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ip to content

연재 월영각 1

2006.11.17 14:00

붉은눈물 조회 수:156

[雪香之哀(설향지애) -눈향기의 슬픔]

1.

청산리 벽계수(靑山裏 碧溪水)야 수이 감을 자랑 마라.
일도창해(一到蒼海)하면 돌아오기 어려우니
명월(明月)이 만공산(滿空山)하니 쉬어간들 어떠리.

“이것은 황진이의 시조로서…….”

기생들의 어머니 정씨부인은 장차 큰 기생이 될 아이들에게 옛 유명한 기생들의 작품을 하나하나 가르치고 있었다. 비록 월영각의 가르침과 조금 다른 기생들의 작품이라고는 하나 그 작품은 가르침에 손색이 없었기 때문에 정씨부인은 황진이의 작품을 선택했던 것이다.

“어허. 이 와중에 졸고 있다니. 그러한 정신력으로 너희가 어찌 월영각의 기생이 되겠느냐.”

정씨부인은 졸고 있는 아이들을 꾸중하며, 그 와중에도 눈이 초롱초롱하게 빛나고 있는 한 아이에게로 시선이 향했다.

눈의 기운을 타고난 아이었다.
처음 월영각 대문에 버려져 있을 때, 정씨부인은 아이의 눈빛에 압도당했었다. 아이는 자신이 버려졌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는 듯, 울지도 웃지도 않고 가만히 하늘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자라나면서도 기품 있고 고매한 성품으로 월영각 기생들에게 놀라움의 대상이 되고 있는 아이였다.

“어머니. 춘향각의 꽃 아가씨께서 뵙자고 하십니다.”

“알겠다. 월영각에 가 있으라 전하 거라.”

정씨부인은 꾸중하던 노여움을 거두고, 아이들을 각자의 방으로 돌려보냈다. 그리고는 방을 빠져나와 자신의 거처인 월영각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기방의 이름이자 가장 가운데 자리 잡고 있는 곳인 월영각은 그 이름처럼 달의 기운이 가장 잘 느껴지는 곳이었다. 달의 새치름한 모습과 함께 푸르스름한 차가움을 머금고 있는 그곳은 월영각의 주인이 머무는 곳으로 적당했다.

정씨부인이 들어서자 앉아있던 여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인 채, 정씨부인이 자리에 앉을 때까지 지켜서 있었다. 정씨부인이 자리에 앉자 그제야 여인은 자리에 다소곳이 앉았다.

“춘향각의 꽃께서 어인일로 나를 찾아오셨는가?”

“소녀, 어머니께 긴히 드릴말씀이 있어 이리 발걸음을 했습니다.”

“말씀해 보시구려.”
여인은 한참이나 정씨부인을 바라보다 어렵게 말문을 열었다. 정씨부인은 그러한 여인을 바라보며, 아무 말 없이 기다려주고 있었다.

“소녀가 이렇게 어머니를 찾아온 연유는 다름이 아니오라 춘향각 꽃봉오리에 대한 문제 때문이옵니다.”

“춘향각 꽃봉오리라 함은 운이가 아니더냐. 그 아이가 무슨 문제가 있기에 이렇게 찾아온 것이냐?”

정씨부인은 의아한 표정으로 여인을 바라보았다. 여인은 잠시 머뭇거리면서 정씨부인을 바라보다 말할 결심이 섰는지,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운이가 월흔제에 나가지 않겠다 하옵니다. 소녀 달래도보고 얼러도 보았으니 요지부동인지라, 이렇게 어머니께 도움을 청하러 온 것이니,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정씨부인은 여인의 말에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월흔제에 나가지 않겠다는 것은 봉오리로서의 자격도 기생으로서의 자격도 받아드리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또한, 자신의 사내조차 찾지 않겠다는 소리니 이것은 월영각의 규칙을 어기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 까닭에 대해서는 물어 보았느냐?”

“물론 물어 보았습니다. 어머니. 그 아이는 더 이상 기생에 뜻이 없는 듯 보였습니다. 지금까지 배운 것이 회의가 들며, 자신이 나아가야 하는 길이 보이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제 아이가 저리 완강하게 월흔제에 나갈 것을 거부하니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여인은 눈가에 눈물을 훔치며, 정씨부인을 애절하게 바라보았다. 정씨부인은 한동안 멍하니 자신의 방에 꽃아 둔, 매화 가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월흔제까지는 아직 한달 정도 남지 않았느냐. 그동안 그 아이를 월영각에 보내어라. 내 그 아이에게 시간을 줄 터이니, 걱정하지 말고 물러가 있거라. 춘향각의 꽃이 된지가 언제인데 아직까지 어린아이의 티를 벗지 못하고 있는 게냐. 낭화(朗花)라 이름 지어준 것도 밝게 살라 한 것이었거늘... 어찌 근심 걱정을 모두 품으려 하는 게냐. 시간이 지나면 운이도 차차 나아질 것이니 걱정 말고 물러 가거라.”

“네 어머니.”

정씨부인의 호통 아닌 호통에 낭화는 조신하게 일어나 인사올린 뒤, 방을 빠져나갔다. 그런 모습을 지켜보던 정씨부인은 낭화가 나가는 것을 확인 한 후에야 미소를 지어보였다. 정씨부인은 자신이 키운 아이 중 가장 정이 많이 가는 아이였기에 더욱 강하게 키우려 했었다. 하지만 성품이 워낙 착한 아이였기에 자그마한 실수, 상처에도 쩔쩔매는 모습은 시간이 지나도 바뀌질 않았다. 그런 아이였기에 정씨부인은 얼마나 고민하다 왔는지 느낄 수 있었다.

“초아. 거기 있으면, 잠시 들어오도록 해라.”
정씨부인은 월영각의 꽃인 초아를 불러들였다. 그리고는 잠시 생각에 빠졌다. 잠시 후, 초아는 조용히 방문을 열고 들어와 자리에 앉았다.

“어머니 부르셨습니까.”

“그래. 네가 보기에 어떤 아이가 이번 월영각의 봉오리로 적합해 보이느냐.”

정씨부인의 질문에 초아는 잔잔한 미소만 띄울 뿐, 어떠한 대답도 하지 않았다. 정씨부인은 초아의 마음을 읽었다는 듯 미소를 보이며 조용히 창 밖을 바라보았다. 창문의 한쪽은 닫혀있었는데, 창살에 붙어있는 문풍지가 조금씩 떨리며 그 바람을 들여보내지 않으러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이 눈에 보였다.

“오늘 바람이 차구나. 내 생각에는 설아가 적당할 듯싶은데, 네 생각은 어떠한지 듣고 싶구나. 내 원래 네가 말이 없다는 것은 알고 있으나, 내 아이인 네 생각은 읽을 수 없으니 궁금하기 그지없구나.”

정씨부인의 말에 초아는 그저 바라만 볼뿐이었다. 시간이 지난 후, 초아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어머니의 생각이 곧 제 생각이옵니다. 설아는 어느 곳에 들여도 손색이 없는 아이옵니다. 그러니 봉오리로서의 역할도 잘 해낼 것이라 생각되옵니다.”

“그리 대답할 줄 알았다. 다행히 너와 내 생각이 같으니 내 한 가지 청을 해도 되겠느냐?”

초아는 정씨부인을 가만히 응시할 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러한 초아의 모습을 정씨부인은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춘향각의 운이가 월흔제에 나가지 않겠다고 했다는 구나. 덕분에 낭화가 고생을 하는 모양이야. 이번 봉오리로 선택된 아이들이 하나같이 다 고집이 세니, 네가 전부 모아놓고 한 달 동안 가르침이 어떠하냐?”

“소녀가 어찌 그리하겠습니까. 어머니도 계시고, 다른 각의 꽃들도 있사오니 그런 청은 거두어 주십시오.”

초아는 일순간 정색을 하면서 정씨부인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강한 의사표현을 한 적이 없었던 초아의 모습은 정씨부인에게는 다소 낯선 무언가로 다가왔다. 하지만 정씨부인은 반대하는 것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한 표정으로 초아를 바라보았고, 이야기를 시작해 나갔다.

“앞으로 한달 남짓 남았다. 그 안에 그 아이들을 봉오리로서 갖추어야 할 몸가짐과 마음가짐을 가르쳐야 할 것이야. 너는 그것을 아이들에게 가르치도록 하여라. 어떻게 하느냐는 너에게 달려있으나, 성공여부로 네가 꽃으로 자격이 있는지를 알아보도록 할 것이다. 그러니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그럼 물러가도록 해라.”

정씨부인은 자신이 할말만 마무리 지은 뒤, 초아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그리고 문풍지가 팽팽해졌다 오그라들었다 하는 것을 바라만 볼 뿐이었다. 초아는 그러한 정씨부인을 바라보며, 어머니께서 더 이상 이야기를 듣지 않겠다고 하는 의지를 느끼고 있었다. 잠시 후, 초아는 조용히 정씨부인에게 인사를 올린 뒤 천천히 자신이 거처하고 있는 방으로 돌아갔다. 초아가 돌아간 뒤, 정씨부인은 그제야 초아가 나간 방문을 바라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내심 그녀가 싫다고 완강하게 고집을 부리면 어쩌나 노심초사 하고 있었던 정씨부인이었다. 하지만 곧 그것은 자신의 기우일 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는 듯, 맥이 쪽 빠진 표정으로 멍하니 앉아있었다.

정씨부인이 넋을 놓고 방문을 바라보고 있는 그 시간, 어디선가 한줄기 소리가 넘실넘실 바람을 타고와 문풍지사이로 스며들고 있었다. 한참이나 넋을 빼고 앉아있던 정씨부인은 자신의 방을 가득 채운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소리는 가늘고 약한 실처럼 끊어질 듯, 끊어질 듯 하면서도 좀처럼 끊어지지 않았고, 커질 듯 커질 듯 하면서도 좀처럼 커지지 않았다. 무언가 가득 머금고 있지만, 그것을 터트리지 않는 소리였다. 정씨부인은 누구의 솜씨인가 궁금해 하며, 소리를 쫓아 밖으로 나갔다. 소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가느다란 실처럼 계속해서 연결되어 있었다. 정씨부인은 그 실의 한 끝을 잡은 듯, 계속해서 다가가고 있었다.

그 실의 끝은 예비기생들의 방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곳이었다. 예비기생들이 머물고 있는 처소는 작았지만, 그 가운데 월지(月池)가 있어 그 풍경이 아늑하고 아담해 보였다. 노래의 실타래는 월지에 작게 지어진 정자위에 놓여져 있었다.

“소리가 참 곱구나. 언제 이렇게 연습한 것이냐.”

정씨부인은 정자위에 다소곳이 앉아 노래를 하고 있던 설아의 모습에 내심 흐뭇해하고 있었으나 표정에 들어나지 않게 조심하고 있었다. 설아는 정씨부인의 목소리를 듣고는 살며시 감았던 눈을 뜨고 정씨부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곧 정자에서 내려와 정씨부인에게 가벼이 그러나 가득 예절이 배어있는 몸짓으로 인사를 올리었다. 그러한 설아의 모습은 흡사 산솔새를 연상시켰는데, 곱게 빗어 넘긴 머리하며 단아하지만 아직 어린티를 벗지 못한 모습까지도 귀엽고 사랑스러워 보이는 것이 정씨부인의 마음이었다.

정씨부인의 질문에 귀까지 붉게 물든 설아는 종종걸음으로 자신의 방으로 들어 가버렸다. 정씨부인은 부끄럼을 타던 설아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앞으로 더욱 당차게 자라게 될 아이의 미래를 스스로 그려보았다. 해는 서서히 산 중턱에 매달려 떨어질까 말까 고민하는 것처럼 위태위태해보였다. 정씨부인은 해가 점점 저물어감에 따라 느껴지는 추위에 팔짱을 낀 채로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 앉았다.

Powered by Xpress Engine / Designed by Sketchbook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나눔글꼴 설치 안내


이 PC에는 나눔글꼴이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사이트를 나눔글꼴로 보기 위해서는
나눔글꼴을 설치해야 합니다.

설치 취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