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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Chains -3-

2006.06.07 00:49

삭구 조회 수:250

낯선 천정이다. 본적 없는,
하얀 벽지와 누르스름한 백열등이 켜져 있는 방.
내가 누워 있는 침대도 하얀색 온통 하얀색으로 도배된 그런 방이다.
다만 이 신비한 곳으로 통하는 문은 우중충한 회색빛이다.
땀으로 흠뻑 젖었을 옷은 옷걸이에 걸려있고.
깨끗한 새 옷이 입혀져 있다. 여긴 어디지.

온통 하얀색 그림자에 가려 보이는 회색빛.
뭘 의미하는 걸까. 아. 어지럽다. 까닭모를 두통이 서려온다.
갖은 인상을 쓰며 참아보지만, 틀렸다. 왜냐하면 악몽이 떠올라 버렸으니까.
숨이 턱턱 막혔던 그 순간들이.
그때 방안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니 침대 위에 자그마한 스피커가 있었다.
반복해서 같은 말이 흘러나온다.
“지금 1층 로비로 내려와 주십시오.”
목소리. 아는 목소리다.
난 피식 코웃음을 치며 어지러운 회색 문을 열고 발걸음을 옮겼다.

“어때 괜찮은가?”
떡 벌어진 어깨에 180이 넘는 키에서 벌써 중압감이 느껴오는 남자다.
생긴 것도 꽤나 잘 생긴데다 나름대로 운동도 하는 편.
눈은 짙은 회색에 언제나 남색 정장을 입고 다닌다.
상당한 재산도 있는데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꽤나 여자 끌고 사람 같다지만
본인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고 한다.
사실 성격상 좋은 인간은 아니기에.

어쨌든 중요한 건 상황이다. 내가 지금 처한 상황.
“뭐가 뭔지 전혀 이해 못하는 것 같군. 하하.”
난 얼굴을 찌푸리며 날카롭게 쏘아 붙였다.
“재밌어?”
이런 내 표정을 빤히 쳐다보다 피식 웃고는 뒤돌아서서 가버린다.
정말 마음에 안 든다.

그의 방이다. 책만 가득한 방에 외로이 책상하나만 덩그러니 있는 허전한 방이다.
따뜻함이라곤 보기 어려운, 꽉 막힌 곳이라 어릴 땐 이곳을 가장 무서워했었다.
뭐 지금도 무섭다. 모습이 아니라 이 향기가 너무 싫다. 피의 향기라고 할까.
“좀 앉지? 멍하게 서 있지 말고.”
그는 아까와 다르게 얼굴에 장난기가 싹 가셨다.
그래, 이 남자는 이런 모습이 어울리더라.
“설명 부탁해.”
“아. 무슨? 당신이 직접 당한 일이면서
  제대로 보지도 않은 나한테 설명을 요구하다니 뭔가 좀 이상하다고 생각 안 하나?”
“시끄러워! 누군 이러고 싶어서 이러는 줄 알아?”
매번 있는 일이다. 티격태격. 아무것도 남지 않는 무의미한 언쟁.
“내가 갔을 땐 상황 종료였어. 자넨 문지방에 쓰러져 있었고.......
  아니, 왜 진실을 외면하려고 하지.”
진실이란 단어에 난 벌떡 일어나 그를 매섭게 노려봤다.
뭐 진실? 닥치라 그래. 그딴 게 뭐가, 뭐가 중요한데.
응?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그런 것 따위.
“....... 아마 이게 유일한 단서겠지. 자네의 그것과 짝이 맞는 것 같더군.”

재차 숨을 고르고 앉아서 그가 건네는 검은 천을 받는다.
눈은 여전히 그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말이다.
그것이 내 손에 들리었을 때 난 직감적으로 이것이 무엇인지 알아채었다.
제기랄. 진실이라는 게. 과거라는 게 이런 거였냐. 어? 누군가 말 좀 해달란 말이다!

단도였다. 어릴 적 그날에 잃어버린.
“제기랄. 왜 이게 이제 와서 나타나는 거야. 그 때 아무리 찾아도 없던 것이 어? 왜!”
내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너무나, 너무나도 싫은 기억이 다시.......

하늘을 향해 치솟는 오만으로 가득 찬 불길. 어둠 속에서 흐르는 붉은 강물.
쇠와 쇠가 부딪치고 욕망의 인간이 울부짖는 괴성만이 귓가에 울리던 날.
모든 것을 잃어버린 날. 사랑을 잃어버린 날. 그 날. ‘항쟁’의 마지막이었다.

자기 몸집보다 훨씬 큰 갑옷을 입은 바보들의 잔치 속.
나도 그 속에 있었다. 처음으로 받은 선물을 들고 무참히 찌르고 베었다.
그들도 나 같은 자식을 가진 아버지였으나
지금은 단지 제 몸 하나 제대로 겨누지 못하는 멍청한 인형에 불과했다.
안타까웠다. 슬펐다. 저 성위에서 조용히 바라보는 그들이 원망스러웠다.
그래서 그들을 베어낸다. 이 긴 복도 끝에 그들이 있다.
그래 내가 이기면 되는 거다. 내가 이 빌어먹을 전쟁을 끝내는 거다.

베어도, 베어도 끝이 없다. 찌르고 뽑는 걸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르겠다.
칼날은 무디어가고 손목까지 피로 흥건하다.
아니 온 세상이 붉다. 다리는 이미 풀려있고 목소리도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멈출 수 없다. 나에겐, 나에게는 커다란 꿈이 있으니까.

굳게 닫힌 문을 연다. 그때 시계는 멈추었다. 눈앞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손발이 부르르 떨리고 북받쳐 오르는 감정에 눈물이 흘렀다.
제기랄. 제기랄! 왜 이런 식 인거지. 당신이 이렇게 만들지 않았던가요.
나와 우리 모두를! 그래놓고 그렇게. 그렇게.......

“오셨군. 오늘 만찬에 귀한 손님이.”
아버지가 묶여있는 의자 뒤로 한 남자가 나타났다.
190은 되어 보이는 훤칠한 키에 상당한 체격이다.
얼굴은 모르겠다.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정말로 두려웠다는 건 사실이다.
“일어나시게. 사랑스런 딸이 찾아왔는데 아버지가 이러고 있으면 되나.”
“쿨럭. 빨리 나가. 나가란 말이다!”
악을 쓰며 말하는 당신. 이미 얼굴은 내가 알고 있는 사람의 얼굴이 아니었다.
자의든 타의든 이미 괴물이 되어버린 당신.
“나갈 마음이 없는 것 같은걸. 후후.”
마음? 나가서 죽으나 여기서 죽으나 같지 않나?
지옥이 다 같은 지옥이지 다를 게 어디 있어? 버려 그런 마음은.
나약한 마음 따위. 똑똑히 지켜보는 거야.
그래도 사랑했던 사람 아니던가. 저주받은 저택에서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가족.

그렇기에 마지막까지 지켜보려 하는 것. 하지만 신은 그걸 원하지 않는 것 같다.
먼 곳에서 종소리가 울리 운다.
저주의 종소리. 슬픔의 종소리가.
당신이 조각조각 떨어져 나가는 순간 내 눈도 뿌옇게 흐려졌다.
눈물 따위가 아니다. 그냥 흐려졌을 뿐이다.
오만에 가득 찬 종소리가 귓가에 울린다.
어지럽다. 제길. 다리에 힘이 풀린다. 꽉 잡고 있던 단도가 손에서 떠나갈 때.
항쟁은 끝났다. 그리고 내 기억도 거기서 끝났다.
그 후 그 남자가 어떤 말을 했는지. 아주 중요한 말 같았는데 말이다.
잊었다는 게 아니다. 꼭 커다란 퍼즐 중 가운데 하나가 없어진 그런 느낌.
그렇게 살인자의 잔인한 밤은 지나갔다. 긴 종소리가 울리던 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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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반부 회상부분이 꺼림직 하군요. 흐름이 거슬리는 느낌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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