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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꿈을 꿨다. 주변 사람들은 모르는 것을 나 혼자 알아버렸지만 거기에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고, 절대 보면 안되는 것을 보지 말아야지! 하고 굳게 결심해서 지나쳐간 덕분에 어마무지한 위기를 손쉽게 피해가는 꿈이었다. 꿈속의 나는 클릭 몇 번으로 비행기 티켓 예매를 끝내고 양말 하나 구겨지지 않게 완벽하게 짐을 싸서, 그대로 쿨하게 집으로 가는 비행기에……

  ……타기 직전에, 풍경이 아지랑이처럼 일렁일렁 사라졌다. 

 

 

  아, 좋은 꿈이었는데. 특히 티켓을 예매하는 부분이 최고였다. 대부분의 학교가 겨울방학을 맞이한데다가 크리스마스 및 새해가 기다리는 이 기간 동안 비행기 표를 구하기란 그야말로 하늘의 별따기니까. 운좋게 예매 취소가 된 좌석을 찾아내서 까마득한 경쟁률을 아무렇지도 않게 돌파할 때의 그 짜릿함이란! 하지만 그것도 다 밤하늘의 은하수 너머처럼 멀리멀리 사라지고 없었다. 의식이 물 속으로- 아니, 물 밖으로 나가기 위해 물장구를 치는 것처럼 천천히 떠오르고 있었다.

 

 

  흑흑. 진짜 좋은 꿈이었다. 다 헛된 일이기는 했지만 꿈 정도는 누구나 꿀 수 있으니까. 그리고 나 같은 상황에 처했다면 누구나 이런 꿈을 꿀 수 있을거라고 생각한다. 다시 한번 쎄굿빠, 내 겨울방학…….

 

 

  죽죽 솟아나는 눈물을 애써 삼키며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

 

 

  의식은 천천히 떠올랐는데 온몸이 찌뿌둥한 피로감과 탈탈 털어내고 마지막 몇 방울만 남은듯한 기력도 같이 확실해졌다. 게다가 옷 너머로 전해지는 이 차가운 느낌. 아무리 겨울이라고 해도 나무로 만들어진 벤치나 여러 사람이 머물렀다 일어서는 돌 의자는 이렇게까지 싸늘해지지는 않는다. 즉 나는 공원이나 번화가 한복판이 아니라 어딘가 알수 없는 곳의 바닥에 있다는 뜻이다. 그러고보니까 내가 이렇게 정신을 잃기 전에 마지막으로 있던 장소는…… 장소는…… 건물 사이였는데?!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잖아! 나는 눈을 번쩍 떴다.

 

 

  "……."

 

 

  그리고 이상하게도 초점을 잡기 힘든, 나를 빤히 들여다보는 채도 높은 붉은 눈과 마주쳤다.

 

 

  "엄마야!!!"

 

 

  나는 기겁해서 뒤로 물러나- 물러나려고 했는데.

 

  이상하게도, 아무리 힘을 써도 몸이 뒤로 가지를 않았다. 왜 이러지? 다리에 힘을 줘서 있는 힘껏 밀어 보는데도 그냥 내가 땅을 발로 차는 퍽 소리만 들리고, 마치 딱딱한 무언가가 내 등을 꾹 받치고 있는 것처럼 몸이 뒤로 안 갔다. 진짜 왜 이러지??

  그래도 일단 조금이라도 물러나기 위해서 열심히 다리로 땅을 누르는데, 갑자기 눈 앞에 있던 눈(말장난 같지만 실제로 이랬다!)이 슥 멀어졌다. 아, 너무 가까이 있어서 초점이 안 맞았구나. 멀어지는 눈을 보며 나는 머리를 세게 맞은거 같은 기분을 느꼈다.

  아무리 이제 막 잠에서 깼다고 해도 그렇지 이런 당연한걸 이제서야 눈치채다니! 나 바보니??? 응, 바보 맞는거 같네!!! 잠에서 깨어날 때의 멍한 느낌이 사라지는 것과 얼굴에 김이 푸시식하고 올라오는 현상을 동시에 체험하며 나는 뒤로 가려는 헛된 시도를 중단했다. 아아아, 분명히 방금 눈 떴는데 몸에서 힘이 쫙 빠져서 다시 잠들거 같다…….

 

 

  그 때, 문득 목소리가 들렸다.

 

 

  "……마스터 님?"

 

 

  나직하고 나긋한 목소리. 귀에 익지는 않았지만 분명히 들어본 적이 있다. 응, 구체적으로는 기절하기 전에…… 분명히 날 말하는 거냐고 물어보려다가…… 아무 말도 못하고 정신을 잃었었지.

  일단 대답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누구, 저요?' 라든가 '누구세요?'라든가-라고 나는 그 말들을 모두 목구멍 너머로 꾹 삼키고 바닥을 짚었던 오른손을 내려다보았다. 슬프게도 사실은 모두 꿈이었다거나 자는 사이에 사실은 내가 마스터 후보가 아니었는데 잘못 선정했던 거라고, 마치 합격 취소 사실을 통보하듯이 령주가 회수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은거 같다. 손등에 생겼던 문양(이거, 따로 이름이 있었는데 뭐였지?)은 어느새 해가 완전히 져버렸는지 새카매진 하늘 아래에서도 사람 마음도 모르고 붉은 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으으. 일단 여전히 영문은 모르겠는데 내가 마스터가 됐다는 것만은 사실인가 보다. 그리고 그렇다는 것은 날 '마스터 님'이라고 부른 저 사람이 내 '서번트'라는 거겠고.

 

 

  -아니, 잠깐만 기다려.

 

 

  나는 자기 마음대로 상황을 납득하려는 이성의 줄을 다시 꽉 잡아 당겼다. 물론 논리적으로는 내가 저 서번트의 마스터라는 사실이 맞기는 할테지만 우선 그 논리가 성립하려면 전제조건부터가 제대로 되어 있어야 한다. 바로 '내가 저 서번트를 소환했을 것.' 그런데 나는 오늘 맹세코 소환 의식을 준비하기는 커녕 마술을 쓴 적조차 없다. 아니, 오늘 뿐만이 아니라 미국에 온 이후로는 절대로!! 물론 책상 위에 놓아둔 머리끈이 베개 옆에서 튀어나오는 마술을-내 의사와는 상관없이-부린 적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런 마술은 이런 거랑은 상관 없잖아?? 그런데 '내' 서번트라니??? 서번트가 무슨 길가의 클로버도 아니고 자기 맘대로 쑥 솟아날리도 없는데 이건 당최 무슨 일일까나!

 

 

  역시 뭔가 착오가 있던게 분명해! 나는 심호흡했다. 비록 우리 집안이 옛날에는 빵빵한 마술사 가문이었다고 해도 지금은 평범한 사람들(그러니까 마술사 기준 말고)과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 수준이다. 마술과 성배전쟁에 대해 지식만으로는 알고 있는 나도 이미 일반인이나 다름 없는 상태. 아무리 평소 품행방정, 성적우수한 의젓한 학생으로 평가받고 있다지만 나는 성배전쟁에 참여하기에는 아직 한참 멀었다는 사실과, 나는 아무런 마술 행사도 하지 않았다는 진실을 눈 앞의 서번트에게 전해줘야 했다. 이대로 있다가는 어어 하는 사이에 휘말려서 어마무지한 마술사들이 싸우는 링 위에 어슬렁어슬렁 등판하게 될 가능성이 적어도 70%는 넘었다. 나는 결심을 굳히고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대로 굳었다.

 

 

  히야아아아……. 이렇게 생긴 분이 존재할 수가 있구나. 분명히 조금 전에 뭔가 말을 하려고 결심을 굳혔던거 같은데 그게 뭐였는지 기억이 안났다. 별빛은 물론이고, 달빛과 가로등빛도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 어두운 건물 사이에…… 마치 남신-내가 생각해도 이 구닥다리 비유는 대체 뭐지?-같은 서번트가 마치 자체발광을 하는 것처럼 앉아 있었다!

  우와아아아아. 나는 양손을 홱 들어서 얼굴을 가렸다. 존재자체만으로도 황송할 지경이었다. 아주 그냥 성배전쟁의 기반을 닦은 마술사들의 쾌거 그 자체다. 내 눈앞의 서번트의 특징을 묻는다면, 옷차림 같은 장황한 걸 떠나서 잘생긴 사람을 왜 신으로 비유하는지 이제 알겠다고 느낄만큼 잘 생겼다는 것을 가장 먼저 꼽아야 할 것이다. 아무 게시글 없이 그냥 셀카만 찍어서 올려도 순식간에 팔로워 1위를 찍고, 아무나 붙잡고 뉴욕 한복판에서 제일 잘생기고 예쁜 사람이 이 사람이니까 찾아와달라고 얘기하면 브라우니 먹었냐고 한 소리 들었다가 잠시 후에 찾아서 데려온 사람한테 제가 어리석었다고 참회받을 정도의 레벨이다.

  나는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존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뇌세포가 깡그리 파업했나보다. 너네 뭐해??? 왜 말이 뇌를 안 거치고 그냥 나가???

  이성 : 근데 잘생긴거 맞잖아. 감성 : 눈이 아주 호강한다 정말…….

  물론 맞는데!!! 

  정신이 이 모양이 되어버리니 결국 입도 다 같은 꼬라지였다. 나는 눈앞의 서번트를 감히 더 바라볼 수 없어서 눈을 질끈 감고 뒤의 벽에 털썩 몸을 기댔다. 그러고보니까 뒤에 벽이 있어서 몸이 뒤로 안 갔구나…… 응…… 지금 와선 아무래도 상관 없는데…….

 

 

  그런데 내 판타스틱했던 대응이 서번트의 주의를 끈 모양이었다. 나를 부르기는 했는데 그 다음부터는 아무 말도 안하고 내 손가락을 바라보고만 있던-어라?-서번트가 다시 천천히 눈을 들었다. 붉은 눈이 손가락-팔-어깨-목을 느릿느릿 타고 올라와서…… 내 눈과 마주쳤다.

  우와우. 이렇게 보니까 속눈썹도 눈이 내려앉을 수 있을 것처럼 길다. 섬세하고 선이 고운 하늘하늘한 흑발에 붉은 눈, 미남이라는 범주를 넘어서 미인이라는 표현도 소박하게 느껴질 인상에 하얀 피부에 이목구비가 정말 그림처럼 자리잡고 있어서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아주 존재 자체가 복지다. 지나가던 누군가가 저 얼굴을 보다가 내 얼굴을 보면 '아니? 왠 오징어가 육지에? 아차, 다시 보니 두 발로 걸어다니는군. 가엾게도…… 오징어의 세계에서라면 너도 괜찮았을지도 모르는데……' 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아니, 할 거다. 확실해.

 

 

  "……마스터, 마스터."

 

 

  아차! 나도 모르게 또 정신이 이상한 곳으로! 서번트의 것이 분명할 목소리-이제는 확신할 수 있다-에 나는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어어, 그러니까 대답을…… 하기는 해야 하는데…….

  내가 처음에 뭐라고 하려고 했었지? 진짜 기억이 안 났다.

 

 

  "아, 안녕하세요!"

 

 

  정신이 일 안하는 사이에 입이 또 제멋대로 움직인다. 안녕하세요? 아안녀엉하아세에요오?? 이거 말고 대답하기에 훨씬 좋은 말이 있지 않았을까??? 하다 못해 '만나서 반가워요' 같은 말이라도 있잖아. 뇌세포 너네 진짜 일 안해??? 지금까지 열심히 공부를 했는데 떠오르는 게 이거밖에 없다구???

 

 

  그런데 이상하게도 서번트는 또다시 반응이 없었다. 여전히 내 쪽을 향하고는 있지만 마치 나를 내가 아닌 다른 것으로 겹쳐보는 것 같은 멍한 시선으로 나를 볼 뿐.

  한참 동안을 나를 그렇게 바라보다가 서번트는 손을 들어 내 오른손의 손목을 느리게 감쌌다. 나는 붕대 같은 장갑(아니, 붕대가 맞는걸까?) 속의 긴 손가락이 천천히, 하지만 분명한 움직임으로 손목에 달라붙는 모습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라? 갑자기 왜 그러지. 악수를 하자는 걸까? 하지만 이 자세로는 악수를 할 수가 없는데. 손목이 잡힌 채 나는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멍하니 내 손을 자기 쪽으로 가져가는 서번트를 바라 보고 있었다. 해가 지평선 너머로 완전히 넘어갔는지 지금은 희뿌연 실루엣만 떠오르는 내 손을 보며, 서번트는 고개를 살짝 기울여 예쁘게 웃었다. 우와아. 황송스러운 외모를 가진 분께서 이렇게 웃어주니 이제는 가슴도 자기 맘대로 두근두근한다. 그런데 첫번째 두근은 설렘이고 두번째 두근은 왠지 이건 좀 아닌거 같은데…… 같은 윤리적인 문제와 마주했을 때 같은 두근 같은건 왜일까?

 

 

  그 때 서번트의 시선이 문득 내 손등에 닿았다. 어둠 속에서도 붉은-서번트의 눈에 비하면 다소 주황색이 섞인-빛으로 빛나는 세 파트의 문양에. 서번트의 멍한 눈이 천천히 획을 따라 미끄러지는가 싶더니-

 

 

  "……마스터 님, 아아, 마스터 님, 이었지."

 

 

  -점차 또렷해져서, 이제는 제대로 나를 눈에 담았다.

 

  주변을 맴돌던 두근두근한 분위기 중에서 두번째 두근이 풍선에서 바람이 빠지듯 순식간에 사라졌다. 음음? 조금 전이랑 바뀐 것이라고는 서번트가 날 똑바로 바라보고 있다는 점 말고는 없는데. 내 손목은 여전히 잡혀 있고. 도대체 뭐였던 걸까? 영문을 알 수가 없어서 고개를 갸웃하는데 다시 서번트가 입을 열었다.

 

 

  "미안해, 마스터 님. 많이 놀랐나?"

 

 

  놀랐다고 해도 안 놀랐다고 해야 할거 같다. 그렇지만 나는 정말로 놀랐다기보다는 그냥 어리둥절하고 있었을 뿐이라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냥, 으음, 뭐가 뭔지를 아직 잘 모르겠어서…… 아, 맞아!"

 

 

  기절하기 전에 분명히- 왜 손을 뻗었을 뿐인데 갑자기 마스터가 되었는지 물어보려고 했었지! 좀 전에는 '제가 마스터가 된 건 뭔가 착오가 있던 거고 사실 전 평범한 사람입니다'라고 말하려고 했었고! 참 빨리도 기억한다. 나는 이제 와서야 고개를 번쩍 들고 허둥지둥 그 동안의 기억을 끌어모으고 있는 정신을 콱콱 때렸다. 아무리 눈 떠 보니 저런 외모의 사람이 눈 앞에 있다고 해도 그렇지 그걸 잊어버리면 어……쩔수 없을 정도이기는 한데!

  흑흑, 자괴감이 든다. 나도 이제는 어엿한 청소년이고 양식있는 고등학생이다. 결코 얼굴을 밝히지 않고 이성에 대한 호감을 외모로만 평가하지도 않으며 분류하지도 않을거라고, 그동안은 생각했었는데에에에에에…….

  

 

  "……아."

 

 

  내가 이렇게 열심히 삽질을 하는 동안에도 나를 타박하지 않고 그저 가만히 바라보던 서번트는, 내 말에 잊고 있던 무언가가 뒤늦게 떠올랐다는 듯 고운 눈썹을 찡그렸다-잘생긴 사람은 저런 표정도 잘 생기게 짓는구나!-. 그리고 나를 바라보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미안."

  "네?"

  "내가 당신을 말려들게 했다."

 

 

  나는 눈을 깜빡였다. '말려들게 했다'는 건 역시 내가 마스터가 되어버린 것과 관련된 이야기일까. 마침 물어보려고 했던 얘기였기에 나는 입을 꼭 다물고 얌전히 서번트가 말을 잇기를 기다렸다.

 

 

  "그 모습으로 보아 일반인이겠지. 성배전쟁이라는 것에 대해 알고 있나?"

 

 

  hmm. 나는 물론 마술이라던가 성배전쟁 같은 거에 대해서는 대부분 지식으로만 알고 있을 뿐이지 일반인에 가깝기는 하다. 조금 전까지도 그렇게 말하려고 했었고. 그런데 막상 다른 사람, 그것도 나를 마스터라고 부르는 서번트에게 들으니까 쪼끔 슬프다…….

  나는 말했다.

 

 

  "저, 일반인은 아니에요. 옛날에 우리 집안이 마술사였거든요. 지금은, 으음, 말씀하신대로 거의 일반인이 맞긴 한데요."

  "그랬던가. 미안."

  "아뇨, 사과하실 만한 일은 아니에요!"

 

 

  마스터와 패스?가 이어져 있다는 서번트가 그렇게 느낀다면 진짜인 거니까. 그래, 오해나 누명을 썼다면 모를까 이것은 마치 E=MC^2 같은 사실이다. 팩트다. 진실이다. 수학 같은 것에 상처 받을 수는 없잖아? 나는 조금도 마음이 상하지 않았다. 진짜로. 절대 이 뒤에 '그런가, 마스터 님이 그렇게 말한다면.'이라고 서번트가 고개를 끄덕였기 때문이 아니다. 진짜진짜로.

  서번트가 말했다.

 

 

  "그럼 설명이 쉬워지겠지. 마스터 님도 짐작했겠지만 나는 서번트다. 나를 소환한 건 마스터 님이 아니라 다른 마술사였지만……."

 

 

  역시 내가 소환한게 아니구나! 나는 그런데 왜 내가 마스터가 되었냐고 물으려고 했다. 하지만 내가 입을 연 순간, 서번트가 다시 말을 이었다.

 

 

  "소환이 반쯤 진행되었을 때, 갑자기 날 소환하려 했던 마술사는 의식을 중단했다. 이유는 나도 몰라. 하지만 소환이 어설프게 끊어졌기에 나는 영체와 육체, 둘 중 어느 쪽도 아닌 상태가 되었지."

  "잠깐, 그러면……."

  "맞아. 마스터 님이 처음 봤을 때의 나다."

 

 

  나는 거무칙칙한 안개에 감싸여 있던 서번트의 모습을 떠올렸다. 하긴, 멀리서 보기에는 사람 같은 모습이라 사람이라고 판단했지만 지금 천천히 떠올려보면 팔이나 다리 쪽은 희미하게 뭉개져 있었던거 같기도 하다. 꼭 안개 그 자체와 동화되듯이.

  하아아아.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이걸 지금 알아차려서 뭐한담. 버스는 이미 저 멀리 떠난 지 오래다. 물론 아까는 정말 위험하다고 생각해서 뛰어왔던 거고, 안 그랬으면 지금 이렇게 서번트와 서로 이야기하는 일도 없었겠지만……

 

  응? 잠깐만.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그거랑 내가 마스터가 된 거랑은 관계 없지 않아요?

 

 

  "나는 도중에 끊어지기는 했지만 제대로 된 절차를 밟아서 소환된 서번트고, 마스터 님은 마술사는 아니지만 엄연히 마술회로를 가졌지. 때문에 성배가 같은 장소에 있는 우리를 주종이라 판단했던 모양이다."

 

 

  날림 아니야?! 나는 입을 딱 벌렸다. 그럼 내가 아니라 마술사든 일반인이든 마력을 가지기만 했다면 내 눈앞의 서번트의 마스터가 될 수도 있다는 뜻이잖아. 성배전쟁이 이래도 돼? 아니, 애초에 그런식으로 일반인이-나처럼-말려들면 어떡하려구! 꼭 마스터에게 사단이 나든 말든 전쟁만 진행되면 그만이라는 말 같잖아- 어라?

 

 

  나는 무언가가 머리를 세게 치고 지나가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누가 말려들던지간에 성배 자체와는 상관이 없을 거다. 중요한 건 각각 일곱명의 마스터와 서번트가 서로 싸워 남은 한 조가 성배를 쟁취한다는 사실 그 자체일테니까. 성배는 소원을 이루어주는 프로그램-010101로 이어진-같은 거고, 그러니까 프로그램에게 왜 참전자 선정을 이렇게 했냐고 따져도 의미는 없을 거다.

  없는데…… 그래도 날림은 날림이지!

 

 

  "엉망진창이네요!"

 

 

  나는 그렇게 투덜거리고 손으로 바닥을 탕탕 쳤다. 그 모습에 서번트가 말했다.

 

 

  "내가 말하기는 그렇지만, 나는 의외로 기개가 있는 서번트다. 폐는 끼치지 않아…… 아마도."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요?! 그리고 왜 아마도 앞에 공백이 있는 거죠!

 

  물론 그런 불만은 서번트의 입술이 호선을 그리는 모습이 보이자마자 아지랑이처럼 가물가물해졌다. 그래. 이 얼굴로 말하면 뭐든 다 십계에 부처님 설법에 꾸란 같이 들릴 거 같다. '겨울은 춥다' 명제랑 눈 앞의 서번트는 '잘생겼다'는 명제는 모두 참이구만 뭐!

 

 

  아니아니아니, 이러면 안되지! 정신 차려!

 

 

  나는 양손을 들어 볼을 세게 때렸다. 겨울의 추위에 이미 얼얼해져있던(그러고보니까 여기서 대체 얼마나 있던 거지?) 볼에서 맵싸한 아픔이 올라와 눈물이 쏙 빠질 거 같았다. 물론 이 정도는 참을 수 있지!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서 한번 더 볼을 짝!소리 나게 때리고, 나는 서번트 쪽을 바라 보았다.

 

 

  ……좋아. 내가 성배전쟁에 말려들었다는 사실에는 여전히 짜증과 분노와 당황스러움 등 '긍정적' 카테고리에는 묶일 수 없는 감정만 잔뜩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제 와서 '무를래요' '안 할래요' 같은 말은 입이 찢어져도 못 한다. 서번트의 외모 같은 걸 떠나서 일단 나는 한번 성립된 계약을 해제하는 고급 마술 같은거 못하고, 만약 이 서번트가 캐스터가 아닌 이상- 아니, 캐스터라고 해도 과연 계약을 해제해줄지 모르겠다. 마술사의 소환에 응했고, 잠시나마 영체도 육신도 아닌 어중간한 상태에 머물러있었으면서도 영령의, 영령의…… 아무튼 영령들이 모인 곳으로 돌아가지 않았다는 건 그만큼 성배를 원할 이유가 있다는 뜻일 테니까. 그런데 겨우 맺어진 계약을 해제해달라고 한다? 만약 내가 서번트의 입장이어도 거부할 거다…… 아니, 나는 착하니까 해줄지도 모르는데. 아무튼.

  나는 힘차게 일어섰다.

 

 

  "-좋아요!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죠. 열심히 하는 수밖에!"

 

 

  호랑이 굴에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고 했다. 정확한 연대를 측정할 수 없을 정도로 먼 옛날에서부터 지금까지 무수한 세월 동안 검증된 옛 성현의 지혜가 우러난 속담이니까 그 말대로 한 눈 팔지 말고 정신만 바짝 차리면 어떻게든 헤쳐나갈수 있을지도 모른다. 응, 분명히 그럴 거야! 나는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랐는지 동그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서번트에게 손을 척 내밀었다.

 

 

  "저는 아마미야 코노하라고 해요. 어어, 한자로 하늘 천, 집 궁, 마음 심, 잎사귀 엽 이렇게 써서 아마미야 코노하라고 읽어요. 보시는대로 일반인 수준의 마스터고, 서번트…… 씨? 에게 폐를 잔뜩 끼칠지도 모르지만 잘 부탁드려요!"

 

 

  서번트는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하지만 곧, 유아한 눈매를 휘며 봄바람 같은 한숨을 쉬며 미소 지었다-우와아아-.

 

 

  "서번트, 캐스터다. 진명은…… 후에, 이목이 없는 곳에서 알려주지."

 

 

  아, 그러고보니 여기 건물 사이였지. 지금은 아무도 다가오지도 들여다보지도 않지만-서번트, 아니, 캐스터가 무언가 한 걸까?-혹시라도 누군가가 이 얘기를 듣기라도 하면 큰일 날지도 모른다. 나는 고개를 끄덕여 캐스터의 말에 수긍하고 캐스터가 겹쳐온 손을 마주 잡았다. 그리고 캐스터가 자리에서 일어서는 것을 도와주기 위해 힘껏 잡아 끌었다…… 가 고개를 위로 치켜 들어야 했다.

  와, 세상은 참 불공평하다. 저런 외모를 가진 사람, 아니, 서번트가 키까지 크다니. 저기서 5cm만 잘라서 나한테 주면 세상이 달라 보일 텐데!

 

 

  "마스터 님? 무언가 불편한 거라도 있나."

 

 

  아. 나도 모르게 인상을 팍 썼나 보다. 키가 크니까 이러면 오히려 얼굴을 못보겠지! 흥! 나는 홱 고개를 숙였다.

 

 

  "아아아아무것도요! 그냥 배가 고파서 그래요!"

 

 

  그리고 적당히 반사적으로 떠오른 말로 변명을 대신했다. 솔직하게 말씀드릴 수는 없다. 왜냐면…… '키가 그렇게 크다니 화나요' 라는 말을 들으면 누가 생각해도 '어휴 애도 아니고……' 싶을 거잖아. 그 이유가 사실이라는 게 더 분하지만.

 

 

  게다가(사실 지금 깨달았지만) 배가 고픈 것도 진짜다 뭐. 안 그래도 오전과 오후 내내 열심히 돌아다녔는데 마력도 쭉쭉 빨려나가고 기절한 채로 몇시간 동안을 건물 사이에 있었더니 뱃속에 들은게 그 사이에 몽땅 소화되었는지 다 사라지고 없었다. 아직 나처럼 쑥쑥 자라나야 할 청소년에게는 매우매우 해로운 사태다.

 

 

  "……배가 고파서."

  "네! 그러니까 얼른 밥 먹으러 가요!"

 

 

  나는 아직 붙잡은 채였던 캐스터의 손을 끌고 골목 밖으로 향해 걸음을 옮겼다. 기억하기로는 아직 오늘 가지고 온 돈을 다 쓰지는 않았다. 성인 남성 한 명과 청소년인 내가 먹기에는 충분할 것이다.  뒤에서 캐스터가 낮게 '마스터 님도……' 뭐라고 말한 것도 같지만 일단 한번 배가 고프다는 걸 자각하고 나니까 위가 밥을 달라고 울어대는 통에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어두운 골목에서, 조명이 가득한 뉴욕의 거리로. 혹시나 인파에 휩쓸려 놓쳐버리지 않도록 캐스터의 손을 꼭 잡고, 나는 따뜻하고 배가 부를 만한 장소를 찾아 걸었다.

 

 

 

 

"아 맞아!!!! 그러고보니까 캐스터, 혹시 제가 들고 왔던 봉투 못 봤어요?"

"봉투?"

"네! 이-만한 크기인데. 파이랑 타르트랑 쿠키랑 케이크랑 잔뜩 사왔었거든요. 지금 되돌아가기엔 늦었을거 같긴 하지만요."

"파이……? 푹신푹신한 과자를 말하는 건가? 그것들이라면 굉장히 맛있었다."

"맞아요, 정말 맛있어요! 특히 커스터드 크림이 가득 찬 애플 파이는…… 잠깐만요. 맛있었다고요?"

"잊을 수 없을 정도로."

"어떻게 알아요?"

"……먹었다."

"먹었다고요? 어…… 누가요?"

"내가."

"제가 기절해 있는 동안?"

"그래."

"그걸 전부?"

"……."

"……."

"……미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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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마지막 부분을 위해서 쓰기 시작했던 글이었는데 도대체 어쩌다 이렇게 길어졌을까요.......(동공지진

저 외모 부분은 코노하의 주관입니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4일차 밤] 12월 27일 - 『트로이메라이』 (기간 : ~9/15일 밤 10시) [14] 로하 2019.09.13 118
공지 [4일차 낮] 12월 27일 - 『투모로우』 (기간 : ~9/12일 밤 10시) [15] 로하 2019.09.11 106
공지 [3일차 밤] 12월 26일 - 『Boxing Day Night』 (기간 : ~9/2일 밤 10시) [21] 로하 2019.09.01 116
138 [3일차 밤] 이스트 빌리지 대화재 [21] 로하 2019.09.03 162
137 [2일차] 캐스터/코노하 - 치킨과 초롱아귀 Sigma 2019.08.31 44
136 [3일차 낮] 12월 26일 - 『성냥팔이 소녀의 기도』(~9/1일 14시) [18] file 로하 2019.08.31 91
135 [소환?] Cat walk night road 아르니엘 2019.08.29 7
134 [2일차 밤] 12월 25일 - 『성탄의 밤』 (~8/30 밤 10시) [36] 로하 2019.08.29 97
133 [1일차] 캐스터/코노하 - 탑 오브 더 락 Sigma 2019.08.27 19
132 [2일차 낮] 12월 25일 - 『圣诞快乐, 新年快乐 !』 [9] 로하 2019.08.27 41
131 [공개 프로필] 어새신 / 이사벨라 마크 file INSURA 2019.08.27 271
130 [2일차 낮] 12월 25일 - 『캐롤, 미사, 칠면조』 (기간 : ~8/27일 밤 10시) [16] 로하 2019.08.27 57
129 [1일차 밤] 12월 24일 - 『나홀로 집에』 (기간 : ~8/27일 밤 10시) [17] file 로하 2019.08.26 261
128 [공개 프로필] 랜서 / 섀도우 캣 아르니엘 2019.08.25 28
127 [공개 프로필] 캐스터 / 아마미야 코노하 file Sigma 2019.08.25 72
» [소환 후] 캐스터/코노하 - 맨해튼의 거리로 Sigma 2019.08.25 15
125 [1일차 낮] 12월 24일 - 『화이트 크리스마스 이브』 (기간 : ~8/27일 밤 10시) [15] 로하 2019.08.25 341
124 [공개 프로필] 세이버 / 에이든 파커 file ahaz 2019.08.25 32
123 [소환] 인간쓰레기와 술주정뱅이와 피해자 L 양(17) 로하 2019.08.25 19
122 서번트/랜서 &섀도우 캣 [2] secret 아르니엘 2019.08.25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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