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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Depression Wish : 에렐리니아 - 10

2008.01.02 01:28

미에링 조회 수:193



콰악.
괜히 엑셀레이터를 있는 힘껏 밟아 버린다.
내 차가 아니기에 피가 쏠릴 정도의 가속 같은건 경험할 수 없겠지만
이 도로의 제한 속도를 생각한다면 충분히 위험한 속도.

단속이라도 당한다면 귀찮겠지만,
괜히 난 그런 무모한 가속을 해 본다. 제한 속도의 두 배를 넘어선
속도에 풍경이 아찔할 정도로 빠르게 흘러간다.

"……"

하지만 창 밖을 보고 있는 조수석의 한 사람은 무슨 생각에 빠졌는지
아무런 반응이 없다. 결국 난 혀를 한번 차고는 이내 속도를 줄였다.
가자고 한 주제에 가는 길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게다가 이 곳의 지리에는 당연히 낯선 나에게 안내조차도 없다.
미리 어제 밤 마루가 대강 설명해 준 목적지까지의 도로 번호와
어느 정도의 길을 지도를 뒤적여 알아 두긴 했지만,
그렇다고 이 낯선 길이 헷갈리지 않는 것은 아니다.

무슨 생각에 빠져 있는지, 그는 그렇게 내가 아주 운이 좋게도
길을 헤메지 않고 도착해서 해안가의 도로에 차를 세울 때 까지도
멍한 눈으로 차창 밖의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다 왔다. 머루."

그제서야 그는 움찔 하고 반응하며 나를 바라본다.

"……아아."

길 문제도 문제고, 어쩐지 멍하게만 있는 그에게 신경을 써 버린 탓에
오는 길에 풍경을 본다던지, 다른 생각을 할 여유가 없었다.
그저 한동안 신경을 곤두세웠다가 긴장이 풀리고 보니 바다.

바닷 바람을 맞으며 가만히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뜨며,
곤두세워 지쳐가는 신경의 긴장을 푼다. 찬 바람이 깊숙이 들어오자,
조금은 경직된 몸이 풀리는 느낌이었다.

마루는 차에서 내린 이후 백사장을 향해 천천히 걸어가며
주변을 천천히 살펴 보고 있을 뿐이었다. 운전 기사로 쓰려고 같이
오자고 한 건 아닐 테지-

그를 쏘아보아 주었지만, 여전히 그는 이 쪽에는 신경을 쓰지 않는다.

…차라리 잘 된 것일까.



천천히, 하얀 모래 위로 발을 딛어 보았다.
푸석하게 파이며 소리를 내는 모래, 소금향을 싣고 있는 차가운 바람.
검푸른 색의 끊임없이 흔들리는 끝없이 보이는 물.

그는 그 바닷물이 밀려와 일으키는 하얀 거품과, 모래의 경계부분을
걷고 있었다. 그다지 신경을 쓰려고 하는건 아니지만,
이 곳에 나를 오게 한 것은 그이기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해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저만큼 앞서 가던 그가 멈춘다.
그리고, 나도 멈춘다.

어느 새인가 난 그의 뒤를 따라 걷고 있었다.
달리 혼자 서 있기도, 따로 어딘가로 향하기도 애매한,
그저 넓게 펼쳐진 모래밭.

어릴 때 아버지와 봤던 바다는 모래 대신 바위 절벽에 부딛히고 있을
뿐이었다. 이렇게 바닷물 가까이에서 걸어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멈춰 서 있던 마루가 나를 돌아 보았다.
어딘가 아련한 곳을 보는 것 같은 눈동자, 저 눈으로 무엇을 찾고 있는
것일까. …마주 보는 것 외에 내가 달리 할 일은 없었다.

다시 바다를 향해 몸을 돌리는 그.

차가운 바람이 옷깃을 흔든다.

차가운 바람은 익숙했지만,
옆에 누군가가 서 있는 것은 그다지 익숙한 일은 아니다.


"에렐."

바람 소리에 녹아가듯, 조용한 목소리,
그리고 난 마루의 그 목소리에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어릴 때 처럼, 이름을 멋대로 줄이는 것은 실례라고 말해줄까.
로베스에게 처음 그렇게 불렸을 때 처럼, 멋대로 그렇게 부르라고
허락한 적이 없다고 대답할까.

"……"

하지만 지금은 그다지 그런 대답을을 할 생각이 들지 않았다.
바닷물이 모래 위로 부서지는 소리만이 잔잔히 들려온다.

난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생각할 것이 있다면 그것도 좋겠지.
떠올려 보고 싶은 것이 있다면 그것도 좋겠지.

그렇게,
그대로 그를 이 곳에 두고 차에라도 돌아가 버려도 상관 없었을 텐데,
저 짧은 부름이 내 걸음을 붙잡아 놓았다.

"대답, 안 해줘?"

여전히 바다를 바라보며 마루는 내게 물었다.

"…원하는 말 무언가 있다면, 해라."

그는 한참을 바다만 바라보다가, 느닷없이 어깨를 가볍게 들썩이기
시작했다. 불러놓고 웃다니, 난 그를 한껏 쏘아 보았다.

"에렐, 그런 표정으로 그렇게 어색하게 말하면 왠지 웃기다고."

쿡쿡거리는 웃음소리, 난 그런 마루를 외면했다.

"실례다."

"미안, 아하하…"

웃음소리가 잦아들고, 다시 고개를 돌리자 마루가 나를 보고 있었다.
바람이 또다시 불어와 머리칼과 옷깃을 한껏 흔들어 놓고 지나간다.

"에렐은 어디에서 왔어?"

내 눈과 머리칼을 바라보며 묻는다.

"아누라크."

그리고 이어지는건 조금은 예상했던 질문.

"아누라크… 멀리서 왔네. 거긴 하얀 머리도 있어?"

"없다."

그는 고개를 살짝 갸웃거리며 다시 물어온다.

"그럼, 에렐은…"

"병이다."

내 머리칼은 태어날 때 부터 백발이었다. 자세한건 내가 알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알지 못한다. 알고 있는 것은 그저 병 때문이라는 것 뿐.
그 이상은 관심도 없었다. 자신이 금발인 사람이 굳이 왜 금발이냐고
묻지 않는 것 처럼, 나 또한 그랬다.

"그럼, 눈은…?"

이어지는 그의 질문에 난 살짝 실소를 머금었다.
하긴, 하얀 머리칼이나, 붉은 눈은 보통은 볼 수가 없으니,
궁금해 할 수도 있겠지. 그의 질문이 이상한 것도, 답하기 어려운 것도
아니었다.

"특이한 눈. 그 뿐이다."

하지만 자세한 답을 해 주지는 않는다.
저주받은 운명의 증거처럼 여겨져 왔던 이 붉은 눈, 이제와서는
그다지 원망스러운 것도, 싫은 것도 아니었지만.

아버지는 이 눈을 참 아름답다고 했다. 내가 어릴 때 세상을 떠난
어머니도 꼭 이런 색의 눈이었다며, 내 눈을 볼 때 마다 웃어주곤 했다.
하지만 아버지 외의 사람들은 나의 눈을 보며 두려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이유를 알게 된 날, 난 더 이상 내 눈동자의 색을
자랑하지 않았다.

"괜찮걸 물었나, 미안. 그냥… 신기하고, 예뻐서."

고개를 살짝 숙이며 사과하는 모습에 난 또다시 실소를 머금고 만다.

"사과를 말할 필요 없다."

다시 고개를 든 그의 얼굴은, 어색하게 웃고 있었다.
그리고 난 조금씩 파랗게 질리기 시작하는 그의 입술을 보고
몸을 돌리며 그에게 손짓을 했다.

"체온이 내려갔다. 온도를 올리기를 권한다."

차가운 바람을 등지고, 뒤따라 오는 마루의 발소리를 확인하며
난 차를 향해 천천히 걸었다. 일정에 따라서 숙소를 정하거나
하는 것도 물어 보아야겠다. 그리고 그보다 먼저, 식사를 할 시간도
한참 지나 있었다.

그렇게, 시간은 어느 새 오후를 지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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