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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Depression Wish : 마루 - 03

2007.12.24 21:24

카와이 루나링 조회 수:197

수천 번 사랑한다고 말해도, 헤어지자는 말 한 마디에 끝나버리는 것이 사랑이야.



이 세상의 것이 아니라고 밖에 생각되지 않는 새하얗고 아름다운 머리카락.
땅에 끌릴 것처럼 길면서도 티 하나 묻지 않은 흰 색의 롱코트.
만지면 부서질 것 같은 가녀린 몸, 하지만 그러면서도 사라지지 않는 당당함.
가느다랗게 뜬 눈, 굳게 닫혀있는 붉은 입술이 보여주는 도도함.
그리고 그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알 수 없는 신비감까지.

그 사람이 몸을 돌리는 순간 그 모든 것이, 내 정신을 앗아가 버렸다.

그 것은 단순히 말로 표현할 수 있는 느낌이 아니었다.

충격
전율
감동

그 외의 어떤 단어라도 수용이 가능할 듯한, 그런 느낌이었다.

만약 신을 마주했을 때의 경외감이 있다면 이런 느낌이었을까?

그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추고 그 사람이 이쪽으로 다가오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한 걸음, 한 걸음. 그 사람이 다가올 때마다 몸의 떨림은 커져만 간다.
잘못 본 것은 아니다. 틀림없이 그 사람은 내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꿀꺽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킨다.

“실례한다.”

내 앞에서 발을 멈춘 그 사람은 억양이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가까이에서 본 그 모습은 내가 어찌 할 수 있는 영역에 있는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손닿을 수 없는 범위, 저 하늘 위에서 날 내려다보고 있는 듯한 시선.

“길 좀 알려다오. 원주민.”

그리고, 그 입에서 튀어나온 무언가 어색한 단어.

“에?”

“……아닌가?”

그 사람은 내 반응을 보고는 살짝 인상을 찌푸리더니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미안하다. 토종인. 길 좀 알려다오.”

“…….”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 사람의 주변에서 보이던 광채가 사라지는 것 같았다. 아니, 그러니까 내가 무슨 닭도 아니고…….

하지만 내 생각을 아는 것인지, 모르는 것인지 그 여자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사림 중천가의 140-5번지를 찾고 있다. 어디인지 알 수 있나?”

“에? 여, 여긴 중천 2가인데…….”

얼떨결에 튀어나온 내 말에 여자의 인상이 찌푸려진다.

“그런가……. 시간을 잡수셔서 미안하다.”

아마도 ‘시간을 빼앗아서 미안하다.’ 라는 의미의 말을 던진 여성은 내게서 등을 돌렸다. 더 이상 미련 따위는 없는 모습이었다.
순간, 나도 모르게 입이 움직였다.

“저, 어디를 찾는다고?”

내 말에 여성은 잠시 고개를 돌려 이쪽을 바라보다가 무덤덤한 투로 답했다.

“사림 중천가. 140-5 번지다.”

“거긴…….”

운명이라는 녀석은 언제나 장난치기를 좋아하는 것 같다. 그 대상의 기분 따위는 생각하지도 않은 채.






보통은 어떤 동네의 번지수 따위를 외우고 다니지 않는다.
각각의 대문 앞에는 그 집의 번지수가 써 있다고는 하지만, 그런 것 신경 쓰는 사람은 그와 관련된 직업을 지닌 소수뿐이겠지.

그렇기에 조금 전, 내게 말을 걸었던 여성을 붙잡았을 때도, 사실 제대로 알려줄 수 있는 자신 따위는 없었다.
자신의 집이 아닌 다른 집의 번지수 따위를 외우는 사람 따위, 있을쏘냐.

하지만, 내게 있어 그 곳 만은 예외였다.
한 때는 지겹도록 와 봤던 곳이니까.

15분 정도 걸어 도착한 곳은 틀림없는 ‘사림 중천가 140-5번지’.

감탄하며 그 여성이 건네는 ‘고맙다. 차 한 대 마시고 가겠나?’ 라는 말을 뒤로 한 채,  도망치듯 그 곳을 빠져나와 버린다.

싱크대 위에 종이 가방을 대충 던져 놓은 뒤 침대 위에 쓰러지듯 몸을 던진다.

“제길…….”

두 번 다시 갈 일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수천 번 사랑한다고 말해도, 헤어지자는 말 한 마디에 끝나버리는 것이 사랑이야.’

누군가 그런 말을 했었다.
그리고, 그 말이 하나도 틀린 곳이 없다는 것은 불과 얼마 전에 알게 되었다.

오늘 그 새하얀 사람을 보았을 때는 한 때나마 그 사실을 잊을 수 있었다.
사랑이라는 것은 결국 아픔만이 남는다는 사실을 잊을 수 있었다.
그렇기에, 어쩌면 나도 모르게 기대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저 사람이라면 무엇인가 다를지도 모른다.’

라고.

하지만, 그 것은 내 착각에 불과했다.

그 사람은 날 돕기는커녕, 오히려 가슴 속을 후벼 파 버리고 말았다.
그 사람을 만나는 순간이나마 잠시동안 잊을 수 있었던, 떠올리기 싫은 기억을 다시 기억하게 만들어 버렸다.
그 것도 아주 선명하게.

“제길…….”

몇 번이고 입 안에서 되뇌어 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분은 나아질 생각을 하지 않는다.

난 대체 무슨 기대를 했던 것일까?
‘마음’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미 구겨질 대로 구겨진 종이에 무엇을 다시 써 넣으려고 했던 것일까?

자신의 어리석은 생각을 탓하며 눈을 감는다.
이대로 잠들어 버린 뒤, 깨끗하게 잊어버리는 거다.
그리고, 마치 오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그렇게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잠들 수 없었다.
그저 이른 시간이었기에 그런 것이 아니다.
멈추지 않고 떠오르는 생각들은 내가 잠드는 것을 억지로 막아내고 있었다.

정말 이대로 좋은가?
이대로 아무렇지도 않게 끝내버려도 되는 것인가?


그 사람은 분명히 그녀와 관계가 있는 사람이다.
그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틀림없이 스스로에게 고통만을 안겨줄 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시작해보려 하지도 않고 포기하기는 싫었다.

상처를 헤집는 것보다도 더욱 아프게 자신에게 다가올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떠나갔을 때처럼 아무런 말도 해 보지 않은 채 그대로 보낼 것인가?
언제나처럼 아무렇지도 않은 듯, 그러면서 뒤에서 홀로 아파할 것인가?
무언가를 해 보려고 하기도 전에 포기하려 할 것인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다.
수천 번 사랑한다고 말해도, 헤어지자는 말 한 마디에 끝나버리는 것이 사랑이다.
그 만큼, 사람의 마음은 부서지기 쉬운 것.
이번에는 단순히 부서지는 것이 아니라 산산조각이 나 버릴지도 모른다.


물론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래도 이전처럼 가만히 앉아 있고 싶지는 않았다.
이상할 정도로 강한 예감.
그 사람이라면, 무언가 내게 남겨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 것이 더 이상 펼쳐지지 못할 정도로 구겨진 마음일 가능성도 있지만…….

그래도 이번에는, 이번만큼은 이대로 주저앉아버리고 싶지는 않다.

“제길!”

누구에게 내는 것인지 모르는 화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외투를 걸쳐 입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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