푸념이라는 혹. 그 혹은 술이라는 강에 떠밀
려 친구의 입 밖에 나오고 말았다. 난 고개를 푹, 숙였다.

  "다음에 또 보자."

  결국, 그 질문에 답해 줄 수 없었다. 친구 또한 답을 바라고 있지 않았다. 시간은 무의미
하게 흘렸고, 우리는 의미 없는 약속을 하며 헤어졌다. 필름이 끊길 정도로 마시진 않았기에
난 한 발짝, 한 발짝씩 남강다리를 걸어갔다.
  칠흑같이 검은 밤이라서 강은 잘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가로수가 드문드문 있었기에 강은
아직 움직이고 있었다. 난 그것을 멍하게 쳐다보다 못 다한 이야기를 답할 수 있었다.
  넌 화가가 되고 싶다고 그랬지? 뻔하게도 집안에서는 반대하고 말이야. 그래. 넌 결국 포
기했어. 그날 밤, 울면서 전화를 하던 너를 기억해. 하지만, 난 너와 달랐지. 난 집안의 반대
에도 이를 악물고 음악을 했어. 구형 컴퓨터에 15만 원짜리 마스터키보드 하나를 안고서 두들
겼고, 오류 때문에 결과물이 저장이 안 되던 때에도 울었지만, 포기하지 않았어. 그 땐 행복
했기에, 가슴이 벅찰 정도로 꿈이 있었기 때문에 웃을 수 있었어. 후후, 노력만으로 상황이
달라질 거라 믿었거든. 부모님을 설득하며 다른 건 바라지 않을 테니 저장만이라도 되는 새
컴퓨터를 사달라고 엎드린 채, 열변을 토했던 기억이 나. 물론 이루어 지지 않았지만.
  이야기를 계속 할게. 아는 선배에게 빌고 빌어서 30분이나 차를 타고 선배 집에 가서 녹음
을했고, 그 결과물이 인터넷에 올려졌을 때 행복함을 느꼈지. 진주에 살아 인맥이 전혀 없어
아무것도 몰라도 행복했지. '음악' 자체를 한다는 사실에 행복했어.
  물론 고등학교를 진학하고 무의미해졌어. 음악 자체를 막아버리는 이 현실에, 갈팡질팡 어
느 거 하나 결단을 내리지 못했어. 음악을 포기하자니 집착과 미움 때문에 싫었던 공부를 하
지 않았고, 이대로 나가자니, 지쳐버린 나 자신과 막혀버린 이 현실에 눈물만 하염없이 나왔
지.
  결국, 무엇하나 확실하게 하지 못하는 우유부단한 인간이 되었고, 지금까지 살아왔어. 넌,
그 모습을 보지 못했지?

  "그래! 확실하게 답해줄게. 행복했었어! 행복했다구! 비록 지금은 열정을 잃어버린 얼굴을
하고 있지만, 행복했었다는 건 변함없어. 변태음악이라고 욕을 먹고, 왜, 그딴 음악을 듣니?
하는 말에도 참을 수 있을 만큼! 행복했었단 말이야……."

  부끄럽게도 지금도 투정을 부리고 있어. 서울에 태어났다면, 그나마 이런 아픔을 가진 사람
들이 모여 사는 서울에 살고 있었다면! 이 저주스러운 경상남도가 아닌, 문화의 흔적이라도
이어가고 있는 그 사람들과 같이 살 수 있는 서울에 있었다면, 지금도 잡힐 듯 말 듯한 희망에
정신없이 나를 이끌었을 거야.

  "물론 너도 알고 있지? 어느 걸 선택했다, 하더라도 후회는 있어. 집안의 말씀에 따르더라도
행복과 후회가 있을 것이고, 내 길을 택했더라도 행복과 후회가 있어. 그 갈림길에서 나는 후
에 미련이 남지 않는 길에, 충실했을 뿐이야. 결국, 너와 다른 길을 선택함으로써 얻은 건 미
련이 남지 않았다는 것뿐. 제대로 된 결과물 하나 없지만 말이야."

  우습지? 넌 아직도 내가 중학교 때처럼 열정에 몸을 태우고 있는 사람으로 알고 있지? 아니지.
너도 봤지? 너의 질문에 늪처럼 가라앉은 체념이 자리 잡은 내 눈을! 애처로운 얼굴이 되어버
린 나를…….

  "더 나은 앞날을 바라지 않아. 잃어버렸던 웃음을 되찾을 수 있었으면 좋겠어. 정녕, 그렇겐
안 되는 거야?"

  답이 나올 리 없는 질문. 이번엔 하늘을 올려다본다.

  "눈이 오는구나."

  차가운 액체가 내 피부에 닿으며 선을 그린다. 그 선 중엔 특이하게도 뜨거운 선도 있다. 그
것은 지금 이 땅을 하얗게 만드는 눈일까? 아님, 부질없는 넋두리의 흔적일까?

  추워…….



*기억하지 못할 어느날 친구와 술 자리를 가진 후에 느꼈던 일을 수필로 적었습니다.

**좋은 하루 되시길. 밖에는 그때처럼 눈이 내리는군요. (낮이지만.)


"재미보단 감정"

Powered by Xpress Engine / Designed by Sketchbook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나눔글꼴 설치 안내


이 PC에는 나눔글꼴이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사이트를 나눔글꼴로 보기 위해서는
나눔글꼴을 설치해야 합니다.

설치 취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