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Depression Wish : 에렐리니아 - 40
2008.03.07 00:35
-기도해줘-
그의 말이 문득 떠올랐다.
겨우 그것이, 기간도 정하지 않은 계약의 보수라고?
지금 와서 생각한다면, 현실적으로 생활비라던가 하는 문제는
없는 것일까? 사실상 나에게 하루의 시간을 거의 다 써 버리는
그의 생활을 보아서는, 또다른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이젠 오히려 걱정마저 된다. 제대로 생활은 하고 있는 것일까?
식사는 내 집에서 한다고 쳐도, 다른 문제는…
왠지, 신경이 쓰여 버렸다.
…그런 문제까지, 내가 신경 쓸 필요는 없는 걸까.
하지만 일단은 그는 나의 고용인인 셈,
제대로 생활해 주지 않으면 제대로 된 일을 할 수 없지 않을까.
그런 방향으로 생각한다면, 자신을 납득시킬 수 있다.
…납득 시키는 건가.
뭔가 쓸데없이 우스운 생각들을 빙글빙글 돌리고 있는 것 같다.
"에렐리니아, 바빠…?"
그렇게 아까 미루어 둔 주방의 정리를 하고 있는데,
로베스가 사뿐한 걸음으로 주방에 들어왔다.
그러더니, 두리번거리며 내 뒤로 다가온다.
"잠깐 정리라더니, 오래 걸리네?"
내 어깨에 달라붙어서 그릇 정리를 바라본다.
팔을 들어 올리면, 로베스의 고개도 함께 올라간다.
……뭔가 묘한 기분.
"말을 배울 거라면, 계속 사용하는 것이 좋다."
내 말에, 로베스는 턱으로 내 어깨를 지긋이 누른다.
그다지 무겁지는 않지만, 그릇을 정리하기엔 조금 방해다.
"둘이만 있는걸. 여기 말은 아직은 익숙하지가 않아서."
연 으로 온다고 했을땐 그렇게 열심히 이곳 말을 가르쳤으면서,
그런 소리를 하고 있다. 여전히 내 어깨를 누르며 배시시 웃는 로베스.
평소보다 웃음도 많고, 달라붙는 것이, 기분이 좋아 보인다.
"에렐리니아, 그래도 말이 조금은 많아졌는걸? 아까 보니."
오후, 마루와의 대화를 얘기하는 모양이었다.
확실히 예전 생활에서와 비교해 보면, 그런 것도 같다.
"그런가."
서로 다른 언어로 이루어지는 묘한 대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잘 알아듣는다면 아무래도 상관 없지만.
"이젠 나보다 여기 말도 잘 하네? 그 사람, 잘 가르치는 모양?"
어깨 위에서 고개를 갸웃거리면, 왠지 간지럽다.
살짝 어깨를 움츠리자, 장난스럽게 웃는 로베스.
"다른건 모르지만 성실하다고 생각한다."
"에렐리니아, 표정이 다르던걸? 뜻밖이었어."
내가 다시 어깨를 움츠리자, 내 어깨에서 떨어져 식탁에 기대어 선다.
그제야 난 그릇의 정리를 마치고 돌아 설 수 있었다.
"…그런가. 그럴지도."
말하고도 어딘가 애매한 대답, 하지만 로베스는 캐 묻지 않았다.
"그 사람, 조금 살펴봐야겠는걸. 그런데, 정말 보수는 기도 뿐?"
"…글쎄. 요구는 그 뿐이지만."
흐응, 하는 콧소리를 내며 고개를 갸웃거린다.
왠지 들떠 보이는 모습, 기분 좋은 일이라도 있는 것일까.
마루가 마음에 들었다던지.
"기회가 되면, 그 사람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조금 알아볼게."
알아보는 것 뿐이라면 아무래도 상관 없다.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난 주방을 나섰다. 정리는 끝, 커피도 조금 전에 마시고 난 후여서,
특별히 뭔가 준비할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런데, 로베스. 예정보다 빨리 온건?"
내 질문에 손바닥을 살짝 맞부딛히는 로베스.
"아, 생각보다 준비가 빨리 되서. 내 집, 내놓았거든.
예정일보다 앞당겨서 나가 버렸어. 에렐리니아의 저택은
관리인을 두었고, 관리는 일주일에 한 번."
잠깐 말을 끊고, 내가 소파에 앉자 내 옆자리에 앉는다.
그리고, 느닷없이 내 손을 꼬옥 감싸쥐는 것이었다.
"그리고, …하루라도 빨리 보러 오고 싶었어.
에렐리니아, 보고 싶었어. 조금 멋대로인가?
미안, 하지만 멀리 있고 싶지 않았어."
그리고 로베스는 내 어깨에 살짝 기대며 내 손을 품 안으로 가져갔다.
잔잔한 숨소리가, 어깨 아래에서 들린다.
손을 조금 더 꼬옥, 감싸 쥐는 로베스를 보며,
조금은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어쩌면. 아주 조금은 내가 필요했을지도 모른다는,
그런 생각이 들어 버린다.
그래, 어쩌면.
그런 생각을 하자마자 자신이 우스워져 버리는것이 싫다.
로베스의 모든 것을 잃게 만든 건 나다.
이제야 떨어졌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내가, 필요했다고…
하지만 이렇게 나를 찾아온 행동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
숨소리가, 잠이 든 것 같았다.
아닌 것 처럼 해도, 먼 길을 오느라 피곤했겠지.
게다가 시차를 생각한다면 거의 하루를 지새운 꼴이다.
잠시 로베스의 얼굴을 내려다 보다가,
조심스럽게, 한 팔로 어깨를 감싸 안고, 다른 팔로 다리를 모아서
안아 들었다.
"으응…?"
살짝 깨어난 로베스가 가늘게 뜬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을 땐,
내가 로베스를 안아 들고 일어선 후였다.
"계속 자."
로베스의 방으로 들어가, 묘기를 하듯 한쪽 발로 침대 위의 이불을
걷어내고, 로베스를 그 위에 눕혔다.
"에렐리니아, …올라…갈거야?"
잠에 빠져드는 목소리로, 이불을 덮어 주려는 내 손을 잡는 로베스.
"그래. 눈 감고 어서 자."
하지만 로베스는 내 손을 놓지 않고, 끌어 당긴다.
"가지 말고, …옆에서 …자. 우리… 어릴때처럼…"
왜인지 어린 아이처럼 떼를 쓰듯 내 손을 잡아 끄는 그 모습에,
난 손을 뿌리치지 못했다.
"로베스는 아이다."
잠결에도 배시시 하고 웃으며 내 손을 흔든다.
"알았다. 단지, 침대에서 떨어져도 원망하지 마라."
생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난 나이트웨어도 입지 않은 채 그 옆에 누워 버린다.
이불을 덮자, 로베스가 내 손을 꼬옥 잡는다.
"잘 자, 에렐리니아…"
난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지만, 로베스는 혼자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감았다. 이내, 숨소리가 조용해지고, 나도 눈을 감았다.
왜인지, 잠이 금방 오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