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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밤의 전화.

더는 화조차 내지 않는, 차분히 착 가라앉은 그녀의 목소리에 나는 또 이불 속에서 떨리는 몸을 애써 달래었다.

"누나 마음 알아. 내가 다 잘못했어. 나도 왜 그랬을까 후회되고, 하다못해 그다음에 정말로 미안해하는 기색이라도 보였더라면 좋았겠지. 그렇지만…"

난 뭐라 이을 말을 찾지 못하다 횡설수설하듯 긴 침묵의 시간을 보내고 간신히 말을 이어나갔다.

"나는 항상 사람이 칠칠치 못해. 그래, 그날만 해도 내가 잘못한 거 알아. 단지, 이 이상 일이 더 커지는 게 싫었어. 내가 잘못했어 미안, 하고 넘어갔으면, 그러기를 바라는 마음에…"

그러자 그녀는 내 말을 끊고 따져 물었다.

"너는 그러면 화가 풀리니? 이미 화가 나고 실망한 상황인데, 거기서 '미안' 하고 가볍게 넘어가려면, 그게 화가 풀려? 난 네가 그럴 때마다 정말 이래서 연하는 안되는구나, 정말로 애 같고, 당장 위기만 모면하려고 하는 그런 모습 볼 때마다…

정말 이건 아니구나, 그런 생각이 들어. 우리는 정말 안 되구나, 설령 이번 일이 어떻게 잘 좋게 잘 넘어가도, 한번 이렇게 어긋난 마음은 다시 붙지 않아. 절대로."

그녀의 말에 난 할 말이 없었다. 그래, 그러지 말아야 했다. 차라리 그 자리에서 넙죽 엎드려 정말로 미안해했다면? 아니, 물론 그래도 그녀는 크게 화를 냈을 것이다. 그녀는 이미 마음을 반쯤 버린 듯했다.

"나도 그랬어. 나도 가끔 누나한테 실망스럽기도 하고, 화도 나고, 짜증도 나고, 그런데 그러다가도 뒤돌아서 누나 생각하고, 누나 사진이라도 보고, 또 전화기 보면 누나 생각도 나고, 그러면 다 풀렸어."

난 이미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채 횡설수설하고 있었지만, 그녀를 붙잡고 싶은 마음을 전하고 싶었지만, 전화기는 그 마음을 전할 수 있을까.

"시현아. 사람은 말이야, 누군가에게 어느 정도의 기대를 하다가도, 그 기대에 너무 실망스러우면 더는 거기에 손을 내밀고 싶지 않게 되는 법이야. 어쩌면 기대가 더 클수록 그 실망감은 더 커지는 법이고. 넌 나랑 벌써 1년 가까이 사귀면서도  모르겠어? 난 벌써 많이 지쳤어. 똑같은 일로 싸운 게 한두 번도 아니잖아?"

나는 그저 전화기를 귀에 대고 아무 말 없이 듣기만 할 따름이었다. 그날 내가 똑바로 처신만 잘했더라도, 그날도 기분 좋게 데이트 마치고 오늘도 즐겁게 사랑을 속삭일 수 있었을 것이다.

"하루하루 너에 대한 내 마음이 식어가. 이번 일이 아니더라도, 나 요새 정말 마음 복잡하고 생각할 일 많아서 머리가 터져나갈 것 같아. 그런데 네가 날 돕진 못하고 자꾸 이렇게 나 힘들게 하는 거 싫어. 지쳐. 그냥, 혼자 지내고 싶을 정도야."

무척이나 서글펐다. 서글프다고 느끼면서도 한편으론 마음이 싸늘하게 식어가는 걸 느꼈다.

이제 와서 배신당했다는 소리는 하지 마. 지금까지 믿고 있었다는 따위의 소리는 하지 마.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잖아? 언젠가는 나를 떠날 거라고. 생각한 대로 됐는데 뭘 놀라. 기뻐해, 예상대로 됐어.

"………!"

시끄러워! 갑자기 모든 게 다 짜증났다. 어째서 나는 이딴 생각이나 하는 걸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작은 문제 때문에 상대에 대해 실망을 하기는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 작은 문제가 크게 느껴질 때 누나는 나와의 관계 자체를 다시 생각하는 반면, 난 그 문제를 어디까지나 그저 함께 극복해나가야 할, 혹은 적당히 모르는 척 넘어갈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

서로에 대한 감정의 차이, 방식의 차이인지도 모른다. 그러한 발상의 차이가 이런 문제를 더 크게 만들었던 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판국에서 내가 무슨 소리를 한들 소용이 있겠나? 결국, 그녀를 저렇게까지 몰아세운 건 나 자신인데 말이다.

"더 할 말 없어?"

나는 끝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럼 끊자."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피곤할 텐데 잘자." 하고 대답했다. 그녀는 대답조차 없이 전화를 끊었다. 나는 전화기를 내려놓고 고개를 떨어뜨렸다.

이젠… 괜찮을까. 생각하는 것도 귀찮다. 이젠 뭐가 어떻게 되건 상관없다. 갑자기 웃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어차피 이런 거구나, 생각했다. 사람과 사람의 유대. 결속.  배려. 다정함. 자상함. 코미디다. 그런 것으로 얽혀든다니, 정말로 코미디다. 정말 흥이 팍 깬다. 더할 나위 없이 기분을 잡치게 한다.

어째서 이렇게 된 걸까? 이렇게 될 리는 없었는데.

하지만, 그것은 생각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당연히, 몇 번이나 몇 번이나 몇 번이나 몇 번이나 생각했던 것처럼, 생각한 숫자만큼 답을 낸 것처럼, 내가 잘못한 일이다.

인과의 원인은 나에게 있다. 인연 따위 없는 편이 좋다. 그렇잖아? 이제 포기하자. 이제 그만두자.  각오하고 말없이 가라앉아 가는 것만이 깔끔한 것은 아니다. 이제 됐잖아? 그렇다면… 깊이 빠져들어가 버리는 것도 괜찮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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