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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미드나잇 인 알함브라

로하 2017.04.25 10:08 조회 수 : 58



# 00.



이샤나 아르시오네는 기분이 좋았다. 안도감,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녀가 아는 존재, 단 한 명도 없는 이상한 나라에 혼자 떨어진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할 수 있었으니까.





# 01.



이샤나는 문득, 자신의 차림이 다소 가볍지 않나 하는 걱정이 들었다. 찢어진 청바지나 과한 디테일의 롤리타 풍 원피스는 아니더라도, 좀 더 정장 같은.. 격식 있는 차림을 하는 것이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텐노우지 아키라 군과 만났을 때는 좀 더 가벼운 차림새 - 복숭앗빛 툴 원피스에 하얀 코트 - 였긴 하지만.. 이샤는 자신의 하이얀 원피스를 내려다보았다. 일단 물빛의 케이프를 걸치고 나오는 것으로 너무 허물 없어 보이진 않을 것 같지만... 물론 지금 인사드리러 가는 그 사람은, 이샤가 여태까지 판단한 것이 맞다면 이샤가 체육복에 슬리퍼를 끌고 가도 무례하다고 느끼긴 커녕 별 신경을 안 쓸 것 같지만, 그 부분에 있어서는 이샤 자신이 양보할 수 없는 것이다.


깔끔한, 한 치 흐트러짐 없는 정장을 걸친 두 명의 여성을 데리고 걷는 프랑스 인형 같은 소녀는 분명 주위의 이목을 끌 것이 분명했지만, 어느새 밤 열 시가 넘어, 열 한 시를 향하는 이 시간에는 거리에 걸어 다니는 사람 따위 없는 것이다. 도쿄의 환락가라면 모르겠지만, 이런 신흥 도시라면 더더욱.



"여기가 맞지..? 호텔 알함브라."



대답을 기대하지 않은 채, 이샤는 중얼거렸다.





# 02.



"부외자"인 숙박객은 없는 것인지, 로비는 조용했다. 이 도시에 몇 개 되지 않는 최상급의 호텔이라, 바(bar)를 즐기러 나온 손님 정도는 있을 법 하건만. 상황을 보니 아무래도 다른 손님들에 대한 걱정을 할 필요는 없을까. 하우스 키퍼 같은 일반 직원들은 어떻게 한 것인지, 판단할 수 없었다. 정상적으로 근무 중이더라도 이 시간이면 일찌감치 퇴근했을 테니까.



"실례합니다. 무슈 빌라르로를 방문하기 위해 왔습니다만. 혹 가능하다면 룸으로 연락을 해 주실 수 있나요? 이샤나 아르시오네라고 합니다."



어쩐지 이샤를 과할 정도로 반짝거리는 눈으로 바라보던 리셉션의 여성 스태프는 흠칫 놀라고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연락하실 필요는 없어요! 회ㅈ.. 무슈 빌라르로의 비서가 미리 언질을 두었거든요. 미스 아르시오네가 오신다면 방으로 안내하라고. 안내해 드릴게요. 따라 오세요."


"아, 그렇군요. 네, 감사합니다."



... 어쩐지 필요 없을 정도로 호의가 과분한 것 같은데... 보통 리셉션의 직원이 짐도 들어주던가..? 그나저나 저 직원, 어디선가 많이 익숙한 얼굴이다.. 굳이 떠올리자면 공연에서 자주 보았던 듯한... 기분 탓인가..?


이샤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조용히 리셉션의 직원을 - 그렇다, 원래의 직원을 기절시킨 후 치워버린 다음에 직원인 척 하는 니시가키 카나메를 - 따라 로비 안으로 들어섰다.


고풍스러운 멋은 없고, 세월의 흐름과 손때도 없지만, 최신식으로 세련되게 꾸며진 엘리베이터를 타고, 최고층까지 오른다. 이샤나는 조용히 어떻게 먼저 인사를 해야 할지 곰곰히 생각했다. 안녕하세요, 무슈, 오랜만에 인사드려요..? 아무 생각 없이 검색해 본 인터넷에서는 "아이고 이런, 사장님 오랜만입니다" 같은 게 주르륵 올라왔다. 무슨 마흔 먹은 아저씨도 아니고...  이샤는 살짝 눈을 찌푸렸다.


띵동,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푹신한 카펫이 발을 감쌌다. 복도에 놓인 최고급의 푹신한 간이 소파를 보고, 이샤는 류카와 이비에게 대기를 명령했다. 


"미스 아르시오네를 모셔왔습니다."하는 짧은 보고와 함께, 이샤나 아르시오네는 정면의 방 안으로 들어섰다. 





# 03.



아마 최고 등급일 게 분명한 스위트 룸은 넓었다. 무언가 알 수 없는 서류를 읽고 있던 남자는 인기척이 나자 고개를 들었다. 사람을 꿰뚫어보는 듯한 황금빛 눈동자. 적당히 걸친 듯 하면서도 흐트러짐 없는 차림. 나풀대는 은빛 머리칼을 가볍게 묶은 남자는 - "그"치고는 놀라울 정도로 - 그녀를 반겼다.



"Bonsoir, ça fait longtemps, mademoiselle. Comment allez-vous?"(오랜만이군, 미스. 별 일 없었는가?)


"Oui.. Oui! Bonsoir, monsieur, ça fait longtemps!" (네, 네에..! 오랜만에 뵈어요!)



모국어 - 정확히 말하면 이탈리아어와 함께 공동 모국어였지만 - 를 이국 땅에서 듣는다는 것이 이렇게 안심이 되는 일인 줄, 이샤나 아르시오네는 처음으로 실감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여태까지는 체감할 기회가 없던 것이겠지. 어느 나라에 가던, 전문 통역이 따라붙고, 매니지먼트 사의 사람과 경호원. 그녀는 항상 여러 사람과 함께 있었으니까. 그러나 그러한 회상에 젖어드는 대신, 이샤나 아르시오네는 먼저 입을 열었다.



"앗, 그.. 먼저,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저씨!"



지금의 말은, 그를 보좌하는 다른 사람들이 들었다면 아마 기겁을 할 말이었으리라. 회장님, 무슈 발레르로. 프랑스인 석유왕. 어떤 것이든 그를 칭하는 말이었지만, 글쎄. 여태까지 그를 아저씨라고 부른 사람은 아마 한 명도 없었겠지. 이샤나 아르시오네 또한 본래 그러한 표현은 쓸 생각도 없었을 테지만, 무심코 튀어나와 버린 것이었다. 이역만리 타국.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곳. 죽을 뻔한 위기. 모국어. 이미 수 년 전부터 알고 있던 사람. 그러한 것이 합쳐져, 제멋대로 튀어나와 버린 말. 순간, 그 말을 내뱉은 이샤나 아르시오네조차 자신이 그러한 표현을 사용했다는 건 자각하지 못했지만. 그렇지만 남자 - 클로드는 그러한 호칭을 지적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그, 그렇다면 괜찮을 걸까. 이샤는 머뭇거렸다.



『마스터, 아는 사이인가?』


『앗, 네에..! 그, 몇 년 전부터 알던 분이에요!』



── 저희 아버지도 안면은 있으시구요. 라이더의 말에 이샤는 덧붙였다. 그렇구나, 하고 이샤의 말에 답하며 라이더는 소리 없이 속삭였다.



『.... 조심하도록 해. 그는... 적어도, 적으로 돌리면 위험한 인물이다.』


『저도 그렇게 생각한달까... 꼭 성배 전쟁이 아니더라도, 예전부터...』



이샤나는 말을 흐렸다. 그녀는 딱히 마술사나 정치인들 사이의 권력 투쟁과 음모에 관심을 두지 않았기에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었으나, 그럼에도 어깨 너머로, 혹은 자연히 흘러 들어온 소식들을 통해 눈 앞의 남자가 얼마나 - 여러 의미로 - 거물인지 알고 있었다. 그녀에게 있어서는 그렇게 무서운 사람이라기보단, 굉장히 취향이 뚜렷하고, 또 바이올린의 반 음 차이도 눈치챌 정도로 음악적 감각이 뛰어난, 공연에 자주 찾아온 분이라는 인상이 더 강했지만.



"음.. 내가 부담이 되는가 보군. 그렇게 무거운 표정 짓지 않아도 된다네. ..늘 그랬듯, 편안하게 하도록."



그렇게 말하며 클로드는 슬쩍 웃어보였다. 딱히 환한 웃음... 함박웃음 같은 것도 아니었지만. 그의 일본 담당 비서인 이소노가 알았다면 당장 집에 돌아가서 절찬리 사춘기 반항 중인 딸에게 양 뺨을 좀 꼬집어 달라고 했을 법한 표정이었다. 차라리 폭소를 터뜨리면 터뜨렸지 저런 건 처음 본다며. 그렇지만 이샤는 그가 공연이나 파티 같은 곳에서, 유독 그의 취향에 맞는 곡을 부르면 그 비슷한 표정을 짓는다는 것을 진즉 깨닫고 있었으므로, 그것만으로도 좀 더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 그에게 이샤에 대한 적의가 없다고 판단한 것일까. 더하여 꽤 전부터 교류가 있던 지인이라는 이샤의 말도 진실임을 알아서일까, 라이더는 일단 살짝 뒤로 물러났다. 아마 상황을 지켜보기로 결정한 듯 싶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지인도 사실이고, 예의 마보석 건으로 신세를 진 것이 사실이라면 과하게 날을 세우기보단, 기본적인 경계를 늦추지 않는 선으로도 일단은 충분할 테니까. 또... 그가 무엇을 말하던, 라이더의 앞에서 거짓을 말한다는 것은 불가능한──"있을 수 없는" 일일 테니까. 



"노파심에 묻는 것이다만..."



클로드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먼저 입을 열었다.



"오는 길에 혹시 다른 곳에 들르거나 하지는 않았겠지? 아아, 거리가 아니라 호텔 내부에서, 말일세."


"에.. 아니요..? 리셉션의 직원분이 바로 방까지 안내해 주셔서요. 아저씨를 찾아뵈러 왔다고 연락을 부탁드리니, 이미 이전에 언질이 되어 있었다고 하신걸요."


"그렇군. 미스도 잘 알겠지만, 일단 이곳은 허락되지 않은 곳에 들어갔다간 무슨 짓을 당할지 알 수 없으니..."



그렇게 말하며, 클로드는 들고 있던 펜을 문 쪽으로 던졌다. 쾅, 하는 굉음도 아니고. 팍, 하고. 화살이 과녁에 꽂히듯 날카롭게 박히는 소리가 났다. 이샤의 뒤를 향해 날아가면서도, 그녀를 스치듯 지나가면서도 그 아슬아슬한 거리에서 머리칼 한 올 끊지 않았다. 이샤나 아르시오네는 깜짝 놀랐지만, 클로드가 펜을 던질 때 라이더 또한 무반응이었다는 점에서 '저 남자들은 이 거리에서 저 문을 향해 꽂히도록 펜을 던지면서 머리카락 한 가닥 손상시키지 않는 게 지극히 당연하고 상식적인 것일까', 따위의 생각이 드는 건 피할 수 없었다. 대체 상식이란 뭘까.



"자네는 좀 나가있게."



히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멀어지는 발걸음 소리가 났다. 저 사람은 누구일까. 그를 싫어하는 사람이 심은 첩자는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펜 한 자루' 따위로, 문에 박히는 정도로 온건하게 끝날 리가 없겠지. 그렇다면 엿보던 그의 휘하 중 한 명일 것이다. 그의 사람이라면 이샤나가 신경 쓸 문제는 아니었다.



"──저런 게 언제 붙어 있을지 모른다네."



꽤 자주 있었던 일인 듯, 클로드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하고는 다시 이샤를 향했다. 



"그래서, 미스는 무슨 용무로 이곳에 온 것인가?" 





# 04.



시치미를 떼는 것일까. 정말로 그가 "의도하고" 자신이란 걸 드러낸 채로 마보석을 보낸 것이 아니었던 걸까. 이샤는 전자라고 판단했다. 믿을 것은 느낌 뿐이었지만- 적어도 그녀가 생각하기에, 그녀가 직접, 스스로 이 곳으로 찾아왔어도 사실상 그가 부른 것과 다름 없다고.



"으음... 일단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그 마보석 건에 대해 먼저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어서요. ...그리고, 제 착각인지도 모르겠지만, 그걸 가져다주신 분이 그렇게 아저씨 측에서 보내주셨다는 걸 '숨기지 않았다면', 뭔가 저에게 하실 말씀이 있으셨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구요."



막상 말하고 나니 아닌가, 하는 생각과 함께 자신감이 사라지는 느낌이라, 그녀는 재빨리 어깨를 으쓱하곤 덧붙였다.



"제가 잘못 판단한 것인지도 모르겠지만요."


"그런가. 그럼 돌려 말하는 건 여기까지 하도록 하지. 미스도 시간이 많은 사람이 아닐테니."


『── 당당하게 있어라, 마스터. 저 남자와 어떤 관계였던지, 지금 이 자리에서 네가 긴장하며 수그러들 필요는 없어. 빚이 하나 있다, 그렇다면 갚으면 될 뿐.』


『네에..!』



그리고, 클로드 루이 엑토르 드 빌라르로는 손등을 들었다. 선명하게 새겨진 세 획의 문신.


그가 성배 전쟁과 같은 것을 "흥미로 인해" 보러 왔다면 몰라도, 그 스스로가 소원을 이루기 위해 마스터가 되었으리라곤 생각하지 못한 이샤나 아르시오네는 눈을 크게 떴다. 그런 이샤나를 보며 클로드는, 여전히 변함 없이 차분하면서도 상냥한 어조로 말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지금 그대와 같은 입장에 처해 있네."





# 05.



"── 하지만, 그대와 내가 굳이 적대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뿐."



어떻게 하지, 하고 고민하는 기색의 분명한 이샤나 아르시오네를 보며 그는 말을 이었다. 이샤나 아르시오네는, 그 중심에 서 있지 않았을지언정, 그것이 살인 따위의 무거운 결말을 불러일으키지 않는 곳일지언정, 나름대로 모략과 뒷말이 수없이 오고 가는 세상에도 익숙할 소녀였다. 그러나 천성의 탓일까, 혈연의 탓일까. 그녀는 그런 권모술수에 손을 잡고 뛰어들기에는 영 냉혹하지 못했다. 무르다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완벽하게 비즈니스 상대, 혹은 무관계한 사람이라면 모르겠지만, 무대 위나 파티에서의 그녀 - 하나의 악기로서가 아닌 이샤나 아르시오네를 아는 이에게는 경계심이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녀 자신은 그리 생각하고 있지 않겠지만... 혹은 깨닫고 있지 않겠지만, 핑글핑글 표정을 바꾸며 상대를 걱정하거나, 자신을 걱정하거나, 무서워하거나, 고민하거나, 당황하거나 하는 것이 전부 다 빤히 보이는 것이다. 그것은 아마 맞서는 마스터에게도 마찬가지겠지.



"내가 이 싸움에 품고 있는 것은 크게 없어. 성배는 원하지 않는다. 성배만 강림 된다면 말이지."



그는 조곤조곤 말을 이었다.



"그래서 그대가 원한다면 손을 잡고자 한다네. 마보석은 그것을 위한 작은 선물 정도라 생각하게."


"성배의 강림은 바라시지만, 소원을 빌기 위한 것으로 바라시는 게 아니라면... 아저씨는 기적이란 게 일어나는 순간을 보고 싶으신 건가요?"


"그것은 세계를 바꾸어 놓기에 충분한 기적일 것이다. 설령 어떠한 소원을 빌더라도 말이지..... 그럼, 그것으로 내 소원은 이루어진다. 따라서, 미스의 생각대로라 보면 된다."



이샤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와 같은 사람이라면 나름대로 납득도 가는 일이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모든 것을 다 가진 사람이었고, 따라서 바라는 것이 없다 한들 그리 이상하지는 않은 일이었다.



"그래서, 대답을 들려줄 수 있는가?"



그는 어디까지나 정중했다. 여기서 이샤나가 거절한대도, 딱히 공격하거나 할 생각은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샤나는, 자신이 낮에 반쯤 장난으로 텐노우지 아키라에게 건넸던 의문을 다시 한 번 품었다.



"그럼, 음.. 한 가지만 더,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요. ...왜 저죠? 여긴 그.. 저보다 강한 분도 틀림없이 계실텐데. 아, 물론 제가 부족하단 거지 제 서번트는 아니에요! ... 아무튼, 만약 아저씨가 성배의 강림을 보고 싶으신 거라면 가장 강한.. 가장 승률이 높을 분께 거는 게 맞지 않나 싶어서요. "


"안타깝게도, 본래의 플랜대로였다면 나는 그 누구와도 손을 잡을 생각은 없었다네. 다만, 계획에 조금 차질이 생겨서 말이지." 


"차질..?"


"이 나를 명확히 적대시하는 누군가가 생겨났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이 나조차 대적할 수 없는 세력이 이 성배전쟁에 자리하고 있지. ..이 둘이 일치한다면, 꽤나 골치 아픈 일이 아닐 수 없겠지."



이샤나는 살짝 몸을 떨었다. 클로드 루이 엑토르 드 빌라르로라는 남자는, 적어도 그녀가 아는 사람들 중에서는 가장 강하고, 빈틈없는 사람이었다. 본인의 실력으로도, 재화의 의미로도. 그런 그가 소환한 서번트 역시 필경 어디에 내놓아도 찬탄을 자아낼 최상위의 서번트일 것. 그런 그가 대적할 수 없는 세력이라 한다면 과연 어떤 사람들... 괴물일지 이샤나로서는 상상조차 잘 되지 않았다. 하여 이샤나는 먼저 라이더에게 물었다. 자신이 부족한 것을 알기에 - 가끔은 자신감이 너무 없어 보일지언정 - 독단으로 결정을 하고, 자신의 생각을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는 대신 서번트의 의견을 먼저 묻는다는 것은 아마 나름의 장점 중 하나일 것이다.



『으음..... 라이더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저 개인적으로는 도움을 받은 분이기도 하고, 아는 분이기도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지금 하신 말씀에 대해 라이더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싶어요. 저 혼자서 하는 것도 아니니까요.』


"그래서 직접 움직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네. 수육한 영령들이 영령들의 잔치를 방해하러 왔다는 것이 말이나 되는가? 이미 성배를 차지했음에도 탐욕에 점철되어 영령들의 명예를 더럽히려는 자들은 이 성배전쟁에 참가할 자격이 없지 않을까?"


"수육한.. 영령이요..?"


『만약 하신 말씀이 맞다면 확실히... 여럿이서 최대한 힘을 합쳐서 대항하는 게 리스크가 적을 것 같다곤 저도 생각하지만요...』



라이더는 잠시, 뜸을 들인 후 속삭이듯 대답했다. 언제나 그렇듯, 호수의 물처럼 맑고 또 흔들림 없이 곧은 목소리였다. 


『자신의 주관이 들어있지만 거짓말은 아니다. 적어도 그는 거짓말로 마스터를 속이려고 하고 있지는 않아. 그 점은 믿어도 되겠지.』

"나는 어제 대부분의 마스터에 대한 정보를 얻었다네. 그 중 충격적인 인물이 있었고, 내 서번트의 정보에 따르면 그들은 이러한 자들이지."

『다만, 거기까지. 내 목적을 잊지는 않았겠지, 마스터? 최종적으론, 이 남자와도 우린 싸워야 한다. 그가 스스로 탈락해 준다면 이야기는 다르겠지만.』


세이버 때처럼, 라이더는 빈틈이 없었다. 이 사람과 적대한다니, 솔직히 말해 정말로 내키지 않는 일이었지만 라이더가 말한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이샤는 시무룩해진, 떨리는 기색을 억누르며 클로드가 내민 서류를 받았다.


『단, 그에게는 빚이 하나 있다. 그러니, 동맹은 아닐지언정 한번의 협력... 한 번의 전투 정도, 힘을 빌려주는 것에는 나도 이의가 없어. 물론, 어디까지나 이것은 나의 의견이고, 마스터가 다른 의견을 취하고 싶다면 말이 달라지지만...』

『으음, 네에.. 라이더가 말한 부분은 저도 알고 있어요....』


역시, 정말로 내키진 않았지만. 무섭다고 해도 틀리진 않겠지만. 그것보다는 껄끄러움이라 해야 옳을 것이다. 그는 꽤나 그녀가 공연에서 자주 찾을 수 있었던 - 그녀의 노래를 좋아해주던 사람이니까. 그러나, 그런 이샤나의 생각은 클로드가 내민 서류를 읽는 순간 지워졌다. 





# 06.



"이거 완전 반칙 아니에요?! 이미 우승했다면서, 욕심이 너무 많아요!"


"그래서 내가 움직인 거라네."



이샤나는 살짝 하얘진 낯빛으로 다시금 서류를 훑었다. 서번트의 스테이터스라 한다면 납득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이 마스터이며, 마스터와 행동하는 보조이며, 서번트는 별개로 존재한다니. 말도 안 된다. 사실상 세 기의 서번트가 한 팀을 이뤘다고 해도 좋으리라.



"이건 이 전쟁에서 싸우는 모든 서번트에 대한 모욕이라 생각하지 않는가?"


『광기와 악, 권위를 관장하는 여신으로까지 떠받들어진 탐욕스러운 여왕인가. 틀림없이 악한 존재로, 내가 바라는 미래에는 불필요한 존재겠지.』


"내가 그대에게 동맹을 청하는 대의 명분은 이것이라네. 그리고 동맹의 손길을 뻗은 것은 그대 뿐만이 아니야. 가능한 한 최대의 인원을 동원하여, 이 탐욕스러운 여왕을 찍어내려는 것 뿐이지. 성배전쟁은 그 이후다."


"으음... 혹시나 해서, 확인차 여쭤보는 거지만, 이 아탈란테란 사람..? 영령..? 은 서번트가 아닌 거지요? 이 사람의 서번트는 따로 있는 거죠..?"


"물론."


"치사해요! 왜 초등학생들 노는 데 어른이 와서 깽ㅍ.. 끼어들어요?! 으으..."


"그 서번트에 대한 정보는 아직 없으나, 결론짓자면 이 정도 되는 적이 현존하고 있는 상황이라네. 만만찮은 위협이 되는 참가자 또한 물론 많으나, 결정적으로 이들은 애초에 이 성배전쟁 자체를 더럽히는 존재들. 그래서 놔둘 수가 없어."



이샤는 다시 침울해졌다. 탐스러운 금빛 머리칼의 끝을 살짝 꼬며, 그녀는 소리 없이 라이더에게 말을 걸었다.



『라이더가 약하다곤 저어어어언혀 생각하지 않지만, 이런 사람? 영령? 하고 홀로... 아니면 세이버와 함께여도, 리스크가 좀 클 것 같아요. 자잘한 문제도 있고, 무엇보다 이 쪽은 사실상 서번트 세 기니까요.』



거기다, 모르긴 몰라도 가지고 있는 특수한 장비를 보았을 때, 설령 이기더라도 본전도 못 찾고 상대는 소모 없이 도주, 자신들은 진명만 알려주는 사태가 될 가능성 또한 충분했다. 이샤나 아르시오네는 지극히 마술사적인 손익계산이나, 전장의 전략 따위를 몸에 익힌 소녀가 아니었지만, 그런 그녀가 보기에도 쉽게 알 수 있는 것이었다.



 『게다가... 나는 그 쪽 신화는 잘 모르지만, 어떤가? 이 여왕은. 자신의 힘을 휘두르는 맹장, 영웅 타입인 건가?』


『저도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자신이 맹장이라기보단, 그런 맹장들과 영웅들을 거느리는? 꾀어내는? 그런 쪽이었던 것 같아요.』



켈트 신화라니, 아일랜드 출신이나 신화 연구자, 룬이나 고고학 계열의 마술사가 아니라면 대부분 듣도 보도 못할 마이너 신화라구요. 이샤는 가볍게 고개를 흔들었다. 그 유명하다는 그리스 신화도 헤라클레스, 트로이 전쟁의 아킬레우스와 헥토르, 오디세우스. 겨우 이 정도가 일반적으로 알려진 수준이니까. 



『아까 라이더가 말씀하신 한 번의 빚..에 해당하는 한 번의 전투로 끝날진 모르겠지만, 만약 다른 진영들도 함께하는 거라면 저는 일시적인 협력은 괜찮다고 생각해요.』


『그렇군. 나도 거기에는 이의가 없다. 한 번으로 꺾진 못하더라도, 최소한 두들겨둘 필요는 있다.』



이 정도라면 한 번에 꺾는 것은 아마도 무리. 하지만 최대한 많은 소모를 이끌어내는 것은 가능하다. 라이더는 지극히 객관적인 - 혹은 냉정한 자세로 속삭였다. 이샤나는 움찔, 몸을 떨었다. 동시에 역시 이 스테이터스는 반칙이지, 란 생각이 다시금 강해진다. 여러 진영과의 협력이라 들었는데, 아처나 어새신이 같은 진영에 있다면 그.. 임팩트 있는 최후 덕분에 기억하고 있지만, 이 사람의 뒤통수에 굳은 치즈를 쏴버릴 순 없을까,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로.





# 07.



이샤나는 클로드와 몇 가지 세부 조건을 정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라이더가 제시하고 이샤나가 동조하며 또 그의 생각을 전하는 쪽으로 갔다고 해도 좋을 것이었다. 아무튼, 그 부분은 라이더가 말한 것이 지극히 합리적인 수준의 요구였으며, 또 클로드가 대답하기 어려움이 없는 것이었으므로 교섭은 잘 진행되었다.



『그런데, 상대의 서번트가 없는 것이 신경 쓰이는데...... 서로의 전력을 모른다면 손발을 맞추기 힘들 것 같아. 최소한 어새신을 이 자리에서대면시켜 준다면 좋겠지만, 제안을 할 지 하지 않을 것인지는 마스터에게 맡길게. 뭐어, 당일 현장에서 해도 좋다고 생각한다면 그것도 문제는 없다.』


『아뇨, 라이더의 말대로 먼저 한 번 여쭤볼게요.』



"으음.. 그런데, 아저씨의 서번트 분은 함께 하시지 않은 건가요?"


"하하하! 안타깝게도 이쪽은 서번트와의 사이가 그리 좋지는 않아서 말이야. 성배를 원하지 않는 마스터에게 정 붙는 서번트가 이상하겠지."


"네에..?!"


"하지만, 그녀가 원하는 것은 이루어줄 생각이다. 그녀는 성배보다 우선시하는 것이 존재했다. 나는 그것을 이루어줄 뿐. 우리는 그런 관계다. .. 대답이 되었는가?"


"혹시 그,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쪼-끔만 더 알 수 있을까요? ... 아저씨는 제가 알던 분이지만, 서번트 분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니까요."


"이 말을 듣는다면 분명 화내겠지만, 내 서번트는 꽤나 긍지 높은 녀석이라 성배전쟁에 그런 불순물이 들어오는 것을 용납할 수 없는 것 같아 보이는군. 물론, 개인적인 원한도 보이는 것 같지만 말이네."



개인적인 원한...? 이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현재의 맥락상 개인적인 원한의 상대라면 아마 그... 3기짜리의 진영일 것. 



"서번트에 대한 정보가 궁금한 것이라면 알려줄 수 있는 건 극히 적네. 그녀와 나는 보다시피 쇼윈도 부부와 같은 형태를 하고 있거든. 그러니 그대가 신뢰를 원한다면, 그녀의 이름을 알려주도록 하지. 그걸로 만족하는가, 영령."



『지금 말씀은 아까 말한 그... 여왕만큼은 이겨야겠다는 걸까요, 서번트 분이.. ?』


『...생전에 뭔가 인연이 있는... 같은 켈트의 영령인 것일까? 정보가 부족하니 판단은 내릴 수 없겠지만... 어쨌든, 이것도 '사실'이야. 그리고... 진명은 거절하도록 하지. 그것까지 받아버리면, 이쪽이 너무 많이 받게 돼. 빚은, 되도록 지고 싶지 않으니까.』


『으음, 그렇다면.. 일단 저 분의 서번트 쪽이, 아저씨랑 별로 가깝지 않고, 하지만 그 사람들에 대해서 만큼은 확실히 적의를 갖고 전력으로 상대할 생각이란 건 확실한 거겠죠..?』


『아아, 적어도 '그의 말에 거짓은 없어'』



라이더는 단언했다. 이샤는 그의 말에 잠시 생각하고는 입을 열었다.






# 08.



방을 나가, 자신의 몫으로 마련된 호화로운 일실에 안내 받기 전, 이샤나 아르시오네는 생각났다는 듯, 문 앞에서 기다리던 이비를 불러 고급스럽게 포장된 선물을 하나 내밀었다. 혹시나, 하고 서너 병 챙겨온 것이 이럴 때 도움이 되는 것인가.



"저희 아버지가 소유한 보르도의 그랑 크뤼에서 나온 와인이에요. 2000년산이고, 시판하지는 않고, 많이 만들지도 않지만, 맛은 정말 좋다고 말씀드릴 수 있어요. 아저씨께서 와인을 좋아하시는 것 같아서..."



... 물론 드러나는 표정의 차이는 크게 없었지만, 어쩐지 그가 꽤나 기뻐하는 듯한 느낌은 기분 탓만은 아닐 것이다. 이샤나 아르시오네는 확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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