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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

 

 

 머리를 곱게 빗어내리고, 머리칼 끝의 동글동글 말린 컬을 손가락으로 다시 한 번 더 말아주고. 혹시라도 입술 밖으로 번진 것이 없는지, 속눈썹이 눈 아래 한 가닥 달라붙어 있는지는 않은지. 실비엣 로즈 도노반은 미련이 남은 것처럼 좀처럼 거울 밖으로 눈을 떼지 못했다. 

 

 

 

 

01.

 

 

 실비엣은 남에게는 남극에 있는 해양과학연구소에서 일한다고 말하곤 했다. 사실 엄밀히 말해, 반 정도는 사실이었고. '해양'이라는 글자 빼고는 틀린 것이 없었다. 아무튼, 그녀는 잉글랜드 바스 지역의 평범한 가정의 장녀로, 특별히 학업이 우수하여 전액 장학금으로 임페리얼 칼리지를 2년만에 졸업하고, 전액 장학금으로 취리히 공과 대학을 다녔고, 한 번 더 전액 장학금으로 MIT에서 학위를 취득한 과학자이자 기술자였다. 남들보다 조금 수학을 잘 했을 뿐인 그녀였지만, 그녀가 박사 학위를 딴지 2년 후 써낸 논문을 들고와 명함을 건낸 남자는 그녀가 상상도 하지 못했던 사람이었다. 마술이라니. 정말이지, 아무리 생각해도 그녀가 잡상인 쫓아내듯이 쫓아내지 않은 것이 기적이었다. 하지만 남자는 UN 총장의 명의로 된 증명서를 들이밀었고 (더해서 그녀는 이 때, 실제로 TV에서나 보던 사람을 스카이프로 마주할 수 있었다), 실비엣이 매력을 느낄 수 밖에 없을 정도의 연봉이 써진 계약서도 함께 내밀었다. 서른 세 살의 여성 기술자에게 연 17만 달러를 제안하는 직장을, 그 존재와 신원이 확실하게 보장된 곳을 거절할 수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 것이다. 

 

 아무튼, 실비엣 로즈 도노반은 본인도 인정하는 속물이었고, 과학자로서의 사명감 따위는 그다지 없었다. 그렇지만 과학자로서의 사명감을 따지기 시작하면 구십구 퍼센트 바게트 하나로 사흘을 버티게 되니까. 

 

 연구소는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남극 (그렇다, 남극. 펭귄 사는 그 곳이다.) 에 위치해 있어서 한 번 들어가면 석 달에 한 번 있는 외출 때 아니면 나가기가 힘들다는 점을 제외하면, 마술사니 뭐니 하는 치들도 결국 똑같은 사람이었고 똑같은 직장이었다. 한 번 들어가면 수용소 비슷한 생활을 한다는 점이 좀 답답하긴 했지만, 숙식제공까지 된다는 것은 결국 17만 달러는 고스란히, 생활비나 통신비, 렌트 따위로 빠지는 일 없이 실비엣의 주머니로 들어온다는 의미다. 뒤에 딸린 두 동생과 부모님의 노후까지 계산하여, 실비엣은 이럭저럭 만족스럽게 생활하고 있었다. 

 

 그런 실비엣에게 날벼락이 떨어진 것은 불과 한 달 전의 일이었다. 인류가 당장 내일모레 망한다고? 본인은 자신의 통장에 붙는 이윤을 계산하는 것만 신경쓰고 있었지만, 실비엣 로즈 도노반은 수재들만이 모인 연구소 내에서도 제법 특출난 능력을 보이고 있었다. 그 자존심 높은 마술사들을 대충 '그 치들도 똑같은 인간이었다' 고 여기고 있을 정도로, 칼데아 내에서도 일부 인원에게만 공유된 인류의 미래에 대해 전달받을 정도로. 

 

 아무튼,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실비엣 로즈 도노반은 본인도 인정하는 속물이었다. 과학자로서의 사명감 따위는 그다지 없었지만, 그녀는 죽고 싶지 않았고, 가족이 죽는 것 따위도 전혀 바라지 않았다. 딱히 아무래도 좋지만, 전혀 다른 타인조차도 누군가 죽는다고 하면 마음이 불편했다. 내 몸이 안락하고 편안한 것이 좋지만, 그걸 위해 누군가가 희생한다고 하면 꿈자리가 뒤숭숭해서 잘 수가 없을 것이다. 그냥 '타인'이라고 해도 불편할 터인데, 인류라는 뭐 와 닿지도 않는 숫자가 눈 앞에 떨어진 것이었다.

 

 그 날부터, 실비엣 로즈 도노반의 업무량은 세 배로 늘어났고, 그녀의 업무 효율성은 다섯 배로 늘어났다. 

 

 

 

 

02.

 

 

 그렇게 주변 연구자들이 경악할 양의 업무를 처리해내던 실비엣을 관리자가 부른 것은 불과 사흘 전의 일이었다. 정확히는, 실비엣을 포함한 몇 명을 불렀다. 심부름을 시키겠단다. 갑자기 무슨 심부름? 이 상황에서? 웅성거리는 사람들 사이로, 관리자는 입을 열었다. 누군가는 '마스터 적합자'의 픽업, 누군가는 앞으로의 비상 사태에 대비한 기자재 공수, 누군가는 런던과 뉴욕으로 가서 마술과 정치의 필두를 만나는 일을. 

 

 "그리고, 닥터 도노반. 자네는 '마스터 적합자'를 한 명 데려와야겠어."

 "설마 맨땅에 헤딩으로 찾아내서 데려오라는 겁니까?"

 "아니, 그렇게 해야 하는 친구도 있긴 하다만, 자네는 아니야."

 "보통 미스터가 그런 표정을 지을 때는 뭔가 꿍꿍이속이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아무리 그래도 자네, 상사한테 너무 솔직한 것 아닌가?"

 "언제부터 미스터가 제 상사였는지?"

 

 남자는 큼큼, 목소리를 가다듬고 파일을 내밀었다. 파일에 끼워진 A4용지라니. 구식이다. 이 정도 연구소라면 자비스 같은 것 한 대는 구비해 두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실비엣은 생각했다. 팔랑팔랑 흔들리는 종이를 펼치고.

 

 "... .... ....."

 "미스.. 아니지, 마드무아젤 아르델비제. 마술사 가계로서도 이례적으로 긴 역사를 지닌 가문이야."

 "그럼 그쪽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 적임자 아닙니까? 시계탑 출신의."

 "아니, 아니지. 거기는 좀, 여러 모로 이례적이라서."

 "뚝뚝 끊는 건 비효율적입니다, 미스터. 하실 말씀이 있다면 그냥 좀 쭉 말씀하시죠?"

 "시계탑의 이단아 같은 집안이야. 최소한 고대 그리스 신화 때부터 있었지만, 마술에 거의 관심이 없어. 마드무아젤 아르델비제가 창조과 학부에 이름을 올리고 있긴 하지만, 학부의 로드를 제외하고는 시계탑에선 그녀를 본 사람도 거의 없어."

 "... 요컨대 미지의 숲 속에 사는 공주님을 찾아오라는 겁니까?"

 "아, 아닐세. 그건 또 아니야. 아르델비제 사람들은 확실히, 본래 남부 유럽의 어딘가 숨겨진 곳에 본가가 있다지만 현재는 아닐세. 누구의 의향인지,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아니야. 자네가 가야 할 곳은,"

 "가야 할 곳은?"

 "이 세상의 진짜 메트로폴리스, 뉴욕이라네."

 

 하, 실비엣 로즈 도노반은 미간을 확 좁혔다. 정말이지 비효율적이다. 간단히, 일주일의 기간을 줄 테니 뉴욕에 가서 이 마스터 적합자를 픽업해서 데려오라, 고 하면 30초 안에 끝날 내용을 이 정도로 질질 끌다니. 실비엣은 비효율적이라는 단어를 혐오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이 관리자는 가장 먼저 구조 조정이 되야 할 대상이란 것에 실비엣은 단 한 점의 의문도 품지 않았다.

 

 "... ... 알겠습니다. 크라이스트처치에 내리면 당장 오클랜드나 웰링턴에서 미 동부로 향하는 국제선 티켓을 끊죠. 뉴욕에서 오는 티켓은 두 장 다 마련해 두셨다고 생각하겠습니다." 

 "그래, 그래. 올 때는 일등석이야."

 "아, 맞다. 그러고보니 미스터,"

 "음?"

 "이 사람, 이름은 어떻게 읽습니까?"

 

 

 

 

03.

 

 

 이사나 아르델비제. 이사나 아르델비제. 실비엣은 혀를 씹지 않도록 입 안에서 연습했다. 귀찮은 일이었으나 초면에 이름을 잘못 부르는 것은 제법 큰 실례이므로. 대강 그녀는 머릿속으로 시뮬레이터를 돌렸다. 깍쟁이 공주님일 경우, 금수저 힙스터인 경우, 소심한 방구석계인 경우. 그리고 또.... 아무튼, 그녀는 센트럴 파크가 내다보이는 만다린 오리엔탈 호텔의 화장실에서 곱슬거리는 머리칼 끝을 다시 한 번 손가락으로 말아보며 생각했다. 평범한 가정에서 평범하게 성장한 그녀로서는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약간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녀는 다시금, 관리자가 지나가듯 언급한 구석을 떠올렸다. 집안의 부가 추정 n조 달러. 조. 그래, 조. 태어나보니 몇 조를 갖고 있는 기분은 어떨까? 생각해보면, 오래된 마술사 집안이란 것들은 대체로 부자라고 들었던 것 같다. 짧은 편이 어지간해서는 3백 년은 된다고. 긴 집안들은 기원전에서 시작하는 케이스가 많다나. 하긴 그때부터 금을 찍어냈다면 나라 하나 살 수 있는 돈도 불가능은 아니겠지. 

 

 아무튼, 그녀는 자신이 거의 약속 시간에 늦기 직전이라는 사실을 깨닫고는, 황급히 구둣발을 절뚝거리며 화장실 밖으로 달리듯 뛰쳐나갔다. 

 

 "아, 안녕하세요."

 ".. 아, 네. 안녕하세요."

 

 혼자 앉아 있는 귀공녀 같은 여성은 딱 한 명 뿐이었다. 올리브색 머리칼을 우아하게 틀어올리고, 약간 어두운 녹색 눈동자를 빛내는 미인. 갓 스물을 좀 넘었을까? 실비엣은 내심, 이런 일에 사진도 사전에 안 전달해 주면 어떻게 하느냐고 욕하고 있었지만 (관리인의 말에 따르면, 악용될 여지가 있단다.) 생각 외로,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뉴욕에는 처음이신가요?"

 

 아, 높으신 분들 특유의 화법이라는 그건가. 용건부터 시작하면 품위 없다고 생각하는 그거. 비행기 안에서의 공부와, 그보다 훨씬 전, 학교 다니면서 몇 번 들어간 네트워킹 행사나 동문의 밤 따위를 생각하며 실비엣은 대답했다. 

 

 "아, 그럼 그, 이제 슬슬..."

 "어머, 이런. 미안해요. 저, 약속이 있어서 먼저 일어나야 할 것 같네요. 그..."

 "네? 아, 어. 실비엣 도노반입니다."

 "어머, 네. 실비엣, 만나서 반가웠어요. 좋은 여행 되시길 바라요."

 

 불과 한 15분 정도 얘기했을까? 올리브색 머리칼의 여성은 여전히 우아한 걸음걸이로 버킨을 한쪽 손에 쥐고는 몸을 일으켜 나가버린 것이다. 혼자 남은 실비엣은 그저 눈을 끔뻑거릴 뿐이었다. 뭐지, 저 여잔? 머리에 든 게 없어서 자기가 어디에 등록해 두었는지도 모르는 건가? 아니면 이 빌어먹을 무능한 관리자가 저쪽엔 설마 사전에 연락을 안 해둔 거야?

 

 "저 분은 T사 회장의 따님인 로잘리 린드버그 양이에요. 머리에 딱히 든 게 많지는 않지만 자기가 계약한 곳 정도는 다 알고 있어요. 지금 눈으로 욕하시는 것 같은데, 그쪽의 상사분은 미리 다 연락을 정확하게 취해 두었구요."

 "... ... ?!"

 "대화를 꽤 즐거워하시는 것 같아서. 그냥 좀 기다렸어요."

 

 실비엣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여태까지 애먼 사람을 붙잡고 있었던 것이다. 반대쪽으로 돌아봤어야 하는데. 삐요삐요 울리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이래서 랩 바깥은 싫다고 다시 한 번 속으로 외치며 실비엣은 목소리의 주인에게 시선을 향했다. 

 

 ──세상이 멈추어버린 것 같다고 생각했다.

 

본 적도 없이 빛나는 별 같은 푸른 눈. 아니, 저걸 푸르다고 해야 하나? 어휘 그대로, 하늘의 별처럼 수십 빛깔을 담아낸 것 같은 눈이었다. 그녀는 무신론자였으나, 처음으로 신이 인간을 어떻게 빚었는지 약간이나마 떠올릴 수 있을 것 같았다. 하늘의 별을 똑 따다가 저 눈에 박아주었으리라. 그리곤 상아와 유리와 우유, 설탕과 흰백합 꽃잎으로 정성껏 빚어내고 조각하고, 탐스런 햇빛 한 줌을 움켜쥐고 저 머리칼로 만들어 주었겠지.

 

 문득, 실비엣 로즈 도노반은 저 소녀를 넋을 잃고 보고 있는 것이 오직 자신 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다른 사람들은 그저 조금 눈에 띄는 사람을 볼 때처럼 흘끔거릴 뿐이었다. 뭐지, 홀린 건가? 그런 그녀의 표정 변화가 재밌다는 듯, 소녀는 낄낄 웃음을 터뜨렸다. 소년 같은 웃음이었다.

 

 "그야, 암시를 걸었는 걸요. 아, 정확히 말하면 항상 걸고 있어요. 너무 눈에 띄는 건 귀찮다구요. 나 여기에 있으니까 공격하러 오라는 것도 아니고."

 "항상..? 아니, 공격이요? 그건 또 무슨."

 "이 나라의 내륙에는 꽤 짐승이 많이 살거든요. 짐승 부리는 사람들도. 그냥 이상한 사람들도. 별로 큰 일은 되지 않지만, 매일같이 그러면 아무래도 번거로운 걸요. 아무튼, 그런 사람들은 이제 오빠랑 언니들이 알아서 해 줄 테니까─, 실비엣 도노반 씨, 맞죠? 아, 박사님이라고 불러드리는 쪽이 좋으신가요?"

 "아뇨, 그건 별로 상관 없습니다만..."

 "아, 정말요? 그럼 실비엣, 이라고 부를게요! 만나서 기뻐요, 실비엣. 이나 아르델비제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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