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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환] 낮과 밤의 경계에서

Sigma 2017.04.11 21:24 조회 수 : 38



  불운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타날 때, 그 날이 유독 운이 없는 날인지, 혹은 그 불운함이 평소엔 나타나지 않는 변수일 뿐인지에 대해서 사람들의 의견은 다양하게 갈린다.

  머피의 법칙이라 주장하는 이도 있으며 평소 알게 모르게 누리던 행운의 반작용으로 불운이 찾아왔다 여기는 이도 있다. 우울함에 잠겨 움직이지 않으려는 사람이 등장하기도 한다. 당연히 그들이 불운에 대처하는 방법 역시 다양하다. 그 날이 지나가기를 기다리거나, 영험한 파워스톤이나 부적을 사거나, 그날의 운세를 찾아보거나.

  반대로 일어났을 일이라 일어났을 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존재한다. 우산을 놓고 온 날 중 비가 오지 않은 날이 온 날 보다 더 많지 않은가? 슈퍼에서 줄이 줄어드는 속도? 계산대가 4대 있다고 가정할 시 자신이 선 줄이 먼저 줄어들 확률은 1/4인 반면 나머지 줄이 빨리 줄어들 확률은 3/4에 달한다…….

  각종 자칭─천냥광대, 꿈과 희망의 전도사, 천재 마술사 등등─과 자칭과 무대 위에 있을 때의 흥겨운 언동 때문에 간과되기 쉬웠으나 텐노우지 아키라는 의외로 후자의 성향을 갖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에게 식빵이 잼을 바른 면으로 떨어지는 이유는 그저 중력이 그쪽 면을 더 강하게 잡아당기기 때문이었다. 물건이 자신이 찾을 때 안나오다가 어머니가 찾을 때 잘 나오는 건 애초에 수색 경험의 차이가 있으니 당연한 일이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아키라가 차가운 성격이냐고 하면, 그렇지는 않았다. 오히려 불운에서 비롯되는 우울함에 매몰되는 대신 사실을 담담히 받아들이고 긍정적인 시야로 조명하는 현실적 낙관주의자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행운에 대해선 기뻐하며 웃음과 함께 받아 들였으니.
  그래서 '도쿄까지 갔음에도 원하던 물품을 구하지 못한' 상황에도 아키라는 다소의 피곤함과 빈손의 가벼움을 친구 삼아 쿠즈류 시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게 없다니! 다시 생각해도 서프라이즈하네요!"


  아키라는 전철에 오래 앉아 있느라 뻣뻣해진 팔다리를 풀곤 길을 걸었다. 1월, 점점 추워지는 계절은 제 형제와는 달리 하늘을 오래 밝혀두지 않았다. 풍경에 덧대어진 붉은빛이 점점 창백해지는 가운데 기온은 점점 여위어갔다. 날카로워진 바람에 아키라는 반사적으로 어깨를 움츠렸다. 몇달 전 비슷한 시간대와 다르게 거리에는 그 혼자 뿐이다. 겨울이구나. 아키라는 새삼 실감했다.


  "아."


  땅거미에 잠겨가는 익숙한 길을 걷던 아키라는 잠시 고개를 돌려 다른 방향을 바라보았다. 학교였다. 소년이 다니는 학교의 교장은 학생들의 의견을 존중해주는 인심 좋은 사람이었다. 방학에도 부활동을 하게 해달라는 학생들의 탄원에 교장은 학교를 개방하기로 결정했다. 그저 여러 부─특히 검도부─가 올리는 실적을 통해 학교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서라고 비꼬는 학생도 소수나마 있었지만, 적어도 부활동을 하는 학생 중 그 결정 자체를 반대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만약 마술도구를 사느라 도쿄에 가지 않았다면 그 또한 부활동을 하기 위해 학교에 있었을 것이다. 아키라는 잠시 손가락을 굽혀 입술에 대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가 아키라는 홱 소리가 날 정도로 방향을 틀었다.


  "부장으로써 사랑하는 부원들을 지도해줘야죠. 제가 갑니다, 여러분!"

 
  아키라는 만일 누가 옆에 있었다면 화들짝 놀랐으리라는 사실은 그다지 신경쓰지 않았다. 또한 자신의 말이 여러모로 부원들에게 지적받을 대사란 사실도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 거리에 있는 사람은 달리 없으니 그것은 일어나지 않을 일이었다. 그리고 아키라는 일어나지 않을 일에 침울해 할 비관론자는 아니었다. 상쾌하기까지 한 기세로 아키라는 학교를 향해 달렸다.






  아키라가 학교에 도착했을 땐 거의 땅에 다다른 태양이 마지막 빛을 흩뿌리고 있었다. 아키라는 막 교문을 나서는 육상부원들과 엇갈려 안으로 들어섰다. 북적거리는 낮과 달리 스산해진 운동장은 관점에 따라 퍽 애잔한 감상을 자아낼 수 있을 법했지만 아키라는 곧바로 고개를 들어 본관을 바라보았다. 아키라의 시선은 곧 3층의 한곳, 마술부 부실에서 멈췄다. 


  "오!"


  아키라는 지체없이, 그러나 조심스럽게 3층으로 향했다. 마음 같아서는 쏜살같이 달려가고 싶었지만 발소리가 난다면 들킬 우려가 있었다. 아키라는 이 시간까지 학교에 남아 연습하는 기특한 부원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대체 누구려나요? 발끝으로만 걸음을 옮기며 아키라는 부원들의 얼굴을 떠올려보았다. 모리, 야마모토, 아사노, 시미즈, 나카자와…….

  읍…… 끄…… 읍……. 복도 저 편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아키라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키라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잠시 후 아키라는 그 소리가 숨이 막혔을 때 내는 소리 비슷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음 순간 아키라는 맹렬하게 부실을 향해 달려갔다.


  "괜찮습니까!"


  문설주에서 튀어날 기세로 문이 열렸다. 반대편 벽에 맞고 튀어나온 문에 부딪힐 뻔했지만 아키라는 가슴을 쓸어내리는 대신 창백한 얼굴로 주변을 돌아보았다. 

  부실 안쪽엔 두 사람이 서 있었다. 그 중 한 명은, 애초에 마술부 부실이었으니 당연하지만, 아키라도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올해 2학년이 되는 후배인 아사노 마야. 반면 다른 한 명은 얼굴을 알기는 커녕 옷차림부터가 외부인이 분명한 소녀였다. 그런데 둘의 자세가 이상했다. 얼핏 보기에 두 소녀는 포옹을 나누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 모습은 보통의 포옹과는 달랐다. 그렇게 판단하기엔 균형이 지나치게 맞지 않았다. 아키라는 둘 중 안겨 있는 쪽, 그러니까 아사노 마야가 쓰러지지 않은 것은 이름 모를 소녀가 그녀를 붙들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이름 모를 소녀 역시 아키라를 알아차렸다. 입고 있는 블레이저보다 짙어 녹아들지 않는 검은 머리칼. 그것에 가려지지 않은 붉은 눈이 반짝이는 모습에 아키라는 흠칫 놀랐다.


  "어머나? 새로운 손님이 오셨네요."


  소녀의 팔에서 아사노가 툭 떨어졌다. 아사노는 그대로 쓰러져 움직이지 못했다. 가깝다고는 할 수 없는 거리였음에도 아키라는 그녀의 창백해진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명백히 평범하지 않은 상황에 아키라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 없는 말을 빚어냈다. 대체 이건……. 그 모습을 보며 소녀는 입술을 아래로 내렸다. 동시에 양쪽 끝은 위로 올렸다.


  "이건 또, 맛있어 보이는 분이…… 어머나, 저도 그만 천한 짓을. 자아, 그럼…… 다음은, 당신의 마력을 받아가도록 할까요?"


  요염하게 미소지은 소녀는 낼름 혀를 핥았다. 그리고 사뿐 걸음을 내디뎠다. 아키라는 지금 이 순간이 굉장히 위험한 순감임을 직감했다. 그는 입술 안쪽을 깨물었다. 아무리 평소에 긍정적으로 행동하는(혹은 그러려고 하는) 사람일지라도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눈을 돌리지는 않는다. 최대한 긍정적으로 상황을 해석하여 침착을 되찾으려는 행위라면 모를까, 무작정 부인하는 것은 그저 위기감으로부터의 도피일 뿐이다. 아키라는 짧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 질문했다.


  "당신, 처음 보는 분입니다만, 아사노 양에게 무슨 짓을 한 겁니까?"


  만약 상황을 '정확히' 짐작할 이가 본다면 놀라운 배짱이라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에 관심이 없었던 소년은 이어 말했다. 무릇 모르는 게 약일 때도 있는 법이다. 


  "아니, 당신이 누군지는 상관 없습니다. 아사노 양, 괜찮습니까, 아사노 양!"


  그리고 '모르기에' 만용을 부리게 될 때도 있는 법이다. 아키라는 좀 전부터 위험을 경고하는 본능을 애써 뿌리치고 아사노에게 달려갔다. 아사노는 반응하지 않았다. 간신히 숨만 붙어있다고 표현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한시라도 빨리 병원에 데려가야 했다. 아키라는 자꾸만 바닥에 쓰러지는 아사노를 애써 부축했다.

  그러나 소녀는 둘을 보내줄 마음이 없는 모양이었다. 몸을 일으켜 후배의 팔을 자신의 어깨에 걸치려는 순간, 아키라는 목에 닿는 이질적인 감촉을 느꼈다.


  "후배를 생각하는 좋은 선배네요……. 어쩌면 연인이었으려나? 후후후…… 뭐어, 아무래도 좋은 일이지만……."


  아키라는 시선을 내렸다. 목 주변을 소녀의 가느다란 팔이 감싸고 있었다. 이게 무슨─ 말을 맺기도 전에 아키라는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만약 소녀가 그를 붙들고 있지 않았다면 그대로 쓰러졌을 것이다. 툭, 바닥으로 떨어지는 아사노. 조금 전 일어났던 일의 재현이었다. 그저 대상이 아키라로 바뀌었을 뿐이다.

  아키라는 필사적으로 힘을 끌어모았다. 왜 소녀가 이런 일을 하는지, 어째서 의식이 잠기는지 아키라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무지(無知)가 언제나 상황에 대한 면제권을 부여하지는 않는다. 아키라에게 어떤 사정이 있든 소녀가 그를 놔주려 하지 않음은 명백했다. 물론 그것과 아키라가 소녀의 뜻을 거부할 권리는 별개였기에 아키라는 약해지는 팔로 소녀를 뿌리쳤다. 정확히는 뿌리치려 했다.


  "그럼…… '잘 먹겠습니다.'


  팔은 주인의 의사와는 달리 제대로 소녀를 떼어내지 못했다. 두어 번쯤 그것을 반복했을 때 아키라의 눈앞이 아지랑이 피어오르듯 흔들리기 시작했다. 눈앞이 어두웠다. 아니, 밝아진 걸까? 둘 다일수도 있었다. 이상하게도 사물의 윤곽선이 점점 희미해졌다. 너무 길면서도 너무 짧은 시간. 아키라의 쇄골을 무언가가 스쳤다. 아마도 소녀의 손가락인 듯하다. 목을 조르는 대신 그것은 마치 뱀처럼 아키라의 목에 달라붙었다. 그러나 아키라의 시야는 영상 매체에서 목을 졸릴 때 표현되곤 하는 그것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곧 눈이 감길 것이다. 점점 옥죄어오는, 봄의 햇빛 한가운데 같은 나른함 속에서 아키라는 물속에 빠진것 같은 충격을 느꼈다. 만약 이대로 눈을 감아버린다면─ 아키라는 이제는 움직이는지조차 알 수 없는 손에 다시 한번 힘을 넣었다.


  "윽……!"


  아키라는 무릎에서 꽤 거센 충격을 느꼈다. 하지만 그것은 반가운 충격이었다. 결국 그가 소녀를 뿌리쳤는지, 소녀가 그를 놓아준 것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어쨌든 아키라는 소녀의 팔에서 벗어나는데 성공했다. 아키라는 팔이 휘감겼던 목에 반사적으로 손을 대며 소녀를 노려보았다.

  "당신, 이게 대체……!"

  무슨 짓입니까, 라는 단어는 아키라의 의도와는 달리 완성되지 못했다. 소녀는 그가 자유를 되찾은 사실에 대해 어떠한 유감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절대 좋은 징조는 아니었다. 본능에 이성이 더해진 경고. 가능함과 불가능함을 넘어서, 이곳에 머무르는 한 두번째 기회는 없다. 아사노 양. 육성으로 말할 시간이 주어질리 만무했다. 때문에 소년은 속으로 말했다.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 아키라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어머나…… 숨바꼭질인가요? 우후후…… 좋아요. 저도 숨바꼭질은 자신있답니다. 자아…… 머리카락이 보이지 않게, 꼬옥꼭 숨어주세요?"


  아키라는 복도를 향해 달렸다. 정적을 깨뜨리는 발소리 속, 소녀의 목소리가 그의 귓가에 싸늘히 달라 붙었다. 다행히 소녀는 아사노에게서 흥미를 잃은 모양이다. 적어도 그가 도망치는 동안엔 아사노는 안전하겠지만…… 아키라는 그것에 기뻐할수 없었다. 그에게 그것은 자기 변호나 다름없이 느껴졌다. 그런 자신에게 혐오를 느끼며 아키라는 복도를 헤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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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량문제로 여기서 커트.
쓰다보니 왠지 점점 길어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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