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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웅아. 일어나."

 

 희미하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조금씩 정신이 들기 시작한다. 무겁기만 한 눈꺼풀 사이로 보이는 것은 하늘 같은 푸른 빛.

 

 벌써 이런 시간인가?

 

 누운 채로 기지개를 켠 뒤 벌떡 몸을 일으켰다. 하도 이런저런 일들이 많이 생기다보니 몸은 몸대로, 정신은 정신대로 피곤한 상태였지만...  그래도 이렇게까지 깨워주는데 일어나지 않는 것도 미안하다.

 

  몸을 적당히 추스른 뒤 침대에서 내려온다.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풍월을 보며 가볍게 아침 인사를 건네고, 바로 식당으로 이동. 오늘도 부담스러울 정도로 신경을 쓰는 가희씨의 모습, 부러움 반과 분노 반이 섞인 사람들의 시선을 받는 일, 시끄럽게 떠드는 풍월을 침몰시키는 연희의 후려치기 등등...

 

 그 것이 언제나와 같은 아침일 것이다.

 

 ... 랄까? 뭐야 이건!?

 

 너무 평범한 것도 문제라면 문제다. 어제 그렇게 고생을 했는데 지금은 평소와 뭐 하나 달라진 것 없이 똑같은 모습. 다른 것이라면 내가 가지고 있는 기억과 다친 곳은 모두 나았다고는 하나 아직도 미묘하게 아릿한 통증 정도? 그 외에는 변한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변한 것은 오직 나 뿐인 것 같았다.

 어쩌면 꿈을 꾼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또 꿈은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어제의 기억은 분명히 있었다. 심지어 선배님은 어제 내가 가라호에게 죽기 직전까지 두들겨 맞은 상태에서 하늘비 선생님이 만든 탕약으로 회복되었던 일까지 기억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 오직 하나, 성별이 바뀌었었다는 일 만을 제외한다면.
 
 이건 대체 뭐라고 불러야 하는 결말일까? 희극? 비극? 그보다는 미완인 채로 끝나는 연재분? 떡밥만을 가득 남겨둔 채 엔딩을 본 작품? 식사시간엔 별로 떠오르지 않았으면 좋을 듯한 느낌의 찝찝함 만을 가득 남긴 채 이번 사건은 끝을 고했다. 아하하...

 

 집어치워!

 이런 '범인은 당신입니다.' 라고 밝혀놨더니 자백도 없이 추리 해설도 없이 그냥 거기서 에피소드 끝내는 탐정 만화같은 전개는 뭐야? 할말이 없게 만드는 전개. 이런 결말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너무나 찝찝하니까.

 

 역시 이럴 때는 그녀를 찾는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 사람이라면 모든 것을 알고 있겠지.
 
 그런 기대를 안고 도서실로 향한다. 최소한의 소리만이 허락된 고요한 무게감. 그다지 마음에 드는 분위기는 아니지만 딱히 거부감이 있는 정도도 아니다. 단지 그 곳에 그녀가 없다면 말이지. 

 

 학원의 도서관은 아무래도 조금은 특이한 분위기였다. 평소의 그녀를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절대 발을 들여놓지 않을 법한 공간. 아무래도 툭하면 도서관에 붙어있는 누군가 때문에 접근조차 하지 않는 곳. 하지만 간간히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도서관에서 책을 볼 때의 그녀는 심각할 정도로 무방비에 가까워서, 방해만 하지 않는다면 꽤나 눈이 즐거운 공간이 될 수 있다는 소문이 떠돌기도 하는 곳이었다. 물론 믿지 않는 사람이 더 많은, 어디까지나 소문일 뿐이기는 했지만...

 

 뭐, 그런 소문이야 어쨌건 일단 그녀는 그 곳에 있었다. 처음에는 미처 눈치채지 못하고 그냥 지나칠 뻔 했지만 말이지.

 

 수북하게 쌓여있는 책 더미 사이. 거의 책장 높이만큼 쌓여있는 책 무더기들은 거대한 성벽과도 같은 느낌이었다. 처음에는 책장이라고 생각했었고, 두번째는 아직 정리하지 않은 책들 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그도 그럴 것이, 책 더미 사이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잔뜩 쌓여있는 책을 보고 누가 그 것을 한 사람이 보기 위해 꺼내서 모아놓은 것이라 생각할까? 하지만 아쉽게도 내가 찾던 사람은 그런 세간의 상식 따위는 이미 저 멀리 날려보낸지 오래된 사람이었다는 것이 문제겠지만.

 

 "계속 거슬리게 하지 말고 들어와. 멍청이."

 

 세 번째로 그 책 무더기 앞을 지나갈 때 들려온 목소리가 아니었다면 난 도서관을 몇 바퀴 정도 더 돌았다가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 거기 있었어요?"

 

 "뭐 이상한 점이라도 있는건가? 책을 보는데 꼭 정해진 위치에서 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틀린 말은 아니지만... 굳이 그 말에 반박해봤자 나만 피곤해 질 것 같다는 생각에 그냥 말 없이 마고씨의 말을 듣기로 했다. 아니, 그 전에 목숨이 붙어있다면 다행일지도 모르겠지만. 지금도 뭔가 불쌍하다는 시선이 반, 미쳤냐고 묻는 시선이 반씩 느껴지고 있는 상황이니까.

 

 책을 옮긴다. 말 그대로 성을 만들어 놓은 것 처럼 쌓여있는 책인 만큼 한두번으로 끝낼 분량이 아니었다. 하지만 마고씨에게 부탁을 하러 온 상태이자 마고씨의 독서를 방해하게 될 몸이다. 이런 일까지 부탁했다가는 진심으로 죽을지도 모른다. 

 

 ...

 

 ......

 

 ..........

 

 ..............

 

랄까, 적당히 내 몸이 들어갈 만한 정도의 공간을 만드는 것 만으로도 이미 죽을지경이었다.


 젠장, 책이 무거운 물건인 것은 진즉 알고 있었지만 이건 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몇 백권을 옮긴 것인지 모르겠다. 대체 마고씨는 이 책들을 언제 다 보려고 이렇게까지 쌓아 놓은 것일까?

 

 "아, 그거 내가 분류 다 해놓은 것이니 볼일 끝나면 원래대로 쌓아놔."

 

 "그냥 죽여주세요."

 

 거친 숨을 몰아쉬며 그대로 마고씨 앞에 앉는다. 바닥에도 책이 잔뜩 쌓여있었지만 치울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그대로 앉아버렸다.

 

 "변태."

 

 "... 네?"

 

 "이 다음 순서는 뭐지?"

 

 비꼬는 것인지, 놀리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목소리. 그 목소리에 슬쩍 고개를 드니 익숙한 검은색 사이에 무언가 새하얀 것이 보였다.
 
 "에... 또...."

 

 그리고 퓨즈 아웃.

 

 한참동안의 노동으로 인해 거칠어진 숨결과 벌겋게 달아올라있을 것이 뻔한 얼굴 앞에 책의 벽에 등을 기댄 채 무릎을 세우고 앉아있는 마고씨의 모습이 보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아무렇게나 앉아있는 마고씨가, 검은색의 스타킹에 가려진 늘씬한 다리가, 그리고 그 안쪽에 있는 새하얀 천조각이 보이고 있었다. 겉보기 만으로는 완벽할 정도로 무방비 상태인 마고씨의 모습이 내 앞에 있었다.

 

 "우... 우아아악!"

 

 "시끄러워!"

 

 퍼억! 하는 소리와 함께 마고씨 손에 들려있던 책이 날아와 이마에 커다란 혹을 만들어낸다.

 

 "조용히 하지 않으면 죽는다."

 

 "읍읍읍...."

 

 눈물이 나올 정도로 아팠고, 비명을 지르고 싶을 정도로 놀랐지만 필사적으로 양 손을 들어 입을 막았다.

 

 안그러면 정말로 죽을지도 모른다. 필사적 이라는 말 그대로 있는 힘껏 입을 틀어막고 고개를 끄덕였다.

 

 "대충 뭐 때문에 왔는지는 알겠지만, 넌 나를 뭐라고 생각하고 있는거냐?"

 

 "읍읍읍."

 

 "언제까지 입을 막고 있을꺼야! 이 멍청이가!"

 

 또 한 대 맞아버렸다.

 

 

 

 


 "그러니까 내가 무슨 탐정이라도 된다고 생각하는 거냐? 아니면 문제집 뒤에 붙어있는 요약 해설집이라고 생각하는거냐?"

 

 "그... 그건..."

 

 "답이 나왔으면 그만이지 왜 굳이 여기까지 와서 날 방해하는 건데? 아니, 내가 여기 있는건 어떻게 안 건데?"

 

 마고씨의 말에 슬쩍 시선을 돌리며 머리를 긁적였다. 사실 마고씨가 있는 곳을 찾는 것이야 그다지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오늘 도서실에 신간이 대량으로 들어온다는 말을 듣는 순간 당연하다 싶을 정도로 연결이 된 것 뿐이니까. 하지만 역시 첫 번째 물음에는 대답할 수가 없었다.

 

 "대체 네 녀석은 언제까지 날...."

 

 결국, 예정보다 조금 일찍 사가지고 왔던 물건을 꺼내어 마고씨에게 내밀었다.

 

 "... 후으. 그래도 이 곳까지 왔으니(투득) 자비를 베풀어 약간은 알려주도록 하지.(폭) 알고 싶은 것은 역시 어제 일이겠지.(쪼오옥)"

 

 혹시나 하는 마음에 들고 온 딸기 우유를 내미는 순간 마고씨의 표정이 거짓말처럼 누그러졌다. 양손으로 우유팩을 잡고 쪼옥 거리는 소리와 함께 단번에 우유 한 팩을 비워버린다.
 
 "하지만 다음에도 이딴거로 날 회유하려 했다가는...."

 

 가희씨에게 부탁해 구워온 버터 쿠키를 내밀었다.

 

 "우우오어으우아으."

 

 순식간에 사라졌다. 덕분에 뒤에 나왔어야 하는 말이 묻혀버렸다. 어떤 말을 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한 번은 더 써먹을 수 있겠지. 딸기 우유를 한 팩 더, 이번에는 빨대까지 꽂아서 건네주었다.
 
 "하여튼, 잔머리만 잘 돌아간다니까."

 

 그제야 마고씨의 얼굴이 약간 풀어졌다.

 어디까지나 비웃음의 수준을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그게 어디야?

 

 "저어, 마고씨?"

 

 "너 말이지. 스스로를 너무 과대평가 하는 것 아냐?"

 

 "... 네?"

 

 "세상이 널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생각 말이다. 웃기는 소리지. 네가 없어도 세상은 돌아가. 어제 일처럼. 그런데 굳이 그렇게 자신이 해야할 일 조차 못하면서 아둥바둥 구르려고 하는건 대체 무슨 생각이야?"

 

 마고씨의 말에 슬쩍 입술을 깨문다.

 

 "사랑받지 못했던 처녀가 귀신이 되었고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기 시작했지. 그 귀신을 잡아먹은 호랑이는 처녀의 한을 풀어주기 위해 자신의 힘과 몸을 잠시 빌려주었을 뿐이다. 연모하는 자에게 좋아한다는 말을 들으니 한이 사라졌고, 이 것으로 만사 해결."

 

 마고씨는 다 마신 우유팩을 꾸깃 하고 움켜쥔 뒤 내게로 던졌다. 조금 전에 책에 맞은 것과는 달리 하나도 아프지 않았지만, 이상하게도 그 작은 우유팩이 무거운 누낌이었다.

 

 "어차피 그 곳에 네가 끼어들 곳은 없었어. 특이한 네 녀석의 체질 덕분인지 그 저주에 휩쓸리지는 않은 것 같지만. 만약 네 녀석마저 여자가 되었어도 오늘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을 일이다."

 

 "하지만..."

 

 "자신이 연모하는 자가 정말 자신이 연모하는 자인지, 아니면 자신이 몸을 빌린 숙주가 연모하는 자인지도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망가진 영이다. 그 연모하는 자가 여성이라면, 모든 이가 여성이 된다면 자신 말고는 그녀에게 정을 품을 대상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단순한 녀석일 뿐이었다. 어차피 오래 갈 저주도 아니었지."

 

 후으, 하고 숨을 내 뱉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끼어들 필요조차 없는 일이었다. 자, 이것으로 해설 종료."

 

 간단한 일이지. 라고 중얼거리며 마고씨는 다시 책을 들어올렸다. 더 이상은 말할 필요가 없다는 듯, 이제 볼 일은 다 끝났다는 듯이 말하는 것 같았다.

 

 자리에서 일어난다. 숨은 가라앉았지만 이상할 정도로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꾸벅하고 아무런 감정도 담기지 않은, 그저 형식적인 인사만을 건넨 뒤 발걸음을 옮긴다.

 

 "하지만 그게 너 답다면 너 다운 일이겠지."
 
 그렇게 책 더미 사이를 빠져나올 때 였다.

 

 "에?"

 

 무언가 잘못 들은 것이 아닌가 하고 고개를 돌린다. 하지만 분명히, 그 책더미 사이에서 자그마한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그런 너 때문에 구원 받았던 사람이, 행복했던 사람이 분명히 있었을 거다."

 

 흐려지는 말꼬리. 하지만 마고씨의 얼굴은 이미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 멋대로 해봐라. 멍청아."

 

 그리고 마지막은 언제나와 같은 질타. 그 이상은 아무런 말도 이어지지 않았다. 그저 책 넘기는 소리만이 들려왔을 뿐.

 

 그 뿐이었다.

 

 

 

 

 

 

 

 

 

 뭐랄까... 예정보다 한참 짧은, 수준도 미달인 졸작이 되어버린 느낌입니다.

 이번 에피소드의 목표는 그 것이었죠. 영웅이의 능력이나 위치가 사실은 별 것 없다... 정도?

 주인공이라고는 하지만 주변에 널린 사람들을 보면 한참 멀었죠.

 모두의 소년 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주인공 보정을 받아봤자 보통은 이렇게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한다... 라는 내용이랄까요?

 뭐, 그래도 마지막 장면으로 이어지게 되겠지만요.

 그 외에는... 가라호 모에화 정도가 목표였습니다만... 뭐 있나요. 흥흥흥 [...]

 

 그래도, 스스로의 글 버릇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던 것은 나름 수확이라면 수확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성격이 급해요. 이래저래...

 다음 에피소드에서는 좀 제대로 해 봐야겠네요. 으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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