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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똑

날카로운 노크소리에 난 입원실 문을 쳐다볼수밖에 없었다. 들어오세요,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순간 목이 막혀서 그런지, 아니면 당시의 충격이 아직도 가시지 않았는지… 그건 잘 알수 없지만, 내 대답 유무에도 신경쓰지않고 새하얀 문은 조심스레 열렸다.

“실례합니다, 유이진씨.”

공손히 인사하는 여자. 세련되게 빼입은 정장이 정말로 잘 어울리는 여자였다. 콧등 위에는 낡은 뿔테안경이 걸쳐져 있어 자칫 딱딱하게 보일 것 같기도 했지만… 그녀의 웃는모습은 이 병원의 천사라고 불리는 간호사들 못지 않았다. 하지만… 무슨일이지? 경찰도 동행하지 않고 혼자서 이 병실에 들어오다니…

“전 이런사람입니다.”

여자는 품에서 명함을 꺼내 내쪽으로 보여주었다. 하지만 난 그런 명함따윈 보지도 않았다. 분명, 신문사에서 날 취재하려고 온 기자정도겠지… 아무래도 경찰동행을 안한걸 보니 어지간히 빽이 있으신가보다.

“유이진씨.”
“지긋지긋합니다. 더 이상 말할거 없으니 돌아가주세요.”

이미 나의 진술은 전국 방송 삼사의 저녁뉴스에 모두 보도되었다. 확실히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그곳에서 일어난 모든 사건들은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누구에게도 얘기할수 없는 내용이다. 왜냐면, 아무도 믿어주지 않을 테니까…

“유이진씨. 전 당신이 메스컴에 이야기한 것이 그곳에서 본 모든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실례지만… 숨기시는게 있다는 것을 알고있습니다.”

덜컹.
심장에서 그런소리가 들렸다. 거짓말안하고 진짜…
순간 놀라 여자의 얼굴을 쳐다본다. 심장박동이 빨라진다. 얼굴이 빨개지는 것을 느꼈지만 그런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눈앞에 있는 여자는 그저… 놀라 토끼눈이 되어버린 내 두눈을 부드럽게 응시하고 있을 뿐이다.

“이야기 해주시지 않겠습니까? 유이진씨. 당신이 겪은 악몽의 일주일을.”

달각달각.

나도 모르게 파이프 침대의 쇠파이프를 손가락으로 두드리고 있었다. 심장은 터질듯이 뛰고, 맥박은 미치도록 벌떡이고 있었다. 흔들리는 눈동자, 그 속에서 그녀는 무엇을 보았는지… 나는 잘 모르겠지만… 이것만은 확실하다.
적어도, 그녀는 그 ‘마을’에서 무슨일이 있었는지 알고있다. 하지만… 어째서? 그 일을 알고있는 것은 나 이외의 다섯명의 친구. 그 애들 뿐일텐데…

“…제, 제가 무엇을 믿고… 당신에게 이야기를 해야하는거죠?”

내 물음에 그녀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제가 이런말을 할때마다… 주위 사람들은 모두 다 나보고 미쳤다고만 합니다. 가족마저… 절 이런 차가운 병원에 집어넣어버렸죠. 이젠 아무도 믿을수 없게됐는데… 어떻게 제가 당신을 믿고 이야기를 해야하죠?”

내 말에 그녀는 그저… 포근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유이진씨는 아마… 절 믿을 수밖에 없을거에요.
사실 제 고향이 바로… 그 ‘마을’입니다.”

쿵!!
심장이 소스라치게 뛰어올랐다. 이미 갈비뼈를 부수고 살가죽을 찢고 뛰쳐나올 기세다. 눈동자는 부산스럽게 그녀의 모습을 보려고 노력한다. 귓가에 들리는 고동소리. 뜨거운 입김. 온몸에 흐르는 차가운 땀방울. 평생 느껴보지못했던 감정. 그곳에서 나는… 말라붙은 입술을 열었다.

“月出에 撞影하니…──달이 떠오를때에 그림자에 손을 뻗으니──”
“無主의 有脘이라. ──주인없는 팔뚝만이 있는구나──”

턱이 떨리기 시작했다. 더 이상의 대화는 불가능한듯 보였다. 도저히 턱뼈를 움직일수가 없었다. 쇼크 때문에? 내가 분명 이 병실에 있는 이유는… ‘마을’에서의 사건때문이 아니라, 눈 앞에 있는 여자가 그 시를 알고있다는 것때문인듯한 착각이 일어났다. 정말로… 내 머리는 미쳐있는걸까? 만약 그렇다면…
그런 날 고칠수 있는 사람은 눈 앞에있는 여자다… 라고 생각할수박에 없었다.

“그 시… 알고계시는군요.”
“어릴때부터 그마을에서 자란 사람이라면 대부분은 알고있지요. 한자도 쉬워서 말이죠.”

겸손하게 웃고있는 그녀에게서 다정함을 느꼈다.
안정되어가는 심장. 동지를 만났다는 느낌이… 비록 같이있지는 않았지만, 똑 같은 장소를 공유했다는 그 안정감이… 나의 몸과 마음 모두를 안정시켜주고 있었다.

“전 분명 그 ‘마을’ 출신입니다. 국민학교때 서울로 이사를 가서 그 이후 들러본건 얼마 후지만… 적어도 그 ‘마을’의 비밀정도는 알고있습니다. 그 조그만한 ‘마을’의… 유일하게 살아 남은 생존자로써 말이죠. 그리고 유이진씨 당신도… ‘대학살 사건’의 희생자이자 마지막으로 살아남은 생존자로써.”

그녀의 그 한마디로 모든 것을 결정났다.
이 여자는 나와 같은 여자다. 난 비록 그 마을 출신이 아니지만… ‘대학살’의 생존자. 그리고 그녀는 ‘대학살’의 희생자는 아니지만… 살아남은 그 ‘마을’의 유일한 생존자. 같지만 묘하게도 다른 우리 둘의 관계가, 아무래도 서로를 이끌고 있었는지…….

“…알겠습니다. 가르쳐드리죠. 그곳에서 무슨일이 있었는지… 저희가, 무슨짓을 당했는지. 그 ‘예량마을’이… 어떤곳인지 말이죠.”

그녀는 이야기를 들을준비를 하며 의자에 편안히 앉았다. 그런 나도… 침대에 편안히 기대었다. 일전의 수많은 메스컴의 기자들과 리포터들에게 ‘진술’하는것이 아니라… 마치 오래된 친구에게 나의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는것처럼, 정말… 그런 편한 느낌이였다.












- 1 -

여름이 한창인 8월이였다.
이상기후로 인해 지구의 온도가 높아져가는 지금, 우리는 현재 에어컨 하나 빵빵하게 나오지 않는 버스안에 몸을 맡기고 어디론가로 흘러가고 있었다.
차창 사이로 흘러들어오는 바람. 에어컨에서는 이미 묵은 때냄새만이 흘러들어오고 있었고, 얼마 되지않는 버스승객들은 에어컨이 나오든 말든 상관하지 않고 창문들을 죄다 활짝 열어놓고 있었다. 덕분에 햇빛도 직사광선도 모두 다함께 하고있었지만, 버스가 달릴때마다 들어오는 바람만이 우리들의 유일한 위안이였다. 간만에 달리는 피크닉, 그런 분위기속에 우리 여섯명은 각자의 생각을 가지고 버스 좌석에 앉아있었다.
내가 앉은 자리는 왼쪽 맨 뒤에서 앞, 2인승 좌석. 그곳에 혼자 늘러앉아 아주 편한 여행을 하고있었다.
정면에는 승객 없음. 그저 버스기사 아저씨만이 묵묵히 버스를 운전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오른쪽 좌석에는… 있다. 등 뒤로 돌아서 뭐라고 즐겁게 떠는 녀석. 나의 오랜친구 최영민. 붙임성도 좋고 성격도 좋은애라 여러 사람들과 친하다. 뭐, 여자애들하고도 많이 친해서 나한테 여자를 소개시켜준다느니 뭐라느니 말은 하고있지만, 난 언제나 묵묵히 사양할 뿐이였다. 왠지, 모르는 여자는 대하기 어렵잖아?
그리고 맨 뒷좌석의 소녀 4명. 그중 오른쪽 창가에 앉아 영민이와 이야기 하고있는 저 여자애는 김민아. 웨이브진 머리카락이 꽤 매력있는 여자아이지만, 나하고는 잘 맞지 않는 애이다. 한마디로 꽤 까진 애. 분명 나하고는 어울리지 않는 애지만, 영민이라면 뭐… 붙임성이 아무래도 좋으니까.

끼익

그렇게 생각하고 있자 갑자기 멈추는 버스… 아, 버스 앞에는 마을주민으로 보이는 할아버지가 커다란 소를 이끌고 도로변을 걷고있었다. 소를 팔러가는건지, 아니면 그냥 산책 나가시는건지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기사아저씨는 그 할아버지가 버스를 모두 지나칠때까지 기다렸다가, 천천히 엑셀을 다시 밟기 시작했다.
차분히 나아가는 버스. 흘러들어오는 바람에 더위를 식히고 있는동안… 그녀가 내게 말을 걸었다.

“이진아.”
“응?”

뒤를 돌아보자, 그곳에는 커다란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는 한 소녀가 있었다. 동급생… 이름은 아마도 강희서였을 것이다. 어깨까지 흘러 내려오는 흑발. 귀염성있지만 성숙한 느낌도 없지않는 그녀는 이래뵈도 남자에게 인기가 많다. 하지만 정작 그녀는 그런거에 관심두지 않는 아이. 왠지 만화 케릭터 같은 설정이다.

“벌써 이렇게나 많이 왔는데… 얼마나 더 가야돼?”
“얼마 안남았을거야. 쫌만 기다려”

내가 웃으면서 괜찮다는 듯이 손을 흔들자, 그녀는 음─ 하고 한차례 고민을 하더니 다시 이어폰을 꽂아 음악을 듣기 시작했다. 무슨 음악인지는 모르지만… 왠지 알고싶은걸. 희서라면 아마도 팝송이나 클래식 같은 고급스러운걸 들을 가능성이 높다. 들리는 이야기로 집도 꽤 잘산다고───

“──아얏, 뭐하는거야.”
“선~배님. 무슨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는 느낌과 함께 뒤를 돌아보자, 그곳에는 보라가 있었다. 1년 아래에 같은 동아리 후배인 양보라양. 처음 만났을때부터, 귀여운 여동생 같은 느낌이랄까? 뺨으로 흘러내린 짧은 머리카락이 그녀의 귀여움을 돋보이게 하고 있었다.

“음~ 별거아냐. 그나저나 짐이나 잘 챙겨둬. 곧 있으면 도착인듯 싶으니까.”
“뭐… 짐이래봤자 별로 없지만요! 그러고보니 선배… 방학동안 머리카락 많이 길었네요?”

버스 좌석에 두팔을 걸치고서 내 머리카락을 가지고 노는 보라양. 잡아당기고 이리저리 꼬아보기도 하지만, 아까와는 다르게 내가 아무런 반응이 없자 금새 놓고 내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뭐, 나도 젠틀한 남자가 되기 위해서는 조금은 길러야 되지 않을까? 거기다가 깎으러 가기도 귀찮고 말이지.”
“선배님! 여자애들은 남자들 머리가 깔끔한걸 좋아한다구요!”
“어? 그래?”

그렇게 말하며 머리를 만져보았다. 정말로… 꽤 많이 길었다. 이제는 머리를 묶고 다녀도 괜찮을 듯 싶다. …실제로 묶으면 분명 이상하겠지만.

“그러니까 선배님, 그냥 빡빡 밀어서 마빡이는 어때요?”
“…그건 사양하겠슴다.”

그렇게 확고한 자기의사를 표현하고선 다시 뒷좌석의 그녀들을 쳐다보았다. 아… 한명 소개 안했구나. 꽤 존재감이 없어서 깜빡할뻔 했다. 1년 후배인 그녀의 이름은 조여진. 어쩌면 우리 동아리와 제일 잘맞는 애일지도 모른다. 단정히 자른 단발에 검은 뿔테안경. 그리고 손에는 언제나 책이 들려있다. 심심풀이로 읽는건지, 취미로 읽는건지… 그런건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언제나 책을 들고다니는 소녀.
거기다가 말조차도 없다. 대화를 해본사람이래봤자 고작… 보라양 한명 뿐일까? 적어도… 내가 보고 아는 사람중에서는 보라 말고는 그녀와 대화라고 부를수 있는 대화를 해본사람은 없다. 보라 말로는 초등학교 시절때부터 알고지낸 사이라고…

“뭘 그리 보시나요 선배님.”
“아! 아니. 아무것도 아냐.”

무표정한 얼굴로 무감정한 말을 뱉는다. 무서운 애야… 김민아 만큼 대하기 힘든 애다. 지금도 아마 보고있는 책이… 「흑마술의 이해」? 역시 장래가 촉망되는 아이였어…

빵빵─

우렁차게 울러퍼지는 경적소리. 그 소리에 우리 여섯명은 일제히 기사아저씨가 앉아있는 운전석에 시선을 돌렸다.

“학생들~ 여기가 마을 입구야. 여기서 내리면 돼.”
“네, 감사합니다!”

영민이가 먼저 인사하고 나를 포함한 나머지 다섯명도 살짝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한다. 그리고 우리들은 다함께 버스에서 내렸다. 놔두고 오는 물건은 없지? MP3, 핸드폰… 중요한 물건은 모두 챙겼다.
그렇게 버스에서 내렸을 무렵…

“으윽… 덥다─”

뜨거운 햇살이 우리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넓게 깔려진 아스팔트 바닥위에 피어오르는 아지랑이. 어쩌면 이곳이 열대지방의 관광명소라고 해도 아무도 의심하지않을 더위다… 라고 생각하며 주위를 둘러보니.

“저기… 영민군?”
“왜그러냐… 너 그런식으로 날 부르면 꼭 느낌이 안좋더라?”
“있잖아… 진짜 우리 심각하게 이야기할게 있는데.”

뭔데? 라는 표정으로 날 쳐다보는 영민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 보며 말했다. 녀석, 꽤나 더운가보네.

“…어디를 쳐다봐도 마을로 보이는 곳은 없는데효.”

내 말에 방금전까지 조그맣게 떠들던 다른 아이들도 조용해진다. 영민군 역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쳐다보다가 곧장 주위를 둘러본다. 길게 뻗은 아스팔트. 그리고 눈앞의 숲. 등 뒤의 가파른 산둥성이. 도대체… 여기 어디에 길이 있다는 것인가?

“어이 최영민… 네가 여기로 오자고 했잖아? 길 모르는거야? 안내하는 사람이나 이런거 없어?”

민아의 물음에 영민은 눈가를 찡그리며 대답했다.

“안내하는 사람은 숙박집 주인이신 할아버지가 나와주신다고는 했는데… 아무래도 몸이편찮으신 것 같으셔서 그냥 댁에 계시라고 했어. 알아서 찾아간다고. 뭐, 아무리 그래도 마을이래봤자 ‘여기가 땡땡 마을입니다!’ 정도는 적혀있을줄 알았는데…”

그러니까 그 말은…
우린 지금 어디로 가야되는지도 모르겠고, 우릴 이끌고 갈 사람도 없다는 말씀인데…

“저 숲속으로 들어가볼까?”
“야 너 지금 장난하냐? 여자애들도 있다고. 그런데 길이 있을지도 모르는 저 숲을 헤치고 가보자고? 그러다가 낭떠러지라도 있으면──”
“그건… 걱정할거 없는 것 같은데요, 선배님?”

아무생각없이 내뱉은 내 말에 순식간에 태클을 걸어오는 민아. 그리고 그 말을 부정하는 것이 보라의 목소리였다. 그녀가 있는곳으로 시선을 돌리자… 그곳에는 풀숲에 숨어있는 조그만한 바위가 있었다.

“선배님. 이 한자 어떻게 읽는건지 아세요? 저도 몇 개는 알지만…”

그렇게 뾰루퉁하게 생각하는 보라곁으로 다가가 바위를 쳐다본다. 그 조그만한 바위에는… 조그만한 글씨로 두행의 시가 적혀있었다.

“월출에 무슨… 영하니. 무주의 유 무슨… 이라. 이 한자 두개가 뭐지?”

그렇게 말하며 등 뒤를 돌아보자, 그곳에는 머리위로 마음껏 물음표를 띄우고 있는 세사람, 영민 민아 희서가 있었다. 하지만, 세삼이라면… 아직 한명은 기대해볼만도──

“──월출에 당영하니, 무주의 유완이라. 달이 떠올라 그림자에 손을 뻗으니, 주인없는 팔뚝만이 있는구나.”

여진의 목소리였다. 확실히 그녀라면 알수있을거라고 생각했는데, 완벽하게 읽은데다 뜻까지 알아내 버렸다. 등 뒤에서 보라가 여진에게 ‘굉장해~’같은 말을 한 것 같지만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이 바위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그곳에는……

“여어, 찾았다.”

내 말에 주위로 몰려드는 소년 소녀들. 풀숲에서 찾아낸 그것은… 습기가 차 쓰러져있는 표지판이였다.

「환영합니다. 여기서부터 예량마을입니다.」

그러고보니… 이상한 시가 적혀있는 바위 옆으로… 길인지 아닌지 의심이될정도로 초췌하게 변해버린 길이 있었다. 잡초가 자라 길은 더 이상 길의 능력을 소화해낼수 없는듯 해보였다. 일단은 그러니까……

“이진이 말이 맞네……”

희서가 그렇게 말하고 영민이 앞장서서 걷자, 다른 아이들도 다같이 그 등뒤를 따라가길 시작했다. 거봐, 내말이 맞잖아? 그렇게 혼자 중얼거리며 민아를 쳐다보자…

“흥”

이라고 하면서 내 눈이 마주치는것과 동시에 고개를 돌려버린다. 뭐야… 나 보고있었던건가? 아마도 내가 아까 말했던 숲을 헤치고 가자고 한말이 의외로 맞는말이 되어버리자 화났나보지. 뭐, 내가 신경쓸일은 아니지…
그렇게 생각하며 오솔길을 걸었다. 높게 솟아오른 이름모를 나무. 그리고 신발에 밟혀가는 잡초들. 맨 앞에는 영민이가 걸어가고 있었고, 맨 뒤에는 내가 걸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센가… 나는 희서의 등 뒤를 보고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참… 이러면 안되지.”

뭘 자꾸 보는거야… 그렇게 중얼거리며 자신을 타이른다. 분명 희서는 예쁘기도 예쁘고, 마음씨도 고운데다가 착하고… 나와는 다르게 반애들하고도 잘 어울린다. 정말 모자랄 것 없는 소녀. 확실히 모든 남자의 동경의 대상이긴 하지만……

“내가 넘볼만큼 싼애는 아냐…”
“누가요?”

흠칫!
하고 놀랬다. 정말이야. 정말 흠칫! 하고 놀랬다고. 진짜 혼이 내 머리위로 살짝 빠져나갔다가 들어왔어. 오싹함을 느낄조차도 없는 그런 서플라이즈! 그리고 목소리가 들린쪽으로 시선을 돌려보니…

“뭐야… 보라였잖아.”
“그럼 오솔길 귀신인줄 알았어요?”
“오솔길 귀신이였으면 그나마 마음은 편하겠지.”

풋, 하고 웃으니 그녀는 ‘에엑! 선배님!’이라고 외치며 뾰루퉁한 얼굴로 날 올려다보고 있었다. 당연하잖아… 오솔길 귀신이였으면 차라리 마음은 편해. 내가 한 말을 들어도 누구한테 말할수도 없을 테니까. 그런데 들은사람이 무려 보라니……

“그러니까… 보라야?”
“넴?”
“그게… 아까 한말은 그냥… 혼잣말이야. 신경쓰지마.”

마음이라는건, 별로 들키고싶지 않은법이니까.
확실히 나만의 혼잣말이다. 누군가 들어도 아무도 모를 혼잣말이다. 그러니까 그냥 여기서 못박아두고 싶은거다. 난… 희서를 좋아하는게 아냐. 동경한다는게 정답인거겠지.

“선배님 몸 안좋아요?”
“응? 아니. 아무것도 아냐.”

아까부터 내 얼굴을 올려다봤는지, 내가 어떤 표정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녀의 반응을 보니 별로 좋은 표정은 아니였는 것 같다.

“신경쓰지마. 그런데 큰일도 아니니──”
“선배님!!”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보라양이 내 앞에 서서 등을 돌린다. 그러고선 그녀는 갑자기 엉덩이를 삐죽, 하고 내밀더니만 두 팔로 자신의 엉덩이를 팡팡! 하고 두들겼다. 뭐하는 거지? 라고 생각하며 별에 별 상상이 다 일어났지만, 그녀의 입에서 나온건──

“선배님! 아파보여요! 저한테 엎히세요!”
“엑──”

그말은 들은 다른 녀석들도 어이가 없다는듯이 날 쳐다보고 있었다. 난 그저 조용히 미간을 잡고 고개를 떨궜고, 보라를 앞선 여러명의 커다란 웃음이 오솔길에 울려퍼졌다.

“유이진, 너 이자식. 이런데서 연애질 하는거 아니다?”
“영민군… 한번만 더 그런 개소릴 지껄이시면 입을 째버린다.”

푸하하~ 하고 유쾌하게도 웃는 녀석을 무시하고 난 눈앞에 있는 소녀를 쳐다보았다. 그 소녀는 아직도 나에게 엉덩이를 내밀고서는.

“어? 안해요? 어부바.”
“…그래. 안할거야. 어부바.”

무려 어부바라는것에 어느정도 충격을 먹었지만, 그런건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이 귀여운 웃음을 지으며 다시 내옆으로 다가왔다.

“선배님.”
“응?”
“웃었죠?”
“어? 아니… 그게…”

분명… 나 역시 살짝 웃은 기억은 나지만, 왠지 그녀입에서 이런말이 나오니 인정하고 싶어지지 않았다. 인정할수없군.

“웃는게 좋아요 선배님. 아까보다 훨~씬 좋아요.”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니, 확실히 그녀는 웃고있었다. 기분좋은 미소를 지어주고 있었다. 분명, 이 얼굴을 보면 우울하던 기분도 좋아지겠지. 확실히 미소지을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그녀의 두 뺨을 양손으로 잡고──

“으아아아아아──”

늘어뜨렸다.
그리고 손을 놓자, 그녀는 양손으로 자신의 뺨을 어루만지여 저 멀리 떨어지고선 외쳤다.

“무, 무슨짓이에요 선배님!!”
“풉”

눈물 글썽인 얼굴로 내게 항의하는 그녀에게 확인사살을 하듯 말했다.

“이정도는 되야 웃기지, 안그러냐?”
“에엑! 선배님!”

보라는 항의하듯 내게 달려들었지만, 그런 그녀도 나의 얼굴을 보았는지… 만면에 미소를 띠우고선 큰 소리로 웃었다. 그저 단순하게 즐기기 위한 캠핑. 그 속에 우린 잠시 잊고있었던 것이 있었다. 지금은… 아마도 모두가 잊고있는듯한 표정.

“다온것 같아.”

숲길을 빠져나오자, 그곳에는 마을이 있었다. 언덕 사이에 보기좋게 자리잡혀 있는 마을. 초가집, 그리고 중간중간에 보이는 기와집. 마치 현대문물의 영향을 받지않은 옛 시골처럼… 전통이 그대로 남아있는듯한 모습이였다. 그래도──

“허허~ 도시에서 온 젊은이들인가? 혹시 김영감댁 손님들?”

…아마도 이곳도 시골이니 만큼, 트렉터 같은 농기구는 있는듯 싶다.
눈 앞의 할아버지는 격심하게 떨리는 트렉터를 타고, 만면에 미소를 머금으며 우리들에게 말을 걸어왔다.

“예! 할아버지. 혹시 김춘수 할아버지댁 아시나요?”
“암. 알고말고. 그영감 오늘 아침부터 손님온다고 들떠있었응께.”

그런 할아버지의 모습에, 우리는 모두들 웃을 수밖에 없었다. 인심좋은 시골, 이곳이 그런 곳이였다.

“와, 저기봐봐!”

희서의 목소리에 우리는 희서가 가리키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언덕 사이로 보이는 푸른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와아… 역시 부산이긴 부산이네. 처음엔 영민선배님이 ‘바다도 있다!’라고 했을 때 반신반의했는데…”
“이녀석! 내가 거짓말 할것처럼 보이더냐?”
“근데 솔직히 말이지. 아까 그 숲길에서 막혔을때는 모두들 바다는 거의 포기하지 않았나?”

민아의 말에 음음! 하고 긍정하는 영민 외 5명의 소년 소녀들. 그에 영민이는 충격먹을 먹었는지 구석에 서서 알수없는 분위기를 풍기며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내가 그렇게 믿음직스럽지 못하단 말이지…”
“오케─, 정신차려 최영민. 네가 아니면 누가 여기까지 우릴 끌고 왔겠냐? 나도 남자지만 너처럼 그렇게는 못한다고.”

쭈그려앉은 영민이의 어깨를 툭툭치며 말하자, 영민은 이내 곧 화색이 되어서 날 돌려다보고 있었다. …감정변화가 심한놈이야. 조심히 다뤄야겠어.

“솔직히 나도… 아까 그 시를 보고 조금은 무서웠지만…”
“아, 그거 말이야? 월출에 뭐시기 하니 뭐시기라?”

희서가 조심스레 말하자, 영민이는 이제 완전히 회복되었는지 싱글벙글 거리며 희서곁에 가있었다. 왠지 그런 그의 행동이 영 석연치는 않았지만… 그래도 내가 상관할바는 아니잖아?

“응… 왠지 무서운 내용같았는데. 바다를 보고나니 마음이 풀린다.”

희서는 그렇게 혼잣말같이 중얼거리며 먼 바다를 내다봤다. 그곳에는 분명 푸른 바다와, 수평선이 있었다.
우리가 걸어내려가야할 흙길을 내려다 본다. 마을까지는 거리가 꽤 되는데…

“할아버지. 여기서 마을까지는 얼마나 걸려요?”
“금방가~ 학생들도 놀려고 온거지? 우리 마을은 해수욕도 할수있으니까… 김영감댁에서 바다까지는 걸어서 10분도 안걸려~”

할아버지의 말을 듣고 마을쪽으로 내려다본다. 군데군데 띄엄띄엄 들어서있는 초가집들. 생에 처음 보는 풍경에 왠지 조금은 가슴이 두근거리고 있었다.

“선배님~ 뭐해요?”

목소리가 들린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그곳에는 이미 나 이외의 모든 아이들이 트렉터를 탄 할아버지를 따라 마을로 내려가고 있었다. 이런, 어느세 움직인거지… 너무 생각하다가 놓쳐버린건가?
그렇게 생각하며 주위를 둘러봤다. 왼쪽에는 우리가 걸어나온 오솔길. 등 뒤로는 밭이나 논으로 추정되는 평야들이 몇몇 보였고, 바로 앞은 마을로 내려가는 길이였다.

“빨리와요 선배님~”
“아, 미안. 곧 갈……”
『왜 모르는거에요……』

…어?
발걸음을 내딛자 마자, 어떤 소리가 들려왔다. 무언가가 머리를 자꾸 두드리는 느낌. 머리는 이내 어지럼증을 느끼고, 시야는 흐릿해지기 시작한다. 아아… 아까 버스에서 잠을 덜잔건가? 졸음이 쏟아지기 시작하는건가? 그래도… 이른 낮부터.

『왜───』

아───
환청이다. 환청이 들려온다. 머릿속이 소용돌이가 되어버린것처럼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끊임없는 어지럼증. 울렁거림. 멀미인가? 그것도 아무이유없이…
머리위에 떠있는 태양을 올려다보았다. 눈이 부시다. 아마도… 일사병인가? 그런것 같지는 않다. 햇빛이래봤자 아까의 오솔길로 일사병에 걸릴만큼의 햇빛을 받아본것도 아니니까. 정신… 차려야지.

“무슨일이에요 선배?”
『선배───』
“아… 미, 미안. 지금 갈게.”

흙길을 밟으며 앞으로 나아간다. 그리고 우리가 가야할 마을로 내려간다. 이당시까지만해도, 난 아무것도 몰랐다. 우리가 무슨일을 당할지, 우리가 무슨짓을 할지 아무것도 몰랐다. 하지만… 꼭 알고있었던거라면. 이 마을은 전의 연쇄살인사건의 시발지라는 것. 그리고, 우리는 뉴스를 보지 않았던 것이다.




- 2 -


“바다닷─!!”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바다에 뛰어드는 제군들. 아마도 각자 수영복은 챙겨왔는지 수영복 타령하는 녀석들은 없었다. 아마도… 말이다.
해변은 그렇게 넓지않은, 아담한 크기의 해변이였다. 새하얀 모래사장, 모래가 굉장히 고와 한움큼 쥐면 금세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려간다. 마치 잿가루라도 되는 마냥.
백사장에는 우리들 말고도, 관광객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몇 명 더 있었다. 대부분 아이를 동반하지 않은, 부부로 보이는 분들밖에 없었지만…
먼 바다를 바라본다. 그곳에서는 해변에서 놀고있는 세명의 소녀가 보였다. 그리고 나는 매점에서 파라솔을 빌려와 그곳에 짐을 두고 짐지키는 중. 하지만… 세명이라니? 분명… 한 녀석과 소녀 하나가 없어보이는데───

“바다는 좋구만~”

아저씨 처럼 말하는 영민을 올려다보자, 그는 바다에서 물놀이를 하고있는 세명의 소녀를 보고있었다. 자세히 보니… 민아랑 희서랑 보라인가. 하긴, 쟤네들은 자주 모여서 놀고 다니니──

“야, 민아 수영복 죽이지 않냐?”
“민아?”

녀석이 말하는대로 민아쪽으로 시선을 돌려봤다. 나올땐 나오고 들어갈땐 들어간 모든 여성의 동경의 대상인 몸매. 거기다가 노출도가 꽤 있는 하얀색 비키니. 아, 저런건 물에 젖으면 더 섹시해 보이는데…

“너 얼굴 빨개졌다.”
“어, 그러냐.”

확실히, 뺨에 손바닥을 가져다대니 분명 뜨겁다. 나 도대체 무슨생각을 하는거야… 저런애보고 얼굴을 붉히다니. 별로 내가 좋아하는 타입도 아니고 사이가 나빴으면 나빴지 좋은 사이는 아닌데……

“그에 비하면 보라쪽은 완전 초딩이네.”
“…무려 초딩이냐.”

그렇게 생각하며 보라쪽을 보자… 즐겁게 놀고있는 초등학생이 떠올랐다. 음, 분명 여동생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또래의 여고생이 아니라… 여동생이다. 정말, ‘고’와 ‘동’의 이 한글자가 이 얼마나 큰 차이를 보여주고 있단 말인가.
보라는 여러가지 꽃무늬가 새겨져있는, 전체적으로 순수하다고 해야되나… 그런 종류의 비키니를 입고있었다. 비키니래봤자… 애들이 입고다니는 것이지만.

“이야… 그런데 희서는 조금 실망이다. 비키니가 아니라니─!!”
“얼레──”

영민의 말에 다시 희서로 시선을 돌린다. 민아와 보라 가운데에서 물놀이를 하고있는 한 소녀. 그녀는 하늘색 원피스 수영복을 입고있었다. 그것도 디자인이 꽤 화려한것이라, 나름대로 나쁘진 않지만… 비키니만큼의 노출도는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너, 아까보다 더 빨개졌다.”
“어? 저, 정말이냐…”

이번에 목덜미에 손바닥을 대본다. 확실히,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다. 확실한 체온으로 느껴지는걸 보니… 햇빛 때문에 그런 것 같지는 않다. 한마디로 대 략 난 감.

“희서 가슴 크지?”
“응”
“만져봤으면 좋겠다”
“그러게”

그의 농담을 아무렇게나 무시하고서는 물놀이를 하고있는 그녀들을 쳐다보았다. 그런데 그중… 자꾸만 눈이 희서에게 가는 것은 왜일까?

“야─, 이진아.”
“뭐야.”
“너 희서 가슴 만져봤냐?”

푸웁─
분명 지금 내가 무언가를 마시고 있었으면 위액부터 시작해서 입밖으로 모두다 뱉어내 버렸을 것이다. 그만큼 갑작스런 질문에, 난 충분히 동요할 수밖에 없었다.

“희서 가슴이라니… 그럼 넌 만져봤냐?”
“어쭈, 이자식. 만져본것처럼 말하는데?”

나에게 수정펀치를 날리려는 영민의 공격을 피하고 나 역시 전투태세를 취했다. 이것은 어느 무술의 자세일까? 태권도? 아웃복싱? 그건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눈앞의 영민이는 공격하는걸 멈추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네가 그런반응을 보이는걸 보니 안만져봤구나”
“당연하잖아 이놈아. 나한테 그런 베짱이 어딨냐.”

그런베짱…
그건 나도 잘 알고있고, 녀석도 잘 알고있는 나의 베짱이다.
여자하고는 친하게 지내지 않는다. 여자로 보이는 아이와는 친하게 지내지 못한다. 그런 아이들에게 말을 붙이면 다행이고, 대화를 하기 시작하면 경사난거다. 아마도, 21세기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이 빗나간것만큼 큰 사건일 것이다.

“그럼 너… 희서 좋아하냐?”

그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영민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파라솔 아래, 그늘 때문에 그의 표정이 한층 더 진지하게 보였다. 방금 그 한마디는… 녀석이 평소에하는 농담과는 분위기 자체가 달랐다.
심장박동이 빠르다. 이것은 가슴에 손을대지 않아도 알수있는 것이다. 분명 난 지금… 표정관리를 하지 못하고 있겠지. 머리는 혼란스러운데도, 그런것에대해서는 모두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무거워진 입술을 열었다.

“아니, 안좋아해.”

사실이 아냐.
누군가가 내게 속삭였다.

“아아, 그러냐.”

안도의 한숨을 쉬는듯한 영민.
하지만 그 모습이… 너무나도 잔인해 보였다.

“그럼 나……”

영민의 입술이 아주 천천히 움직인다.
마치 나를 조롱하듯이, 아주 천천히 움직인다. 이제부터 녀석이 할말이 뭔지 알고있는데. 난 그것을 막지도 못하고… 그 목소릴 끝까지 들을 수밖에 없었다.

“희서랑 사겨도 되냐?”

두근두근두근두근두근.
미친듯한 고동. 심장은 더 이상 뛰지않고 발광을 하고 있었다. 마치 왼쪽가슴과 오른쪽가슴을 미친듯이 넘나드는 것 같다. 잘못하면 배 아래까지, 잘못하면 가슴 밖에까지 튀어나올지도 모르는 미친 심장. 하지만 심장은 그렇게 뛰고 있었지만… 냉정을 찾지 못한 의사는 이미 열려진 입술이 움직이는대로, 목소리를 내뱉고 있었다.

“응, 마음대로해.”

그건 사실이 아냐.
누군가가 내게 속삭인다.

“이야~ 역시 넌 내친구야.”

내 말을 믿지마.
그것은 목소리가 되지 못하고, 가슴속의 메아리가 되어서 심장을 때려부수고 있었다. 쿵쾅쿵쾅, 거대한 발소리. 대지를 뒤흔드는 거인의 발소리와도 같은 심장박동. 미친듯한 소리는 아직 멎어지질 않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네가 상대여서는 나 포기할려고 했거든. 희서 말이야.”

아냐. 아까 한말 다 거짓말이야.
목소리는 나오지도 않고, 입술조차… 그 문장을 담으려 하지 않았다. 여름의 대기중에 스며드는 집념.

“너도 나름대로 잘생겼고 말이지, 희서도 너한테 호감있는 눈치라.”

쿵!!
심장정지… 라도 한 느낌이다. 희서가… 나한테 호감이 있었다고?

“저번에 걔가 말했거든. ‘사귀기에 나쁘지 않다’고……”

사귀기에… 나쁘지 않아……

“그래도 다행이구만. 사귈생각 없다니. 그럼 희서한테 딴생각 없는거라고 생각한다? 그럼 나도 희서한테 조금은 가능성이 있겠지.”

심장… 제자리 걸음. 쿵쿵쿵. 심장… 무언가가 붙잡아 둔듯 움직이지 못한다. 그저, 내 왼쪽 가슴에 주저앉아 큰소리로 울고있을 뿐이였다. 쿵쿵, 하고. 무언가를 외치듯이 울고있을 뿐이였다. 그래… 뭐라고 하는거지 이녀석?

『…이제 희서는──』
“너… 왜그래?”

쿵쿵, 쿵쿵.
왼쪽 가슴은 오른손으로 짓누른다. 이제… 그만쫌 뛰어. 됐어. 이제 다 끝난 일이야. 아무리 아니라고 소리쳐도, 아무리 거짓말이라고 소리쳐도, 더 이상 아무것도 바뀌지 않아. 이미 입밖에 나간 말을… 주워담을수 없어.

『내것이───』
“어디 아프냐? 일사병?”
“아아… 아마도… 미안. 조금만 누워있을게.”

그렇게 말하며 내맘대로 백사장에 누웠다.
들리지 않아. 아무것도 들리지 않아. 아무것도 듣고싶지 않다. 그렇게, 난 귀로 이어진 신경을 닫았다. 파도소리도 들리지 않을만큼… 모든것을 차단했다.
…두근두근. 오른손으로 왼쪽 가슴을 후려친다. 퍽! 하고 경쾌한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그럴때마다, 심장은 살려달라고 소리친다. 별수없군… 조용히 달랠수 밖에.

“그럼 난 물수건이랑 얼음쫌──”
“──됐어. 쟤네들이랑 놀고와.”

내 말에 무언가 충격을 받았는지… 그는 이후 아무말도 하지않고 어디론가로 뛰쳐나가버렸다. 어디로 갔는지는 모른다. 아마 물수건을 가지러 갔는지 모른다. 아니면 자신의 본능에따라 ‘희서’와 놀러갔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 그런건 아무래도 상관없겠지.

“차갑네요. 선배님.”

좌측에 근접해오는 인물 포착. 보라와 맞먹는 아담사이즈 몸매… 그 아이는 바로 조여진양이였다. 그녀는 물에 젖지도 않은 머리카락에… 언제나처럼 안경까지 쓰고서는 파라솔 안으로 들어오려 하고 있었다. 거기다가 저모습은……

“여진아 너… 학교 수영복……”
“네. 학교수영복.”

남색의 평범한 학교수영복. 그 학교수영복 덕분에 아담한 몸매가 더욱 아담해 보인다. 거기다가 가슴에는 당당하게 ‘조여진’이라는 이름까지 붙여져 있고…… 잠시만. 우리학교에는 수영과목이 없을뿐더러, 학교 전용 수영장도 없는데 학교 수영복이라니?

“그거 어디서 난거야…”
“통신판매.”

…역시 장래가 촉망되는 아이로군…
그렇게 생각하고 있자 그녀는 누워있는 내 옆으로 다가와 앉으면서 책을 폈다. 아까전 버스에서부터 읽고있었던 「흑마술의 이해」이다. 아마도 지금까지 읽고있는걸 보니… 꽤 흥미있는가 보다.

“차가워요”

갑작스러운 그녀의 말에 난 무심코 ‘뭐가?’라고 물었다. 하지만… 그 대답은 금방 돌아오지 않았다. 잠시 책에 빠져있다가 헤어나와서 그런가? 그녀는 자신의 손에들린 책에서 시선을 떼고선 내게 말했다.

“아까 영민선배님께 했던말.”
“아……”

아까의 그 차갑다는 이야기도… 이 이야기인가. 분명, 말했을때부터 느끼고 있었다. 내가 그녀석에게 이정도까지 차갑게 대할수 있다니… 자신이 한말에 자신이 놀라게 된 격이였다.

“이진선배님과 영민선배님은 친구니까요.”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무언가가 우리가 있는 파라솔쪽으로 뛰어오는 것을 느꼈다. 그것이 신호였는지, 여진은 다시 책에 얼굴을 파묻기 시작했고, 난 몸을 일으켜서 다가오는 것이 누구인지 확인했다.
…영민이였다.

“야, 유이진. 괜찮냐?”
“어? 어…….”

녀석의 품에는 무언가가 잔뜩 들려있었다. 수건인가가 몇 개. 그리고 세숫대야로 쓸수있을듯한 플라스틱 대야. 그리고 1리터짜리 얼음물 한통이였다.

“너 많이 심각한 것 같아서, 빌려왔다. 만화책에서 봤는데 말이지, 일사병에 걸렸을때는 이마, 겨드랑이하고 허벅지 안쪽을 차가운 수건으로 식혀주면 빨리 낫는다더라?”

그렇게 말하며 그는 1리터 얼음물을 세숫대야에 모두 쏟아붓고서는, 빌려온 수건을 적셔 내 이마에 얹어주었다.

“야 차갑잖아…”
“여름인데 쫌 참아라?”
“이놈이. 차가워서 심장마비 걸려 죽으면 책임질거냐?”

내말에 하하하, 하고 가볍게 웃는 영민.
그모습이 꽤 즐거워 보인다.

“오냐! 내가 책임지마!”

큭큭, 거리며 웃는 녀석을 오른쪽 발로 멋지게 헤드샷 해버렸다. 쿠엑! 이라는 알수없는 비명을 지르며 날라가는 녀석을 보고있자, 속이 후련해진다.

“이게 무슨짓이야 임마!!”
“…그건 내가 묻고싶다 이놈아. 세상에는 해도될 농담과 하면안될 농담이 있다는걸 정녕 모른다는 것이냐!!”

빈 페트병을 들고 영민을 쫓아간다. 마치 어릴적 술래잡기를 하는 느낌. 하지만… 역시 저녀석 나보단 빨라. 방금까지만 해도 내앞에 있었는데 그세 저 멀리 가있잖아.

“네 이놈!! 거기서지 못할까!!”
“왜? 서면 좋은거라도 있냐?”
“뽀뽀해줄게.”
“앍!!! 역시 넌 외계에서온 BL성인이였어!!”
“내 정체를 알아채다니, 살려둘수 없다!!”

이라고 외치며 텅 비어버린 페트병을 집어던졌지만, 너무 가벼워서 그런지 그저 산들바람에 휙, 하고 다른곳으로 날아가 버렸다. 쳇, 힘없는 녀석… 그렇게 생각하며 주위의 무기를 찾고있을 때, 누군가가 내 팔을 잡아당겼다.

“이제부터 수중전이야!!”

첨벙!
하는 소리와 함께 시야가 흔들린다. 귓속이 멍멍해지고 숨이 막힌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서자 마자──

“푸핫!! 누, 누구야!!”
“아……”

난 어느샌가 바다에 빠져있었다. 높이는 얼마 안되는데… 무릎까지도 오지도 않는 얕은 수심이였다. 하긴, 아무리 이정도까지밖에 안온다 해도 쓰러지면 분명 머리 하나는 잠기겠지만──

“미, 미안…”

두손을 가슴에 모으고, 고개를 숙이고서는 날 올려다보고있는 소녀가 있었다.
희서였다.

“아……”

상황이해가능.
말 그대로… 내 팔을 잡아당긴건 희서였다. 그리고 내가 화를 내자, 그것에 겁먹어 움추려든것이다.

“…다쳤어?”

야단맞은 강아지처럼 움추려 있는 소녀. 얼어있는 분위기. 주위에는 파도소리만 나고, 등 뒤에선 상황을 알수없는 영민이 ‘어이 뭐야~’ 라면서 쫓아오고 있었다. 그리고…

“야 너 희서한테 무슨……”
“꺅!”

촤악!
민아가 입을 열었을 때, 희서의 얼굴은 바닷물로 엉망진창이였다.

“하하, 미안. 이놈의 손이 제 멋대로…”

철퍽 철퍽.
두손으로 바닷물을 튀기자, 희서는 꺅꺅 거리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물놀이, 수중전은 이제부터다!

“복수닷 강희서!! 감히 나에게 물을 먹이다니!!”
“꺄-! 유이진 그만해! 입에 물들어갔어!”

즐거운 모습.
언제까지고 우울해 있을순 없다. 소풍을 온만큼, 즐겨야 한다. 태양은 뜨겁지만… 바닷물은 차가워, 굉장히 좋은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우리들 여섯명의 마지막 피서는 막을 내려가고 있었다.





- 3 -

부스럭.
숙소 안이였다. 숙소는 꽤 현대식으로 꾸민 기와집이였다. 그래봤자 지붕의 기와가 말 그대로 돌기와가 아니라 플라스틱 기와라는 거겠지만…
방은 세개로 나누어 2명씩 들어가게 했다. 나와 영민이 같은방, 보라와 여진이 같은방, 민아와 희서가 같은방. 이렇게 세방. 우리방 옆에 바로 보라의 방이있고, 그 옆에 희서의 방이 있었다. 말 그대로… 우리가 하는 이야기는 옆방에도 고스란히 들린다는 이야기. 방음이 꽤 안되는 집이라서 그런지, 아까도 영민과 나의 둘만의 이야기를 옆방에 있는 보라가 듣고선 우리방으로 쳐들어와 따진적이 있었다. 별이야기 아니였는데… 보라는… 가슴이 작다고……

“으음… 최영민군?”

목이말라 잠이 깬것이다. 물을 찾아보려 했지만, 물은 아무데도 없었다. 하긴… 여긴 숙박집이니까. 우리집처럼 물이 알아서 준비되있을리가 없지…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잠을 자려고 했지만, 좁은방. 영민의 기척이 없었다.

“어디갔지…”

화장실이라도 갔나.
그렇게 생각하며 핸드폰의 시계를 확인한다. 새벽 2시 13분… 한창 한밤중이로군. 모두가 자고있을시간, 최영민 이아이는 아마도 화장실을 갔나보다.

“음… 잠시만 정신차리자.”

지금 시간은 새벽 2시. 이 한밤중에 영민은 혼자서 화장실을 갔다. 거기다가 이곳은 시골. 화장실도 수세식. 위험한 화장실. 그리고 무서운 화장실. 그리고 지금은 시기도 딱 알맞은 한여름!!

“후후… 조금만 놀래켜줘볼까.”

이불을 걷고 일어난다. 뺨을 때려 잠을 깬다. 좋아, 준비됐다. 이젠 기척없이 다가가서 기척없이 놀래키는 것 밖에 없다. 그러니까… 그 뭐냐. 떵통에 빠지면 어쩌냐고? 뭐… 설마 빠져죽기야 하겠어? 아니, 분명 가능성은 있으니까… 살짝만 놀래켜줘야겠다.

끼익.
낡은 장지문이 소리내며 열린다. 차가운 기운이 방안으로 스며들어오고, 달빛만이 마당을 비춘다. 그다지 넓지않은 마당. 문을 나간 바로 앞에는 창고가 있었고, 그 바로 옆이 화장실일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발소리를 죽이고 화장실로 돌입하려 하자──

저벅.

발소리. 가 들렸다.그리고 인기척. 누구지? 영민인가? 영민이가 화장실에서 나온건가? 하지만 내가 나왔을때는 저 낡은 화장실문이 열리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 발소리의 주인은 영민이가 아닐터… 그렇게 생각하며 대문쪽을 쳐다보자──

‘곱슬머리?’

길다랗게 웨이브진 머리가 대문을 스쳐지나간다. 그리고 발소리는 저 멀리 멀어진다. 곱슬머리라니… 저정도의 긴 웨이브진 머리는 내 기억속에 단 한명밖에 없다. 김민아… 그런 그녀가 왜 대문쪽에 있었을까? 거기다가… 발소리가 난 것은 내가 있다는 것을 눈치 채고 난 후이다. 그렇다면, 날 보고 대문 밖으로 나갔다는 이야기인데… 왜, 도망치듯 그렇게 나갔을까?
그렇게 생각하며, 마룻바닥밑에 있는 신발을 꺼내 신는다. 저벅, 하고 모래를 밟는 소리가 났지만 다른곳에 들릴만큼 그렇게 큰 소리는 아니였다.

자… 이제 어쩔까. 민아를 쫓아가볼까? 아니면 계획대로 영민이 있는 화장실로 가볼까? 아무래도 화장실가서 장난을 친다니… 조금은 아닌 것 같다. 그런다고 여자아이의 프라이버시를 침해할 생각은 없지만… 민아를 따라가보자.
그렇게 생각하며 발걸음을 옮긴다. 한걸음… 두걸음. 조금씩 발걸음을 내딛자──

“…아!”

흠칫,
여자 목소리였다. 등 뒤에서 들린 여자 목소리였다. 희미하게, 들릴것 같지만 들리지 않는 목소리… 그 여자의 목소리는 방금전 보다 더 작게… 방금전 보다 더 희미하게 들리고 있었다.

“…하면… 안… 잠시……”

식은땀이 흐른다. 뺨을 타고 흘러 내린다. 귀신인가? 아니… 귀신이라고 생각하기에는 너무 부자연스럽다. 분명 귀신은 아닐것이다.
그렇게 등 뒤로 돌아보자,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우리가 묵고있는 숙박집의 세 방이 있을 뿐이다. 맨 왼쪽이 내가 나온 방. 맨 가운데가 보라와 여진이 있는 방. 맨 오른쪽 방이… 민아와 희서가 있어야 할 방. 하지만, 민아는 방금 대문밖으로 나갔다. 그렇다면 세번째 방에는……

“…시만… …다려……”

희서밖에 없을텐데──

“옆방에… …들린단 말이……”

희서는 분명 자고있을텐데──

“……아… 그만……”

희서는──

“…해… 그만해… 영민아……”

…그리고 세번째 방문 앞에 서있는 나를 발견했다. 그곳에 뿌리를 내린듯 딱딱하게 굳어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멍하니 방문을 쳐다본다. 목소리는 그곳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보통은 비디오에서만 들을수 있었던 그런 목소리. 그리고… 다른 사람도 아닌 희서의 목소리. 방문 하나 사이로 보이지 않는 그곳에서는───

『──기분좋아……』
“──영민아… 조금만 살살……”

숨을 쉴수가 없다. 시선으로 다른곳으로 옮길수가 없다.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심장은 미친듯이 뛰었다. 듣지마. 들으면 안돼. 나 자신이 나에게 그렇게 속삭인다. 아니, 지금은 외침이 되어 있었다. 아무것도 들어선 안되고, 아무것도 알아선 안된다. 모든것을 마음속의 모래에 묻어두고, 그것을 더 이상 파내면 안된다.
온몸에 힘을 짜내어 귀를 막았다. 들리지 않는다. 이젠 들리지 않는다. 그래, 이제부터는 그냥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이 방으로 들어가 잠을 자고 아무일도 없었다는듯이 아침에 일어나 아무일도 없었다는듯이 영민이와 잡담을 하고 아무일도 없었다는듯이 희서와 전날의 일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런 나 자신을 상상한다.

“윽……”

목구멍에서 올라오는 무언가를 입을 막아 참는다. 그리고 목소리는 또다시 들린다. 그리고 다시 귀를 막는다. 하지만 목구멍은 그것을 용서하지 못한다. 울컥, 하고 올라오는 무언가. 다시 입을 막는다. 그리고 다시 들린다. 입을 막는다. 귀를 막는다.

‘가식적이야… 모든것을 잊고 평소대로 행동하다니. 할수없어… 가식의 극치다.’

그런 행동을 반복하며 다리를 이끌자… 그곳은 이미 내가 잠을 자던 방문 앞이였다.

“아… 하아……”

한숨을 내쉰다.
새하얀 김이되어 허공에 떠돈다. 여름에 떠오르는 입김…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그런 생각을 할 틈따윈 없었다. 그리고 여기까지 오니까… 그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기분나빠.”

조용히 읊조렸다.
귓속에 흘러들어오는건 귀뚜라미와 개구리의 울음소리. 끊임없는 울음소리. 그래… 너희들은 ‘목소리’를 내지 않겠지? 그래… 너희들은 저 여자──희서──처럼… 기분나쁜 목소리를 내진 않겠지?

“아…”

턱이 젖어있다. 그것은 땀때문인가? 아니면 입에서 흘린 침때문인가? 그건 잘 모르겠지만… 온몸이 굉장히 찝찝하다는 것은 변함없다.
신발을 벗고 마루바닥에 올라선다. 벽에 기대어 하늘을 올려다본다. 하지만… 처마덕분에 밤하늘은 보이지 않았다. 별마저, 달마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늘은 그저 새카만 하늘, 그것 뿐이였다.

“…희서, 가……”

신뢰가 무너진다. 실망이 앞장선다. 그리고 머릿속에는 그녀의 ‘목소리’가 떠돈다. 듣기싫은 목소리. 기분나쁜 목소리.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녀석──영민──을 위한 목소리. 그렇다. 희서는… 내것이 아니지.
…그렇다면 오늘 바다에서 있었던 일은? 영민이 말했던 것은? 영민이 희서는 내게 호감을 가지고있었다고 했다. 희서는 어제 나와 재밌게 놀았다. 그래, 마치 연인처럼… 그렇게 재밌게 놀았다.
그리고 영민도… 알았을것이다. 어제 나의 반응으로… 알고있었을것이다. 내가 희서를 좋아한다는 것을. 적어도… 마음은 있다는 것을. 그런데도… 그런 친한 친구인데도… 그것을 알고있는 나의 가장 친한 친구인데도 불구하고……

“…배신감.”

그래. 배신감.
난 배신당했다. 영민에게도, 희서에게도… 그 두명에게 완벽하게 배신당했다.
영민은 언제까지나 영원히 나의 친한 친구일줄 알았다. 희서는 언제나 내가 짝사랑하는… 적어도 동경의 대상인 그런 여자애일줄 알았다. 하지만 결국… 두사람은 남자와 여자였다. 내가… 잘못알고있었다. 영민은 희서는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희서는 나를 좋아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도 희서를 좋아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결과는… 아니였다.

“아, 아냐…”

이런마음 먹으면 안된다. 영민이도 친구다. 희서도… 친구다. 난 희서를 좋아하지 않는다. 희서는 그냥… 그래. 조금 동경할 뿐이다. 다른여자애와는 다르고, 이쁘기도 하고… 착한데다, 공부도 잘하고… 그래서 조금 동경하고 있을 뿐이다. 그저… 저런 여자와 사귈수 있다면, 저런 여자와 친해질수만 있다면───

“선배님.”

혼이 머릿속으로 빠져나가고, 심장이 순간 멈췄다고 뛰기 시작한다.
그리고 소리가 들린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조그만한 소녀가… 마룻바닥에 앉아있는 날 내려다 보고 있었다.

“뭐하시는거에요?”
“아…”

보라였다.
보라는 아직 잠이 덜깼는지, 눈가를 비비고 있었다. 그나저나, 보라의 잠옷… 생긴거만큼 어린애 취향이구나.

“그… 달을 보고있었어.”
“달… 이요?”

그러자 그녀가 하늘을 올려다본다. 그리고 나도 같이 하늘을 올려다 봤다. 보이는건 처마로 가려진 밤하늘뿐……

“…달 안보이는데요 선배님.”
“하하. 그, 그런가.”

아까전부터 알고있었지만… 분명, 달은 없다. 그저 새카만 하늘에 몇 개의 별만이 희미하게 빛을 발하고 있을 뿐이였다.

“아. 그런데 보라는… 이시간에 무슨일이야?”

그렇게 말하며 그녀를 올려다보자, 그녀는 잠시 생각을 하더니만… 이내 입을 열었다.

“…옆방에서 너무 시끄러워서요.”

그 말을 하고 입을 꼭 다물고서는… 그녀는 조심히 걸어와 내 옆에 쭈그려 앉았다.
좋은 향기… 그렇게 생각하며 그녀를 쳐다보자, 그녀는 얼굴이 조금 붉어져 있었다.

“선배님.”
“응?”

그녀는 날 보려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마당 어딘가를 쳐다보며… 내게 말했다.

“아까 선배님… 울고있었어요.”
“울고… 있었다니?”

그렇게 물으며 뺨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본다. 목 언저리의 땀은 이미 거의 말라있었다. 그리고, 뺨에 손가락을 가져다대자… 분명. 미끄러운 무언가가 손에 닿았다.
눈이 뜨거워진다. 잠시 잊고있었던 무언가가 떠오른다. 기분나빠, 기분나빠 기분나빠… 그 목소리는 그곳에 가면 지금도 들리겠지. 끊임없이 들리겠지. 이 밤이 끝날때까지… 멈추지 않고 들리겠지.
따뜻한 손이 눈가를 훔친다. 그리고… 그 손의 주인을 보았다.

“울보네요… 선배님.”

주륵 주륵.
그것은 빗물같았다. 구멍이 뚫려버린 하늘같았다. 잠시 왔다가는 소나기가 아니라, 여름 내내 내리는 장마같았다. 눈물은 눈가를 적시고, 뺨을 적시고, 마음을 적신다.

“희서선배님 좋아하죠?”
“안좋아해.”

거짓말.
누군가가 그렇게 속삭였지만 난 더 이상 아무래도 좋다는듯이 무시했다.

“그럼 영민선배님 좋아해요?”
“…너 말이지──”
“──그런표정 하고있지 마요. 선배님.”

정적.
들리는건 풀밭의 귀뚜라미와, 개구리 소리뿐. 그녀가 내 말을 막아버리고서는, 조용히 말을 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유이진이라는 사람은… 누구한테나 잘웃어주는 그런 사람이에요.”
“…뭐?”

순간놀라 그녀의 얼굴을 쳐다본다. 하지만, 그녀는 얼굴을 마주치려 하지않고… 그저 시선을 떨군채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수줍음 타는 소녀 같은 모습.
달빛만이 우리들을 비추고 있었다.

“선배님이 희서선배님을 좋아하는건… 예전부터 알고있었어요. 그러니까… 직감 같은 거니까요… 아! 이건 혼잣말이에요 선배님! 절대로 대답하지 말아요! 그냥 혼잣말이니까……”

그렇게 말하고서는 다시 그녀는 마당에 있는 담을 넘어… 풀숲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너진 담장쪽에있는 풀숲… 그곳에는 조그만한 빛이 어른거리고 있었다. 반딧불이였다.

“이진선배님도 그렇고… 희서선배님도 그렇고… 두분다 서로 좋아하는 것 같아서… 혹시나 사귀는건가? 이런생각도 해봤지만… 실제로 학교에서는 잘 이야기 하지 않잖아요? 그래서 그런건 아닐거라 생각했는데……”

만지작 만지작.
그녀는 어느샌가 자신의 손가락을 서로 만지작 거리고 있었다.

“어제… 그 오솔길이였어요. 그때부터 알고있었어요. 이진선배님은… 희서선배님만을 보고있다고.”

그 말이 왠지 쓸쓸해 보여… 나도 모르게 그녀를 위로해주려 했지만, 그건 아무래도 아닌 것 같다. 그녀는 지금 혼잣말중이다. 그런데다가… 내가 어설프게 위로하려들어봤자, 기분만 나쁠수도 있다.

“선배님…”
“응?”
“만약 선배님이 희서선배님을 좋아하고… 희서선배님도 선배님을 좋아한다면… 그렇게 해서 선배님이행복하다면… 전 그것만으로도 좋아요. 그것만으로도 축복할수 있어요. 하지만…
선배님이 희서선배님 때문에 슬퍼하고, 희서선배님 때문에 눈물을 흘린다면… 전 희서선배님을 미워할 수밖에 없어요.”

그녀는 나를 보고있었다.
눈동자와 눈동자가 마주친다. 그리고 그녀의 눈동자는… 큰 결의를 한듯이 보였다.

“선배님.”

그녀가 나의 소매를 잡아당긴다. 그리고 상반신을 일으켜, 내게 기대어 온다. 호흡은 목덜미로, 그녀의 가느다란 팔은 내 어깨를 감싸고… 그녀의 입술은 내 뺨에 닿았다.

“안아주세요.”

그녀의 가녀린 팔이 어깨를 조여온다. 꾸욱, 하고… 그녀의 숨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그녀의 호흡이 목덜미를 자극한다. 그녀의 엉덩이가 내 허벅지를 타고 내려오고, 그녀의 입술이 조금씩 조금씩 나의 입가에 맴돈다.
그리고 나는… 팔을 들어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날 강희서라는 여자 대신으로 생각해도 좋아요… 선배님이 마음이 심란할때를 노려, 선배님의 마음을 독차지하려는 나쁜애로 봐도 좋아요… 선배님. 부탁이 있다면, 평생토록… 제가 선배님을 사랑하게 해주세요.”

그녀의 몸이 더욱 밀착해온다. 내 손은 점점 허리에서 엉덩이쪽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완전히 고삐가 풀려버린 황소가 되어버린 상태…
그녀에게서 좋은 향기가 났다.

“선배님… 절 마음껏 대해도 좋아요.”

그리고.
그녀의 입술이, 내 말라버린 입술을 적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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