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Depression Wish : 에렐리니아 - 42
2008.03.11 14:35
아침, 언제나 습관처럼 일어나는데, 팔이 무거웠다.
돌아보니 무언가가 내 팔을 따라 매달려, 들려 나오고 있다.
"우응… 에렐리니아, 초코 쿠키…"
무슨 꿈을 꾸고 있는지, 아니면 나 때문에 살짝 깬 것인지,
눈을 감은 채 잠에 깊이 젖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로베스,
그리고 난 어제 로베스의 옆에서 잠이 들었다는 것을 상기했다.
"풋…"
같이 자본건 정말 오래 전의 일, 하지만 어릴 때와 변한 것이
없는 것 같았다, 로베스는. 변한건 나 뿐이겠지.
피식 하고 웃어 버리고는, 로베스의 손에서 조심스럽게 팔을 빼 냈다.
시계는 다섯 시. 언제나처럼이다. 처음 며칠은 시차 때문인지
제대로 일어나지 못했었지만, 이젠 이 곳의 시간에 익숙해져 있다.
아누라크 밖으로 나간 것도 처음이고, 하루 전체의 시간이 바뀐 일은
역시 쉽지는 않았다는 느낌일까. 겨우 시간 차이에 3일이나 걸렸다.
어제는 긴장을 했던 탓인지, 조금 늦게 일어났지만…
아무래도 좋겠지, 난 2층의 내 방으로 향했다.
미리 갈아 입을 옷을 꺼내 두고, 속옷을 챙겨서 욕실로 향했다.
로베스가 일어나는 시간은, 이전과 같다면 6시 반. 그 때 까지라면
충분히 샤워를 마치고, 간단한 정리 정도는 해 둘 수 있을 것이다.
갈아입지 않고 잔 덕분에 조금 주름이 가 버린 원피스와, 속옷을
벗어 두고 욕실에 들어섰다.
그리고 곧 쏟아지는 따끈한 물줄기…
잠시 그 물줄기를 느끼며 잠 기운을 흘려 보낸다.
약간 멍한듯 했던 머릿속이 맑아지는 기분,
샴푸를 손에 받아내려는데, 무슨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였다는 생각이 드는 차에,
"에렐리니아, 같이 샤워하자."
욕실 문이 열렸다.
"어?"
난 샤워 배스의 문을 당겼지만, …그래봐야 유리 문.
로베스, 언제 일어난 것일까. 일어나는 시간이 바뀐 건가?
속옷은 욕실 앞에 있으며, 수건은 욕실 입구 바로 옆에 있다.
입구엔 로베스가 있으며 샤워 배스는 욕실의 가장 안쪽이다.
샤워 배스는 사방이 별도로 막혀 있고 문이 달렸지만,
두 면만이 벽이고, 한쪽 벽면과 문은 유리다.
…일단 몸을 돌리는 것으로 대처한다.
"…문 닫아."
"응."
…들어오고 나서 닫으라는 말은 아니었다.
욕실 안에 들어서서 문을 닫는 로베스, 하지만 옷은 다 입은 채다.
"옷이 젖는다. 나가. 1층에서 욕실이 있다. 그쪽을 써라."
하지만 로베스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오히려
한 걸음 다가오고 있었다.
"괜찮아, 어차피 이 옷은 세탁할거니까. 갈아입을것 옷도
꺼내 놓았는걸."
아무래도 욕실을 못 찾았다던가 하는 문제는 아닌 것 같았다.
"금방 끝난다. 기다려라."
하지만 로베스는 이미 입고 있는 블라우스와 스커트를 벗고 있었다.
"어릴때는 종종 같이 샤워했잖아?"
그러니까 그건, 15년쯤 전의 이야기다.
몸이 조금 더 자라고 난 다음부터는, 난 나 외의 사람에게 몸을
보인 적이 없었다.
"에렐리니아, 부끄러워 하는거야?"
"아니다. 하지만…"
이런건 생각해 본 적도 없었기에,
뭔가 반박할 말조차 생각이 나지 않았다.
"난 오랜만에 좋은걸."
이미 속옷까지 벗은 후여서, 이젠 강제로 밀어낼 수도 없다.
로베르는 나를 대할때엔 종종 마이페이스이긴 했지만,
역시 이런건 어릴 떄 이후로는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벽을 향해 선 몸을, 돌릴 수가 없다…
"그, 그럼 로베스, 난 얼른 마치고 나갈게."
손에 받아둔 샴푸를 머리칼에 바르고, 조금 서둘러서 휘젓기
시작했다. 바디 클리너는 생략하자. 린스까지만 마치고 얼른 나가면
괜찮을 것이다.
하지만…
"부끄러워 하지 않아도, 에렐레니아.
게다가 몸매도 나보다 좋은걸. 어디 보자."
등 뒤에서 갑자기 손이 나타났다.
"무슨, 앗…"
난데없이 가슴을 잡아 머리는 로베스에게, 난 머리칼을 헤집고
있었기에 전혀 대응하지 못했다.
"음, 이정도면…"
조금 손을 내려 가슴 바로 아래를 쓰다듬더니, 손을 뗸다.
"C는 되겠는걸, 에렐리니아. 부럽잖아, 난 B도 아슬인데."
하지만 난 로베스에게 대답할 여력은 남아 있지 않았다.
스스로가 당황했다는 것을 알 정도로, 허둥대고 있었다.
샴푸가 다 칠해진건지 아닌건지, 그냥 헹구어 내어 버린다.
"계속 돌아서 있을거야? 자아~"
"무…"
화악, 세상이 돌아갔다.
로베스는 내 어깨를 잡아당겨 벽으로부터 내 몸을 돌려 버렸고,
난 생긋 웃고 있는 로베스와 정면으로 마주 서게 되었다.
"괜찮잖아, 어릴 때는 아무렇지도 않게 장난 쳐 놓고선…
게다가 여자끼리. 남도 아니잖아? 후훗."
이젠 뛰어 나갈 수 있는 여력마저 잃어버린 것 같다.
"무얼 보는거야."
"하지만 예쁜걸, 에렐리니아."
로베스는 태연하게 내 옆에 있는 샴푸를 손에 받아내며,
내 몸을 찬찬히 바라보고 있다.
"그,그다지…"
샴푸로 머리에 거품을 내던 로베스는, 갑자기 그것을 내 몸에
푸석, 하고 붙여 버렸다.
"맨날 삭막하게 살더니 자각이 없는거야, 에렐리니아는.
여기서 조금만 돌아다녀 보면 알걸?"
그렇게 말하며 거품을 내게 폭폭 묻히고 재미있다는 듯이 웃는 로베스.
난 전혀 대응하지 못한 채, 그저 묵묵히 린스를 머리칼에 바르고
있었다.
"아, 그래. 에렐리니아. 오후엔 쇼핑이라도 하지 않을래?
이 집도 너무 적적해 보이는걸, 이것저것 사 두자. 어떄?"
난 말없이 끄덕이며, 시선을 둘 곳을 찾는다.
바로 정면에 있기 때문에, 마땅히 눈을 돌릴 곳이 없었다.
얘기를 하는데 외면을 해 버릴 수도 없고,
바라 볼 수도 없는 그런 상황이었다.
게다가 그러는 동안에도 거품으로 나에게 장난을 치고 있는 로베스를,
말리지도 못하고 있다.
"푸후훗, 이거 봐, 에렐리니아. 수영복 같다. 그치?"
내 몸 여기저기에 멋대로 거품을 붙인 다음 재미있어 하는 모습이,
어릴 때 그대로였다. 하지만, 난 거기에 따라가지 못한 채,
애매하게 서 있을 뿐이었다.
린스를 헹구어 내기 시작하자, 몸에 붙은 거품도 씻겨 내려간다.
…왠지 얼굴에 피가 쏠리는 느낌.
정말, 나만 이렇게 변해 버린 걸까,
생각해보면 어릴때는 정말 실컷 이렇게 함께 했었는데.
아니, 하지만 보통 성인이라면 같이 샤워를 하거나 하는 일은 없다고
생각하는데…
"난 먼저 나간다."
겨우 당황한 자신을 진정시키고, 린스를 헹구어 내기를 마친 나는,
서둘러서 수건을 꺼내어 들고, 욕실 앞에 둔 속옷을 집어 들고
방으로 재빨리 들어와 버렸다.
물기를 닦아 내고, 속옷과 옷을 입고,
그제서야 머리칼에 남아 있는 물기를 말리기 시작한다.
헤어 드라이어의 소리에, 잠시 다른 생각을 묻어 두기로 햇다.
"후우…"
조금은 진정이 된 것 같은 느낌,
이렇게 당황해 본 것도 정말 오랜만이라는 생각이었다.
요즘 들어 당황할 일이 많아지는 것 같다.
이번 마루와 있었던 밤도 조금은 그런 일들이 있었고…
머리칼을 말리고, 정리를 마친 뒤 방을 나서자,
로베스가 욕실에서 나오고 있었다.
"오늘은 하얀 스커트네? 에렐리니아도 조금 화사하게 입어보는건
어때? 어울릴거야. 이따 쇼핑하러 가면 골라보자."
내 옷을 보며 그렇게 말하는, 나신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웃고 있는 오랜 친구. 하긴, 어릴 때는 이 둘만에게 만큼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런데 나는…
"어서 옷을 입어라. 체온이 내려간다."
도망치듯, 로베스 앞을 지나 1층으로 내려오고 만다.
머리를 꽤나 오래 손질해 버린건지, 시간은 어느 새 6시 반을
넘기고 있었다.
조금 있으면 마루가 도착할 시간,
식사 준비라도 해 볼까…
계단을 내려오는 로베스의 발소리를 확인하며,
난 그 기척을 애써 모른 척 하며 냉장고를 열었다.
아니, 냉장고에 얼굴을 묻었다고 해야 할까…
역시 로베스는 에렐을 노리고 온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