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Depression Wish : 에렐리니아 - 16
2008.01.11 01:19
오래된 종이의 향이 방 안에 가득하다.
이전에 도착한 책장까지 모두 13개의 책장이 겨우 팔을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은 간격으로 방 안에 가득 서 있었다. 그리고 그 곳에
방금 막 상자들 속에 넣어 옮겨 온 책들을 다 채워 넣기를 끝냈다.
"하아…"
마루를 돌려 보내고, 막 어두워지기 시작했을 때 시작한 것이
끝내고 보니 완전한 어둠, 책 한 권 한권을 감촉을 확인하며 꽃아 넣는
일은 그렇게 긴 시간을 들여 끝이 났다.
아버지는 항상 책을 다시 정리하실 때면 이렇게,
한 권씩 한권씩 촉감을 확인하고, 표지를 열어본 후 꽃아 넣고는 했다.
그렇게 책 한권 한권에 담긴 기억을 되새기신다고 했다.
그리고 나에게 남아 있는 기억은 그렇게 책 한권 한권을 쓰다듬으며
꽃아 넣던 아버지의 모습이다. 때로는 잔잔한 미소로, 때로는 아련한
그리움이 담긴 눈으로, 그렇게 책을 꽃아 넣으며, 그 한 권 한권을
넣을 때 마다 내게 한 번씩 눈길을 주셨던, 그 모습…
"칫."
이제와서 감상에 젖기라도 하자는건가. 고개를 저어 생각을 털어 낸다.
떠올려 봐야 결국 다시 날 원망하게 될 뿐이다.
일생을 통털어 단지 일년 반 정도를 함께 했던 분. 그런데 어째서
이렇게도 나에게 깊이 남아 있는 것일까.
서재로 삼게 된 이층의 방의 전등을 끄고 나왔다.
침실로 삼기로 한 방은 역시 이층에 있는 개폐식 천창이 있는
방이었다. 처음 이 집을 봤을 때, 아니 이 집의 사진을 보았을 때
이 천창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스위치를 올리자 드르륵 하는 소리와 함께 천창을 가리고 있던
차폐막이 천천히 걷혔다. 어두운 방, 불을 켜지 않은 채 그렇게
천장의 반 정도를 차지한 천창을 통해 들어오는 달빛에 의지해
침대에 몸을 눕힌다.
땀까지 흘려 가며 2층의 서재까지 책장을 함께 날라 주던 마루의
모습이 문득 떠오른다. 혼자였다면 전부 2층까지 나르는 것은
무리였을 테지.
생각해보면, 필요 이상으로 나에게 신경을 쓰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이 나라 사람들은 다 그런것일까? 말을 가르쳐 준다고 했을 때만
해도 외국인을 보고 벌이를 할 만한 기회라도 잡으려는 걸까 하는
생각도 들었었다. 어차피 나도 필요했던 것이기에 곧바로 수락을
했던 것이지만…
그런데, 고작 바다에 한 번 왕복한 것으로 끝이라고,
게다가 가끔 나를 바라 볼 때의 눈빛에 담긴 흔들림,
아무에게나 향할 눈빛은 아니다. 하지만, 그 흔들림이 나 때문이
아니라는 것도 안다. 굳이 나에게 관심이 있다거나 한 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는 어째서 나에게 다가 온 것일까.
뭔가 다른 목적이 있다고 생각되지도 않는다.
그냥 별 것 아니겠지 하고 넘길 수도 있겠지만,
난 내 주변에 다가오는 사람에게 신경을 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낯설지 않게 되어 버린 누군가가,
또다시…
나의…
티리리링-
벨 소리가 나를 현실로 돌려 놓았다.
누가?
의아하게 바라본다고 휴대용 전화기가 대답을 들려 주지는 않는다.
난 전화기를 집어 액정 화면을 확인한다.
"……"
번호와 이름을 확인한 뒤, 통화 버튼을 눌렀다.
"무슨 일인… 무슨 일인가."
습관처럼 튀어나가던 말을 멈추고, 다시 이 나라의 말로 바꾸어
말한다. 한참 다른 생각을 하던 중이었기 때문일까.
수화기 너머에서는 곧바로 대답이 들리지 않았다.
숨을 한 번 들이마시는 소리,
그리고 짧은 한 마디가 들려온다.
=미안해=
목소리는 분명히 마루의 것이다.
갑자기 들려온 말은 분명히 사과의 말.
무엇을 사과하는 것일까.
하지만, 난 그것을 바로 묻지 않았다. 그저 다음 말을 기다리며
짧은 응답을 돌려 주었을 뿐.
"그런가."
=응, …미안해.=
다른 설명도, 자세한 이야기도 없이, 그 뒤로 작게 이어진
또 한번의 사과, 그리고 '잘 자. 먼저 끊어.' 하는 그의 인사로 통화는
종료되었다.
"……뭐냐."
전화기를 보며 그런 혼잣말.
그리고 어두운 방의 허공을 지나 천창 너머의 하늘을 올려다 본다.
문득, 가끔 나를 마주하던 마루의 눈빛이 떠올랐다.
나를 보면서도 내 모습 너머 어딘가를 보든 듯 하던 그의 눈,
그것은 아마도 그리움과 닮은 느낌이었으리라.
"쳇."
난 짧게 혀를 차고, 다시 시선을 허공에서 천창 너머의 밤 하늘로
돌렸다. 하늘이 개이고 있는지, 군데 군데 가려진 사이로 별들이
눈에 띄기 시작한다.
떠오르는 것이 많은 밤이다.
그래서일까.
잠이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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