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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시련

2004.10.24 21:54

격랑[激浪] 조회 수:258






  며칠째 계속되는 백야. 또 강렬하게 이글거리는 태양은 더욱 삭막한 사막을 주황빛으로 물들게 한다.
  그래서일까? 한 젊은이는 바람 한 점 없는 사막을 보며 자신의 눈동자가 녹아버릴 거 같은 착각을 한다.

  "그대가 추장이 되겠다고 한 젊은이인가?"
  "네! 그렇습니다."

  드디어 말문을 트는 늙은이의 말에 젊은이는 반색을 하며 힘차게 대답했다. 그러나 늙은이는 젊은이의 힘찬 대답에 어울리지 않게 고개를 숙이고 묵묵히 빛이 바란 거친 수염을 쓰다듬었다. 씁쓸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이다. 젊은이는 다시 답답해지기 시작했다. 자신이 추장이 되겠다고 했을 때 노인은 지금처럼 침울한 표정과 함께 씁쓸한 표정만을 지었다. 그것이 꼭 추장자리를 물러주고 싶지 않은 자처럼 보여 젊은이를 화나게 하였다.

  '그토록 오랫동안 추장을 해놓고선! 아직도 추장에 대한 미련이 남아있단 말인가? 어리석은 늙은이 같으리라고.'

  젊은이는 인디언 부족 중에 하나인 윈더카프 부족에 속해 있었다. 항상 용맹함과 전사다운 모습을 추구하고 자랑스럽게 여기는 윈더카프 부족의 전사인 젊은이로선 이런 나약한 늙은이의 모습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아직 상대는 윈더카프 부족의 추장. 섣불리 상대해선 안 되는 자였다. 젊은이는 그것을 상기하며 꾹 참았다.

  "좋네. 하지만, 위대한 윈더카프 부족의 추장자리는 아무에게나 줄 수 없는 법. 시련을 거쳐야 하네."

  고개를 흔들며 마지못해 대답하는 추장의 말에 젊은이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커다란 무쇠 같은 주먹으로 가슴을 탕탕 쳤다. 그것은 오히려 시련을 원하는 자처럼 보였다. 아니, 실제로도 젊은이는 시련을 원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언제나 자신을 자랑스럽다고 여겼기 때문에 거저 주는 추장자리는 오히려 사양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또 다른 이유는 눈치채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추장자리를 지원한 자기 또래의 전사들은 모두 여덟 명. 하지만, 단 한 명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 이유는 두 가지라고 젊은이는 판단했다. 시련이 목숨마저 앗아갈 정도로 위험하거나, 추장의 더러운 계략으로 인한 결과라고 말이다.

  "좋아. 언제 시련을 받아보겠나?"
  "지금 당장 받겠습니다."
  "흠…, 시련을 받기 전에 부모의 얼굴을 한번 보고 시작하는 게 어떤가? 이 시련은 목숨마저 위험해서 부모 얼굴보기도 마지막이 될 수도 있다네."

  추장은 어딘가 모르게 간절한 어투로 젊은이를 설득했다. 하지만, 젊은이는 속으로 콧방귀를 뀌며 비웃었다. 역시 자신의 판단이 맞았다. 이유는 두 번째였다. 자신이 부모님을 만나려 간 사이, 더러운 함정을 파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고작 그런 계략에 내가 넘어갈 줄 알았느냐? 웃기지 마라. 난 위대한 윈더카프 부족의 선택받은 전사다!'

  "아뇨. 지금 당장 받겠습니다. 시련을 준비해 주십시오."

  젊은이의 당찬 말에 추장은 뜻 모를 한숨을 쉬며 속으로 안타까워했다. 하지만, 젊은이의 의지가 이 정도인 이상 자신이 더 이상 관여할 순 없었다. 이제 남은 건 기대라는 것에 매달려 기다리는 것뿐.

  "……알겠네."

  추장은 한 걸음, 한 걸음 조심스럽게 발을 옮겨 젊은이의 바로 앞까지 당도했다. 그리고 뼈만 남은 앙상한 오른팔을 들어 젊은이의 이마를 잡았다. 젊은이는 자신의 이마를 추장에게 잡히자 몸을 움츠리며 경계했다. 하지만, 곧 안심했다. 저런 앙상한 팔에서 자신의 머리통을 으깨어 버릴 힘은 없을 테니까.

  "그럼 시련을 시작하겠네. 선택받은 윈더카프의 전사여. 자네는 이 시련을 받아들이겠는가?"
  "네. 받아들이겠습니다."
  "자네는 이 시련의 어떤 결과에도 받아들이겠는가?"
  "네. 받아들이겠습니다."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네. 위대한 윈더카프의 전사여. 시련을 시작하겠네!"

***

  "으!"

  머리가 파열될 듯이 아파 난, 팔을 들어 고개를 부여잡고 힘겹게 일어났다. 온몸은 사막의 모래에 절여있었고, 입 안에도 텁텁한 모래가 가득했다. 퉤 하고 내뱉었다.

  "여기가 어디지?"

  주위를 살펴보았다. 하지만, 보이는 건 끝없는 사막. 조금 전까지만 해도 본 천막도, 사람의 형상도, 심지어는 빌어먹을 추장 늙은이까지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보이는 건 주황색으로 물든 사막뿐이었다. …왠지 보는 것만 해도 눈이 아파 와서 잠시 눈을 감았다.

  "후!"

  눈을 감고 냉정하게 사태를 파악하자 금방 답이 나왔다. 빌어먹을 추장 늙은이의 계략에 속은 것이다! 시련을 시작하겠다고 손으로 내 이마를 잡았을 때 뭔가 술수를 부려 나를 기절시킨 게 틀림없었다. 나는 추장의 더러운 짓거리에 치를 떨면서 동시에 나 자신의 바보 같음에 혀를 찼다. 방심한 것이 나의 잘못이었다. 앙상한 손밖에 남지 않았다 해도 늙은이, 또한 선택받은 전사이자 추장! 호락호락한 존재가 아니었다.

  "흥! 이런 계략이라면, 당당하게 다시 부족을 찾겠다. 그리고 모두에게 늙은이의 행동을 밝혀 추방하고 내가 추장이 되겠다!"

  아무리 이런 황량한 사막에 버려졌다고 해도 늙은이의 근력으론 나를 들고 멀리 가진 못했을 거다. 만약, 한 젊은 남자를 시켜 나를 버렸다고 해도, 그런 살기 없는 간단한 수에 내가 오래 기절할 리도 없을뿐더러 아직 날도 저물지 않았다. 분명 방향 찾기 어려운 곳에 나를 버렸을 뿐, 멀리 버렸을 리가 없다.
  좋다. 그럼 멀리 가지 않고 범위를 크게 잡고 돌듯이 부족을 찾으면 된다. 허리에는 비상시 이용하는 말린 육포와 물통도 있는 상태. 두려울 것이 없다.
  나는 모양이 특이한 커 다한 바위를 찾아 번쩍 들고 적당한 중심자리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등 뒤에 달린 창을 꺼내 내 재킷을 달곤 바위 위로 올라가서 힘껏 내리찍었다. 그러자  콰직-! 하는 소리와 함께 내 창은 보기 좋게 바위에 꽂혔다.
  나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이것을 중심으로 주위를 돌며 부족을 찾으면 된다.

  "그럼 시작해볼까."

  절대 늙은이, 네 뜻 대론 안 될 것이다. 나를 지금까지 당한 멍청한 녀석들과 똑같이 취급한 걸 후회하게 해주마!

***

  "크윽!"

  나는 모래를 내뱉었다. 지금까지 몇 번이나 다리가 풀려 넘어졌는지 셀 수도 없을 지경이었다. 후우! 한숨이 절로 나왔다. 아무래도 추장 늙은이를 너무 얕본 거 같다. 원을 그리듯이 찾은 지 어느새 15일. 하지만, 아무리 찾아도 주위에는 끝없는 사막과 내가 달아놓은 창뿐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나를 버린 거냐, 늙은이!
  이미 참는 건 한계였다. 육포는 다 먹은 지 오래. 허리에 달려있는 양가죽으로 만든 물통을 꺼내어 뚜껑을 열고 조금 마셨다. 그러자 목의 갈증이 어느 정도 가신다. 그것만으로 힘을 얻은 거 같다.
  하지만, 상황은 절망적. 이것이 마지막 물이었다.

"읍!"

  이를 악물고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서 쓰려지면 찾아오는 건, 죽음뿐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절대 정신을 놓아선 안 된다.
  나는 늙은이에 대한 분노로 간신이 몸을 지탱하며 길을 걸었다.
  꼭, 부족으로 돌아가겠다. 그리고 추장이 되겠다.

***

  이제 움직일 수 없다. 물통의 무게조차 무겁게 느껴져 버린 지 오래다. 아직도 보이는 건 녹아버릴 거 같은 주황빛 사막뿐. 눈앞이 까마득하다.

  "……."

  신음조차 나올 힘이 없다. 설상가상으로 밤이 되자 기온은 뚝 떨어지고 바람이 거세다. 이대로 있다간 사막의 모래에 파묻힐 것이다.
  안 된다. 살고 싶다. 아직 나는 죽고 싶지 않다. 그러니까 찾아야 한다. 부족을 찾아야 한다. 추장 같은 건 아무래도 좋다. 제발 살려만 다오. 제발-, 나를 살려다오!

  "……."

  날이 밝아온다. 내가 제일 좋아했던 일출. 이젠 저주스럽다. 싫다. 저것이 뜨면 고통스럽다. 또 눈동자가 녹아버릴 것이다. 그러니까 싫다.

  "……무울."

  내가 이제 내뱉을 수 있는 말은 이것뿐. 물을 마시고 싶다. 목이 아파. 목은 혐오스럽게 물을 요구한다. 아아, 인간은 얼마나 나약한 존재란 말인가.

  "……무우울."

  팔꿈치를 저어서 기어간다. 기어간다. 기어간다. 기어간다. 기어간다. 기어간다. …….
  버텨야 한다. 나를 구해줄 전사를 기다리기 위해 물이 필요하다. 그러니까 물을 찾아서 기어간다.

  "……."

  날이 밝았다. 눈동자가 녹아버려 사막이 진흙같이 보인다. 그래도 기어간다. 방향 따윈 잊어버린 지 오래. 오직 물이 필요해.
  푹. 푹. 푹.

  "……?"

  진흙같이 녹아버린 시야에서 갑자기 이질적이 것이 보인다. 눈에 힘을 준다. 그러자 대상이 명확해진다.

  "……!"

  나무다. 나무였다. 나무가 몇 그루 있는 곳. 나무가 살 수 있는 건, 물이 있기 때문이다. 오아시스다! 오아시스라고!
  움직일 수 없었던 몸에서 갑자기 힘이 난다. 이제 살 수 있다. 물만 마시면 살 수 있어!
  달려간다. 뛸 때마다 푹푹 빠지는 모래의 뜨거움 따윈 알 바 아니다. 아무렇지도 않다.
  가까워진다. 거의 다 왔다. 조금만 더 가면 된다.
  푹. 푹. 푹. …….

  다 왔다! 나는 고개를 내리고 너무나도 순결한 물을 보았다.

  "……!"

  독초다. 물에는 물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물에 띄워져 있는 작은 잎들. 그것은 분명 독초였다!
  주저앉았다. 이 물을 마시면 죽는다. 물론 사막에는 독초가 자랄 수 없다. 분명히 백인 놈들의 짓이다. 신대륙을 발견한 이후부터 이유도 없이 우리를 죽이고 장식품을 가져가는 놈들의 짓!
  정신이 희미해진다. 나의 몸은 이제 더 이상 살 수 없다고 심장이 속삭였다. 그래. 이제 더 이상 살 수 없다. 마지막 희망이었던 물마저 죽음의 샘이 되었다. 그러므로 이젠 나에겐 살 수 있는 가망성 따윈 없었다.

  '기왕 죽는 거라면…….'

  그렇다. 기왕 죽는 거 저 물을 마시고 죽는 편이 낫다. 저 물을 마시면 시원함을 느끼고 죽을 수 있을 것이다. 어차피 죽는 것, 이렇게 죽으나, 저렇게 죽으나, 매한가지 아닌가.
  그렇다면, 좀 더 편하게 죽겠다.
  꿀꺽. 꿀꺽. 꿀꺽.

  "크아! 시원하다. …컥!"

  검붉은 피가 입 밖으로 나온다. 그와 동시에 내 심장은 멈추기 시작한다. ……이제 죽는구나.
  털썩-.

***

  젊은이는 죽었다. 그러자 쓰러진 젊은이 옆에서 이곳과는 어울리지 않는 빛이 났다.

  "결국, 이겨내지 못했는가……."

  한동안 펼쳐지던 빛이 사라지자, 그 자리엔 추장이 씁쓸한 표정을 지은 채 나타났다. 추장은 한숨을 쉬었다. 자신은 이런 결과를 알고 있었다. 이미 여덟 명의, 아니 이젠 아홉 명의 죽음을 똑같이 보았으니까.
  추장은 처참하게 죽어버린 젊은이에게 다가가서 손을 뻗어 젊은이의 등을 어루만졌다. 그러자 젊은이의 시체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기대를 가진 내가 또 졌구나."

  추장은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이 시련은 만들어진 시련이었다. 예부터 전사 부족인 윈더카프의 유일한 주술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추장을 뽑는데 사용한 '시련의 공간'이었다.
  시련은 간단했다. 참가자를 극한까지 몰아붙이곤 이 독초가 가득한 오아시스를 보여주는 것이 시련의 주목적이자 끝이었다. 물론 젊은이가 보여주듯이 이 물을 마시면 시련에 패해서 죽는 것이다.

  "……."

  추장은 고개를 돌렸다. 그 시선을 따라가니 놀랍게도 사막에 어울리지 않은 강이 보였다. 추장은 그 물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어리석은 전사여! 자네의 생각을 자신만이 가지고 있을 거라고 착각했는가?"

  추장 또한  이 시련을 겪었다. 하지만, 추장은 이 시련을 이겨내고 큰 강물을 마심으로써 시련을 통과해 추장이 된 것이었다.

  "나는 위대한 윈더카프의 추장. 자네가 생각하는 욕심 따윈 절대 없네. 조금만 더 참고 견뎠으면 좋으련만……."

  결국, 이번에도 윈더카프의 새로운 추장은 탄생하지 못했다. 추장은 자신의 앙상한 손을 바라보았다. 마치 나뭇가지 같은 손. 아마 오래 견디지 못할 것이다. 그렇기에 그 전에 새로운 추장을 찾아야했다. 만약 추장이 죽는 순간까지 새로운 추장을 찾지 못한다면, 이 윈더카프 부족의 미래는 멸망이었다.
  추장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 지옥 같은 시련의 하늘은 여전히 태양만이 이글거렸다.

  '제발 윈더카프의 앞날을 지켜주옵소서. 선대이시여.'

  추장이 살아있는 한 이 시련은 계속 될 것이다. 추장은 부족이 지켜지길, 그리고 더 이상 선택받은 전사가 죽지 않길 기도했다.
  자신처럼 시련을 이긴 새로운 추장이 나오길 또다시 기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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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분전환도 할겸, 펜픽을 잠시 멈추고, 단편을 하나 써보았습니다.
오랜만에 (정말 오랜만에) 3인칭을 넣어보았는데 이거 어색하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그리고 습작 스토리입니다;)
좋게 봐주시면 저야 좋지요.
많은 관심(리플);; 부탁드립니다.


"재미보단 감정"




sketchbook5, 스케치북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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