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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Depression Wish : 마루 - 53

2008.06.16 15:49

카와이 루나링 조회 수:210

 어슴프레 밝아오는 하늘을 바라보며 기지개를 켜 잠을 쫓아낸다.
 여전히 죽은 듯 잠들어 있는 잎새의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몸을 일으킨다.

 검사 결과가 오늘 나온다고 했던가...
 제발 아무런 문제가 없기를 바라며 조심스레 잎새의 머리를 쓰다듬어 본다.

 호흡은 많이 안정된 상태.
 하지만 혈색이 없는 얼굴은 여전했다.
 하루 이틀 몸이 안 좋았던 것이 아니라는 것 쯤은 검사 결과가 나오지 않아도 쉽게 알 수 있었다.

 이 바보, 대체 언제부터 이랬던거야?

 미련을 두고 다시 그런 편지를 보냈을 때라도 눈치 챘으면 좋았을지도 모른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잎새 성격에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것 쯤은 쉽게 알 수 있었을텐데.

 "후으..."

 한숨을 쉬고는 몸을 돌린다.
 병실을 빠져나와 자판기에서 따뜻한 음료를 하나 뽑아든 뒤 병원 바깥으로 나왔다.
 싸늘한 공기에 남아있던 졸음까지 모조리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잎새가 깨어났을 때 과연 어떤 말을 먼저 하면 좋을까?
 잎새는 과연 어떤 말을 꺼낼까?

 내가 그 바닷가에 간 것은 분명 우연이라고 하나, 잎새의 편지는 아마 그 쪽으로 와 달라는 의미였겠지.
 만날 날짜도, 시간도 없이 그 곳에 있었다는 것은... 언제부터인가 무작정 거기에 서 있다는 것과 같은 뜻.

 대체,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 응?

 순간 이 쪽으로 다가오는 누군가의 모습이 보였다.
 익숙한 모습.
 하지만 이 곳에 올 이유라고는 없을텐데 어째서?

 "역시, 오빠 맞구나?"

 "... 여긴 무슨 일이야?"

 날 보며 씽긋 웃는 솔이를 보고 살짝 인상을 찌푸린다.
 하지만 솔이는 딱히 내 표정에 대해 신경쓰지 않는 것인지 어깨를 으쓱였다.

 "여기, 어딘지 몰라서 그래?"

 "응?"

 솔이의 물음에서 느껴지는 이상한 뉘앙스에 고개를 갸웃거린다.
 하지만 솔이는 더 이상 말을 해 줄 분위기가 아니었다.
 고개를 돌려 병원 건물을 한 번 훑어보며 그 질문에 조금 어이없는 대답을 하려다가....

 "그야 병원...."

 문득, 이 병원이 어딘지 깨달았다.

 "기억 났구나. 여기도 아빠가 스폰서로 있는 곳이야. 여기에서 오빠 얼굴 모르는 사람 없을걸?"

 "칫...."

 입 안이 씁쓸해졌다.
 바보같이.... 골라도 꼭 이런 곳으로....

 ".... 괜찮은거야?"

 그렇게 스스로의 어리석음을 탓하고 있으려니, 솔이가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응?"

 "언니 말이야. 괜찮은 거냐고."

 언니.... 라.....

 예상하지 못했던 호칭.
 하지만 그렇게 불릴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에 슬쩍 웃음이 새어나왔다.
 
 "뭐, 오늘 검사 결과 나온다니까. 두고 봐야지."

 "으응...."

 내 말에 솔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하지만, 어쩐지 석연찮은 표정이다.
 
 "왜? 뭐 문제 되는 거라도 있어?"

 그렇기에, 갑자기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으응, 그게 말이지..."

 솔이는 잠시 대답을 하지 않고 머뭇거렸다.
 그 태도에 무언가 이상한 것을 느껴 막 캐물으려 하는 순간

 "오빠, 요즘 여자 만나잖아. 괜찮은건가 하고..."

 "그건...."

 자신도 모르게 손에 힘이 들어갔다.
 종이컵이 우그러지며 안에 있던 음료수가 넘쳐 손을 적신다.

 "아빠가 하는 짓이야. 오빠가 지금 뭐 하는지 모를까봐?"

 ".... 그 인간이...."

 빠드득, 하고 이를 갈았다.

 대체 왜 날 못잡아 먹어서 안달인거지?
 어디까지 날 얽매어야 만족하는거지?

 무언가 울컥 하고 솟아오르는 기분이었다.
 
 항상 그 모양이었다.
 내 일거수 일투족을 전부 다 감시하고 구속하고 자신이 원하는 방향대로만 끌고 가려던...
 내 스스로의 의지로 결정했던 일이 단 하나도 없던 삶.

 그 것이 싫어 집까지 뛰쳐나왔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난 그 손바닥 위에 있는 건가?

 ".... 괜찮아?"

 "괜찮을리가."

 자신도 모르게 퉁명스럽게 답하고 말았다.
 하지만 솔이는 그런 내 태도에 개의치 않는다는 듯, 오히려 걱정하는 투로 다시 물었다.

 "어떻게 할거야?"

 "뭘?"

 "그야..."

 솔이는 잠시 대답하지 않고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레 답했다.

 "사냥개들이 따라붙을지도 몰라."

 "....."

 솔이의 말에 숨을 삼킨다.

 "아빠가 아무 일도 안하는 것 같지? 아니야, 이전부터 계속 뒤에서 손을 써 왔다고."

 어느샌가 목소리까지 낮추어가며 말을 이어나간다.
 몸이 굳는 것이 느껴진다.

 "사람 하나 망가뜨리는거, 아빠한테는 아무 것도 아니야. 굳이 문제를 일으킬 것도 없이 스스로 망가지게 만들어 버리면 되니까."

 "미친...."

 욕설이 튀어나왔다.
 어느샌가 움켜쥔 주먹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솔이가 어떤 말을 꺼낼 것인지, 대충 예상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언니, 아마도 병명은 '신경 쇠약' 정도가 되지 않을까?"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 병원쪽으로 시선을 주며 말한다.
 그 말에 솔이가 무엇을 이야기 하려던 것인지, 예상했던 것이 사실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대체..."

 대체 왜?

 "뻔하지."

 솔이 역시 그리 좋은 기분은 아닌 것 같았다.

 "회사 때문이야. 회사를 이을 사람을 자기가 원하는 대로 만들어 내려는 거고."

 "그따위 회사... 바란적 없어."

 목소리가 떨려오고 있었다.
 솔이 역시 그런 내 기분을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여줬지만
 그렇다고 해서 특별한 방법이 있는 것은 또 아니었다.

 "... 빌어먹을."

 한 순간 눈 앞이 새하얗게 변해버리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자신이 원하는 무언가 때문에 한 사람의 인생을 망가뜨리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한다고?
 그런 어처구니 없는 경우가 어디있다는거야!

 "... 조심해. 내가 해 줄 수 있는건 이 정도 뿐이야."

 솔이는 얼굴에 씁슬한 표정을 지우지 않으며 말했다.
 그 말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주면서도....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자신이 그렇게 원망스러울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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