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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0.



이샤나는 다소 의기소침한 상태였다. 자신 때문이다. 도움은 되지 못할망정, 라이더의 발목을 붙잡기나 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훨씬 더... 그녀는 고개를 붕붕 저었다. 그녀는 이비가 내민 마보석 쥬스 - 솔직히 정말 맛은 없었다. 모든 약이 그렇듯. - 를 쭈우욱 들이마셨다. 기운이 조금 나는 것 같았다. 



"그런데 마보석... 최근에 만들어 둔 기억은 없는데, 어디서 났어?"



이비의 컴퓨터와 같이 정확한 묘사로, 이샤나 아르시오네는 그것이 누구로부터의 선물인지 정확히 알 수 있었다. 





# 01.



이샤는 여전히 조금 시무룩한 눈치였다. 물론 아까보다는 훨씬 나은 컨디션이었지만, 죽었다 살아난 감각에서 오는 공포감은 여전히 어디선가 그 귀신 같은 캐스터가 튀어나올 것만 같은 기분을 이샤에게 주었고, 그에 더해 자신이 정말 쓸모 없었다는 기분만이 남았다.



『마음에 둘 필요는 없어, 이샤. 그건 결코 네 탓이 아니니까. 그렇게까지 심한 증오를, 너는 아직 태어나서 받아본 적이 없었던 것 뿐이야.』



또, 가능하다면 평생 몰라도 상관 없는 정도의 증오이기도 하고. 그게 당연해. 라이더는 이샤를 위로하고 격려했다. 



『네에.. 그래도, 그... 제가 조금 더 잘 했으면, 그렇게 놓치지 않았을 것 같아서...』



이미 벌어진 일. 상황은 바뀌지 않는다. 고로, 보통의 경우라면 시간만이 약일 뿐. 그렇지만 이번은 조금 달랐다. 아주 기분이 좋아지거나 만사가 괜찮아질 거란 확신까진 들지 않았지만, 신기하게도 라이더의 말을 들으면 무언가, 무언가가 정말로 "괜찮다"는 기분이었다. 괜찮아질 거야. 절대로. 이샤는 살짝 입을 옴싹거렸다. ... 아직 마음에서 지워버릴 순 없지만, 맞아. 계속해서 걱정을 끼치고 신경을 쓰게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민폐일 것이다. 또, 계속 마음에 담아두고 영향을 받는다면 - 비록 이것이 공연은 아닐지언정 - 더 잘하는 것이 오히려 힘들겠지. 이샤는 가볍게 심호흡을 하고, 양 뺨을 살짝 찰싹! 하고는 조금 기합을 넣었다.



『으으, 솔직히.. 아직 자신은 없지만. 공연에서도 실수가 난 걸 계속 신경쓰면 연달아서 망쳐 버리니까..! 그래도 다시, 최대한 노력해 볼게요!』



그리고 그으, 격려해 주셔서 감사해요. 라이더. 이샤는 작게 덧붙였다. 그런 이샤를 보고 살풋 미소지은 라이더는 곧 다시 진지한 얼굴로 돌아왔다. 



『그래, 다행이야... 그리고, 걱정만 하고 있을 순 없겠어. 이샤. ..서번트의 반응이다.』



그 말을 듣자, 반사적으로 움찔했지만, 이샤는 곧 다시 호흡을 가다듬곤 곧바로 탐색을 펼쳤다. 겨우 십대의 소녀라기엔 상당히 놀랄 정도로 세련되고 재빠른 동작, 흠 없는 범주였다. 문득 이걸 배울 때, 공격 마술 쪽으로 방향을 바꿨다면 조금 다른 모습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곧바로 지웠다. 남을 해치는 계열의 마술은 내키지도 않았을 뿐더러, 이샤의 전문이 아니었다. 그녀가 그 목소리로, 손끝으로, 움직임으로 행하는 것은 아름다움. 누군가를 해하는 것이 아니다.


그나저나, 어제처럼 곧바로 전투로 이어지지는 않았으면 좋겠는데. 그렇게 생각하며 이샤는 발견한 반응을 향해 우아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 02.



그리 멀지 않은 거리였다. 두 블럭 정도 걸어갔을까. 이샤나 아르시오네는 이어지는 번화가의 한가운데서,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있는 소년을발견했다. 체구는 이샤와 엇비슷.. 키는 조금 작을까. 신발에 따라서는 거의 같아지겠지만. 확실히는 알 수 없었지만, 얼핏 보기에는 어리다면 초등학교 6학년 정도. 많아야 중학생 정도일 법한 소년이었다. 


저렇게 어린 아이도 이런 것에 참가한 걸까. 그런 생각을 하며, 이샤는 살그머니 라이더에게 물었다.



『저렇게 어린 아이도 참가자인 걸까요...? 아무리 봐도 저 사람이 맞는 것 같은데.』


『근처에 서번트 반응이 있으니까... 나처럼 영체화하고 있는 것 같지만 말야.』


『으음... 저로서는 솔직히 어제 같이 무시무시하고 나쁜 서번트는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그런 서번트가 하나로도 끔찍한데 둘이나 있으면 더 무섭... 싫을 것 같아요.』


『그러한 기색은 느껴지지 않지만... 일단 습격해올 기색은 없는 것 같아. 이야기해보면 어떨까?』



이샤는 안도한 눈치였다. 솔직히 말해서, 그녀 자신의 안전 문제 때문에도 심장이 남아나지 않았지만, 민간인도 마찬가지였다. 어제에 이어 또다시 이런 번화가에서 전투라니. 상대가 그나마 신비의 은닉 때문이든 성격 때문이든 민간인의 피해는 없도록 하는 것에 동의한다면 차라리 나았지만, 그런 것은 상관 없이 공격하는 부류라면 정말로 골치 아팠다. 이샤나 아르시오네는 가능한 한 최대한 - 물론 '완전히'가 불가능하다는 건 그녀도 알고 있었다 - 민간인의 피해.. 특히, 생명의 피해가 없길 바랐다. 멍청하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고, 비효율적이라 해도 당연한 것이며, 무르다고 해도 상관 없는 것이지만, 그녀는 아무것도 모르는 채 이 도시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정말 "자연재해"와 같은 이 일에 휘말려 피해를 보는 것은 바라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서번트에게는 다소 비효율적인 행동을 요청할 수도 있고, 서번트를 보조하는 데 온전히 쓰여야 할 마력을 결계에 돌릴 수도 있다. 그렇게 말했을 때, 라이더는 그녀를 탓하는 대신 오히려 살짝 웃었다. 나는 그런 점이 네 좋은 점이라고 생각해, 이샤. 그렇기 때문에 이샤 또한 안도했지만.


아무튼, 지금은 일단 저 마스터에게 어떻게 다가갈지가 관건이다. 이샤는 그렇게 판단했다.



『으음... 제가 먼저 일단 인사라도 건네는 게 나을까요? 어린 아이에게 말을 거는 수상한 사람으로 보일까요? ...아직까지..는, 공격할 의사가 있는 것 같지는 않은데.』



잠시 고민하던 이샤는 먼저 입을 열었다.





# 03.



"그.. Bon jo... 안녕하세요?"


"아, 안녕하십니까!"


"그.. 일단 저는, 으음... 이샤나라고 해요."



이샤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 아이는 내가 자신을 잡아먹을 거라고 생각한 걸까. 저렇게까지 큰 기합을 넣어서 인사할 필요는 없는데.. 아무튼, 이샤는 먼저 자신의 이름을 알렸다. 최소한, 먼저 자신의 이름을 말한다면 적의가 없다는 걸 약간이라도 나타낼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풀 네임을 말하지 않은 건, 유년기에 뼛속에 새기듯 박아넣은 마술사로서 지켜야 할 최소한의 몇 가지 중 하나의 증거겠지. 물론 풀 네임에 지극히 가까운 이름을 찾는 것은 구글에 검색하면 0.1 초만에 알아낼 수 있는 것이긴 하지만.


그녀가 먼저 이름을 말한 것에, 상대 소년은 놀란 눈치였다.



"텐노우지 아키라입니다. 초면입니다만, 이샤나 양도 알고 계실 듯 하고... 성배전쟁의 마스터가 맞으십니까?"



이번은 이샤나 쪽이 놀랄 차례였다. 단도직입적.. 이라면 단도직입적이지만, 이런 식으로 물어볼 줄은 예상 외였다. 살짝 눈을 깜빡거린 이샤나 아르시오네는 잠시 생각하고는 대꾸했다.



"숨기는 건 의미 없겠죠. 맞아요. 그래서 텐노우지 씨를 찾아낸 거구요. .. 일단, 그럼 먼저 단-도-직-입-적- 으로 물을게요. 무례한 질문이지만, 텐노우지 씨는 여기서 저희와 싸울 생각이신가요?"


"Dan-Do-Jig.... 아,"



이샤는 순식간에 뺨이 달아올랐다. 자신은 설마 이상한 발음을 해 버린 걸까. 그녀는 외국인이고, 15살이 되기 전에는 일본어 따위 기초적인 인사를 아는 게 전부였으므로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겠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부끄러워 죽을 것 같았다. 엉망인 빈틈을 보이다니. 차라리 라이더에게 통역을 부탁하고 모국어로 하는 게 나았을 뻔했다..! 이샤나 아르시오네는 쭈글쭈글해지는 기분과 함께 뜨거워지려는 뺨을 애써 식혔다.



"아뇨, 전 싸우기 위해 돌아다닌 것이 아닙니다. 이샤나 양은 어떻습니까? ... 만약 싸우고 싶다고 하더라도, 장소를 옮겨 주셨으면 좋겠습니다만."


"저도 가능한 한 싸우고 싶지 않아요. 특히 이런 곳에선요. ... 저희 또한 텐노우지 씨가 음.. 제 생각보다 굉장히, 나쁜 사람이 아니라면 먼저 공격할 생각은 없어요."



두 소년소녀는 마치 서번트들의 반응을 살피듯 잠시 머뭇거렸다. 하지만 양쪽 다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그로 미루어보아 전투는 피할 수 있는 것일까. 이샤는 생각했다. 라이더는 좋고 싫음, 그리고 싫더라도 납득하고 어느 정도 양보할 수 있는 선과 그렇지 못한 것이 뚜렷하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여태까지 보기로는. 그런 라이더가 싫은 기색이 없다면 일단.. 은 안도해도 되는 것인가 싶었다.


그리고 잠시 후, 이샤나의 눈 앞에 소녀의 인영이 나타났다. .... 혹시 몰라 지나가는 사람들과의 사이에 살짝 차단을 해 두길 잘했다, 고 이샤는 생각했다. 이 번화가 한가운데서 갑자기 사람이 튀어나오면 누구나 놀라겠지.


소녀는 비교적 앳되어 보였다. 마찬가지로 소년의 모습인 라이더보다는 한두 살 많아 보일까. 검을 차고, 동양풍 복식을 입은 단발의 소녀.  검 또한 서양의 것과는 확연히 다른 것이지만, 이샤나로서는 정확히 어느 나라의 양식인지 알 수는 없었다. 굳이 따지자면 - 예술가로서 배운 그녀의 교양과 기초 지식에 힘입어 - 이 나라.. 일본의 것에 가까워 보였지만 어떨지... 국적이나 상식에 따른 인종, 복식만 갖고 판단하면 안 된다는 것은 자기 옆의 라이더가 가장 먼저 증명해주고 있지 않았던가. "세이버", 하고 텐노우지 아키라라는 소년이 무심코 중얼거렸다.



"초면에 실례. 하지만, 그쪽의 서번트도 모습을 드러내 주었으면 합니다. 보다시피, 우리 마스터는 마술도, 싸움에도 초심자. 암습을 당하면 견딜 수 없으니까요."


"우윽.... 그건 부정할 수 없습니다만, 뭐랄까.. 좀 더 있어보이는... 아니, 아닙니다."



소년이 초심자라는 것은 이샤나로서도 전혀 의심 없이 받아들일 수 있달까, 대강 눈치채고 있던 사실이었지만. 아마 이샤나보다 더 전투 등의 경험이 많은, 노련한 마술사였다면 처음 본 순간, 말을 나눌 것도 없이 바로 파악했겠지. 이샤는 속삭이듯 머릿속으로, 라이더에게 물었다.



『라이더는 어떻게 하실래요..?』


『상대의 경계를 푸는 의미라면 나도 모습을 드러내는 편이 좋겠지만.. 긴장은 과연 어떠려나. 판단은 이샤에게 맡기겠어.』


『으음.. 상대도 당장 공격할 것 같지는 않고, ... 마스터 쪽이 엄청난 연기파 배우나 다중인격이 아니라면 기습할 타입 같지는 않아요. 저쪽이 먼저 저렇게 나왔다면, 저희도 마주 해주는 게 낫지 않을까요?』



그렇네, 라는 작은 동조와 함께 라이더는 곧 꽃잎 내려앉듯 모습을 드러내었다. 특유의 희미한 꽃향기.. 혹은 마알간 숲내음 같은 것이 뺨을 간지럽혔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언제나 머릿속이 맑아지고, 안정되는 느낌에 이샤는 살짝 안도한 듯 저도 모르게 입가를 끌어올렸지만, 상대는 아닌 것 같았다. 움찔하고 긴장한 것이, 나이 차이가 그리 나지 않는 이샤나 아르시오네에게조차 보이는 것이다. 이샤는 잠시 생각하다가 - 나름 숙고하다가 - 조심스레 말했다.



"그.. 해치지 않아요?" 



별로 효과는 없는 것 같다.



"실례. 내 마스터는 이 나라의 말이 익숙하지 않아. 필요하다면 대신 통역하지. 서번트, 라이더다."



이번에는 이샤가 뾰로통해질 차례였다. "기본적인 의사소통에는 문제가 없었다구요!" 라고 꿍얼거렸다. 실제로도 여태까지 소통에 문제가 있었던 적은 없었는데. 아까의 단-도-직-입-적- 한 번을 빼면! 라이더가 진지하게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설마 100분의 1의 가능성으로 아까의 단도직입 건을 돌려서 놀리는 것인지, 이샤나 아르시오네는 분간할 수 없었다. 그런 그녀의 뺨이 부풀어오른 걸 아는지 모르는지 모르겠지만!



"아... 그보단 익숙하지 않아서. 신경 써주신 것은 감사드립니다."


"그런가.. 그럼, 나는 우선 자리를 옮기는 것을 제안하겠어."



그제서야 이샤나 아르시오네는 자신들이 길가에 서서 이야기하던 중이었단 것을 깨달았다. 확실히 깨닫고 보니 애매한 자세다. 이샤는 살짝 한숨을 쉬곤, 근처에 적당히 들어갈 곳이 없나 묻기 위해 입을 열었다.






# 04.



그들이 들어온 것은 비교적 한적한 카페였다. 실은, 이샤나로서는 근방의 스타○스에 가서 일본 한정 메뉴라는 사쿠라 어쩌고를 마셔보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만석이었다.



"사람이 조금 많...은 것 같은데 괜찮으십니까?"


"에에. 어차피.. 만약 중요한 이야기가 나온다면 민간인에게는 들리지 않을 정도의 가벼운 결계를 쳐버리면 되는 일이니까. 상관 없을 것 같..아요."



이샤나는 살짝 머뭇거리다 말했다. 음, 또 어색한 침묵이다. 몇 안 되는 면식이 오래된 지인이었다면 푸하! 하는 소리와 함께 편하게 대했을텐데, 아직 초면인 것도 그렇고, 일본인은 거리감이 있다는 말을 들은 기억에 이샤나는 어색한 침묵을 애써 견뎠다. 그러나, 역시.. 완전한 민간인이었다면 지금 상황이 굉장히 긴장될 것이다. 열 서너살 정도의 어린 소년이라면 더더욱. 그런 판단 하에, 이샤나는 큰 맘을 먹었다.



"혹시, 식사 아직 안 하셨다면 샌드위치도 주문할 건데 같이 드실래요?"


"우선, 싸움을 택하지 않아주신 것에 대해 먼저 감사드립니다. 조금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전투만을 목적으로 움직인 게 아니라서.. 에? 아.. 괜찮습니다. 저녁은 먹고 나와서. 마음은 정말 감사드립니다."



실패였다.... 역시나. 이샤나는 사람을 대하는 게 다소 서툴렀다. 정확히 말하면 친밀하게, 친근감 있게 대하는 것이. "실제로 비교적 많이 보았거나", "아예 비즈니스적 관계, 혹은 관객을 대할 때로 예의 바르고 정중하게 대하는 것". 이 두 가지의 극단적인 부류를 제외하고는. 당연한 일일 것이다. 인간 관계가 형성된다던 열 살 이전까지의 시간을, 그녀는 대부분 사람과 보내지 않았으므로. 아무튼, 아까의 단-도-직-입-적-에 이어, 이샤나는 또다시 머리칼을 쥐어뜯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아마 방에 돌아가면 침대에 뛰어들어서 베개에 얼굴을 묻고 발로 이불을 팡팡 차지 않을까. 그런 이샤나의 급속도로 나락으로 떨어지던 생각은, 텐노우지 아키라의 말로 멈추었다.



"그나저나 마술사라는 분들은 굉장히 냉혹하다 들었습니다만... 제 의견을 들어주신 것도 그렇고, 개인차가 있는 것 같군요."


"그런가요? 감사를 들을 만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엣."


"...?"


"그으. 으음... 텐노우지 씨가 만난 분이 어떤 분일진 모르겠지만, 냉혹.. 이라면 아마 보통...은 그런 사람들이 더 많을 거라고 생각해요. 냉정하게 말해서. 자신을 마술사라고 인-식-하고 자-각-하는 사람이라면요."


"그렇군요."



솔직히 말해, 이샤나 아르시오네는 다소 망설였다. 이걸 말해주어도 되는 것일까. 일반화하는 것은 아니지만, 사실이긴 했다. 그녀는 자신을 마술사라고 인식한 적이 그다지 없었으며, 반대로 제대로 마술사라는 자각을 가진 이들 중에는 아마도 그가 말하는 "냉혹"한 사람들이 더 많을 것이다.


그 와중에, 문득 그녀는 냉혹이라는 어휘를 알아들은 스스로에게 조금 뿌듯해하며 말을 이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매너가 좋거나 상냥해 보이는 사람도 있지만,  .. 아, 물론 진짜 착한 사람도 있구요! 대신 상상을 초월하는 변태도 있고... 팔은 안으로 굽으면서, 효율성을 따지는 냉정한 부류가 제일 많을 거에요."



텐노우지 아키라는 흠, 하는 소리와 함께 고개를 갸웃거렸다.



"환담도 좋지만, 좀 더 실무적인 이야기를 해도 좋을까요."


"아, 이야기가 많이 빗나갔군요. 세이버, 지적 감사드립니다."



그렇게 말하는 세이버 앞의 접시에, 수북하게 쌓여 있던 양갱이 사라진 것을 보며 이샤는 가볍게 손을 들어 양갱을 추가로 주문한 후, 눈 앞의 소년을 바라보았다.



"아무튼, 이번에 저와 세이버가 움직인 것엔 다른 이유도 있었습니다. 이샤나 양도 아시겠고, 세이버도 말했으니 인정하겠습니다. 저는 그야말로 일반인! 성배전쟁에 참여하기 전까진 마술도, 성배도 몰랐습니다. 당연히 지금도 잘은 모르고요. 세이버는 믿음직하지만, 솔직히 저희만으로는 전쟁을 헤쳐나가는건 어려울것 같다는 결론에 저희 둘 다 도달하여.. 말이 복잡해졌군요."



텐노우지 아키라는 가볍게 숨을 들이킨 후 말했다.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저흰 동맹을 원합니다."





# 05.



이샤나는 자신 앞에 놓여진 커피 - 아이스 바닐라 라테. 저지방 우유에 시럽은 반만 넣은. - 를 한 모금 쭉 들이키고는 라이더를 바라보았다. 『라이더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특히 저는, 마술사들이 말하는 '일반인'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는 분을요. 제가 생각해도 아쉬운 입장에서 말이 많습니다만.."



이샤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라이더의 대답을 기다리며 되물었다.



"아까 제가, 겉보기엔 친절하고 속은 냉혹한 마술사도 있다고 말씀드렸죠. 제가 그런 부류가 아니라고 생각하시는 이유가 있나요?"


"협상 테이블의 상투적인 대답 같습니다만... 이샤나 양이 그런 분이셨다면, 사람이 적은 곳으로 장소를 옮긴 다음 바로 절 제거하려고 하셨을 것 같습니다."


『아아, 손을 잡아도 좋을 것 같아. 하지만, 잊으면 안 돼, 이샤. 나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는, 결국은 세이버도 희생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그 마스터인 소년은, 보호해도 좋겠지만.』


『그렇군요. 라이더가 말한 것처럼... 결국에는 나중에 싸우게 되는 건 어쩔 수 없겠지만.. 타협이 되는 사람들이라면 잠시라도 손을 잡고, 괴물 같ㅇ.. 나쁜 서번트나, 훨씬 더 위험한 적한테 먼저 집중하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이샤나 아르시오네는 감정을 이성적인 명분으로 합리화했다. 어느 쪽도 거짓은 없었지만. 어차피 모두와 싸우게 된다면, 강대한 적이 있다면 협력해서 그 쪽부터 처치하는 것이 이득일 것이다. 그건 아마 다른 여러 진영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겠지. 홀로 리스크를 지고 싸우느냐, 나누느냐. 전자라면 이긴다 하더라도 큰 소모로 인해 곧바로 타 진영에게 공격 받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을 터. 그러한 비교적 객관적인 명분으로, 이샤나는 악인이 아닌 사람과는 싸우기 싫다는 자신의 기분을 애써 냉정한 판단으로 포장했다. 단 30초 정도. ...그녀는 결국, 자신에게 솔직해졌다.



『솔직히 저.. 어린 마스터 군이랑 싸우는 것도 싫기도 하지만요.』



사실이었다. 그녀는 세이버와 모종의 속내 교류(?)를 하는 듯한 텐노우지 아키라를 흘끗 바라보곤 다시금 커피를 홀짝였다. 완전한 일반인이었다면 필경 무언가의 대사건에 휘말려 서번트를 소환하게 되었을 터. 그녀 또한 어떤 의미로 비슷한 - 끔찍한 - 과정을 거쳤기에. 자신 또한 무서웠는데, 심지어 마술 따위 전혀 모르던 어린 소년이 얼마나 무서웠을지, 혹은 긴장하고 놀랐을지 떠오르자 문득 다시금 안쓰러운 기분이 들었다. 임사 체험(가칭)에 대한 공포감이 되살아나는 것과 함께. 정말 솔직히 - 지극히 마술사적인 객관성으로 판단했을 때, 이들은 어제의 그 캐스터 같은 자를 만난다면 아마 그녀 이상으로 어려울 것이었다. 이샤나는 가볍게 고개를 붕붕 저었다.



『으음.. 저, 라이더. 라이더의 말을 새겨서, 전장이란 것은 자각하고 있지만... 동정심이라던가 걱정이라던가 나름대로 안 하려고 애쓰지만.. 저 아이, 어제의 그 캐스터라던가 만나도 괜찮을까요..』


『... 우선 틀림없이 죽겠지. 세이버도 상당히 강력한 영령이지만, 그 캐스터의 보구를 상대로는 버티지 못할 위험이 커.』


『그렇죠? 으음. 그럼 나중의 일은 나중의 일이고. 그럼 일단 저는 오케이 할게요. ... 역시 큰 불을 끄는 게 먼저일 것 같기도 하구요.』



이샤는 판단했다. 어제와 같은, 혹은 그보다 더 강한 영령이 나올지도 모르는 일이다. 아까 판단한 강적을 상대할 때의 계산에 더해, 그녀는 자신이 모든 종류의 보조를 다 해줄 수 있을 만큼 노련하지 않다는 것은 자각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최소한 한동안은, 협력을 통해 전력을 더욱 다질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점에 있어, 첫 번째로 소년과 소녀는 이해가 일치했다. 두 번째는 관계 없는 사람을 휘말리지 않게 노력한다는 방침. 세이버는 어떠할지 모르나, 라이더는 그 방침에 있어서는 피치 못할 경우가 아니라면 대체로 동의했으므로 - 이샤 또한 약간의 불편함, 비효율이라면 몰라도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대해서는 각오하고 있었다 - 그 부분에 있어서 또한 일치했다.


그리고, 지극히 개인적인 의견이었으나, 이샤나 아르시오네는 단순히 강한 아군보다는 '신뢰할 수 있는' 아군을 선호했다. 비록 옛적에 죽을 뻔한 후 인연이 끊긴 외가지만, 그 집안과 다른 몇 마술사 집안의 예시를 통해, 그녀는 능력 있고 신뢰할 수 없는 아군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알고 있었던 것이다. 강하더라도 언제 뒤통수를 맞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전전긍긍하는 것보다는, 정말로 믿을 수 있는 사람 쪽이 나았다. 


하여, 이샤나 아르시오네는 답을 정했다. 그러나 그 전에...





# 06.



"그럼, 하나 여쭤 볼게요. 제가 당신과 동맹을 맺으면 어떤 메리트가 있을까요?"



당황한 것은 텐노우지 아키라 쪽이었다. 메리트..라니, 그는 초보자였고, 딱히 굉장히 강한 전투.. 싸움 실력을 가진 것도 뭣도 아니었다. 세이버는 강하지만, 저 라이더에게 있어 그게 메리트가 될 수 있는 것인지 그로서는 확신할 수 없었다. 아니.. 아마도 아닐 것이다. 이건 동맹 거절을 돌려서 말하는 건가... 거의 그렇게 생각할 뻔한 아키라였지만, 그는 이샤나, 라고 스스로를 소개한 소녀의 표정을 보곤 이해했다. 자기 PR이에요, 자기 PR! 이렇게 말하는 듯한, 짓궂은 빛이 살짝 스쳐지나가는 눈에 아키라는 에헴, 하곤 대답했다.



"물론 마술입니다! 종이 접기, 가사 전반, 저글링 등 엔터테인먼트 기술에도 자신 있으니 여차할 땐 찾아 주시길! 이 텐노우지 아키라, 여러.. 두 분의 즐거움을 위해서라면,"


"마스터. 목소리가 커요."



역시 세이버야. 가차 없지. 이런 표정을 지으며 주위에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고개를 꾸벅거리는 아키라를 보며 이샤나는 살짝 웃었다. 결계는 대화의 내용 같은 걸 흐리게 하지 아예 차단하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물론 그렇게 지적한 세이버 또한 이미 이샤나가 추가로 주문한 두 접시의 양갱을 흔적 하나 남기지 않고 완식한 상태였지만.



"아무튼 좋아요. 저희 측에는 종이접기, 저글링, 가사 전반 등의 엔터테인먼트 기술에 자신 있는 사람이 없사오니, 귀하는 저희 측에 꼭 필요한 인재라 판단했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텐노우지 아키라 씨."



이샤 또한 모처럼 훨씬 나아진 기분으로 응수했다. ....종이접기, 저글링, 가사 전반 등을 라이더가 할 수 있는지 그녀는 알지 못했지만 (할 수 없었대도 보자마자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라이더에게 가사일을 할 수 있냐고 물을 수 있는 용기는 그녀에게 없었다. 묻는다면 하늘에서 벼락이라도 떨어질 것이 분명했다. 아무튼 그런고로, 이샤나 아르시오네는 손을 내밀었고, 텐노우지 아키라는 가볍게 맞잡았다.





# 07.



"그나저나, 놀랐어요."



연락처를 저장하며 (아키라는 왓츠앱이 아닌 LINE만을 사용했으므로, 이샤나는 메일 주소의 저장에 더해 새로 어플리케이션을 깔아야 했다) 이샤나는 중얼거렸다.



"아키라 군처럼 어린.. 연령대가 낮은 분도 이 싸움에 참가하고 계셨다니."


"예..? 어린... 그, 혹시 이샤나 양은 나이가 어떻게 되십니까?"


"네, 저요..? 17살입니다만."


"저도 17살입니다만.."


"...... 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무례한 생각을 해서 죄송합니다 겉으로 보기에 앳되 보이셔서 제가 잘못 판단했습니다 하며 끝없이 사과하는 이샤나와, 새삼 그렇게 작아 보이는구나, 실감한 아키라였다.





# 08.



그리고 잠시 후, 친한 친구 중 하나가 이샤땅이 쿠즈류에 있대! 어쩌고 하면서 대흥분한 메일을 보냈던 것을 발견한 아키라가, 자신이 방금 한 시간의 공연을 보려면 '최소' n만 엔에 해당하는 돈과 n초 안에 예매해야 하는 스피드를 필요로 하는 이샤나 아르시오네와 차를 마시고 손을 잡았다는 것을 깨닫는 건 또 다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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