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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마스터는 조금 전부터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어디선가 불러낸 의자에 앉아서는 그저 허공을 무섭게 노려보고 있다.

우으으.

입이 방정이라더니 내가 딱 그거다. 그렇게 소리치면 안됐는데.

그치만 정말 몰랐는걸. 나는 내가 세이버 클래스일 거라고 생각했다. 검도 갖고 있고. 방패야 늘 갖고 다니는 거고.

그런데 실더라니!

물론 내 방패가 완전무결하다는 것은 내가 가장 잘 안다. 알지만, 그렇지만…….

 

 

"이봐."

 

 

헉.

 

 

"메?"

 

 

헉.

깜짝 놀라서 발음이 이상해졌다.

 

또다시 침묵.

마스터는 입을 다물었다. 기분 탓인지 조금 전보다 더 무서워진것 같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하지만…… 응. 안 물어봐도 뻔하다. 아니, 물어보기도 무섭고. 분명 어리버리한 영령을 뽑았다고 탄식하고 있을 거야. 아까도 그렇게 폼 잡으면서 멋진 척 했는데 실수나 하고.

 

그러고보니 실수하는건 이번이 벌써 두 번째다. 소환된 지 한 시간─ 아니, 한 시간은 지났을지도 몰라. 아무튼 하루도 안 지나서 두번째다!

얼굴이 화끈거린다. 완전무결한 내가 이런 추태를 부리다니 어떻게 된 거야.

당장 도망가고 싶어! 어디 도망칠 곳이…… 옳지.

 

 

"……뭐하는 거야?"

 

 

방패 너머에서 마스터의 목소리가 들린다. 다행히 표정은 안 보인다. 좋았어.

그야 마스터가 무서워서요, 라고 대답하면 불벼락이 떨어지겠지?

 

그렇지만…… 이게, 이렇게 쓸 방패가 아닌데. 문득 자괴감이 엄습했다.

나는 이렇게 가벼운 상태로 있으면 안돼.

나는, 원래는 이 방패를 들 자격이 없어.

방패를 잡은 손가락이 떨렸다.

나는, 나는……

 

 

"……봐, 이봐!"

 

 

갑자기 드리워진 그림자와 목소리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어느새 근처까지 온 것일까. 마스터다.

방패 뒤에 쪼그려 앉아 있었기에, 보이는 것은 마스터의 구두와 바지 아랫단 정도. 고개를 꺾어─목이 아팠다─마스터를 올려다보았다. 긴 금발. 붉은 눈. 반듯했던 눈썹이 지금은 찡그려져 있었다. 무엇 때문에? 자신이 소환한 영령이 한심해서일까?

그건…… 어쩌면 당연한……

 

 

"안 잡아 먹어. 나와."

 

 

아. 다른 이유였던 모양이다.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아.

휴우, 하고 절로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응. 벌써부터 이렇게 가라앉으면 안되지. 어두운 일은 잠시 머리 뒤로 미뤄두자.

어두운 생각을 털어내기 위해 고개를 저었다. 애써 마음 속으로 밀어버렸다. 지금은 아니야. 지금은 안돼.

다시 마스터를 올려다보았다. 단호하게.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당당하게,

 

 

"누…… 누가 마스터가 무서워서 숨은 줄 알아요?"

 

 

말하지 못했다.

마스터는 잠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떴다. 그 1초도 안되는 시간이 무척이나 길었다.

 

 

"그래. 그런걸로 해두자고."

 

 

들키지 않았다는 안도감.

그리고, 명백히 어린아이 취급 당하는 것에 대한 짜증.

감정이 뒤섞여 뭉실뭉실 올라온다. 일단은─ 나는, 표면적인 감정에 충실하기로 했다.

 

 

"무슨 소리에요? '해두자'니. 정말이라니까요?"

 

"알았어. 알았으니까, 나와."

 

 

노골적으로 '내가 봐준다'는 말투다.

이쯤 되니 나도 눈썹이 찡그려졌다.

흥.

아직 새파랗게 어리면서.

태어난 년도부터 계산하면 내가 몇 살이나 더 많을 텐데.

 

……그렇지. 여기선 더 어른인 내가 참자.

방패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마스터는 다시 의자로 돌아가 앉아 있었다. 조금 전처럼 아무렇게나 앉은게 아니라 다리를 꼬고.

한결 진지해진 느낌에, 나도 일어섰다.

 

 

"좋아요. 여기선 어른인 제가 참도록 하죠."

 

"……."

 

 

마스터의 붉은 시선이 휙 위로 올라와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어딘지 모를 허공으로 천천히 내려갔다.

이루 말할 수 없는 감정이 담긴 눈빛이었다.

왜?

 

 

"아직도 화가 난 거에요?"

 

"화? 내가?"

 

 

마스터는 이번엔 시선만이 아니라 고개를 들었다. 똑바로 나를 올려다 보며 마스터는 황당하다는 어투로 말했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그야 처음에 제가…… 소환됐을 때……."

 

 

말문이 막혔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해? 괜히 폼 잡았던 것? 자신의 클래스도 모르고 있던 것?

……다시 도망치고 싶어졌다. 기왕이면 이불 속 같이 커다란 곳으로. 아니면 바깥으로.

물론 나는 마스터를 혼자 두고 도망칠 정도로 어리숙하지는 않다. 그러니까 밖으로 도망치지는 않을 거야.

그렇지만 방 안에는 딱히 이불 같은 것이 없었다. 지금 보니, 정말 날 소환하기 위해 임시로─혹은 무단으로─찾아낸 방인 것 같다.

괜찮아. 숨을 수만 있으면 돼. 눈만 살짝 움직여서 주위를 살펴 보았다. 대충 물건더미 속이면 될까? 몰래 오른발을 움직여서……

그 때 마스터의 표정이 달라졌다. 어이 없다는 그것으로.

 

 

"뭘 고민하나 했더니. 그 정도로 화를 내지는 않아."

 

 

거짓말.

슬쩍 움직였던 오른발을 다시 왼발에 갖다 댔다.

 

 

"아까 그렇게 험악한 표정을 짓고 계셨잖아요."

 

"아, 그거."

 

 

마스터는 다시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안 그래도 그 건에 대해서 얘기하려던 참이야. 앉아…… 라고 하기에는 가구가 없군. 내가 일어설까?"

 

 

거짓말, 이라고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마스터의 분위기로 보아선, 그저 상황을 모면하려는게 아니라 진심인 것 같았다.

하지만 무슨 소리람?

 

 

"전 어린애가 아니에요. 얘기하는데 꼭 의자에 앉을 필요는 없어요. 그리고 전 서번트라고요. 지구력도 참을성도 마스터보다 훠얼씬 뛰어나요."

 

"하긴 그렇겠군."

 

 

마스터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좋아. 그럼 우선 네 클래스부터 이야기하도록 할까. 네 클래스가 실더라는 건 확실하겠지?"

 

"맞아요. 전 세이버로 소환될 줄 알았지만요."

 

"그래. 바로 그게 문제라는 거야."

 

"왜 문제라는…… 아."

 

 

하마터면 제 능력을 의심하시는 거에요? 라고 말할 뻔했다. 하지만 그 직전 깨달았다.

내 클래스는 세이버가 아닌 실더. 누군가 먼저 세이버를 소환해버려서 실더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아마 높은 확률로 그럴 테고.

가장 우수한 클래스의 자리를 빼앗기다니. 어차피 나는 세이버가 아니더라도 완전무결하니 셈이 나지는 않는…… 다는 건 아니라고도 할 수 없지만.

아무튼 문제는 그것이 아니다.

 

어째서 '실더'인 걸까?

 

물론! 나한테는 실.더.의. 적성이 있다. 전혀 어울리지도 않은 엉뚱한 클래스에 끼워넣어진게 아니라.

하지만 내가 알기로 보통의 성배전쟁에 실더는 소환되지 않는다. 성배전쟁에 참가하는 서번트는 세이버, 아처, 랜서를 위시한 3기사와 라이더, 캐스터, 어새신, 버서커의 4술사로 이루어진 일곱 클래스다.

하지만 나는 실더로 소환됐다.

 

 

"표정을 보니 나랑 같은 결론을 내린 것 같군."

 

 

마스터는 가볍게 이야기했다. 어디까지나 내일 날씨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듯한 어조였다.

 

 

"그래. 이건 보통 성배전쟁이 아니야. 동서고금의 영령이 참여하는 전쟁에 '보통'이라는 말을 적용하는 것도 이상하겠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규정은 있었지. 하지만 이번에는 가장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서번트들의 클래스부터 어그러졌어. 네가 다른 클래스를 대체해서 실더가 되었든, 추가로 소환되었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엄연히 정식으로 소환된 서번트면서도, 정규 클래스의 서번트가 아니었다. 엑스트라, 혹은 이레귤러라고도 할 수 있을 클래스. 통상적인 성배전쟁이라면 있으리라고는 예상도 못했을 거다. 나도 내가 실더로 소환된게 아니었더면 몰랐을 거고.

즉, 이 성배전쟁은 통상적인 성배전쟁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것이 좋은 징조일지, 나쁜 징조일지 분하게도 나로서는 아직 알 수 없지만.

마스터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말을 이었다.

 

 

"뭐, 이러니저러니 아는 척 하기는 했지만, 나는 성배전쟁에 대해서 사실 잘 몰라. 참가해 본 적도 없고. 경력 있는 신입도 버티기 어려운 판에 나같은 초짜는 더욱 힘들겠지. 게다가 이런 '보통'이 아닌 성배전쟁에선."

 

 

거짓말. 나는 입술을 비죽였다. 잘 나가다가 왠 궤변이람. 

이제 막 소환된 나도 안다. 마스터는 절대 초보 마술사가 아니다. 물론 실력이 초보인데 비해 마력이 많은 사람도 있을 수 있겠지만, 풍기는 분위기라는게 있잖아. 마스터가 무슨 초짜라는 거에요?

의심스럽다는 기운을 쏘아보내는 내 눈빛을 아는지,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지(이러면 정말 화가 나는 일이지만), 아니면 정말 모르는지 마스터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뚜벅뚜벅 나에게 걸어와서는…… 오른손?

 

 

"아, 왼손잡이인가?"

 

 

응?

 

 

"아뇨, 전 양손 다 써요. 완전무결하니까요."

 

 

엉겁결에 대답했다.

아니, 이게 아니잖아.

 

 

"그럼 문제 없겠군."

 

 

내가 입을 열기도 전에 마스터는 내 눈앞에 오른손을 내밀었다. 내 손과는 골격 자체가 다른 큰 손. 길다란 손가락. 마스터의 키 기준으로는 조금 아래, 내 키 기준으로는 조금 위에.

 

 

"늦은 감이 없잖아 있지만 정식으로 얘기하지. 아이리안 스펜서라고 한다. 보다시피 널 소환한 마술사고, 이번 성배전쟁에 참여한 마스터야. 내가 이 이상한 전쟁을 조사하고, 살아남는 데에는 네 도움이 필요해. 그러니 모쪼록, 잘 부탁해."

 

"메? 아니, 네?"

 

 

우으으.

이번에도 당황하는 바람에 이상한 발음이 나와버렸다.

그러니까, 마스터는 나에게 악수를 하자고 손을 내민 것 같다. 응. 악수. 손과 손을 맞잡는 의미가 내가 살았던 때와 달라지지 않았다면, 이건 분명히 악수야. 성배가 준 지식으로 보면…… 크게 달라진 것 같지도 않다. 그러니까 악수가 맞다.

어어……  그런데 왜?

 

눈을 깜빡이며 마스터의 오른손과 마스터를 번갈아보았다.

분명히, 거들먹거리고, 잘난척하는, 나야말로 마술사다, 하는 사람일거라고 생각했다.

물론 선입견은 안좋지만 아까 그렇게나 날 어린애 취급 하고 내가 진짜 어른이요 하는 생각이 팍팍 풍겨나오는 행동을 했는걸.

그래봐야 나랑 겉모습으로 8살 차이…… 밖에…… 안 나면서.

태어난 년도로 따지면 나보다 하아아아안참 어리면서.

흥.

 

고개를 치켜 올렸다. 그리고 오른손을 들어 마스터의 손을 마주 잡았다.

 

 

"좋아요. 클래스 실더, 당신의 서번트로서 당신의 말에 따르겠어요. 제 완전무결한 능력에 기 죽지나 마세요."

 

"기대되는군."

 

 

마스터는 빙긋 웃었다.

그것이 진짜 웃음인지 의례적인 웃음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 역시, 샐쭉 미소 지었다.

 

 

 

 

7.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정말 그게 그런 전승으로 이어질 줄 몰랐어요!"

 

 

그리고 약 한시간 후.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되기 전 '지금이라도 호화롭게 지내봐야지. 나중에 후회해봐야 소용없다고.'라는 마스터의 의견에 이동한, 호텔이라는 곳의 방에서.

내 진명을 들은 마스터의 추궁에 나는 계속해서 사과해야 했다.

 

 

 

////

 

오랜만에 쓰는 1인칭 시점.

프린세스 다이어리를 떠올리며 썼는데 괜찮은지 잘 모르겠네요. 그건 완전히 일기 형식이라 다르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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