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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르시아 제 1 부 2 화 - Give & Take 4

2004.04.01 20:21

슈안 조회 수:319

제 2 화 Give & Take - 자매 (2)




꿈을 꾸고 있다.
그 날 보고 있던. 그 붉은 풍경.
석양이 아름다웠던 그 날. 그녀가 자신의 자매들을 베어넘긴 그 날.
100명의 자매들의 피를 뒤집어 쓴 그 날.
그녀는 웃고 있었다. 그녀는 울고 있었다.
그녀의 가장 경애하는 단 한 명의 자매를 구해냈다는 기쁨에 웃고, 그를 위해 다른 100명의 자매들을 살해한 슬픔에 울었다.
그리고 자신이 지켜낸 마지막으로 남은 단 한 명의 자매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영혼마저 봉인시켰다.
그리고 영원히 끝나지 않을것만 같은 꿈을 꾸었다.
꿈 속에서는 몇번이고 자매들을 베어 죽인다. 그늘진 곳에 숨어서 덜덜 떨고 있는 자매를 손에 든 두 자루의 흉검으로 찢어발긴다.
최후의 발악일까. 그 순간에, 몸에 칼날이 파고 드는 그 고통에 잠들어 있던 '그 것'이 눈을 뜬 것일까.
그 몸이 반쯤 잘려진 자매의 모습이 한순간 흉한 괴물의 모습으로 변하여 그녀를 덮쳐온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그녀는 그에 개의치 않고 베어 들어가던 검에 힘을 가하여 자신의 자매를 완전히 동강내어 버린다.
자신과 완전히 똑같은 모습. 아직 아기의 모습조차 채 벗지 못한 아이들은 자신의 몸보다 몇배는 더 큰 하이페리온을 들고 서로를 도륙하고 있었다.
철도 채 들기전에, 고작 6살의 나이에 그녀들은 처음 손에 검을 들고, 그 직후에 서로의 피를 그 검에 칠하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언니를 지키고 싶었을 뿐이었다. 자신의 등 뒤에는 무력하게 떨고 있는 자신의 누이가 있다. 한치도 물러날 수 없었다.
몇번을 베이고, 찔렸다. 그녀의 피 역시 그 언덕을 붉게 물들여 갔다.
그래도 그녀는 물러서지 않았다. 102명의 자매들 중에 유일하게 자신이 유대감을 느낀 존재. 그녀는 그 존재를 지키기 위해 싸웠다.
지키기 위해 죽였다. 자신에게 유일하게 사랑을 준 존재를 지키기 위해. 그 존재를 위해서라면 설령 신이라도, 악마라도 죽일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렇게 두 자매는 살아 남았다.




여느 때의 꿈을 꾸고 있었다. 흐린 시선 너머로는 잔뜩 굳은 얼굴을 하고 있는 자신의 누이가 있었다.
잠시 그녀의 창을 꼬나쥐고 망설이던 쥬라는 이를 빠득갈고 말했다.

"......미안해. 유라. 여기까지인 모양이구나. 우리."

너무나도 분하다는 표정. 지독한 슬픔을 억지로 밀어넣는 듯한 표정. 그런 쥬라를 보며 유라는 따뜻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괜찮아. 우리가 등진 운명이야. 자..."

그렇게 말하고 유라는 두 눈을 감았다.
도저히 살아 있다고 할 수 없는 상태. 엉망진창으로 찢겨진 몸을 벽에 기대고 힘겹게 숨을 내쉬는 유라를 내려다보며 쥬라는 계속 망설였다.

'왜. 우리는 이래야만 해? 누군가 죽지 않으면, 누군가의 영혼이 봉인되지 않으면 안 되는거야? 둘이 함께 살아갈 수는... 없는거야?'

쥬라는 끝내 자신의 동생을 찌를 수 없었다.
그녀의 양볼을 타고 끊임없이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 놈이. 그 놈이 다시 10년전의 그 날을 재현하게 만들었다. 자매들간에 서로 죽이고 죽는. 그 날을.
그녀는 조용히 그 놈의 이름을 뇌까렸다.

"이 광현."

유라를 향해있던 창을 거둔 쥬라는 그녀에게서 등을 돌려 방 정중앙의 마법진 쪽으로 향했다.

"이 광현. 이광현. 이광현. 이광현."

광현이 유라의 영혼을 해방시키지만 않았다면. 불완전한 형태나마 그녀들은 언제나 함께 할 수 있었다.
적어도 쥬라에게는 그것이 행복이기도 했다.
아무 말도, 감정도 표현하지 않는 인형. 그것을 곁에 두는 것 만으로도 기쁜 것이 소녀의 마음이라던가.
그래. 유라는 쥬라의 인형(doll)이었다. 그녀는 항상 유라를 꼭두각시로서 다뤄왔다.
자신의 명령에 충실하게 따라주는 인형. 그게 기뻤다. 유라에게는 언제나 미안했지만, 그래도 그게 기뻤다.
쥬라에게 있어 이미 유라는 동생이 아니었다.
자신의 일부. 자신의 육신의 일부였다. 자신의 도구였다.
목석처럼 아무 말없이 자신을 지켜주는 그녀가 그렇게나 든든할 수 없었다.
그런 그녀의 자그마한 행복을 깬 상대. 이 광현을 그녀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다.
이대로 유라와 함께 붕괴하여 사라져버린대도, 놈은 반드시 죽인다. 철저히. 그 존재를, 그 영혼마저도.
그리고 놈의 세계마저도. 이제 그녀에게 남은 행복은 그것 하나 뿐.
그녀의 등 뒤에서는 유라가 계속 제지의 말을 꺼내고는 있지만, 이미 그녀의 귀에는 그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이제... 조금만... 더......"

그 말과 함께 그녀의 발 밑의 마법진이 발동했다.



.

.

.



"젠장... 유라 녀석...! 이런 때 대체 어딜 싸돌아다니고 있는거야!"

속이 부글부글 끓는 느낌. 불안.
내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 감정은 그것 뿐이었다.
오피스가로 향하는 마지막 버스.
사람은 거의 타고 있지 않았다.
한참을 차창 밖에 보며 뭔가를 생각하던 크림슨 울프가 문득 내게 고개를 돌려 말했다.

"...아무래도, 혼자 쥬라를 치러 간 모양이다."

"그럴리가. 우리는 녀석이 어디 있는지도 밝혀내지 못했다구. 바로 앞집에 두고도 모를 정도였는데..."

그 말에 크림슨 울프가 상당히 당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뭐? 그럴리가. 너. 혹시 유라에게서 마르카덴에 관한 얘기를 들은 적이 없는건가?"

"응? 마르카덴? 유라가 아니라 쥬라한테서 들은 적은 있어. 마르카덴의 집안의 풍속대로 쌍둥이중에 동생은 10살이 되면 영혼을 봉인당한다던가."

"헛소리. 그건 거짓말이다. 무엇보다, 마르카덴이라는 가문따윈 없어."

뭐? 없다고? 그게 무슨 소리야? 그럼 마르카덴의 쌍둥이 늑대라는 별명은 왜 붙은 건데?
잠시 할 말을 잃고 눈을 껌뻑이는 날 보며 한심하다는 듯 한 숨을 픽 내쉰 크림슨 울프가 말을 이었다.

"마르카덴은 마을 이름이었다. 그 마을에서 어느날 한 아이가 태어났지."

"이 봐. 난 옛날 얘기 듣고 싶은게 아닌데."

그러나 크림슨 울프는 말을 끊어먹은 내게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닥치고 끝까지 들어. 아무튼, 그 아이는 성장하여 18세가 되었지. 전해져오는 얘기에 따르면, 경국지색의 미모를 지닌 여성이었다는 것 같군."

"......"

닥치고 끝까지 들으라는 말에 심하게 배알이 꼴리는 것을 느꼈지만, 일단은 끝까지 듣기로 했다.

"그래. 분명, 푸른 머리에 붉은 눈동자라고 알려져있지."

"어, 어이... 당신. 대체 뭘 말하고 싶은거야?!"

"닥치고 끝까지 들으라고 했다."

울컥. 정말로 속에서 뭔가 올라오는 듯한 격분을 겨우겨우 잠재우고 크림슨 울프의 얘기를 듣는다.

"...불행히도 그녀는 보통 인간이 아니었지. 어떤 연유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녀는 악마의 육신을 가지고 태어나 버린거다. 반인반마의 육신이지. 보통, 그런 경우에는 자아가 확립되면 악마에게 영혼을 빼앗기고, 그 인물은 완전히 악마가 되는데... 묘하게도 그녀는 자아가 확립되어도 악마에게 자신의 영혼을 빼앗기지 않았다."

"..."

수아와 나, 그리고 에루아는 숨을 죽인채 그의 말을 들었다.
다행히도 다른 승객들이 탄 앞자리와는 거리가 꽤 있었기에 크림슨 울프의 말이 저쪽에 들릴 염려는 없었다.

"그러나 그러던 어느날 그녀는 자신의 힘을 제어하지 못하고 마르카덴의 마을을 완전히 파괴해버렸다. 그에 나의 주군, 마슈드 님은 그녀를 생포하기에 이르렀는데..."

그 대목에서 그는 한번 헛기침을 하고는 말하기 싫은 내용을 말한다는 듯,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불경하게도, 나의 주군이다만, 마슈드님은 신의 육신에 필적하는 육신을 만들고자 하셨다. 그에 어떤 미치광이 마법사를 불러들여 붙잡아 온 그 여인에게서 102명의 아이를 복제하는데 이르렀다. 그 미치광이 마법사에 관해서는 상세히 알려진 바가 없지."

터무니 없는 얘기다. 설마... 설마.

"그리고 그 102명의 여자아이들 중 하나가 유라와 쥬라. 그 102명의 아이들의 육신은 모체인 여성보다 악마로서의 순도가 월등히 높았다. 그러면서도 그 몸에 깃든 인간의 영혼과 악마의 영혼이 일체화가 되어 뜻대로 그 악마의 힘을 자유로이 쓸 수 있었지. 허나, 거기엔 치명적인 결함이 있었다. 설령 육신이 100여개로 나뉘어도, 악마라는 것은 유일 무이한 존재. 육신이 100여개라해도 그것은 곧 하나이기도 했지. 그런 단 하나의 존재에 영혼이 100여개. 기본적으로 하나의 존재에는 단 하나의 영혼만이 허용된다. 한 하늘에 두개의 태양은 떠오르지 못하는 법이지."

머릿속이 하얗게 된 느낌이 들었다.
유라는 내게 그런 얘기는 단 한번도 한 적이 없었다.
실제로, 내가 그녀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그녀의 이름뿐이었다.
내가 이해를 하든 말든, 크림슨 울프는 말을 계속 이었다.

"그것을 어긴 존재의 말로는 붕괴. 어차피 붕괴될 거라면 서로 죽이고 죽게하여 가장 강한 개체를 가려내는편이 좋겠다고 생각한 그녀들의 아버지 혹은 어머니인 마법사는 죽음의 향연을 열었다. 그것은 끔찍했지......"

마치 직접 보기라도 한 것처럼 다시 차창 밖에로 고개를 돌려 먼 곳을 바라보는 듯한 크림슨 울프.
그는 그 상태로 말을 계속 했다.

"같은 얼굴을 한 어린 아이들이 손에 손에 검을 들고 서로를 베어 죽이는 것은 참으로 끔찍한 광경이지."

"...당신. 보기라도 한건가?"

"아아. 봤지. 그 때는 나도 참관했었으니까. 하지만 끝내 그 마법사를 만나보지는 못했다만. 인간인지조차 의심스러울 정도였거든. 한 번 쯤 상판을 보고 싶었다."

얘기가 너무 상식 밖이다. 요 2주일 간, 줄곧 상식 밖의 일들만 일어났지만, 이건 도가 지나치다.

"결과적으로 남은 것은 유라와 쥬라 둘. 당시, 쥬라는 별다른 전투 능력이 없었기에 가장 먼저 죽었어야 했지만, 유라가 그녀를 끝까지 지켜냈다는 군. 잘은 모르겠지만, 그 이후 내가 접한 소식으로는 유라쪽의 영혼이 봉인되어, 그 둘은 암살자로서 활약했다고 전해진다."

유라가... 쥬라를 지켰다? 지금은 그렇게 죽이려고 하는 주제에?

"그보다도, 본론이 뭐야? 유라가 쥬라의 은신처를 알고 있다면서. 그건 어떻게 된거야?"

내 질문에 크림슨 울프는 미간을 찌푸리며 답했다.

"내 얘기를 제대로 듣기나 한건가? 육신은 여럿으로 나뉘었어도 원래는 유일무이한 존재. 즉, 그녀들은 한 몸이다. 예를 들어 네가 네 수족이 어디 있는지 보지 않아도 그것들이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지 알 수 있는 것 처럼 말이다."

뭐야. 그럼 녀석은. 유라는 처음부터 쥬라가 어디에 있는지 알면서도 우리한테 한 마디도 안했다는 거야?

"...이만큼 들어도 모르겠나. 머리를 써라. 유일 무이한 존재에 여러개의 영혼이 깃들면 그 육신과 영혼은 붕괴한다."

"그건 아까 들었어."

"잘 들어. 분명 네가 유라와 쥬라와 처음 만났을 때, 그녀들은 어떤 상태였지?"

그야......

"유라의 영혼이 봉인된 상태였지? 아마. 그리고 내가 어쩌다가 유라의 봉인을 풀었고......"

"거기다. 문제는."

"?"

대체 이 녀석은 뭘 말하고 싶은 건가.
크림슨 울프가 내뱉은 문제라는 것을 열심히 생각해보는 나에게 크림슨 울프는 답을 말해줬다.

"유라의 영혼의 봉인을 푼 그 시점에서. 유일 무이한 존재에 두개의 영혼이 깃들게 된거다. 그것은 즉, 그녀들의 붕괴를 의미한다."

"......!"

그런건가! 그렇게 되면 둘 중 하나가 죽어야만 해.
내가... 내가 그렇게 만든건가.

"따라서 쥬라가 널 죽일만큼 미워하는데도 타당한 이유가 있지. 정상적이라면 유라 역시 널 죽일만큼 미워해야 할 터이지만, 어째서인지 그녀는 그런 의향은 전혀 없는 듯 싶다."

"................"

잘 생각해보면, 나는 그녀의 봉인을 푼 그 순간부터 그녀들의 원수가 된 거다.
그 옛날, 유라는 쥬라를 지켰다. 그 수많은 자매들 중에 쥬라만을 지킨 이유. 달리 생각할 필요도 없다.
특별한 애착. 유대감. 혈육으로서의 애정. 그 두 자매들 사이에는 틀림없이 그것이 있었다.
그리고 그 둘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한쪽의 영혼을 봉인했다.
유라의 성격상, 분명 자처해서 언니인 쥬라를 구하기 위해 영혼을 봉인했을 것이다.

"......바보 자식...!"

왜. 단 한마디도. 단 한마디도 내게 말해주지 않은거냐? 유라.
내가 밉지 않았냐? 너희 자매의 자그마한 행복을 깨버린 내가!

우우우웅.... 치익......

서서히 정차하는 버스. 그에 이어 문이 열렸다.

"...가자. 일단 그 팬시 샾의 주인을 만나보고. 바로 유라를 찾으러... 가자."

뭔가가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라 목소리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이것은 분노인가. 아니면 애상(哀想)인가.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머리를 꽉 붙들고 놓아주지 않았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저만치 앞에서 이쪽을 향해 손을 흔드는 한 사내의 모습이 보였다.
그의 모습을 확인하자마자 대뜸 달려가서 그의 멱살을 틀어잡았다.

"당신...! 대체 정체가 뭐야!!"

버스로 여기까지 오는 동안 크림슨 울프에게 들은 얘기때문에 감정이 고양된 탓일까.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올라가 있었다.
그러나 내게 멱살을 잡힌 상대, 김 영훈은 그에 전혀 동요하지 않고 어디까지나 사무적인 어투로 말을 꺼냈다.
저녁때 보여준 모습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진정하시지요. 할 얘기가 있으니 천천히..."

"그럴 시간 없어!!"

내 말에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내 눈을 직시해왔다.

"흐음? 그 파란 머리 아가씨 때문에 그리 서두르시나?"

"...!!! 너! 유라가 어디갔는지 알아?!"

내 질문에 그의 무기질적인 두 눈동자가 순간적으로 웃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제 얘기를 들어주신다면, 그녀가 어디로 갔는지 알려드리죠."

"...빌어먹을!!"

거래를 하겠다는 거다. 그의 말에 나는 난폭하게 그의 옷깃에서 손을 뗐다.
그리고 그를 노려본다.
여유가 없는 나와는 달리 그는 어디까지나 여유로운 모습으로 우리를 접했다.

"자. 그러면 질문에 대한 답을 해 드리죠. 저는 김 영훈. 26세 독신. 당신들이 알기 쉽게 말씀드리자면, 마법사입니다. 그리고 모 연구시설의 연구자이기도 하지요."

"...그래서. 당신 목적이 뭐야?"

"요 일전의 폭동사건의 규명입니다. 저도 우연히 그 광경을 봤습니다만, 그건 아무리 봐도 폭도들이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었죠. 오히려 부두교의 좀비에 가깝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그게 과학적으로 일어난 사건인지, 아니면 마법에 의한 건지. 그게 궁금해서 말이죠."

좀비 사건의 전말을 알고 싶다는 건가. 문득 뒤의 수아를 돌아봤다. 잠시 고민하던 수아는 이내 내게 고개를 끄덕였다.
설명해주라는 신호였다.

"좋아. 말해주지. 한번만 말할테니까 잘 들......"

"호오? 의외로군. 꼬마. 설마 살아있었다니."

막 내가 김 영훈에게 그 사건에 대해 설명하고자 한 그 순간, 제 삼자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나지막한 목소리. 희열이 담긴 목소리.
거리의 어둠을 뚫듯 흉흉하게 빛나는 푸른 안광.
그 목소리에 분명히 기억이 있다. 저 푸른 안광에 분명히 기억이 있다.
어느새 주위의 공기는 피부에 달라붙을 것만 같이 끈적거리고 있었다.
죽은 듯 고요한 거리. 얼마전 좀비 사건때의 그 날밤처럼, 거리는 죽어 있었다.
그리고 저 멀리서 이쪽을 보며 웃고 있는 저 사내.
정장을 차려입고, 검은 머리를 짧고 깔끔하게 정리한 40대 전후의 사내.

"아... 아아..."

내가 가진 얼마 안 되는 어린 시절의 기억중에 가장 싫은 기억이 떠올랐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잃었던 그 날 밤의 기억이.
왼쪽 가슴에 파고들던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사내는 그날 밤과 같은 잔인한 미소를 띄운 채로 이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호오. 이건 영광이군. 나를 기억하고 있는 건가. 꼬마. 눈이 얼어붙었어."

놈을 똑바로 노려본다.
가로등의 희미한 불빛에 비친 그 얼굴. 어둠을 꿰뚫는 푸른 안광. 양손에 나눠든 나이프.
확실히 그날의, 10년전의 그 살인귀였다.
머리모양을 바꾸고 나이를 먹어서 얼굴의 모양이 변했어도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부모의 얼굴조차 잊은 내가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하는 것은 그 원수의 얼굴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말이다.
이를 악물고 모두들에게 말했다.

"다들... 도망가. 저 놈은... 내가 어떻게든 할테니까."

"하아? 광현 오빠, 무슨 소리야? 저건..."

내 말에 뭔가 이의를 제기하려는 수아.
왜 이렇게 말귀가 어두운 걸까. 가라고 하면 갈 것이지.

"닥치고 어서 가! 내가 여기서 이 놈을 막고 있는 동안에 유라를 빨리 찾아내란 말이야!"

"뭐... 뭐라고!?"

한마디도 안지려는 그녀의 성격상 내 말은 거의 폭언에 가까운 것이었겠지.
그녀가 내게 뭔가 맞받아치려고 했을 때, 크림슨 울프가 그녀의 앞에 팔을 내밀어 그걸 제지했다.
그리고 그는 내게 말한다.

"막는다로는 부족하다. 필살의 각오로 임해라."

그 말과 함께 크림슨 울프는 에루아와 수아의 팔을 붙들고는 골목길쪽으로 내달렸다.
잠시 상황을 읽지 못해 망설이던 김 영훈인가 뭔가하는 자도 곧바로 그의 뒤를 쫓아 갔다.
그런 그들에게는 흥미가 전혀 없다는 듯, 시선을 오직 내게 고정시킨 살인귀가 말했다.

"히? 꼬마는 남았네."

왜 나는 남아버린 건가. 저 멀리서 수아가 뭐라 외치고는 있었지만 그것도 잠시, 곧 그 목소리는 들리지 않게 되었다.
10년전의 재현이다. 고양이 앞의 쥐인가. 나는 이 사내에게 겁을 먹은 건가.
사내는 그 날처럼 느긋한 발걸음으로 내게 다가왔다.

"많∼이 컸네. 꼬마야."

"지랄하네. 꼬마 딱지는 벌써 옛날에 떼어버렸어!"

그 말과 동시에 눈앞의 사내의 안면에 장타를 먹였다.
턱에 깔끔하게 들어가는 장타. 그러나 사내는 그것을 맞고도 고개를 갸웃할 뿐이다.

"무슨 소리. 아직도 꼬마구만. 크히히히히!!!"

쉬익!

그의 광소와 함께 한 줄기 섬광이 내 목을 노리고 달려들었다.
눈에 보이지는 않았지만, 본능적으로 고개를 숙여 그것을 피했다.
그리고 상대를 발로 걷어차 거리를 띄운다.
그런 내 행동에 상대는 아무런 반응도 없이 히죽히죽 웃으며 이쪽을 쳐다볼 뿐이다.
사내의 얼굴을 노려보며 언젠가 수아가 날려댔던 불덩어리를 연상한다.
마나는 느낄 수 없지만, 쓸 수는 있었다. 그렇다면, 분명히 가능할 터!

콰앙!

내 손바닥에서 형성되어 내 손바닥을 떠난 불덩어리는 사내의 안면에 적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내에게는 일말의 데미지조차 보이지 않는다.
사내는 여전히 히죽히죽 웃으며 양 팔을 크게 벌려 보인다.
얼마든지 두들겨보라는 듯이.
그에 오기가 생겨 불덩어리를 수도 없이 그를 향해 날려보냈다.

쾅! 콰쾅! 퍼퍼퍼펑! 쾅!

그러나 그것 역시 그에겐 아무런 데미지를 입히지 못한다.
마법 자체가 통하지 않는 몸인가, 아니면 어중간한 마법으로는 상처하나 줄 수 없는 상대인가.
정체조차 알수 없는 사내. 10년전, 나의 부모를 도륙한 사내.
내 머릿속에서는 이미 그를 지금까지 만났던 녀석들 중에 최악의 괴물로 인식하고 있었다.

"너... 대체 뭐야."

10년동안 가장 궁금했던 것. 그것을 그에게 물어본다.
그에 그는 유쾌한 듯 자신의 몸에 걸친 정장을 가리키고는 크게 웃으며 대답한다.

"크히히히히!! 보면 몰라?! 비지니스 맨! 이지!"

"장난은 집어치워!"

"후... 크쿠... 키키키... 이 몸의 인기는 시들지를 않는구만. 흐흐. 사실대로 말할게. 꼬마야."

그렇게 말하고 사내는 두 팔을 내렸다.

"나는 광기의 악마, 파라르. 다른 이름으로는 스톰 하운드. 그리고 이 육신의 이름은 최 한진. 이걸로 충분하니? 꼬마야! 카하하하하!!!"

악마? 악마라고?

"크크... 오랫만에 소환에 응해서 오자마자 그리운 얼굴과 마주하니 참으로 기쁜 걸? 자아... 이번엔 내가 질문할 차례. 어떻게해서 살아남았니?"

그 질문에 나는 억지로 입가를 일그러뜨리며 답했다.

"킥. 내 심장은 오른쪽이라고. 네가 10년전에 찍은데는 꽝이야."

"호오? 그런 실수를 다하다니. 세상 참 오래살고 볼 일이야."

그 말과 함께 한줄기 섬광이 그의 손에서 떠났다.
정확히 내 오른쪽 심장을 노리고. 그것을 옆으로 쓰러지다시피해서 피한다.
뒤늦게 뒤쪽에서 금속음이 들린다.

챙.

그의 손에서 떠난 섬광. 그것은 나이프였다.
다만, 그것이 너무 빠른 나머지 빛 줄기로 보였을 뿐.

"꼬마야. 이제 이것도 질린다. 슬슬 끝내자?"

그렇게 말한 사내의 양손에 어디에서 나오는지 모를 새로운 두개의 나이프가 쥐어진다.
녀석은 악마라고 했다. 그게 사실이라면 악마처럼 무식하게 센 녀석에게 대항할 수 있는 것은......

"르 브란!"

되든 말든 한번 해보자!

[안이해. 되든 말든 한번 해보자라니. 그런 사고 방식으로는 목숨이 백개 있어도 부족하다고. 도련님.]

참으로 오랫만에 듣는 듯한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려퍼졌다.
성공이다.
그와 함께 눈부신 섬광이 내 오른손에 나타났다.
푸른 빛의 창대와 다섯 갈래로 나뉘어진 창날. 틀림없는 르 브란이었다.
르 브란을 들고 상대를 향하는 내게 르 브란이 말을 걸어왔다.

[도련님. 저 자는 악마 파라르야. 인간 수준의 반응 속도로는 도저히 어떻게 될 상대가 아니야.]

그럼 어떡하라구? 나는 인간인걸.

[그 날 밤. 크림슨 울프와 싸울 때 썼던 그 힘을 써. 그 수 밖에 없어.]

눈앞으로 사내가 한 발짝 한 발짝씩 느긋하게 다가오는게 보인다.
하지만 그런 터무니 없는거 또 썼다간 100% 죽을게 틀림 없다고.
어차피 안써도 죽기야 하겠지만.

[거봐. 죽을 바에는 발악은 해보고 죽어야지? 아무튼 그 힘을 제대로 컨트롤만 할 수 있다면 악마 클래스의 적과도 대등하게 싸울 수 있을거야.]

그, 그래?
앞으로 20보...! 곧 녀석은 내 코 앞 까지 온다!
더 이상 쓸데없는 생각은...

[전혀 쓸데 없지 않아! 그날 도련님의 몸에 드러났던 그 주식, 틀림없는 강신(降神)의 주식이야.]

그녀의 말을 채 들을 틈도 없이 르 브란을 놈에게 찔러들어갔다.

파창!!

놈은 그것을 왼손에 든 나이프로 튕겨낸다.
히죽 웃는 놈. 그와 함께 왼쪽 옆구리에 호된 통증이 달렸다.
발이 땅에서 떨어지는 묘한 감각과 함께 몸이 공중에 뜨는 것을 느꼈다.
그렇게 한참을 옆으로 날려가 도로 한복판까지 날려가 아스팔트 바닥을 굴렀다.
놈이 발로 내 옆구리를 가볍게 걷어찬 것이었다.
그것만으로 놈과의 거리가 크게 벌어질 만큼, 그의 힘은 막강한 것이었다.

[도련님! 내 말 들어! 이대로는 죽어!]

우씨. 그거야... 나도 알...아!
온몸이 지끈지끈 쑤셔서 일어나지도 못하는 나를 향해 놈은 또 다시 느긋하게 한 발짝씩 다가온다.
즐기고 있군. 저자식.

[새디스트한테 죽기는 싫잖아? 도련님.]

어째서인지 르 브란 녀석의 히죽 웃는 모습이 떠올라서 약간 열 받았지만 녀석이 여기에 오기까지 시간이 약간 있다. 일단 그녀의 말을 들어서 손해는 없겠지.
그야, 나도 새디스트한테 죽긴 싫어. 그러니까.

[방법 말이지? 솔직히 말하면 나도 몰라.]

................................
널 믿은 내가 바보다.

[실례네. 그래도 막연하게는 알고 있다고. 그날 도련님의 몸에 떠올랐던 주식의 일부에 기동식이 그려져 있었을거야. 그걸 머릿속에 그려.]

그건 무리. 그날 기억은 거의 없는 걸.

[거의 없어도 조금이나마 있을거 아냐! 가장 인상에 남았던 주식의 모양을 머릿속에 그려! 그게 기동식일게 틀림없어!]

그렇게 우리가 바보같은 상의를 하는 동안 녀석의 이목구비가 뚜렷이 보일정도로 거리가 좁혀졌다.
그래. 일단은 몸을 일으키고. 녀석이 느닷없이 공격해 올걸 대비하고, 머릿속에 그걸 그려보자.
욱신욱신 쑤시는 다리를 억지로 움직여 몸을 일으켰다.
일단은 전체적인 모양. 지금 기억나는 거라곤. 원형의 도형.

쉬이잉!!

바람을 가르며 달려드는 사내의 나이프. 그것을 가까스로 르 브란의 창대로 막아내고 다시 옆구리로 달려드는 차기를 창대로 받아냈다.

터엉!

쇠를 울리는 소리와 함께 또 다시 몸이 허공에 붕 떴다.
르 브란 채로 날 날려버린 것이다.
이번에는 불행하게도 건물 벽에 날아가 부딪혀 버렸다.

쿵!

날아가 버릴 것만 같은 의식을 간신히 붙들어 잡고 르 브란을 지팡이 삼아 몸을 일으켰다.

"컥... 쿨럭... 크... 오냐. 어디... 제대로 붙어보자아...!!!"

머릿속으로 큰 원을 그린다. 그리고 그 원 안에 역삼각형의 배열로 원을 세개 더 그려넣는다.
그리고 그 세 원의 중심점들을 연결하여 역삼각형을 그린다.
그리고 바깥의 큰 원의 양 옆에 정삼각형을 그려넣었다.
그와 동시에 온 몸의 관절이 불에 데인 듯 뜨끔뜨금해왔다.
막혀있던 무언가가 다시금 열리는 신호. 닫혀 있던 제 삼의 눈은 그것으로 다시 열렸다.
온통 붉은 빛으로 물든 세계. 마나의 흐름이 다시금 이 두 눈에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팔의 주식이 녹색빛을 뿜어내고 있다.
이전과 같이 몸이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제멋대로 움직이거나 하지는 않는다.
눈 앞을 반쯤 덮은 검은 머리카락. 성공했다는 것을 확신한 그 순간, 알 수 없는 자신감이 솟아났다.
아무것도 안 든 자유로운 손을 파라르를 향해 내밀고 검지를 까닥까닥해 보인다.

"Come on."


제 2 화 Give & Take - 자매 (3)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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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우... 몸 상태 최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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