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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이 백작님. 나인발트 기사단의 지휘권은 당분간 백작님께 맡기겠습니다. 지휘를 부탁드립니다. 서둘러 진군하십시오. 필립군은 제가 반드시 데리고 오겠습니다."

"하지만 혼자서는 무리오!"

"한 사람을 잡기 위해 이런 위급한 상황에서 병사들을 뺄 수도 없지 않습니까? 저 혼자서도 충분합니다. 기사들과 피난민들을 부탁하겠습니다. 가자 이럇!"

필립의 돌발적인 행동으로 귀족 지휘관들은 한동안 패닉 상태였다. 하지만 그 와중에 재빨리 자신의 말을 끌고 달려온 기사단장 사리크는 백작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는 말을 몰았다. 클레이 백작의 답변도 듣지 않은 채 서서히 필립의 달려간 방향으로 사라져 가는 기사단장의 뒷모습. 뒤이어 백작의 딸인 네르바까지 말에 오른 채 그의 앞으로 달려왔다.

"아빠, 나도 따라 가겠어요!"

"네르바 안돼! 위, 위험하다!"

"지금 위험하지 않은 곳이 이 주위에 어디 있어요! 내 걱정은 하지 말고 아빠는 빨리 이동이나 시작해요! 필립은 반드시 끌고 돌아올 테니! 이럇!"

"네, 네르바!"

기사단장에 이어 하나 뿐인 딸 네르바까지 사라지지 클레이 백작은 망연자실한 채 한동안 할 말을 잃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이런 그의 모습을 보다 못한 노장, 듀자크 자작이 그를 향해 충고가 뒤섞인 위로를 하기 시작했다.

"백작님. 네르바양 역시 실력 있는 견습기사입니다. 자기 몸 정도는 지킬 수 있으며, 기사단장님까지 나섰는데 무엇을 그리 걱정하시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군요. 에르드, 린스트 남작의 희생을 헛되이 할 순 없습니다. 어서 진군 명령을!"

자작의 말에 비로소 제 정신을 되찾은 클레이 백작. 서둘러 기사들과 궁수로 이루어진 수비진형을 형성한 뒤 이동명령을 내렸다. 어느새 백작의 얼굴은 진군을 시작할 때와 같이 딱딱한 표정에 긴장감이 서려있는 신중한 지휘관의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이렇게 수많은 사상자를 낸 발사로크 군의 기습 이후 그들의 진군은 다시 시작되었다.



                    *                   *                    *



  정확히 8명. 작센 성의 중심부에 위치한 여신을 기리는 신전. 피와 먼지에 절은 병사들이 자신들을 둘러싼 한 무리의 병사들을 두려움과 분노가 반반쯤 섞인 눈빛으로 노려보고 있다.
대장으로 보이는 뚱뚱한 중년의 남자를 제외하곤 모두가 지친 기색이었다. 그들은 필로스 후작과 기사 미첼을 포함한, 최후까지 성에 남아 항전을 다짐한 수비군이었던 것이다.

"결말이 나지 않았는가 후작."

물샐틈없이 모든 퇴로를 차단한 병사들 사이로 중무장을 한 남자 하나가 그들 가까이 다가온다. 그의 모습을 보며 얼굴을 가린 투구 사이로 희미하게 미소를 짓는 후작. 그 역시 남자를 향해 몇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서로가 서로를 지켜보는 가운데 먼저 말문을 연 사람은 발사로크 군의 총 지휘관이었다.

"필로스 폰 에르네오 후작. 더 이상의 저항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을 터, 이제 그만 검을 내려놓으시는 것이 어떻겠소. 제국의 고귀하신 귀족 치고 꼴이 말이 아니구려."

정중하지만 속에 가시가 돋친 지휘관의 말에 후작은 묵묵히 서 있을 뿐이었다. 발사로크 군에서 터져 나오는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이를 무시하며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는 필로스 후작. 오히려 보다 못한 미첼이 검을 움켜잡고 적 지휘관을 향해 달려드려는 순간, 그를 제지한 것은 후작 그 자신이었다.

"이런 무례한 놈!"

"미첼, 가만히 있거라! 내 명령없이 움직이는 건 용서하지 않겠다."

"……예."

미첼을 진정시킨 후 조용한 손놀림으로 자신의 머리를 감싼 투구를 벗는 후작. 이윽고 땀과 때가 덕지덕지 붙어 시커매진 후작의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적 지휘관의 도발적인 말투에도 불구하고 그를 한번 쳐다 본 뒤 피식 미소를 지어주는 필로스 후작의 모습. 여유로움과 더불어 상대를 압도하는 분위기까지 함께 묻어 나온다. 자연히 그를 향해 비아냥거렸던 발사로크의 지휘관은 어느 순간, 이미 위축되어 있는 상태였다.

'역시 한 영지의 책임자답군, 그 많은 공격으로도 단숨에 성을 함락시키지 못한 이유를 알 것 같구나.'

하지만 결말은 이미 나 있는 상황. 자신의 손짓 한번이면 눈앞의 패잔병들은 순식간에 시체로 변할 것이다. 그러나 그가 이렇듯 우물쭈물 하는 데에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다.
고작 8명이지만……20여명 가량의 병사의 생명이 필요할 지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감. 단순한 느낌이 아닌 수 차례 전투를 겪어 오면서 생겨난 지휘관 나름대로의 감각이 그의 판단을 주저하게 하고 있었다.

"후작, 이제 그만 검을 내려놓으시오. 당신은 충분히 우리 발사로크 공화국을 상대로 용맹과 능력을 발휘했으니 마지막 가는 길은 고통 없이 보내드리리다."

약간 공손한 말투로 바뀐 지휘관은 후작에게 항복을 권고하고 있었다. 물론 항복을 하나, 싸우다 죽으나 그들의 미래를 똑같이 한가지로 귀결될 것이다.
죽음……귀족은 무조건 사형, 평민이라도 귀족 밑에 붙어 저항하였을 때도 역시 사형. 바르디아 제국을 전복시키기 위해 군을 움직이는 발사로크 공화국의 목표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적군 처리 방침이다.

"미안하지만 네놈들이 원하는 대로 호락호락 죽어줄 것 같은가! 끝까지 저항만이 있을 뿐이다!"

"호오…젊은 기사답군, 패기가 넘쳐. 하지만 난 네게 묻지 않았다. 애송아."

"뭣이라고!"

또다시 발끈하는 미첼. 분노로 인해서인지 그의 몸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떨리고 있다. 후작은 이런 미첼의 모습을 보며 남몰래 속으로 한숨을 한번 내쉴 뿐이었다. 미첼로 인해 다시금 긴장감이 높아지는 신전 내부의 분위기.
대치하고 있는 이들의 모습을 대리석으로 조각된 이그니스의 모신(母神). 이나즈는 별다른 감흥이 없다는 듯한 석상 특유의 표정으로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슬슬 마무릴 지어야겠군. 모두들 무사할까 모르겠구나.'

속으로 다짐을 한 필로스 후작은 성을 떠난 피난민들과 병사. 아들 필립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클레이 백작과 그 휘하의 여러 귀족들. 초췌하고 남루한 옷차림의 아이들과 여인들.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이자 언젠가 이 성의 주인이 될 몸이었던 필립까지…….
잠시 동안 회상에 잠긴 채 가만히 있던 필로스 후작이 낮은 음성으로 미첼에게 명령 내렸다.

"미첼경, 투구를 벗게."

"네?"

"투구를 벗으라고 말했네."

"하, 하지만……."

"같은 말을 내가 몇 번을 해야 명령을 실행하겠는가?"

미첼은 갈수록 불쾌하다는 듯이 언성을 높이는 후작의 목소리에 머뭇거리면서 투구를 벗었다. 뽀얀 피부에 아직도 앳된 빛이 역력한 그의 소년 같은 얼굴에 발사로크의 지휘관을 비롯한 군대 전체가 한동안 술렁이기 시작했다.
이런 그들을 한번 사납게 노려본 뒤 후작을 쳐다보는 미첼의 눈에는 의문이 깃들여져 있었다. 후작은 이런 미첼을 응시하면서 입을 열었다.

"저들을 똑바로 쳐다보거라 미첼경."

"네, 알겠습니다 후작님."

대답을 함과 동시에 고개를 돌려 자신들을 포위하고 있는 발사로크 군을 노려보는 미첼. 후작은 그를 조용히 바라보면서 말없이 서 있었다.
천천히 후작의 양손이 그의 머리 위로 올라간다. 이런 후작의 모습을 보며 병사들과 심지어 발사로크 군까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미첼만은 후작의 명령 때문에 여전히 병사들을 노려보고 있는 상태였다.

"미첼경, 저들의 모습을 가슴 깊이 새겨라."

"네, 알겠습니다. 죽는 그 순간까지도 저들의 모습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좋아, 죽는 그 순간까지 그 말을 지키길 바란다. 미첼경, 미안하게 되었다."

"예?"

퍼억∼!!

"우…윽……."

"너같이 젊은 아이를 이 전쟁에서 죽일 수는 없다. 살아 남아서 그 말을 지키고 성을 꼭 되찾거라 알겠느냐 미첼……."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칼등으로 미첼의 뒤통수를 후려갈기는 후작의 양손. 미첼은 제대로 된 비명 한번 지르지 못한 채 쓰러졌다. 그런 미첼을 안쓰럽다는 듯이 바라보며 서있는 후작과 경악한 주변 병사들의 표정. 발사로크 군 지휘관도 후작의 이상한 행동에 할 말을 잃은 상황이었다.

"필, 필로스 후작, 아군인 기사를 공격하다니……당신 지금 제정신인가?"

"당연히 제정신이지."

"그렇다면 지금의 행동은…무엇인가?"

"자네가 그것을 알아 무엇에다 쓰려고 하는가?"

"…………."

후작 특유의 부드럽지만 냉정한 느낌을 풍기는 어조에 발사로크 군 지휘관은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다. 조용해진 상대를 뒤로하고 필로스 후작은 여전히 뜨악한 표정으로 자신과 쓰러진 미첼을 바라보고 있는 7명의 병사들을 향해 명령을 내렸다.

"미첼을 부축하고 모두 무기를 버려라. 모든 무장을 해제하도록."

처음에는 후작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 멀뚱멀뚱 서있던 병사들이었다. 하지만 그의 진중한 눈빛을 보고는 힘없이 무장을 해제하기 시작한다. 발사로크 군 지휘관도 이제는 상황을 이해하고 묵묵히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후작 역시 더 이상의 불필요한 희생을 필요 없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분명 병사들의 목숨을 보장하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다만, 한 성의 성주로써 자기 자신만큼은 적에 투항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발사로크 지휘관은 속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이윽고 병사들의 무장이 다 풀어진 것을 본 후작은 다시 몸을 돌려 지휘관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말을 시작했다.

"여기 있는 병사들과 쓰러진 미첼이라는 기사는 이번 전투동안 당신들의 군대를 지연시키기 위해 성문 앞에 불을 지르거나 주요 통로를 막아놓는 임무만 수행하였을 뿐 그대 쪽의 병사들을 죽이지 않았다는 건 총지휘관인 그대가 더 잘 알 것이라 믿소. 당신의 이들의 생명과 안전, 이 작센 성에서 생활을 영위할 수 있게 보장해준다면 기꺼이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겠소이다."

후작의 말에 발사로크 병사들을 포함한 모두가 조용히 선 채로 지휘관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런 그들을 애써 쳐다보지 않으려 노력하며 속으로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생각하는 지휘관. 특별히 어려운 문제도 아니었지만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하는 문제였기에 생각이 지연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받아들이기 힘든 조건은 아닌 게 분명하군. 그러나 우리 군령은 귀족은 물론 귀족 밑에서 저항한 자는 신분을 막론하고 처형하도록 되어 있다는 것이 우리의 군령이오."

지휘관 역시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받아들일 수 있다는 조건을 내 비추면서도 군령을 예로 들어 상대를 초조하게 만들고, 초조해진 상대를 통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최대한 얻어보려는 수법.
그의 속내를 알아 챈 후작은 대놓고 웃음을 짓고 있었다. 어찌 보면 후작 그 자신이 가장 원했던 일이었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무장을 해제할 필요가 없는 것인가? 마지막으로 병사들의 목숨만큼은 보장해주길 바랬는데 그대가 정 그렇다면 -죽는 그 순간까지 그대의 병사들을 베어 넘기는 수밖에 없군- 유감이오."

"…아, 아니…꼭 그런 뜻은 아니오. 병사들의 목숨과 어린 기사의 목숨 역시 보장해 줄 순 있지만…후작…성의 책임자인 필로스 후작 그대는 항복을 해도 목숨을 보장해 줄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오."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은 후작의 살벌한 말 한마디에 발사로크 군의 지휘관은 적잖이 당황하고 있었다. 상대는 한 성의 주인이다. 젊은 시절에는 단 일격으로 적과의 싸움을 끝장내는 자. 라는 별명으로 '일격의 필로스' 라는 칭호까지 가지고 있었던 무시 못 할 상대. 그가 죽을 각오를 하고 덤벼든다면 자신은 물론 병사들의 희생이 얼마나 될지 걷잡을 수가 없었기 때문.
더군다나 이곳 신전은 소수가 자리를 잡고 적을 막는다면 아무리 숫자가 많은 발사로크 군이라도 이동에 한계가 있다. 때문에 통로가 위축되고 그렇게 되면 후작이 가장 원하는 상황이 올 것이다. 어느새 그의 등에서는 식은땀까지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렇다면 병사들과 기사의 생명과 안전은 확실히 보장해 줄 수 있다는 말인가?"

"그렇소. 그것만큼은 확실히 보장해주겠소. 원한다면 이곳에서 계속 삶을 살수도 있소. 하지만 몇 년, 혹은 평생 감시가 붙어 다닐 수도 있을 것이오. 이 정도는 이해해주었으면 하오 필로스 후작."

후작의 얼굴이 평온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모든 것을 각오한 위축되지도, 흥분하지도 않은 잔잔한 눈빛. 자신의 마지막을 생각하고 있을 지도 몰랐다.

"그 조건을 받아들이기로 하겠소. 하지만 나는 끝까지 저항할 테니 나를 사로잡는 것은 그대들의 몫일 것이오. 모두, 미첼을 부축하고 저들에게로 가라!"

"후, 후작님……."

"너희들은 충분히 할 몫을 다 했다. 이런 곳에서 개죽음을 당하는 것은 영주인 내가 용납 못하니 살아남아야 한다. 더 이상의 이의는 나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하겠다. 어서 저들에게로 가라."

후작의 말에 그들은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기며 느릿느릿 발사로크 병사들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그들의 신변이 확보되는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던 후작은 안전이 확보된 것을 확인 한 후 조용히 검을 뽑는다.
검을 뽑을 때 나오는 섬뜩한 소리. 일순간 후작을 제외한 발사로크 군 전체가 얼어붙은 듯 고요하다. 후작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진 지는 오래. 진지한 눈빛으로 그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전체가 덤비던 개개인이 나와서 나와 결투를 하던 상관하지 않겠다. 작센 성의 성주 필로스 폰 에르네오가 죽을 자리를 오늘에서야 찾았군. 나를 이기면 후작을 벤 공으로 순식간에 지위가 상승할 것이다. 용기 있는 자들은 앞으로 나와라. 내 모든 것을 걸고 상대해주마!"

주변을 울리는 후작의 쩌렁쩌렁한 목소리. 지위 상승이라는 말에 발사로크 군 병사들의 눈에도 이채가 감돌기 시작했다. 후작의 마지막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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