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리뉴얼]月夏 ~여름 밤하늘의 환상~#Prologue
2004.04.10 17:46
오랫만에 이 땅을 밟아 보자 신발 밑창을 뚫고서 전해져 오는 차가움에 전율이 오르길 시작했다.
너무나도 오랫만..아니, '땅'이라는 곳에 발을 디디는것 자체가 정말로 오랫만이라서 붕- 떠있는것만 같은 느낌이다.하지만 '땅'이라는 곳에서 느껴진 흙의 느낌은 너무나도 선명했다.
조그만한 돌, 하지만 큰 돌, 부스럭 거리는 모래의 느낌.오랫만에 디뎌본 학교 운동장은 그저 그런 느낌이였다.
눈을 지긋히 뜨고 조용히 학교 건물 너머 저 먼산을 올려다 본다.
아름다운 밤이였다.
아름다운 여름밤이였다.
하지만 굉장히 차가운 밤, 그래도 바람 한점 없는 굉장히 더운 밤.
"오랫만이야, 이런 밤은.."
조용히 중얼거렸지만, 입에서 새하얀 김따윈 나오지 않는다.
그저 평범한 여름이기에.
달이 새하얗게 떠있다.
조용히 넓디 넓은 운동장을 내려본다.
신비한 분위기, 아무도 없는 학교의 운동장에서 나의 목적따윈 단순히 옛날기억을 쫓아가길 위해서다.
그래.학교에는 이렇게 올라와서 이런 길로 교실로 올라갔었지..그리고 내가 '그 여자'를 다시 만난곳은 이곳, 그리고 그 여자에게 내가 죽었던 곳은 바로 이곳..
아무말 없이 발걸음으로 하나 하나 짚어나가자, 밤의 운동장은 흙을 밟는 '부스럭'하는 소리만이 지배하게 되었다.
분명히 눈앞에는 내 자신이 아닌 또 다른 누군가가 걸어가고 있는데..
분명히 내 눈 앞에는 길다란 머리를 늘어뜨린채 반가운 누군가가 걸어가고 있는데..
분명히 내 눈 앞에는 길다란 머리를 늘어뜨리고 치마를 흩날리며 걸어가는 여자가 보이는데..
도저히 그녀의 발소리가 내 귀에는 들리지 않는다.
왜일까, 무슨 일일까, 하고 몇초동안 생각을 해봤지만.이젠 놀랍지도 않은 상태이다.
이런 비현실적인, 그러니까..알수없는 여자가 땅 바로 위, 그러니까 허공에 떠서 걷고 있는다고 한들, 더이상 놀랄만한 일따윈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나 자체가 비현실적인 존재이기에..
부스럭,
하고 내 발에서 평소보다 더 커다란 소리가 나자.
앞서 저 멀리 걷고있던 '여자'가 조용히 뒤를 돌아봤다.
'그녀'의 발소리따윈 들리지 않는다.그저 허공에 춤추는 머리카락들이 부딪치는 소리만이 들려올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하지만 역시 맞았어.역시나, 반가운 그 '여자'.너무나 반가워서..손을 흔들수 조차 없었다.
피가 묻은 '여자'의 얼굴을.
조금더, 조금만더 추억이 되새겨 지면서, 쫓고 쫓기던 옛날 생각에 나 자신이 쫓기면서, 난 반가움에서 조금씩, 아주 조금씩 놀라움과 증오심으로 일그러져 갔다.
녀석이다.
'우리'를 죽인 그 녀석이다.
'우리'의 목에 칼을 댄 그 녀석이다.
하지만 아직 '녀석'에게 손을 댈 상황이 아니다.
우리에겐 목표가 있다.내가 이 세계에 다시 태어난 목표가 있다.
'여자'가 웃었다.
피가 묻은 새하얀 얼굴이, 미소로 일그러졌다.
내 입가에도 미소가 번졌다.
'그녀'의가느다란 머리카락이 서서히 흔들린다.
내 교복의 옷자락도 서서히 흔들린다.
운동장의 한 가운데였다.
모래먼지가 바람에 휘날린다.
아까까지만 느껴지지 않은 그 바람이다.
너무나도 더워서, 하지만 너무나도 차가워서 곤란해하던 이 나에게.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덕분일까, '적'인 '그녀'의 미소는 그리 기분나빠 보이진 않는다.오히려 즐기고 있는 거라면 그런거겠지.
밤의 공기는 가시가 되어 있었지만, 그 가시는 나를 향하고는 있진 않다.
'그녀'도, 싸우고 싶은 마음은 없는 것일까.
아니, '그녀'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번의 '적'을.그녀가 범해버린 살인의 '적'을.
머리가 조금씩 조금씩 어지러워진다.
귀가 점점 멍멍해지더니, 이내 '위잉-'하는 소리가 고막을 지배한다.
아아, 나쁜 기분은 아니다.어지러움을 잊길 위해 살짝 눈을 감았지만..그 사이에 눈 앞에서 뒤를 돌아보던 피투성이의 '여자'는 사라지고 없었다.
역시, 전혀 놀랍지가 않은, 처음 느꼈던 반가움이 이내 곧 아쉬움으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아까보다는 더, 더 허탈하고, 더 기분좋은 미소로 얼굴을 일그러 뜨렸다.
털털하게 입가로 웃음을 흘려 보내고서는, 모래바람이 부는 운동장을 뒤로하고 밤의 가로수길을 걸었다.
감정이 복받쳐, 아까와는 또 다른 전율이 온몸에 찌릿, 하게 흐른다.아아-, 하고 조용한 신음소리를 내며.
달빛아래의 어둠속으로 아무렇게나 사라졌다.
아래쪽에 있는 것은 프롤로그가 아니었던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