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이 동국과 서국으로 분열된지도 100년. 처음 몇십년간 형제국이라는 미명하에 보내왔던 평화가 거짓이라는 듯이 시작된 동국과 서국간의 전쟁은, 서국의 원정대가 동국의 국경을 침범함으로서 시작 되었다.
서로를 얕잡아보고 서로의 승리를 확신하며 시작된 이 전쟁은 무려 5년 동안 계속되었고, 서국 원정대는 더 이상 원정대의 의미를 잃게 되었다. 그리하여 전쟁 이후 6년째 되는 날에 이르러서야, 서국 원정대는 동국 수도를 코앞에 둔 어마어마한 넓이의 알타하임 분지에 돌입하게 되었고 동국은 그에 원정대에 의해 상당히 넓어진 국경의 경비조차도 포기한 채 알타하임으로 전 병력을 집중시켰다.
알타하임 분지의 아침은 대포의 포격소리로 시작되고는 했다. 밤새 변경된 전선을 따라 적의 돌격만을 간신히 저지시킬 낮은 크기의 목책을 세워 놓으면 그 사이 전진한 서군의 포병대가 관측이 가능해질 정도로 밝아오면 포격을 시작한다. 구경이 작지만 사거리가 긴 경량형 포탄이 여지없이 목책을 박살내고 나면 서군의 병력이 튼튼한 방진을 짜고 돌격. 그리고 동군은 필사적으로 막아내다 어느새 전진해온 서군의 포병대가 전진해 다시 포격이 시작되면 사거리 밖으로 후퇴. 서국에 비해 동국의 대포는 위력, 사거리가 상당히 뒤쳐진 터라 최후의 일전을 각오하고 후방에서 서군의 깊숙한 돌격만을 노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출혈을 강요당하면서 조금씩 후퇴할 수밖에 없는, 알타하임 분지의 전투가 시작된 이후 한달간 똑같을 광경일 터였다.
하지만 오늘은 조금 달랐다. 서국의 포격이 시작되고, 전선에 쌓인 목책들이 부셔져 나가는 장면까지는 똑같을 터였지만 좀더 먼 후방에서 방어진을 짜고 있어야 할 동군은 어찌된 일인지 포격에 의해 흙먼지가 자욱이 일어나기 시작할 때쯤에 이미 전선 가까이에 방진을 짜고 대기하고 있었다. 서군의 포병대가 충분한 사격을 가했다고 판단하고 포격을 중지 했을 때, 동군의 돌격이 시작되었다. 건조한 가을인 탓에 무척이나 뽀얗게 피어오른 흙먼지를 헤치고 나아갔을 때쯤에는, 서군의 돌격 병의 선두와 마주칠 수 있었다. 이미 예견했던 일이기에 동군의 선두에 위치한 총병의 화승총은 일말의 주저함 없이 불을 뿜었다. 귀를 멍멍하게 하는 폭음이 전장 한 가운데를 가르자 갑작스런 동군의 등장에 당황하고 있던 서군의 선두가 순식간에 붕괴해 버렸다.
뒤이어 시작된 창병의 돌격은 이미 선두가 붕괴하여 대열이 흐트러진 서군의 중앙부를 거침없이 꿰뚫었고, 전장은 동군의 우세로 흘러가는 듯 했다.
“후미에 서군 기병대다!”
하지만 어느새 측면을 따라 돌격하던 서군의 기병대가 방향을 틀어 동군 방진의 후미를 거침없이 꿰뚫었다. 기병대의 푸른 깃발이 여지없이 보병들을 뚫고 지나가자, 푸른 깃발의 인도를 받은 서군 포병대의 포탄이 동군 방진의 후미부분에 떨어져 내렸다. 동군의 필사적인 돌진에 서군 보병대가 힘겹게 막아내는 사이, 대포와 서군의 기마병은 동군의 후미를 사정없이 유린했다.
동군 보병의 패색이 짙어졌을 때였을까, 어느 순간부터 포병대의 포격 음이 들려오지 않았다. 서군 기병대 역시 이상함을 눈치 챘는지 쉴 새 없이 휘젓던 동군의 후미에서 빠져나와 포병대가 위치해 있을 고지를 올려 보았다.
가을의 푸른 하늘, 그리고 대포의 아가리에서 뿜어져 나왔을 매캐한 회색 연기. 그리고 그것을 배경삼아 펄럭이는 흰 깃발 가운데에 그려진 검은 페가수스.
잔뜩 지쳐있던 동군 병사들은 그 깃발을 발견하는 순간 환호성을 질렀다.
서군이 병력과 대포성능의 우세에서도 알타하임 분지의 전투를 빠르게 승리로 이끌지 못하는 것에는 필사적인 동군의 방어에도 있겠지만 그 이전에 대륙의 전 국가, 아니 이전 제국시대를 들추더라도 비교할 바 없는 강력한 전력이 동군에 있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바로 기병대. 돌격을 위해 포병대가 전진 배치되면 여지없이 보병의 방어진을 뚫고 포병대를 유린하는 동군 기병대의 존재는 서군의 전진을 더욱 조심스럽게 했고 이는 알타하임 분지의 전투를 열세 속에서도 한 달간이나 버틸 수 있었던 동군의 원동력이었다.
그리고 그 기병대 중에서도 전투력에서 수위를 다투는 기병대가 바로 검은 페가수스 깃발을 상징으로 삼은 제3기병대였다. 일명 천마기병대.
순식간에 포병대가 있던 고지를 점령한 제3기병대는 엉거주춤하게 멈춰선 서군의 기병대를 향해 쏜살같이 돌격해왔고, 말머리조차 제대로 돌리지 못한 서군 기병대는 단 한번의 돌격으로 반수가 궤멸되는 타격을 입었다. 첫 돌격 후 서군 기병대가 전열을 가다듬고 추격을 하려 했지만 반전하기는커녕 크게 원을 그리며 화살을 쏘는 제3기병대의 기동력에 서군 기병대는 얼마 지나지 않아 후퇴할 수밖에 없었고, 서군 보병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 후퇴를 하였다. 알타하임 분지에서의 한 달간 벌어졌던 수많은 전면전 중 동군의 첫 승리였다.
전진한 전선에 맞춰 목책을 세우고 얼마 뒤에 주둔지를 정리하도록 지시한 보병12군단의 단장인 블레임 백작은 후퇴하는 서군을 쫓다 돌아온 제3기병대를 맞이했다. 3백여기 가량으로 이루어진 기병대의 가장 선두에서 말을 몰고 들어온 기병대장은 말에서 내려 투구를 벗고는 블레임 백작에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제3기병대장 루크샤 엘 라드 자작이 인사드립니다.”
남자 목소리라 하기에는 무척 톤이 높은 목소리. 투구를 벗을 때 흘러내린 어깨까지 내려오는 금발. 놀랍게도 제3기병대의 대장은 여성이었다.
블레임 백작은 양팔을 활짝 벌리며 말했다.
“라드 자작, 우리 사이에 무슨 그런 딱딱한 인사란 말이오. 그건 그렇고 이번 천마기사단의 활약은 정말 눈이 부서더군. 이게 다 라드 자작의 뛰어난 지휘력 덕분 아니겠소.”
블레임 백작의 과도한 환대에 라드 백작은 약간 어색해 하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기병대원들 모두가 뛰어난 덕분일 것입니다.”
“으하하. 라드 자작의 겸손함은 정말 어쩔 수가 없군. 그래, 내 긴히 할말이 있으니 잠시 안으로 들어와 주게.”
“예.”
기병대장, 라드 자작은 뒤따라온 부관에게 휴식을 명하고는 블레임 백작을 따라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급조한 천막이었지만 그래도 군단장의 막사답게 바닥에는 카펫이 깔려 있었고 책상과 의자, 한쪽 벽면에는 거울과 따뜻한 김이 올라오는 세숫물이 있었다. 라드 자작은 블레임 백작이 권하는 의자에 앉았다.
먼저 말을 꺼낸 것은 블레임 백작이었다.
“그래, 자네가 겸손해 하더라도 어쨌든 이번 작전의 제안자는 자네지 않나, 라드 자작.”
라드 자작은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후후. 자네의 그런 조용한 모습은 군인으로서는 참 보기 좋긴 하네만, 웃는 얼굴도 좋았었는데 말이지.”
“어렸을 때 이야기 입니다.”
라드 자작의 단호한 대답에 블레임 백작은 쓰게 웃었다. 블레임 백작은 라드 자작이 어렸을 때 밝게 뛰노는 모습을 기억하는 몇안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그래. 옛날이야기지. 요 6년의 전쟁은 참 여러 가지를 바꿔 놓았구먼.”
블레임 백작은 마련된 차를 입에 살짝 대보고는 다시 말했다.
“어쨌든 이번 전투의 승리는 이미 전서구로 황궁에 보고 되었네.”
“예.”
“그리고 황궁에서는 이번 승리를 매우 기뻐하면서 승리 기념 파티를 연다고 하더군.”
“예.”
어차피 수도에 사는 사람들은 6년이라는 세월 동안 벌어진 전쟁을 이미 옆집의 부부싸움 정도로만 인식하고 있는 차에, 황궁에서 파티를 연다는 것이 그리 신기한 일은 아니었다. 라드 자작의 무덤덤한 대답에 블레임 백작은 잠시 헛기침을 했다.
“그리고 이것이 자네에게 온 초청장이네.”
“초청장… 말씀이십니까? 전투중이라 참석은 불가능할 터인데….”
“아니, 이번 파티의 주인공은 자네이니, 아마도 꼭 참석해야 할 것이네. 이건 권유가 아니라 명령일세.”
라드 자작은 블레임 백작을 어이없는 눈길로 쳐다보다 실례임을 깨닫고 시야를 낮추며 대답했다.
“황궁의 명령이군요.”
“그렇다네. 파티는 4일 후에 열리니 오늘 저녁에 바로 출발해서 준비하면 될 것 같군. 내 수도의 저택에 기별을 넣어 놓을 터이니 내 저택에 가서 좀 쉬고 파티에 참석하면 될 걸세.”
“아닙니다. 그러실 필요는….”
“라드 자작, 자네는 수도에 집도 없잖은가. 내 말에 따르도록 하게나.”
“…예. 그리하겠습니다.”
블레임 백작은 고개를 살짝 숙인 채인 라드 자작을 빤히 바라보다가 한숨을 섞어 말했다.
“전쟁 중에 수도로 가서 한가하게 파티에나 참석하는 것이 마땅치 않을 터이지만, 그래도 제국의 영웅이라는 감투를 쓰고 있으니 어쩔 수 없는 것 아니겠는가.”
“….”
라드 자작은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더욱 깊게 숙여 보이고 초청장을 받고 천막을 나섰다.
“이 전쟁이 끝나면 자네가 다시 웃는 모습을 볼 수 있길 바랄 뿐이네.”
천막 밖으로 나선 루크샤는 뒤에서 들려오는 블레임 백작의 말에 잠시 멈칫했지만 다시 걸음을 옮겼다.
다음날 저녁 무렵, 본래 말을 달려도 삼일은 족히 걸릴 거리였지만 기병대로서 다져진 기마술과 체력은 그 거리를 하루 무렵까지 단축시킬 수 있었다. 물론 지나가는 동안 수십번의 검문소가 있었지만 제3기병대장이라는 이름은 이를 손쉽게 통과할 수 있게 하였다.
수도에 도착한 시간은 저녁 시간이었기에 루크샤는 광장에서 조금 시간을 보내고 블레임 백작의 저택으로 향하기로 했다. 아무래도 저녁식사 시간에 찾아가는 것은 손님으로서의 도리가 아니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말의 걸음을 조금 늦추며 주변을 둘러보다, 루크샤는 한 무리의 사람이 모여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저녁 시간에, 이렇게 광장에 모여 있는 사람들이라니, 루크샤는 의아함을 느끼며 말에서 내려 그곳으로 다가갔다.
사람들 한 가운데에는 약간 높이가 높은 단상이 자리하고 있었고, 그 위에는 통통한 몸집에 콧수염을 길게 기른 남성이 정장을 빼입고 올라가 있었다. 라드 자작은 그를 알아볼 수 있었다. 연설과 웅변에 뛰어난 실력을 가진 오웬 남작이었다.
오웬 남작의 연설은 계속되고 있었다.
“지금 저 서국의 더러운 흙발이 우리 제국의 신성한 땅을 더럽히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저 비열한 서국이 점령당한 땅의 제국민들이 고통스러워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자랑스러운 제국군은 결코 패배하지 않을 것입니다. 기필코 저 서국의 병졸들을 무찌르고 서국을 점령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때까지 전쟁을 멈추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그 뒤로도 계속되는 연설의 주요 내용은 전쟁에 찬성하자는 것이었다. 6년간 계속되는 전쟁은 그동안 쌓아왔던 황궁의 재정을 바닥내기에 충분했고, 그에 따라 시민들에 대한 징세가 무거워 지고 있는 터, 전쟁을 반대하는 목소리가 조금씩 나오고 있으니 귀족으로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을 수많은 없었던 것 같았다. 아니면 황궁의 명령이 있었다든지.
지금 최선의 선택은 당장 전쟁을 종결시키는 것이었지만, 같은 귀족으로서, 그리고 군인으로서 그런 말을 입에 담을 수는 없었다. 그때, 루크샤의 바로 옆에 서 있던 청년이 큰 목소리로 말했다.
“그럴 수 없습니다. 더 이상 전쟁이 계속되었다가는 제국 전체가 피폐해질 뿐입니다.”
오웬남작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청년을 바라보았다.
“아니, 그럼 자네는 지금 저 비열한 서국 군대에 점령당한 제국민들을 그대로 두어도 괜찮다는 것인가?”
“아닙니다. 지금 당장 전쟁만 종결시킬 수 있다면 이미 길게 늘어진 서국 원정군의 보급로를 위협하는 것만으로도 6년전의 국경을 충분히 회복시킬 수 있을 겁니다. 긴 전쟁은 이미 제국이나 서국이나 충분히 지치게 만들었고, 서국은 이미 제국 영토 깊숙이 침투한 원정군을 유지시키는 게 고작일 터입니다. 마치 우리가 서국의 진격을 간신히 막고 있을 뿐인 것처럼 말입니다.”
“무엇이? 그럼 우리가 저 서국의 발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한다는 소리인가? 자네 정체가 무엇인가! 혹 서군의 스파이라도 되는 것이 아닌가?”
스파이라는 말에 주변에 모여든 사람들의 시선이 순식간에 흉흉해졌다. 비록 무거워진 징세와 몰려드는 피난민들 말고는 전쟁을 직접 피부에 느끼지 못하는 시민들이라지만, 서국에 대한 분노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지자, 청년은 머뭇거리며 반걸음 뒤로 물러섰다.
루크샤는 가만히 그 모습을 바라보다 한걸음 앞으로 나섰다.
“이자는 제가 데리고 다니는 자입니다, 오웬 남작. 당신의 웅변은 훌륭하지만 함부로 사람을 매도하는 일은 삼가주시길 바랍니다.”
오웬 남작은 자신을 알고 있는 데다, 청년과는 다르게 흉갑을 갖춰 입고 길이가 긴 장검과 망토까지 둘러 입은 루크샤가 평범한 사람이 아님을 직감하고 조심히 물었다.
“그대는 누구시오?”
“제3기병대 기병대장 루크샤 엘 라드 자작입니다.”
루크샤는 그 말과 함께 망토를 살짝 추슬러 등 부분이 앞으로 보이도록 하였다. 오랜 시간 말을 달려 뽀얗게 먼지가 내려앉은 망토의 한 가운데 새겨진 흑색 페가수스는 그녀의 말이 신빈성을 갖게 하는데 충분한 역할을 했다.
“아, 제국의 영웅! 라드 자작을 몰라 뵈었습니다! 부디 무례를 용서하시길.”
제국의 영웅이라, 루크샤는 약간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아닙니다 오웬 남작. 그대의 훌륭한 웅변은 잘 경청하였습니다.”
오웬 남작은 라드 자작이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어 한다는 것을 눈치 채고 말했다.
“예, 길이 어두우니 살펴 가시길 바랍니다.”
루크샤는 자신의 옆에 서 있던 청년을 이끌고, 순식간에 분노의 시선에서 경외의 시선으로 바뀐 시민들의 사이를 빠져 나왔다.
얼마를 더 걸어 인적이 뜸한 골목길에 이르자, 걸음을 멈추었다. 그 뒤를 따르던 청년 역시 마찬가지였다. 루크샤는 뒤돌아서고는 청년을 바라보았다. 사람들 사이에 있을 때는 눈치 채지 못했지만, 가만히 서서 바라보는 청년의 외모는 무척이나 준수했다. 어둠 속에서도 빛나는 짙은 검은 머리를 단정하게 기르고 같은 색의 눈동자로 루크샤를 바라보고 있었다. 단언컨대, 루크샤는 자신의 얼마 안 되는 평생 동안 이 청년만큼이나 잘생긴 남자를 본 적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히 생각일 뿐이었다. 생각을 그대로 표면화시키기엔 루크샤, 그녀가 전쟁 속에서 보낸 6년이란 시간은 무척이나 길었다.
루크샤는 무감정한 눈길로 청년을 바라보며 말했다.
“위험했습니다.”
청년이 대답했다.
“으아, 덕분에 살았습니다. 좀 전에는 어떻게 되는 줄 알았지 뭡니까? 아아. 그나저나 저 유명한 천마기사단의 라드 자작님이 정말입니까?”
청년의 약간 과장된 어투에 루크샤는 약간 꺼림칙함을 느꼈다.
“예. 그렇습니다만. 그쪽은?”
다시 한번 청년은 팔을 과장되게 벌려보이며 대답했다.
“저는 그냥 평범한 청년, 로엔이라고 불러주십시오.”
루크샤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하지만 그것은 평범한 사람에게 허락된 지식은 아니지요. 그럼 이만.”
루크샤가 골목을 벗어나려하자, 로엔이 허둥지둥 앞으로 뛰쳐나와 루크샤의 앞을 막아섰다.
“아아, 은혜도 입었는데 이대로 보내드릴 수는 없죠. 가까이에 샐러드가 무척 맛있는 음식점이 있는데 부디 대접의 기회로 삼아도 되겠습니까?”
“아니요. 은혜를 갚을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수도에 가지고 계신 저택도 없지 않으십니까? 어디 여관에라도 묶는 게 아니시라면 저녁식사시간에 남의 집을 방문 하는 건 큰 실례라구요.”
청년의 말에 대한 루크샤의 반응은 재빨랐다. 허리춤부터 바닥 가까이까지 늘어진, 하지만 망토에 의해 충분히 가려진 기병장검이 순식간에 뽑아져 나와 로엔의 목 언저리까지 와 닿았다. 늘씬한 검신이 골목의 어두운 밤하늘 아래에서도 눈에 확연히 띌 정도로 빛나고 있었다. 약간의 정적. 로엔의 목울대가 약간 움직였다.
“나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지? 넌 정말로 스파이인가?”
가늘게 뜬 옅은 갈색 눈동자가 매섭게 빛나는 모습을 보며, 로엔은 약간 어색한 웃음을 흘려보았다.
“에, 그러니까 그게 말이죠. 가장 확실한건 제가 스파이가 아니라는 것이겠네요.”
목에 얹어진 칼날이 살짝 당겨졌다. 로엔은 목에서 따끔거리는 통증이 몰려오자 화들짝 놀라서 대꾸했다.
“그, 그러니까 제가 여동생이 있는데 말입니다,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천마기사단장은 수도 여성들의 우상 같은 거라, 이 말이죠. 제 동생이 자작님의 신변잡기까지 줄줄이 꿰고 있는데 매일 상대하는 저도 고역이라서 말이죠. 그, 그래서 이번 이야기를 동생에게 들려주려고….”
그 이후로 몇 분정도 괴상망측한 변명을 읊어대었다. 루크샤는 눈썹을 한껏 모으고는 검을 치워보였다.
“후….”
얕은 한숨. 로엔은 그것이 자신의 목숨을 살려준다는 것인지 저녁 식사 초대에 응하겠다는 것인지 잠시 고민해 보았다.
“그럼 그 식당으로 안내해 주시길 바랍니다.”
다시 무표정하게 돌아온 얼굴과 딱딱해진 말투. 로엔은 약간 아쉬운 감정을 품고는 아직도 따끔거리는 목을 문지르며 성큼성큼 앞장섰다.
과연 식당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수저 비슷한 모양의 나무 조각이 문 앞에 걸려있는 것만으로 간신히 구분해낸 식당 안은, 낡은 외관과는 다르게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고, 사람도 제법 많았다. 수도에서 고작 삼. 사일 거리에서는 목숨을 건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지만, 수도에서 외식은 이미 유행처럼 번지고 있었다.
로엔은 간신히 구석에 비어있는 테이블을 발견하고 루크샤를 안내했다. 주문이 간단했기 때문에, 둘은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맛있다는 샐러드와 스프가 앞에 놓여져 있을 수 있었다. 식사는 느릿했다. 로엔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떠드느라 그것들을 입에 넣을 생각이 없었고, 루크샤는 건성으로 대답하며 하루 넘게 달려온 덕에 피곤해진 몸을 쉬게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루크샤가 피곤해 보이는 것을 눈치 챈 것일까, 로엔은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로엔이 입을 다물자 오히려 루크샤는 그런 로엔을 궁금하게 여기며 쳐다보았다. 로엔은 포크로 샐러드를 휘적이다 다시 입을 열었다.
“자작님은 좋겠습니다. 자신의 뜻을 실천할 힘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힘이라.”
루크샤의 대답은 곧장 나왔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기에 로엔은 의외라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뜻을 실천한 힘이라는 것은 저 어리석은 오우거도 가지고 있는 것이지요.”
“풋, 푸하하하!”
로엔은 입에 반쯤 물고 있던 샐러드를 뱉어내며 신나게 웃기 시작했다. 루크샤는 그런 로엔에게서 약간 거리를 벌리기 위해 상체를 뒤로 빼면서 이어 말했다.
“하지만 당신은 힘이 없어도 뜻한 바를 행할 용기를 가지고 있지 않나요.”
“크큭. 크크크큭!”
그러다 샐러드가 목에 걸렸는지 끓는 소리로 간신히 웃음을 참던 로엔은 루크샤의 말에 간신히 숨을 몰아쉬며 대답했다.
“그러는 용기는 저 한심한 오크도 가지고 있는 게 아니던가요.”
이번엔 루크샤의 차례였다. 루크샤는 풋, 하고 살짝 웃음지어 보였다. 딱딱한 얼굴에 갑작스럽게 번진 웃음기를, 로엔은 멍하니 바라보다 말했다.
“우와, 제가 그렇게 재밌는 이야기를 많이 했는데 처음 웃었다구요?”
“그런가요?”
루크샤는 이 청년이 제법 마음에 들었다.
밤늦게 블레임 백작의 저택에 방문한 루크샤를 맞이한 하인들은 제법 분주했다. 전서구를 통해 언질을 받았지만 이리 빨리 루크샤가 도착할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푹 쉬고 싶던 루크샤의 계획은 하인들의 방정리가 끝날 때 까지 응접실의 푹신한 쇼파에 몸을 살짝 기대는 것으로 만족 할 수밖에 없었다.
파티 당일, 루크샤는 흰색 바탕에 검은 페가수스가 그려진 기병대 예복과 검은 망토를 입고 저택을 나섰다. 집사가 마차를 부르려 했지만 거절한 루크샤는 그리 멀지 않은 황궁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전쟁 내내 말 위에서 생활하던 차였기 때문에, 오히려 이렇게 발을 땅에 디디고 걷는 것이 마음을 평안케 했기 때문이었다.
황궁으로 향하는 널따란 길은 제법 조용했다. 서민가와 조금 떨어져 있는 탓이기도 했고, 대부분 황실 주최 파티에 참석하기 위해 마차를 달리거나 이미 황궁에 들어가 있기 때문이었다. 가끔 지나가는 마차 소리 외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던 대로에서 일단의 말발굽소리가 들려왔다. 쇠굽과 돌바닥이 부딪히는 소리의 묵직함에, 루크샤는 고개를 돌려 소리가 나는 곳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여섯 필의 말과 중장갑을 입고 있는 기병들이 타고 있었다. 흉갑을 제외하고는 어깨, 허벅지 보호대가 전부인 경기병과는 확연히 다른, 거의 전신을 철판으로 감싼 갑옷의 무게에 말굽소리가 묵직한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여섯필의 말은 곧 루크샤의 앞에 다다랐다.
“이거 천마기병대장 라드 자작 아니신가.”
“후크 백작님.”
루크샤는 상대를 알아보고 고개를 숙여 보였다. 숙인 고개 위로 따끔한 시선이 내리꽂혔다.
“그래 이번 파티의 주인공이 어찌 이리 단촐 하게 걸음하고 있단 말인가?”
“혼자 걷고 싶어 주위를 물리친 것일 뿐입니다.”
“그런가. 그럼 계속 걸어오시게나, 나와 부하들은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약간 조롱기가 석인 말투. 루크샤는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약간 더 숙였다. 한참 그런 루크샤를 내려보단 후크 백작은 뒤따라오는 기병들을 이끌고 다시 황궁으로 말을 몰았다.
과거 봉건시대의 기사대에서 이름과 갑옷을 물려받은 중기병대가 소모품 취급을 받던 병사에서 출발한 경기병대를 자기들과 같은 선에 놓는 것을 좋아할 리 없었다. 자신들이 중기병임을 과시하기 위해 언제나 중갑을 입는 힘겨운 일을 마다하지 않는 후크백작이 그러한 경기병대의 대표 격인 루크샤를 좋게 보지 않음은 당연했다.
느린 걸음으로 황궁에 도달했을 때는 이미 파티가 시작된 후였다. 파티의 주인공이 루크샤, 그녀 자신이라지만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파티 자체이지 주인공이 누구냐는 아니었으니까. 그저 참석해서 생색만 내주면 끝이리라.
하지만 그것은 순전히 그녀의 착각이었다. 언제나 바쁜 직업인들이나 언제 죽을지 모르는 전쟁터의 군인과는 다르게, 수도의 귀족들은 무엇인가 즐길 수 있는 것들이 필요했고, 그런 그들에게 현재 동국의 시민들에게 영웅으로 추앙받는 라드 자작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루크샤의 도착을 알리자마자 순식간에 관심이 쏠리고, 루크샤의 주변으로 아름답게 드레스를 차려이은 귀족여인들이 몰려들었다. 여자의 몸으로 한 부대를 이끄는 지휘관의 자리에 올랐다는 사실은 기실 남자보다는 여자들이 더욱 관심 갖기 마련이었고, 루크샤 주변에 모인 사람들 중에 남성들은 그러한 여인들의 관심을 끌기 위함일 뿐인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은 관심을 뿐이었고, 음악이 흘러나오자 남자와 여자들은 서로 짝을 지어 춤을 추기 시작할 때쯤에는 루크샤의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드레스 차림도 아닌 경무장의 제복 차림인데다, 여자의 몸이니 어느 쪽에서도 춤 신청을 해오기가 힘들었던 탓이었다. 그런 루크샤의 시야에 이곳 황궁에 오기 바로 전에 만났던 중갑의 병사들이 눈에 띄었다. 그들 중에는 후크 백작도 있었는데, 그들의 중갑 역시 춤을 추기에는 그다지 편한 복장은 아니었는지 구석에서 마치 이 모든 귀족들을 보호하는 것처럼 주변을 향해 눈을 부라리고 있었다. 물론 후크 백작이 루크샤와 눈이 마주칠 때 마다 약간 째려보는 것을 잊지는 않았지만.
한창 춤의 열기가 피어오르고 있을 때, 홀의 입구에서 왕자와 공주의 입장을 알려왔다. 홀 정 중앙에서 피어오르던 춤의 열기가 순식간에 사그라지며 귀족들이 모두 입구를 향해 고개를 조아렸다. 루크샤 역시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비록 보이지는 않지만 한손을 가슴에 얹고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비록 남자의 예절이었지만 제복에 어울리는 예절이 이것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약간 시간이 흐르고, 홀에서 유일하게 차가운 대리석바닥을 울리는 걸음소리가 루크샤 앞에서 멈춰 섰다. 가벼운 발걸음은, 여성의 것이 분명했다.
“고개를 드세요, 라드 자작.”
여린 여자아이의 목소리. 루크샤는 고개를 살짝 들어보였다. 이제 갓 열 살 정도가 되었을까, 까만 머리카락의 어린 여자아이가 루크샤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루크샤는 어디선가 본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실례가 되지 않도록 살짝 시선을 낮추었다.
“그대가 제국의 영웅, 천마기병대장 루크샤 엘 라드 자작이 맞나요?”
“황녀전하, 비록 영웅의 칭호는 과하나 제가 기병대장이라는 것은 사실이옵니다.”
루크샤의 부드러운 대답에 공주는 눈을 반짝이며 루크샤의 손에 자신의 손을 포개며 말했다.
“예전부터 라드 자작의 소식은 언제나 저의 즐거움 이었어요. 이렇게 만나서 정말 기쁩니다.”
공주의 과도한 친밀함에 당황한 것은 오히려 루크샤였다. 루크샤는 공주에게 잡힌 손을 함부로 빼지도, 그렇다고 그대로 두지도 못하여 어쩔 줄을 몰랐다.
“로라. 라드 자작님이 곤란해 하시잖니?”
루크샤는 그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그 목소리가 너무도 익숙한 탓이었다. 루크샤의 시선이 닿는 곳에는 까만 머리의 공주와 꼭 닮은 모습의 왕자, 로엔이 서 있었다.
“맙소사.”
루크샤는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낮은 목소리로 탄식했다.
다시 음악이 연주되었을 때에는 루크샤는 홀에 있지 않았다. 왕자와 공주가 귀족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덕에, 루크샤는 파티장을 손쉽게 빠져나올 수 있었다.
루크샤는 망토를 살짝 추스르며 정원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겨울이 가까워진 싸늘한 날씨에 의자역시 제법 차가웠다. 입을 벌려 내쉬는 숨조차도 희어지는 날씨. 과거의 6년이 그렇듯 이번의 겨울역시 제법 괴로워질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루크샤의 옆쪽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살짝 긴장해버린 근육을, 이곳이 황궁이라는 사실을 상기해내며, 몸에 가득 들어찬 긴장을 조금 삭히며 인기척이 난 곳을 바라보았다.
까만 머리, 준수한 외모. 로엔이었다.
“황자 전하를 뵈옵니다.”
루크샤는 자리에서 일어나 예법에 어긋나지 않는 정중한 몸동작으로 로엔에게 인사를 했다.
“어, 음. 라드 자작, 이런 곳에서 만나게 되었군요.”
루크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런 루크샤를 바라보던 왕자가 한숨을 쉬며 옆에 놓인 의자에 앉으려고 하자, 루크샤는 두르고 있던 망토를 벗으며 말했다.
“겨울이 지척인지라 의자가 싸늘하옵니다. 잠시.”
사심 없이 신하로서 왕족에게 가지는 깍듯한 예의. 로엔은 망토가 깔끔하게 놓인 의자를 빤히 바라보다가 픽, 하고 새는 소리를 내며 그곳에 앉았다.
“이거 뭔가 거꾸로 되었군요. 원래 레이디가 앉을 의자에 손수건을 깔아주는 것은 신사의 도리였던 것 같은데 말이죠.”
“말을 낮춰주십시오 황자전하.”
로엔은 루크샤의 딱딱한 대답에 질린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로엔이 말했다.
“음 저 라드 자작, 이전에 공원에서 만난 것처럼 편하게 대해도 됩니다.”
“그때의 무례를 벌하시겠다면 달게 받겠습니다.”
“으윽.”
도저히 들어갈 틈이 없는 대답. 로엔은 그런 루크샤의 모습에 약간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그때 라드 자작이 웃는 모습은 참 예뻤는데, 지금은 그렇게 딱딱한 얼굴이군요.”
루크샤는 대답하지 않았다. 로엔은 다시 한번 한숨을 쉬고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내일 저녁에 황궁에서 군 수뇌부들과 작전회의가 있을 겁니다. 라드 자작도 참석하세요.”
“예, 황자전하.”
높낮이가 없는 음색. 그 목소리조차 가늘지 않았다면 도저히 여자의 대답이라고는 상상도 못했으리라. 시야에서 로엔이 사라지자, 그때까지 숙이고 있던 고개를 살며시 들며, 의자에 아직도 온기를 머금고 있는 망토를 챙겨들었다. 루크샤는 살짝 가라앉은 눈길로 손에 들린 망토를 바라보았다.
다음날, 루크샤가 블레임 백작의 저택에서 눈을 떴을 때는 약간 늦은 아침이었다. 본래 새벽에 일어나는 버릇이 있었지만 밤이 깊어질 때까지 계속된 파티에 피로해진 덕에 조금 늦게까지 잘 수밖에 없었다. 결국 아침식사를 부탁하기에는 너무 늦어 실례할 수는 없다는 생각에 일찌감치 저택을 나섰다.
저녁에 황궁에 들어갈 때 까지 어딘가 볼일이 있다거나 한 것은 아니었지만, 파티 이전 몇 일간 저택에서만 머물렀기 때문에 수도를 돌아볼 요량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루크샤의 계획은 얼마 걷지도 않고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루크샤의 앞을 떡하니 가로막고 있는 로엔, 왕자의 존재 때문이었다. 루크샤는 몸을 굽혀 예를 표했다.
“황자전하. 어찌 수행원도 없이 이런 곳에….”
그런 루크샤의 행동에 로엔은 당황하며 루크샤를 일으켰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보는 사람이 있는지 살펴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 그, 잠행 중이랄까요, 라드 자작. 잠행. 잠행 알죠?”
“예, 그렇지만….”
“음. 그 잠행 말이죠.”
“하지만 어찌 수행원도 없이?”
“어, 그러니까….”
잠시 고민하는 것 같은 로엔. 왕자의 이상한 행동에 루크샤는 눈썹을 살짝 치켜세워 보였다.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로엔은 짐짓 몸을 꼿꼿이 하고 근엄한 목소리를 내어 보였다.
“루크샤 엘 라드 자작.”
“예 황자 전하.”
“그대가 오늘 나의 수행원이 되어주어야 하겠습니다.”
“…예?”
“그러니까 황자라고 하지 말고 로엔이라고 불러줘요. 알겠죠?”
루크샤는 이 상황을 정리할 약간의 시간의 필요성을 느꼈다.
결국 왕자의 청을 거절할 수 없는 루크샤는 로엔이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호탕한 웃음을 토해내며 앞장서는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작위 수여식 때 말고는 단 한번도 오지 못했던 수도를 돌아보려던 계획을 취소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 계획은 그대로 이루어졌다.
루크샤의 행선지를 정할 권한을 가진 로엔이 가고 싶어 했던 곳이 바로 수도 구석구석이었으니까.
왕자가 그 수행원에게 대하는 태도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사근사근하게 대해오는 로엔에게, 루크샤는 조금 당혹스럽기는 했지만 잠행이라고 얼버무리는 왕자의 말에 어느 정도 동조 할 수밖에 없었다. 이를테면,
“루크샤, 아침은 먹었나요?”
거짓말을 할 수는 없기에 약간 머뭇거리는 루크샤의 태도에 로엔은 곧바로 다음 말을 꺼냈다.
“그럼 우리 아침식사부터 하는 게 어때요? 좀 걸어가면 아주 맛있는 빵집이 있거든요. 거기는 아침마다 새로 빵을 굽는 다구요.”
“황자전하, 저 때문에 시간을 빼앗기실 필요는 없습니다. 부디 저는 신경 쓰지 마십시오.”
이번엔 지지 않고 대답하는 로엔.
“아니 그래도 황자라고 하네요.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요? 그냥 로엔이라고 불러요. 그리고 명색이 군인이라는 사람이 끼니를 걸러서야 제대로 힘쓰겠어요?”
결국 루크샤는 한 마디 대답하면 두 마디로 몰아붙이는 로엔에게 그가 하자는 대로 이리저리 끌려 다녀 버리게 되었다..
물론 끌려 다닌다고 표현하기는 했지만, 본래 살던 고향의 적막한 시골동네의 풍경, 그리고 그 다음으로는 시체위에 까마귀가 내려앉은 잔인한 전쟁터의 풍경만 보아온 루크샤 로서는 활기차고 시끌벅적한 수도의 모습을 제대로 둘러 볼 수 있었다.
그것이 로엔이 의도한건지는 모르겠지만.
겨우 오전 시간 만에 수도의 절반을 돌아다닌 루크샤와 로엔은 광장에 이르러서 잠시 쉬기로 결정했다. 물론 훈련으로 체력이 다져진 루크샤가 겨우 걷기 몇 시간으로 지칠 리가 없었으므로, 이는 전적으로 로엔의 결정에 의한 것이다. 살짝 지친 표정을 내보인 로엔이 광장에 놓여져 있는 벤치에 앉았다.
“어, 루크샤도 앉아요. 서있으면 안힘들어요?”
“힘들지 않습니다. …로엔.”
“그러지 말고 앉지요.”
“명령이시라면.”
딱딱한 말투에 이어 약간 거리를 두고 앉는 루크샤의 옆모습을 바라보던 로엔이 문득 말했다.
“이렇게 나란히 앉아있으면 다른사람이 어떻게 볼까요?”
“…?”
잠시 생각하던 루크샤가 무언가 대답하려고 입을 여는 순간 로엔이 황급히 다른 말을 꺼냈다.
“저기 사탕을 파는군요. 기다려요 제가 좀 사올게요.”
“제가 사오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서려던 루크샤의 어깨를 잡아 내리며, 로엔이 말했다.
“좀 쉬고 있어요. 제가 사올게요.”
보좌관으로서 그럴수 없다고 말하려던 루크샤는 어딘가 굉장히 단호해 보이는 로엔의 눈빛에 말을 삼키며 자리에 앉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로엔은 노점상에서 희뿌옇고 반투명한, 동그란 알이 나무막대에 매달린 사탕을 가지고 왔다. 다 큰 어른 둘이 공원에 나란히, 그것도 한명은 제국군인의 제복을 차려입고 사탕을 들고 있는 모습은 약간 어색하기까지 했다.
루크샤는 손에 들린 사탕을 빤히 내려보았다. 로엔은 그런 루크샤의 반응을 조심스럽게 바라보았다. 한참을 사탕을 바라보던 루크샤가 입을 열었다.
“어렸을 때….”
루크샤는 손을 들어올렸다. 표면이 반질반질한 사탕이 햇빛을 조금 반사해 반짝였다.
“어렸을 때는 계속 제국의 변방에 살았었습니다.”
루크샤의 이야기였다.
어린 나이의 소녀들이 으레 그렇듯 저 역시 수도를 구경하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예쁜 옷을 입고 멋진 왕자님과 춤을 추는 것 같은, 말이지요. 하지만 사정이 그렇게 좋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제 아버지께선 폐하의 군대를 이끌고 변경을 방어하는 임무를 맡고 계셨기 때문에 쉽게 자리를 비울수가 없었습니다. 거기다 제가 태어날 즈음해서는 서국의 도발이 상당히 심해졌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을 테지요.
아버지께서는 저 외에 다른 후사가 없으셨기 때문에 저는 거의 반 강제적으로 군인으로써 가져야할 여러 가지에 대해서 배우게 되었습니다. 기본적인 용병술부터 지휘자가 가져야할 덕목까지…. 어쩌면 당신께서는 지금 이런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셨는지도 모릅니다.
어렸던 저 역시 그 의미를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다른 또래들이 뛰어노는 모습이 그렇게 부러울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죠. 수도에 다녀온 어떤 아이가 그곳에서 사온 사탕을 들고 온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자랑을 하던 모습을 봤습니다. 한입 넣고 행복해 하는 아이들의 표정이 그렇게 부러울 수 없었습니다. 저는 아버지께 한달음에 달려가서 사탕을 사달라고 졸라댔지요. 하지만 이미 귀족으로서, 군인으로서 가져야할 예절에 대해 배우고 있는 제가 그렇게 떼를 쓰는 모습이 보기 좋지 않으셨나 봅니다. 평생 동안 그때만큼 크게 혼난 적이 없었죠. 그래서 저는 결심했었습니다.
나이가 차 홀로 수도에 갈 수 있게 되면 꼭 사탕을 사먹겠다고. 어렸기 때문에 생각할 수 있는 희망사항이었겠지요.
하지만 나이가 차고 나서는 그러할 수 없었습니다. 본격적인 서국의 도발이 시작되었고 폐하의 부대가 모두 규합되어 정규군으로 다시 재편되었기 때문에, 저는 아버님의 부관 자격으로 전쟁에 참여했습니다. 그리고 6년간 쉬지 않고 계속된 전쟁에 사탕 같은 것은 떠올릴 수 없었죠. 아마 지금 생각해 보면 단지 사탕이 먹고 싶었던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저 수도에 가보고 싶다는 희망이 비뚤어지게 표현된 것이겠지요.
그리고 그리운 눈길로 손에 쥔 사탕을 내려보는 루크샤의 눈빛은 그 어느 때 보다도 차분한 빛이었다. 잠시의 침묵. 루크샤는 그제야 자신이 누구에게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깨닫고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여보였다.
“죄송합니다. 주제넘게 사적인 이야기를….”
로엔은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그렇지만 말이죠.”
로엔은 가볍게 숨을 들이쉬며 말했다.
“지금 수도에서 멋진 왕자님과 함께 있잖아요?”
황당한 대답에 루크샤가 시선을 들어 로엔을 바라보았다. 로렌은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활짝 웃고 있었다.
“음, 예쁜 옷을 입고 있는 건 아니지만, 지금 수도에 있고 어, 제 입으로 말하긴 좀 부끄럽네요. 어쨌든 멋진 왕자님과 함께 있잖아요?”
그러면서 한쪽 눈을 찡긋거리는 로엔의 모습에 루크샤는 그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 이후 저녁이 되기까지 로엔은 루크샤의 웃는 모습을 무척이나 자주 볼 수 있었다. 그동안 전쟁터에서 잃어버린 웃음을 보상하듯이, 사소한 것에서도 밝게 웃음을 터트리는 모습에 로엔은 왠지 모르게 스스로가 기분이 좋았다.
어느덧 오후역시 지나고 저녁시간이 되었다.
“음, 이쯤에서 헤어지도록 하죠.”
“하지만 로엔, 저는 보좌관 자격으로….”
이젠 제법 부드럽게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루크샤를 흐뭇하게 쳐다보던 로엔이 대답했다.
“에, 하지만 황궁을 몰래 빠져나온 입장이라 당당하게 들어가기는 좀 그렇네요. 그럼 나중에 회의 시간에 보도록 하죠.”
크게 손을 흔들며 멀어지는 로엔을 향해 고개를 숙여보이려던 루크샤는 잠시 멈칫한 다음에 어색하게 손을 들어 살짝 흔들어 보였다.
통보받은 시간에 황궁에 도달한 루크샤는 황궁 안 분위기가 상당히 어수선해진 것을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신분을 밝히고 황궁 내부로 들어온 루크샤는 경비병의 안내를 받아 거대한 회의실로 들어갔다. 하지만 웬걸, 아직 통보받은 회의시간이 되려면 한참의 시간이 남았지만 이미 회의실은 군 수뇌부들로 가득 들어차 있었다. 어쩔줄 모르는 루크샤를 향해 누군가가 말했다.
“왔군 라드 자작. 급한 일로 회의가 앞당겨졌으니 개의치 말고 자리에 앉게.”
워낙 심각한 얼굴들이라 루크샤는 이유도 묻지 못하고 제일 말석에 자리했다.
“그럼 이미 들으신 분들도 계시겠지만 다시 한번 방금 전서구로 도착한 내용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때, 상석 근처에 자리하고 있던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나 손에 쥔 종이를 몇장 넘겼다.
“어제 새벽, 제국군 보병8군단이 궤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었습니다.”
8군단이라면 알타하임 분지에서도 가장 중앙의 방어를 담당하던 군단일 터였다. 거기다 분지내 몇 안되는 튼튼한 요새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궤멸이라니? 루크샤는 떠오르는 의문을 뒤로하고 다음 이어질 내용에 귀를 기울였다.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대규모 부대로 요새를 포위하고 장거리포를 쏟아 부으며 참호를 파서 조금씩 전진해 중량형 포탄의 사거리에 이른 서군이 일제히 포탄을 쏘아대서 외부 방어벽이 손쉽게 무너졌고, 그럼에도 끝까지 분전하던 8군단은 심대한 타격을 받고 후방으로 간신히 후퇴했습니다.”
“하지만 제국의 자랑인 기병대가 있었을 터인데 그리 손쉽게 당했단 말인가?”
“8군단과 작전연계를 담당하던 제2기병단은 통째로 전멸했습니다.
“뭐, 뭣?!”
이번에는 루크샤 역시 차분하게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다른 수뇌부들과 마찬가지로 루크샤 역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기병대의 전멸? 루크샤가 이끄는 독립 기병대와는 달리 기병단은 수천에 이르는 대규모 기병을 거느리고 있었고, 거기다 제2기병단이라면 기병 모두가 중장갑을 착용해 높은 전투력을 보유한 부대였을 터였다.
“마법입니다. 어째서인지 이제까지 중립을 지키던 상아탑에서 서군에 마법사를 파견한 모양입니다. 포병대를 향해 돌진하던 기병대는 하늘에 떠오르는 불덩어리를 보고 그곳을 향해 방향을 틀었지만 이미 포진하고 있던 포병대에 타격을 입고 곧 이어서 떨어져 내린 마법에….”
자리에 서서 손에 쥔 서류를 읽어가던 자가 말을 끝맺지 않았지만 그 뒤의 이야기는 모두의 뇌리에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런데 어째서 상아탑에서? 그들은 전투에 투입된 마법사가 죽어도 전혀 개의치 않다는 말인가? 상아탑이라는 이름이 울겠군!”
“약간의 첩보와 추리에 의하면 아마도 마법사의 절대적인 생존과 상당한 보상을 약속한 것 같습니다. 척후병의 정보에 따르면 상당수의 보병부대와 포병부대가 마법사를 호위하기 위해 같이 움직이는 것 같았습니다. 마법의 사거리가 생각 외로 굉장하기 때문에 방어에 유리한 고지에 위치해 대 부대의 호위를 받으면서 중요한 순간에 마법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것만으로도 이미 전선 대부분이 붕괴직전의 상태에 이르고 있습니다. 아마도 하루에 두세 번 이상 사용은 불가능한 것 같지만 그것만으로도 전혀 방비대책이 없는 제국군으로서는 심각한 피해가 발생할 수밖에 없습니다.”
할말이 끝났는지 사내는 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회의장에 모인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하지만 모두의 생각은 같았다. 대부대의 호위를 뚫고 어떻게든 마법사를 처치해 버리면 아무리 큰 보상을 약속한다 하더라도 상아탑은 마법사를 거둬들일 것이다. 금은보화의 가치보다도 그들은 마법사를 중요시하기 때문이었다. 엄청난 금액을 약속한다 하더라도 목숨이 위험할 확률이 있다면 발을 빼낼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어떻게?
그 때, 회의장 구석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루크샤였다.
“좋은 생각이 있습니다.”
좀 전에 루크샤에게 자리를 권했던 자가 말했다.
“오오. 제국의 영웅 라드 자작이 아닌가. 이야기해 보시게.”
루크샤는 잠시 뜸을 들이다 말했다.
“지금 이곳에 모인 모든 분들과 생각이 다르지는 않습니다. 아마도 서국에는 저 마법사들이 마지막 패일 것입니다. 저번 제국군의 승전으로 궁지에 몰린 서국이 마지막 패를 꺼내든 것이 분명합니다. 즉, 큰 손실을 감안하더라도 기병으로 적의 방어부대를 뚫고 마법사를 처치할수만 있다면, 그래서 상아탑에서 마법사 지원을 중단만 한다면 사기가 극도로 떨어진 서국을 상대로 당장 전투는 물론 알타하임 전체에서의 승리도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어떻게’ 였다.
“정보에 따르면 그들은 마법사 호위를 위해 눈속임 부대를 두고 있을 정도입니다. 마법이 발동되어 눈에 포착할 수 있을때 까지는 마법사가 어디에 존재하는지도 불투명합니다. 그 사이에 호위부대를 뚫고 마법사에 도달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은 없습니까?”
루크샤가 대답했다.
“간단합니다. 해답은 경기병에 있습니다.”
순간 회의장 구석에서 ‘쾅’ 소리가 나며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라드 자작! 그 이야기는 중기병대는 불가능하다는 소리인가!”
고함소리는 후크 백작이었다. 가뜩이나 중기병인 제2기병단의 전멸로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던 후크 백작은 루크샤가 ‘경기병’을 언급하자 발끈해서 외친 것이었다. 루크샤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경기병은 중기병보다 좀더 빠르게 마법사에게 접근할 수 있을 것입니다. 빠른 속도는 포병과 총병, 궁병의 조준을 힘들게 할 것이고, 장갑이 부족한 경기병이라 할지라도 경쾌한 움직임은 산병의 방어를 적절하게 돌파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방패병들의 방어진을 돌파하는 것은 이미 경기병으로도 몇 번이나 실행해 보았던 것입니다.”
“물론 중기병보다 빠르게 마법사에게 도달할 수 있겠지. 마법이 완성되기 전에 말이야! 하지만 그렇다면 경기병이 살아 돌아올 수 있을 것 같나?”
루크샤는 내리깔고 있던 눈을 들어 후크 백작과 시선을 마주쳤다. 무서울 정도로 담담한 눈동자였다.
“당연히 대부분, 아니 모든 경기병이 목숨을 내놓아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실패할 수 없는 작전입니다. 이것이 실패한다면 제국은 알타하임 전쟁에서 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잔뜩 흥분해 있는 후크 백작 옆에 조용히 앉아있던 사내가 나지막히 물었다.
“하지만 사지로 뛰어들 지휘관이 누가 있겠나?”
루크샤는 곧바로 대답했다.
“제가 하겠습니다.”
그때 루크샤의 뒤쪽에서 외침이 터져 나왔다.
“안돼! 불허한다!”
“황자전하를 뵙습니다.”
회의장의 모든 사람이 기립해 방금 회의장으로 들어온 사람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로엔, 바로 황자였다. 로엔은 씩씩거리며 루크샤에게로 다가왔다. 루크샤는 고개를 숙인 채로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 작전은 불허다!”
루크샤는 대답하지 않았다. 로엔은 그것이 완곡한 거절의 의미임을 눈치 챘다. 주변의 시선은 오히려 그런 황자의 태도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눈빛이었다. 수세에 몰린 제국군이 이 위기를 벗어나려면 루크샤의 주장대로 당장의 최선책임을, 영민한 황자 역시 알고 있을 터였다. 거기다 자원까지 하는데 불허라니?
모두가 찬성하는 작전. 로엔은 피부가 찌릿할 정도로 모아진 시선을 느끼며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인 루크샤에게 말했다.
“좋다. 라드 자작, 그 건에 대해 집무실에서 좀더 이야기를 하도록 하지. 따라오도록!”
잔뜩 화가 실린 어투. 루크샤는 거칠게 몸을 돌려 회의실을 나가는 로엔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어째서지?”
루크샤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곳은 로엔의 집무실이었다. 한쪽은 고급스럽게 양장된 책들로 빼곡히 들어차 있었고 밖으로 향하는 벽은 큼직한 창문이 자리해 저녁임에도 촛불 빛이 무색할 정도로 밝은 달빛이 들어차 있었다.
그 집무실 안에는 루크샤와 로엔, 단 둘 밖에 없었다.
“어째서 굳이 라드 자작, 그대의 목숨을 내놓으려 하는 거지?”
“목숨을 담보로 한 작전을, 발안자인 제 자신이 하지 않는 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명령해도 되지 않나?”
그 말에 루크샤는 무례임을 알면서도 로엔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저는 뜻을 실천할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그것을 행할 용기도 가지고 있지요. 그럼에도 그것을 회피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것이 제가 배운 귀족으로서, 군인으로서의 자세입니다.”
“힘은 오우거도 가지고 있고 용기는 오크도 가지고 있다! 내말은…!”
로엔은 다음 말을 내뱉으려다 잠시 머뭇거렸다. 빤히 마주쳐오는 루크샤의 시선을 부담스럽게 회피했다.
“왜 하필 너여야 하냐는 거다.”
로엔의 말은 조금씩 낮아져 마지막 말은 귀를 기울여야만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루크샤는 그런 로엔을 바라보며, 집무실에 들어온 이후로 처음으로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짧은 시간 보아온 그 어느 때 보다도 밝고, 눈부신 미소. 로엔은 그런 루크샤의 미소를 처음과 마찬가지로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것은 제가 정의를 믿기 때문입니다. 로엔.”
“정의라니, 그런 시대에 뒤떨어진 궤변을 믿으라는 건가?”
부드러워진 루크샤의 어투에 반론하는 로엔의 목소리는 여전히 작았다. 그런 로엔을 향해, 루크샤는 얼굴 가득하게 자부심을 머금고 대답했다.
“자신의 가슴이 진정으로 선하다고 믿는 것, 그것이 제가 생각하는 정의입니다.”
“루크샤는 적을 쳐부수는 것이 선하다고 믿는 건가?”
루크샤는 고개를 살레살레 저었다.
“이 전쟁이 더 이상 고통 받는 사람이 없이 끝나는 것이 제가 지금 진정으로 믿고 있는 선입니다.”
루크샤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집무실을 나섰다. 루크샤가 문을 닫는 순간까지, 로엔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젠장.”
루크샤는 말안장에 앉아 마지막으로 무장을 점검했다. 길고 튼튼하지만 잘 휘는 장창. 작지만 복합적으로 설계 되어 제법 사거리를 자랑하는 활. 가슴과 어깨, 허벅지를 보호하는 갑주. 그리고 머리를 무겁게 내리누르는 투구.
루크샤는 수도에서 보낸 지난 몇일이 너무 편했다고 생각했다. 지난 몇 년간 마치 몸과 하나가 된 것처럼 느껴왔던 무장들이 거추장스럽다고 느껴지다니. 루크샤 시선을 들어 전면을 바라보았다. 고지에 배열된 서군의 포병, 그리고 요소에 배치된 총병과 궁병들. 서군의 마법사가 마법을 실행하여 위치가 파악되면 동시에 달려 나갈 터이다. 이미 기병대원들에게는 모두 작전을 하달한 상태.
차오르는 긴장감에 루크샤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완연한 겨울의 차가운 공기가 가슴 깊숙이 들어찼다. 그러자 문득 떠오르는 로엔의 모습.
루크샤는 픽,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예쁜 옷을 입고 멋진 왕자님과의 춤이라.”
그 때, 멀지 않은 고지의 상공에서 불덩어리가 떠올랐다. 마법! 명령은 없었다. 모두들 지시받은 대로 말머리를 돌리고 창을 추켜세우고 달음박질쳤다. 수백여기의 기마가 순식간에 가속되어 주변 풍경이 밀려나고, 하늘에 떠오른 불덩어리가 확대되었다. 겨울의 차가운 공기가 순식간에 뜨겁게 달아올라 얼굴을 스쳤다. 이 멀리에서도 느껴질 정도로 불덩어리는 광폭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멋진 왕자님과….’
루크샤는 사방에서 터져 나오는 대포의 포격음에 생각을 접었다. 몇 일만에 손에 쥔 창이 제법 무겁게 느껴졌다. 그렇지만 여느 때와는 다르게 전장 한 가운데에서 루크샤의 입가에는 가벼운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기사로 대표되는 중기병, 즉 풀 플레이트 메일과 랜스로 무장한 기병은 총포의 발달로 급격하게 역사에서 사라졌습니다. 실제로 보병 편제가 근접전 위주의 방진에서 산병을 적극 활용한 유동성있는 방진, 거기에 장거리에서 위력적인 사격이 가능한 대포의 등장은 그닥 소용없는 중갑과 느린 기동성을 가지고있는 중기병에겐 큰 악재로 작용하였습니다. |
뭐냐거든 웃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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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보았습니다.
확실히... 중갑을 뚫는 무기가 등장한 뒤부터는 중기병이란 녀석들은..
... 그래도 나름 로망인데 말이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