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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침묵(沈默).
    무음(無音)의 영역에 다다른 뒤 행할 수 있는것이 그것 뿐이란 것을 알았을 때,
    나는 죽음(死)를 결심했다.
                                                                        


First-Suicidium. 월요일의 방관자(月曜日の傍觀者)



그저 멍하니 백색의 천장을 올려다본다. 아무런 문양도 없는, 마치 하얀 종이 위에 하얀 물감을 가득 덧칠한 것 같은 그런 느낌의 백색. 그것은 마치 겨울의 아이스크림처럼 굉장히 이질적이고, 익숙해지지 않는 것이다. 설령 몇 년이 지난다해도.
그래서 나는, 항상 병원에 대해서는 좋지 않은 기억만을 가지고 있다. 언제나 무미건조하고 지겹기만 한, 그런 병원 생활의 반복이었다.
활달한 성격도 아니라서, 간호사나 의사와의 추억도 별로 없다. 같은 병실을 썼던 다른 사람들에 대해선 말할 필요도 없겠지.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눈 기억은 없다. 다들 나를 단지 붙임성 없는 여자아이 정도로 생각하고, 자신들만의 세계를 유지해갔다.
몇 번이고 그들의 친구와 가족이 오갈 때면 그것이 말하지 못할 정도로 부럽고, 부러워서 몇 번이나 울었다. 모두가 잠들어 있을 때, 소리를 죽이고 바보같이 울었다.
그들처럼 되고싶다고, 진심으로 바랬다. 하지만, 무의미할 뿐이다. 바보같은 생각일 뿐이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것을, 처절할 정도로 잘 알고 있다.
왜냐고 묻는다면...
나는 깨닫고 있기 때문이다.
그 날, 아빠와 엄마가 나를 이 병원에 '버렸다는걸'. 지금은 아빠의 친구 덕에 그나마 이 병원에 남아있다는 걸. 8번의 여름과, 8번의 겨울이 지나는 동안 한번도 방문하지 않는 부모를,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부모를, 그래도 꾸준히 기다리는 바보짓을, 나의 주치의인 그 사람이 가엽게 봐준 것이란 것을.
그렇게 8년이 지났다.
그리고 그 사람을 만났다.
그 날은 월요일(月曜日)이었다.




그 사람은 새로 나의 주치의가 된 사람이었다.
아빠의 친구이자 나의 주치의였던 의사를 대신해 새로 부임한 사람.
굉장히 젊은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하나... 쇼쿠리 사쿠라? 에에?]

그것이 처음 만난 그사람은 그렇게 적어놓곤 머리를 긁적였다.
풋. 그게 뭐야. 하나쇼쿠리?
아하하.
하나, 쇼쿠리? 아하하하하.
정말이지 그땐 아무생각없이 웃음이 나왔다. 나도 모를 정도로 웃었다. 아마도 그렇게 웃어본건 처음일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웃기지도 않은 이야기를.
8년동안 잃었던 웃음을 한꺼 번에 뱉어낸 것처럼. 그렇게 웃었다.
그 사람은 무안한 표정으로 얼굴을 붉혔다.
하나카자리 사쿠라(花飾り さくら).
한참을 웃고난 후에야 그렇게 적어주었다.
그 사람은 잊어먹지 않도록 하나카자리, 하나카자리 하고 몇번이고 되새겼다.
그래. 하나카자리 하고. 그것은 '들리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어느새 나는, 그 사람과의 시간을 기다리게 되었다. 그 사람과 함께라면 언제나 행복했다. 지난 8년동안의 시간이, 바보같아 질 정도로.
그래. 정말로 기뻤다. 그 사람은 친절하게 웃어줬고, 친절하게 말해주었고, 친절하게 나의 치료를 위해 힘내주었다. 그 사람이 곁에 있으면 웃을 수 있었다. 즐거웠다.
그렇기 때문에 착각하고 있었다. 언제까지고 나의 곁에 있어준다고. 나만의 사람이 되어준다고.
그 사람도 결국 자기의 세계가 있는 것이다. 돌연 아무 말도 없이 그 사람은 내 곁을 떠났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장마의 중간. 6월 24일. 월요일(月曜日)었다.



그것도 벌써 6년 전의 이야기. 나는 어느새 19살이 되어있었다.
그리고 지금 내 옆엔 얼마전에 새로 부임한 흰색의 정장을 입은 의사가 앉아있다.
4번째 주치의. 늙었지만 인정이 많고 인자해 보이는 얼굴이다.
그가 미소를 지으며 입술을 움직였다.
무언가 말을 꺼낸 것이겠지만, 들리지는 않았다. 의사도 그 사실을 알고있었다는 듯이, 이내 작은 종이조각에 무언가를 적기 시작했다.

[여전히 아무것도 들리지 않나? 하나카자리(花飾り)양. 그렇다면 고개를 끄덕여주게.]

나는 그 글을 천천히 읽어나갔다. 글의 의미를 정확히 할 수 있도록 몇번이고 읽었다. 늙은 의사는 그런 나를 아무말 없이 기다려주었다.
이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말게. 진단했을 때는 아무 이상이 없었으니 말이야. 아마 정신적인 문제겠지. 조금 치료를 받다보면 괜찮아 질거야.]

의사는 그렇게 적고는 나를 보고 작게 미소지었다. 나를 안심시켜려는 듯이 보였다.
하지만, 웃기는 이야기이다. 이것 때문에 12년을 병원에서 보냈는데 그렇게 쉽게 나을리가 없잖아. 더구나 지금의 '나'에게 있어서는 더욱 그렇다. 그 사람이 떠나고 더 이상은 웃을 수 없게된, 그 사람을 만나기 전보다 더욱 처절해진 나에게는.
그것은 이 '주치의'보다 '내'가 더욱 잘 알고있다.
그 순간 문을 열고 간호사가 한명 들어왔다. 젊고, 연분홍색의 간호복을 입은 사람이다.
그 간호사는 심각한 얼굴로 의사를 향해 입술을 덜썩였다. 의사도 이내 심각한 표정을 짓더니 간호사를 향해 뭔가를 말했다.
그들은 몇 번이고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 이야기는 나에겐 분명 '들리지' 않아서, 나는 그들에게 간섭하지 못한 채 그것을 멍하니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짧은 이야기가 끝난 뒤 의사는 다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잠시 나갔다 오겠네. 걱정말게. 금방 돌아올 테니까 말야. 만약 견디기 힘들어지면 머리맡에 있는 버튼을 누르게. 그럼 금방 달려오겠네.]

그렇게 적고는 의사는 급히 간호사와 함께 방을 나갔다.
발걸음 소리가 멀어지는 것을 확연히 '듣는다'.
그렇다. 실은 나는 그에게 거짓말을 했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은게 아니다. 그 사람과 노력했던 시간동안 나는 창을 두드리는 빗소리도, 문을 여닫는 소리도, 글자를 써나가는 소리도 뚜렷히 듣게 되었다. 다만 내가 듣지 못했던 것은 '의사'의 '간호사'의, '인간(人間)'의 말이었다.
그것을 듣게되기 전에, 그 사람은 나를 떠났으니까...
...더 이상 노력하지 못했다.
두두두둑
창을 두드리는 빗소리는 점점 굵어졌다.
'이젠 어쩌지.'
... 더 이상 이곳에 있을 생각은 없었다. 아니, '이유'가 없었다...
그 사람이 없어지고, 아빠의 친구에게 신세진 것도 14년하고도 절반.
어차피 '이것'은 '병원에서 치료할 수 있는 병'이 아니니까, 이곳에 있어봤자 의미가 없다.
그리고... 남아있는 소리조차도 들을 수 없게 되기전에 무엇인가를 해야만 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이렇게 무력하게 이곳에 있는 것은, 그 사람의 노력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것이므로.
'좋아.'
다행히도 이곳은 1층의 병실. 창문은 안쪽에서 열 수 있는데다 사람 한명 쯤은 충분히 나갈 수 있는 크기였다.
나는 다시 한번 문쪽을 바라본 뒤 창문을 열었다.
차단되지 않은 빗소리는 더욱 강하게 나의 청각을 자극했다. 아직은 겨울이라기는 이른 계절인데도 바깥의 공기는 차가워 몸이 떨려왔다. 조금은 결심이 흔들렸다.
하지만, 정말이지 무언가를 하지않으면, 그때는...
창문을 넘었다. 옷깃에 스며드는 비는 생각 이상으로 차갑고, 따가웠다.
다시 들어가고 싶다고, 솔직히 생각했다. 그러면서 나아갔다. 어둡고, 춥고, 차가운 빗 속의 가운데로 나아갔다.
그날 밤은 정말로 ,귀가 아플정도의 빗소리만이 들렸다.



무리다. 결국은 이 정도다. 500m도 나아가지 못했다. 단지 작은 전화박스에서 비를 피하는게 고작이다.  처음부터 나에게는 무리였던 것이다. 빗 속을 걸어나가는것도, 인간의  '소리'를 듣는것도.
그래도 정말로, 열심히 노력해왔다고 생각했었다. 정말로 노력해서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의 소리를 듣고, 새의 지저귐을 듣고, 연필을 끄적이는 소리를 듣게되었다고, 그렇게 생각해왔다. 하지만 나는 결국 '인간'의 소리를 듣지못했다.
노력이 부족했다. 분명, 그렇다...
... 그래. 돌아가자. 어차피 나는, 그 사람이 없이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돌아가서 편히 침대에 누워있자. 아무것도 들리지 않을 때까지. 줄곧, 줄곧, 줄곧.
그렇게 생각하고 박스 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를 보았다.
검기만 한 세계에서, 그는 검은 우산을 들고 검은 옷을 입은 청년이였다.
아니... 그런게 아니다. 단지 검정으로 가득찬 것이 아니다.
그래. 그것은 분명 '검정' 그 자체다.

"... 오랜만이네. 내 이 '감(感)'이 발동하는건..."

어... 라?
어째서... 어째서...
지금의 나에게 인간의 목소리가 들리는 걸까...
지난 14년하고도 반년을 듣지 못했던, 그 사람과 노력했던 반년동안 조차도 듣지 못했던 그것이... 왜 이렇게 쉽게 들리는 거야.
  
"... 난감한데... 음, 아무래도 그녀에게 연락을 해야하겠지."

그렇게 말하며 그는 웃었다.
쓸쓸하고, 차가웠다. 그 누구도 짓지 못할 만큼.
미소라고도 할 수 없는 기묘한 웃음이다.

"당신은..."

힘을 내서 목소리를 쥐어짰다. 물론 자신의 목소리라도, 들리지 않았다.

"... 글쎄. 지금은 그만뒀지만 일단은 '자.살.방.관.자.'라고 할까."

"자살... 방관자..."

그것이 나의 인생을 변화시킬 - 혹은 원래부터 그렇게 되었을- 자살방관자와의 첫 만남이었다.



      - 그리고, 그날은 월요일(月曜日)의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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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중지될지 모르는 연재. 이판사판입니다.
아마도 이것보단 단편을 더 많이 쓸지도 모르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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