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
벌떡. 아침 여섯 시. 열 한 살짜리 아이들이 일어나기에는 조금 이른 시간이었지만, 자로 잰 듯 일어난 여자 아이의 금빛 눈에 잠기운 따위는 남아 있지 않았다. 소녀는 아직은 여름 같은 8월의 마지막 날 공기를 깊이 들이쉬며, 창문을 활짝 열고는 방 밖으로 뛰쳐나갔다.
"아버님, 어머님. 평안히 주무셨어요!"
"──시에라, 이렇게 일찍 일어나도 되는 건가요? 피곤할 텐데... 혹시 긴장해서 잠을 설친 게 아닌가요?"
"에헤헤. 전혀요! ..는, 항상 이맘 때쯤 일어났는걸요!"
등의 한 가운데까지 길게 늘어뜨린 달빛 머리카락이 살랑살랑 춤을 추었고, 아이는 밝은 목소리로 '아버지'에게 대답했다. 그는 그런 딸아이가 못내 사랑스러운 듯 금빛 강한 녹색 눈동자를 곱게 포개어 웃고는 아이에게 오라는 듯 팔을 뻗었다. 잠시 고개를 갸웃한 아이는 곧 꺄르르 웃고는 와락 달려가 품에 안기고, 다소 작은 체구를 보여주듯 부친의 품에 안긴 채 재잘거렸다.
"아, 누나."
작게 하품을 하며 따라나온 것은 소녀와 닮은 은빛 머리카락과 녹청색 눈동자를 가진 여리고 곱게 생긴 소년. 호칭대로라면, 소녀의 남동생인 듯 싶었다. 소녀와는 키도 별로 차이가 나지 않고, 앳된 얼굴도 비슷해 보이는 것으로 보아 나이 차는 많지 않은 듯 싶었다.
"우읏, 아도니야. ... 역시 너무해. 네가 조금만 더 일찍 태어났더라면 함께 입학할 수 있었는데."
"하지만 그러면 누나가 태어났을 때랑 시간이 맞지 않잖아? 그래도, 내년에는 함께 갈 테니까. 나도 누나랑 같이 학교에 가는 것을 기대하고 있는 걸.
앞으로 한동안 누나를 볼 수 없다니. ...꼭 매일매일 편지, 써서 보내 줄 거지?"
"응, 물론!"
누나 - 여자아이 쪽은 일월 초, 쌓인 눈조차 부끄러워 땅 속으로 숨어들 정도로 찬란한 아침에 태어났다. 동생, 남자아이 쪽은 십 일 월의 낙엽 가득한 날, 해질녘 노을 속에서 태어난 아이. 같은 해에 태어났으므로 동양의 기준이라면 둘은 동갑이었겠으나, 아도니야라 불린 동생 쪽은 누나를 누나로 공경하길 바라며 그리 행동했으므로, 어느샌가 둘은 '누나'와 '남동생'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시에라. 아도니야. 자아, 오늘은 어머니와 제미니가 진수성찬을 준비해 주실 테니까. 슬슬 함께 식당으로 갈까요."
"네에!"
아버지 품에 쏙 안겨 있던 여자아이는 깡총 뛰어내려 가만히 서 있던 동생의 손을 잡고는 토끼가 뛰는 양 가볍게 달렸다. 그런 작은 아이 둘을 미소를 머금은 채 바라보던 아버지는 곧 어깨를 으쓱하며 몸을 일으켰다. 자신의 귀여운 딸아이라면 어딜 가서 무엇을 하든 잘 해내리란 것을 그는 믿어 의심치 않았으나, 역시 조금 마음 한 구석이 허전하긴 한 것이었다. 물론, 그는 마음만 먹으면 '시찰'이라는 핑계로 언제든 학교에 가서 아이를 볼 수 있는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시에라 아가씨! 아도니야 도련님! 어서어서 오십시오! 간밤에 좋은 꿈 꾸셨나요?"
"으응, 제미니. 아침부터 고마워. 많이 바빴지? 앗, 뤼미에르하고 세바스찬도 있네. 도와 준 거야?"
"아이구, 아닙니다요! 제미니는 앞으로 또 석 달 동안 아가씨를 보지 못할 생각만 하면 슬퍼서 밥도 먹지 못하겠습니다!"
"그럼요, 그럼요. 아가씨처럼 영특하시고도 자비로운 분은 학교에 가셔도 훌륭하게 해내시리라 믿어 의심치 않지만 그래도 역시.."
제미니라는 자는 소녀의 집에서 일하는 꼬마 집요정이었다. 보통 주방을 담당하는 제미니 말고도, 이것저것 집안의 잡다한 것을 관리하는 뤼미에르와 세바스찬이라는 집요정들 또한 오늘은 특별한 날인 만큼 이른 새벽부터 주방에서 바삐 준비한 듯 싶었다. 본디 '해고'당한 집요정들이었던 뤼미에르와 세바스찬은 이 저택의 주인 - 소녀의 아버지가 거두어들인 만큼 그들에 대해서 대대로 일한 집안의 집요정에 비해도 지지 않을 정도로 매사에 열심이었고 가족에 충실한 것이었다. 무엇, 기본적으로 이 집안이 다른 곳들과는 딴판일 정도로 집요정을 비롯한 온갖, 비-마법사인 존재들에게마저 관대하고 또 평등하게 여기는 곳이기도 했지만.
"어머나, 시에라..! 아도니야..! 잘 잤니?"
"네, 어머님! 어머님도 평안하셨나요."
소년과 소녀의 머리칼이 누구에게서 물려받은 것인지를 보여주는 여성은, 부드러운 미소를 띄며 몸을 돌렸다. 그녀는 아직 그녀보다 훨씬 더 자그마한 두 아이의 머리칼과 이마에 차례로 입을 맞추며 방긋이 웃었다. 그녀에게 있어서는 이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한 아이들이었다. 아니, 그녀뿐 아니라 이 저택의 모든 존재들에게 있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이들이니까. 빵 반죽의 밀가루가 묻은 손이어도 앞섬에 슥슥 문지르고는 꼭 끌어안아 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밧세바. 제가 무엇인가 도와주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역시 요리는 영 서투른지라..."
"어머, 아니에요. 평상시에도 충분히 바쁘시고 또 이 정도야 아무렇지 않은 걸요. 오히려 제미니랑 세바스찬, 뤼미에르가 고생했지요."
"아하하. 그런가요, 셋 다. 아침부터 수고해 주어서 고마워요."
"아이고, 무슨 과분한 말씀이십니까요, 주인님!"
"그렇습니다요!"
오히려 황송하다는 듯 쉼없이 고개를 숙이는 세 집요정을 보며 다윗은 그럴 필요는 없는데..라고 중얼거리며 조금 멋쩍게 웃었다. 휴가나 급여라도 지불하고 싶지만 그들은 펄쩍 뛰며 그것만큼은 못 받겠다 몇 번이고 외친 것이었다. 넝마 조각 따위가 아닌 제대로 된 옷을 입을 수 있게 해 주고, 제대로 대접 받고 존중 받는 것으로도 과분할 정도의 영광이라며. 아무렴 그렇게까지 손을 내두르며 사양하는 데도 억지로 안겨줄 수는 없었기에 다윗은 어쩔 수 없이 넘어갈 수 밖에 없었으나, 그들이 원한다면 언제든 급료든 휴가든 무엇이든 줄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앗차, 그러고보니 깜빡 잊을 뻔 했네. 시에라, 아도니야. 깜짝 소식이 있단다."
"...에, 깜짝 소식...?"
눈을 동그랗게 뜨고 깜빡이는 시에라와 아도니야를 보고, 밧세바는 다윗과 눈을 마주치고는 무엇인가를 꾸미는 소녀처럼 장난스레 미소지었다. 도무지 두 아이의 어머니라고는 보이지 않는 미모가 마치 어린 아가씨처럼 사랑스럽게 보였다.
"암논, 압살롬, 타말이 함께 아침 식사를 하러 오겠다는구나."
". . . ! ! !"
두 아이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그 셋은 밧세바가 낳은 아이는 아니었으나, 그녀가 다윗과 결혼한 후 상의 끝에 데려온 입양한 아이들이었다. 그러나 시에라도, 아도니야도, 듣기 전에는 몰랐을 정도로 친자식처럼 고이고이 기른. 비록 둘째 아들 압살롬은 자신이 입양아라는 것을 알자 그대로 가문의 이름을 내려받는 것은 못 참겠고, 스스로의 능력을 증명하고 자신의 위치는 자신이 만들겠다며 집을 나갔지만, 아직도 툴툴대면서도 종종 집에 찾아오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인연을 끊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피도 아닌 가문의 이름 덕으로 모든 특권을 그대로 받는 것은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는 부류였다. 암논에 있어서는, 어릴 때까지는 집안의 이름만을 믿고 제멋대로 구는 오만하고 보잘 것 없는 도련님 같은 소년이었으나, 한 살 차이가 나던 둘째 압살롬이 그 꼴을 못 보아 넘기고 둘이서 죽어라 싸운 끝에 함께 성 뭉고 병원에 실려가고 나서야 제정신을 차리고 자립한 장남이었다. 그 덕에 아직도 압살롬과는 사이가 좋지 않지만, 역시 그 또한 다른 가족들을 아끼는 것은 진심이었다. 오만하고 제멋대로긴 했지만, 본성 자체가 악인은 아니었으며 또 기본적인 능력은 부정할 수 없을 정도의 실력이었으니까. 마지막으로, 장녀 타말에 있어서는 기숙사 반장이었던 암논이 타 기숙사였던 그녀를 여동생이라는 이유만으로 과하게 응석을 받아주려는 태도를 보여 그를 발로 차 버리고 더 다가오면 절연해 버리겠다는 선언 후 졸업하여 또 스스로 자립한 당찬 아가씨였다.
아무래도, 입양한 아이들인 만큼 열 한 살인 시에라나 아도니야보다는 조금 나이가 많았지만. 타말은 열 여덟 살. 암논은 스물 한 살에 압살롬은 스무 살이었다. 차례대로, 압살롬은 스카우트 받고는 독일에서 가장 인기 있는 퀴디치 팀인 발키리 나하트에서 활약하는 전도유망한 수색꾼이었으며, 암논은 그 나이에 성 뭉고 병원의 저주 분야 수석 치료사 - 승진이 보장된 - 이었고, 타말은 마법사 법률 강제 집행부에 그 해의 지원자 중 유일하게 합격한 인재였다. 부장인 아멜리아 본즈가 그녀를 매우 마음에 들어한다던가.
아무튼, 그런 과거도 과거였으며, 지금은 자신들의 업무가 너무나도 바쁜 형제들이었기에 좀처럼 한 자리에 모이는 일은 없었기 때문에 시에라와 아도니야의 얼굴이 환히 밝아졌다. 그들에게도 역시 귀여운 여동생이고 남동생인 것이었다. 막내둥이 두 명은.
"일곱 시까지 오겠다고 했으니까, 이제 곧 오겠구나. 자아, 시에라. 아도니야, 그럼 이제 자리에 앉아야지. 여보, 당신도 어서 앉으세요. 곧 음식도 다 완성되니까요."
"네에─!"
은발의 어린 아이 둘은 깡총 뛰듯 의자 위에 폭 걸터앉았다. 아직 아이였던 둘에게는 조금 높았으나, 그들은 익숙한 듯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 등받이에 허리를 딱 붙이고 등을 곧게 세운 채, 교과서에나 나올 것 같은 자세로 얌전히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사소한 대화를 나누며 - 그것은 보통 호그와트에 관한 것이었다 - 꺄르르 웃고 또 떠드는 중, 고풍스러운 벽난로에서 녹빛 불꽃이 화려하게 타올랐다.
"──야아, 집도 오랜만이구만. 아, 나 아직 안 늦었지? 이야, 시에라. 입학 축하한다."
".....!"
"아도니야도, 건강하게 지냈지? 아프면 안 된다? 암논 그 자식처럼 뭐 손에 묻으면 안 되니 무슨 주문이 이러쿵 저러쿵 떠드는 것도 웃기고 남자앤 좀 구르기도 하고 해야 하지만, 그래도 적당히는 조심하라고."
"네, 형!"
"아버지 어머니도, 그간 건강하셨죠?"
먼저 나타난 것은 검은 머리카락이 가볍게 목 뒤를 덮고, 빠져들 듯한 청회색 눈동자를 빛내는 청년이었다. 두 아이가 부른 대로, 차남 압살롬이었으며, 그에 뒤질세라 곧 타오르는 붉은 머리카락에 청록색 눈동자를 가진 아가씨와, 어두운 금빛 머리카락을 길게 길러 묶은 다소 고압적으로 보이는 보랏빛 눈의 청년이 뒤따라 나타났다.
"아오, 이 빌어먹을 자ㅅ...형. 아프지도 않았냐? 진짜 성격이 너무 더러워서 병도 피해가는 것 아냐? 어떻게 병원에서 거의 사는데 옮지도 않냐."
"시끄럽다. 여전히 뇌도 근육 같군."
"시에라, 아도니야. 너희들은 저렇게 되면 안 돼? 저 두 오빠..랑 형은, 닮으면 안 되는 거라고 꼭 기억해 둬?"
""네에──""
"그래도, 오랜만에 다들 모였으니까. 암논, 압살롬. 그만 반가워 하고 이제 자리에 앉아 주세요. 타말, 시에라에게 그 쪽의 냅킨을 건네주겠나요? 아, 고마워요, 제미니."
"얘들아, 식사 완성이야! 자아, 그럼. 다들 이제 앉고!"
갓 구운 온갖 종류의 빵과 직접 만든 진한 잼, 입 안에서 녹아내리는 버터. 다섯 가지 요리법의 포들한 달걀 요리들과 윤기가 흐른 베이컨과 소시지. 먹기 좋은 두께의 햄과 노릇하게 완성된 감자. 쥬스와 커피, 홍차와 우유. 샐러드에 와플, 크림과 팬케이크. 빠알간 홍옥과 산더미 같은 과일들. 담백하게 구운 생선과 뽀오얀 요거트가 한 자리에 차려졌다. 누군가는 냄새가 좋다며 감탄을 하고, 누군가는 몰래 소시지 한 조각을 슬쩍 집어먹고. 그것을 또 잡고는 놀리고. 소란스럽고도 화목한 아침의 시간이었다.
01/
"그럼, 이제 짐은 다 실었고. 잊은 건 없지요, 시에라?"
"네에! 전부 다 확인했어요!"
"그렇군요. 뭐어, 당신이라면 알아서 잘 했겠지만. 혹시라도 가서 빠뜨린 것이 생각난다면 부디 바로 연락을 해 주세요. 곧바로 보내 줄 테니까요."
"네, 아버님!"
9와 4분의 3번 승강장. 한창 자식을 학교도 돌려보내는 - 혹은 처음 보내는 부모들과 그 아이들 틈에서도, 시에라와 그 가족은 매우 눈에 띄는 사람들이었다. 그것은 그들의 분위기 때문도, 눈에 띄는 외모 때문이란 것도 전부 다 해당하는 것이었으나, 단지 그 뿐이 아닌 - 그들을 알아보는 사람들이 괜스레 말을 붙이는 통에 더해진 것이었다.
그들 가족은 이름을 지금은 쓰이지도 않는 옛 히브리 말로 붙였으나 - 조상의 뿌리가 그 쪽 근방이라 하였다. 영국 밖에서는 아마 멀린보다 더, 그리고 영국 안에서도 유명한 마법사 솔로몬 왕의 후손이라고. - 성씨와 아버지 다윗의 이름만큼은 밖에서는 영어로 불렀는데, 하여 그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을 몇 번이고 만난 것이었다.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다윗 - 영어식으로 읽으면 데이비드, 는 오러부터 시작하여 온갖 일을 성실하고 완벽하게 끝내어 결국 젊은 나이에 위즌가모트의 일원 및 국제 마법 국가 연합 ( United Nation of Wizardry ) 의 영국 대표직을 수행중인 유명인이었으니까. 거기에 귀족적인 일부 마법사들 - 압살롬은 이것을 혈통 차별주의자 개자식들 ( Pure - Bloodist Bastards ) 이라고 불렀다 - 이 동경해 마지 않는 수천 년을 내리 이어져온 가문. 마지막으로, 모난 데 없이 사람을 가리지 않는 특유의 사상과 성격으로 위의 순수 혈통 귀족주의자와 머글 출신 파, 혼혈 출신 파 등을 적절하게 잘 중재해 온 마법사라면 더더욱.
"우웩, 아버지. 저 인사들 그냥 싸그리 좀 무시해 버리면 안 됩니까? 가뜩이나 우리 시에라 가서 슬픈데 정신 산만하게 하잖아요."
"아하하. 하지만 압살롬. 인사를 해 온 것을 넘겨들을 수는 없지 않나요. 암논, 타말. 둘은 이제 인사를 마쳤나요?"
"예. ...시에라, 힘든 일 있으면 언제든 연락하도록. ..마법 약 수업의 과제물 정도는 모르겠다면 언제든 보내 주어도 좋다."
"암논 오빠, 지금 장난해?! 애한테 뭘 허락하는 거얏!"
"어머나, 타말. 하지만 시에라가 그럴 아이가 아니라는 건 너도 잘 알잖니?"
"윽, 어머니.. 그건 그렇지만요."
"..누나, 화이팅!"
"으응. ...아버님, 어머님. 타말 언니, 압살롬 오라버님, 암논 오라버님, 아도니야. 제미니. 뤼미에르. 세바스찬. 저어, 열심히 할게요!"
다윗은 빙그레 웃고는 무릎을 숙였다. 한 쪽 무릎이 땅에 닿았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대신, 그저 귀엽고 사랑스러운 딸아이를 꼬옥
끌어안았을 뿐이었다. 이 때만큼은 암논도, 압살롬도 입을 다문 채, 그저 어깨를 으쓱하며 어쩔 수 없다는 듯한 미소를 희미하게 머금은 채
가만히 지켜보는 것이었다.
"시에라. 저도, 밧세바도. 당신의 형제자매들도. 우리는 당신을 믿어요. 당신이 항상, 전부 다 잘 할 거란 말이 아니에요.
그저 우리 딸이, 내 소중한 아이가 건강하고, 행복하고, 후회 없는 시간을 보낼 수 있기를. 있으리라고, 그렇게 믿고 있어요. ...그럴 수 있지요?"
"... 역시, 조금은 긴장 되지만.. ..열심히 노력할게요!"
"아하하. 좋은 대답이에요. 안심이 되는군요. 자아, 그럼 이제 슬슬 탑승할 시간이네요."
말을 마친 아버지,는 딸을 조금 더, 조금 더 강하게 꽈악 끌어안았다. 석 달 간의 짧은 이별이지만, 역시 막상 이 순간에는 조금 아쉬운 것이었다.
아니. 그래도, 더 큰 하늘로 나아가는 순간이니까. 그는 살짝 미소지은 채 꽉 안았던 팔을 풀었다.
"그럼, 저. 다녀오겠습니다!"
"건강 조심해──!"
"괴롭히는 놈..은 없겠고, 집적대는 놈 있으면 꼭 오빠한테 연락해라, 약속이다?"
"누나, 힘내..!"
"즐거운 학기, 보내라."
"안녕히 다녀오십시오, 아가씨!"
"모쪼록 건강히!"
"기다리고 있겠습니다요!"
시에라의 남매들과 세 집요정이 저마다 한 마디씩 외친다. 뛰어들어가는 소녀를 보며, 다윗과 밧세바는 그저 웃는 얼굴로 손을 흔들 뿐이었다. 그것에 답하듯, 시에라 또한 크게, 붕붕 손을 흔들었다. 적당히 빈 객실에 들어가서도, 창문을 열고는 계속해서. 이윽고 열차가, 길고 높은 경적 소리와 함께 철컹, 철컹, 움직이기 시작했고. 그들이 보이지 않게 되고서야 시에라는 객실의 의자에 폭 안기듯 깊이 앉았다.
역시, 집을 떠나는 것은 처음이라 조금 어쩐지 아련한 기분이 들었다. 누군가와 이야기라도 나눌 수 있다면 좋으련만, 소문이 퍼진 탓인지, 마법사 집안 출신인 듯한 아이들은 객실 안에 얌전히, 인형처럼 앉아 있는 그녀를 보고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감탄하는 목소리로 저들끼리 소곤거리며 지나갔고, 아니면 문을 열려다가 자신이 그녀를 방해해도 되는 것인지, 같은 요지의 중얼거림을 흘리고는 곧 다른 객실로 가 버렸으니까. 머글 출신인 듯한 학생들에 있어서는 또 그녀를 보곤 동경하는 듯한 목소리로 소곤거리면서 문 밖에서 은근히 시선을 향할 뿐이었다.
우으, 어쩐지. 조금 외로울지도.
똑똑.
시에라가 그렇게 생각하며 입을 작게 오므릴 즈음, 누군가 가볍게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02/
곧 가볍게 문을 드르륵 연 것은 금발의 소년이었다. 굉장히 예쁘게 생긴 아이. 시에라의 눈 색보다 조금 더 어둡고 진한
꿀타래 같은 금빛에, 투명한 햇빛 같은 빛깔의 머리카락. 소년은 가볍게 객실을 두어 번 두리번 거리듯 살펴보고는, 인형처럼
앉아 있는 시에라를 보고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혼자야?"
가볍게 고개를 끄덕하자, 소년은 작게 흐응, 중얼거리고는 곧바로 쾌활하면서도 묘한 예의를 갖춘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이 괜찮다면, 여기 앉아도 될까?"
"물론이에요.(Of course, sir.)"
"존댓말..? 굳이 원래부터 동갑이나 연하에게도 그런 말씨가 아니라면 신경 쓸 필요 없지만."
"... ....정말..?"
"으응, 물론. 그런 것, 그다지 따질 생각은 없으니까."
금발 소년은 핸드 캐리어를 구르지 않도록 바닥에 잘 눕혀 고정시키고는 시에라를 마주보는 자리에 나붓이 앉았다. 삼분의 일
가량의 다른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소년 또한 빳빳하게 다린 교복을 반듯이 입은 상태였다. 이건, 자신도 교복을 입고 오는 편이
좋았을까. 시에라는 단정하고 고운 자신의 옷차림을 내려다보며 아주 조금 고민했다.
"이따가 거의 다 도착하면 잠시 자리를 피할 테니까, 그 때 갈아입으면 좋다고 생각해."
"...?! 아, 으, 응... ..고마워."
"고맙긴. 당연한 거잖아?"
자신은 그렇게 표정이 읽기 쉬웠던 것일까. 시에라는 조금 뾰로통해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지만, 곧 고개를 두어 번 붕붕 가볍게
흔들고는 다시 소년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흘러내린 은사가 기분 좋은 소리와 함께 사락였다.
"그, 이름. 물어봐도 될까..?"
"응? 아아, ..샤를."
"...샤를(Charles)..? 프랑스 식 발음이네.. 프랑스 계?"
"뭐어, 그런 셈일까나. 당신은?"
"시에라. 시에라 샤로메 셀레스타인 (Sherra Shlome Celestine). 시에라는 Cierra 가 아니라 Sherra, 라고 써."
"그렇구나. 확실히 따로 일러줄 정도로 특이한 철자구나. 어느 쪽이든 프랑스어로는 같은 발음이지만... 그래도, 당신에게는 무척
잘 어울린다고 생각해."
"...! 칭찬 고마워, 샤를..! ..이라고 불러도, 괜찮아?"
"후후, 물론. 영광이야. 시에라."
"와아, 그럼, 잘 부탁해. 샤를!"
"이 쪽이야말로."
시에라는 환하게 웃었다. 조금 긴장했달까, 외롭다는 생각을 했었지만 금새 괜찮아진 기분이었다. 그녀는 빙글빙글
미소를 지으며 옆에 적당히 놓아 두었던 가방에서 커다란 책을 꺼내었다. 고대 그리스의 마법사와 마녀. 고대 그리스어 주문의
분석에 관하여 음운학적 개념으로, 라는, 보통의 일학년생들이라면 보자마자 경련을 일으키는 것을 넘어 제목조차 제대로 읽지 못할 것 같은
책이었지만, 시에라는 아무렇지 않게 휘리릭 책장을 넘겨 접어둔 곳을 펼쳤다.
아마도, 타말이 옆에 있었더라면 여기선 책을 읽을 것이 아니라고 핀잔을 주며 조금 더 대화를 해 보라고 콕콕 쪼았겠지만,
안타깝게도 시에라는 그런 센스는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인사를 나누고 사이 좋게 지내기로 했으면 그걸로 끝. 대부분 다른
마법 세계 명문가의 자녀들처럼, 시에라 또한 파티 같은 것에서 몇 번 인사를 나누고 교류해 본 정도가 '친구 사귀기'의 끝이었으므로.
다윗과 밧세바는 시에라가 조금 더 또래 아이들과 교류를 할 수 있길 바랐지만, 안타깝게도 그들의 저택 주변에는 시에라 또래의
아이들은 없었다: 물론 본인 또한 일부러 방에 쳐박힐 만큼은 아니었지만, 책을 보는 것을 굉장히 즐기기도 했으니까.
아무튼, 정신 없이 책에 빠져들기 시작한 시에라를 흘끗 바라본 후, 샤를 또한 적당한 두께의 책을 한 권 꺼내어 읽기 시작함으로서
객실 안에는 고요함이 감돌았다. 근처 객실들과는 마치 차단된 듯 동떨어진 고요함이었으나, 결코 어색함은 없는, 평온한 공기였다.
03/
"얘들아, 뭣 좀 먹지 않겠니?"
객실 안의 침묵을 깬 것은 카트를 끌고 지나가는 풍채 좋은 판매원 여성의 목소리였다. 온갖 과자류 - 암논이 본다면 치아 질환의 주범이라고 눈을 찌푸릴 법한 - 가 산더미처럼 그득그득 쌓여 있는 카트를 본 시에라는 잠깐 고민했지만, 곧이어 살짝 팔을 내밀고 호박 주스를 샀다. 시클을 지불하는 것이 익숙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착실하게 잘 해냈다고 스스로에게 조금의 자부심을 가지며 시에라는 간이 테이블에 호박 주스를 올려 놓고는 가방을 뒤적여 작은 상자를 꺼내었다. 그녀의 손바닥보다 조금 큰 정도의 상자였지만, 마법은 괜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니까. 분명 클 것도 없는 상자였음에도, 그 안에서는 먼저 타파스 같은 자잘한 요깃거리가 든 상자, 온갖 과자와 초콜릿이 담긴 상자, 조금 더 배가 부를 음식이 담긴 상자가 줄줄이 쏟아져 나온 것이었다.
"함께 먹자!"
번호 | 제목 | 글쓴이 | 날짜 | 조회 수 |
---|---|---|---|---|
공지 | 기존 기록 보관 장소 | 카와이루나링 | 2012.11.20 | 1906 |
공지 | 이 곳은 팀 회의실 입니다. [1] | 카와이 루나링 | 2012.02.20 | 1183 |
197 | 예정 | kisone | 2014.02.20 | 22 |
196 | 라떼 | ??? | 2014.02.19 | 12 |
195 | 도너츠 | 로하 | 2014.02.19 | 9 |
194 | 코코넛 | ??? | 2014.02.15 | 11 |
193 | Secret | 로하 | 2014.02.15 | 5 |
192 | 꼬르륵 [2] | 샌더스 | 2014.02.14 | 27 |
191 | 꿈의 끝에서 | 로하 | 2014.02.13 | 9 |
190 | 망고 | ??? | 2014.02.11 | 17 |
189 | 네 여기 치킨 반반에 무마니 주세요 | 로하 | 2014.02.10 | 11 |
188 | 작성도중 (브금주의!) [1] | 렛잇고 | 2014.02.08 | 18 |
187 | heaven's door | ??? | 2014.02.07 | 8 |
186 | 웨히히 | 사쿠라모찌 | 2014.02.07 | 25 |
185 | 타이가 비뚤어졌어 | 로하 | 2014.02.06 | 6 |
184 | IYAGI | ??? | 2014.02.03 | 26 |
183 | 메이드 인 헤븐 | ???? | 2014.02.02 | 6 |
182 | 이야기 | kisone | 2014.02.02 | 4 |
181 | 냉정과 열정 사이 [7] | sg | 2014.01.30 | 28 |
180 | @_@ | 로하 | 2014.01.29 | 14 |
179 | Tangled | 로하 | 2014.01.26 | 5 |
» | 초코 슈크림 [1] | 롤케잌 | 2014.01.25 | 77 |
00/
살짝 열린 창 틈새로, 자그마한 새 두 마리가 날아와 지저귀었다. 그리고, 인형처럼 폭 잠든 소녀가 번쩍 눈을 뜨고 벌떡 일어나는 것은 그와 동시. 6시에 맞춰 둔 알람은 권속의 장난인지 질투인지 모를 이유로 울리지 않았다. 재빨리 일어난 소녀가 잠이 덜 깬 탐스런 금빛 눈으로 멍하니 침대에 앉은 채 주위를 둘러보자 보인 것은 온갖 군데 너저분하게 널린 옷가지들. 거의 다 비슷한 모양의 하얀 옷이란 것이 문제였지만.
소녀는 멍한 눈으로 어째서 자신이 이렇게 지저분한 상태에서 잠이 들었나, 아니, 그보다 어째서 간밤에는 예장을 준비하지 않은 것인가를 떠올리기 위해 애썼다. 곰곰히 생각했다. 어제──분명히──밤에 언제나와 같은 정찰을 한 뒤──마스터들을 들여보낸 후──그 다음에──함께 간──밤의 달구경──산책에서──낯익은──성상화 꽃밭───약속───그리고...
그 늦은 밤까지 무엇이 있었는지 떠올려 낸 순간, 소녀는 이불에 발이 꼬여 침대에서 굴렀다.
01/
헐레벌떡. 소녀는 재빨리 방과 이어진 화장실로 뛰어들었다. 샴푸, 린스, 아니, 칫솔 먼저인가? 비누는 머리를 닦는 데 쓰는 용도였던가? 소녀는 정신 없이 자신이 무엇을 집어들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구르듯 샤워기를 틀었다. 목욕물을 받을 여유 따윈 없었다. 소녀는 얇은 흰색의 홑옷을 거리낌없이 벗어 던지고는 김이 피어오르는 뜨거운 물에 머리칼을 적셨다. ...어째서 자신이 이렇게 경망스럽게 움직이는 것인지는 그녀 자신도 알지 못했다. 아니, 외출을 준비할 때 목욕을 해야 한다는 것 또한 몰랐으며 여직 그리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 전에, 이러한 '사적인 외출' 자체가 처음이었지만.
아무튼, 중요한 건 그것이 아니다. 소녀는 재빨리 하얗고 가는 팔을 뻗어 통을 집어들었다. 가볍게 두어 번 펌프. 그리고 손에 문질러 거품을 낸 후 - 아니, 실례. 거품을 내려고 '시도'한 뒤에야 소녀는 그것이 린스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런, 낭패를 본 기분으로 소녀는 이미 물에 젖은 머리칼을 살짝 넘기곤 고개를 돌렸다. 샴푸 통, 샴푸 통. 똑같이 생긴 통. 윽, 소녀의 미간이 확 좁아졌다. 곤란한 듯 입매가 쳐졌고 입술을 가볍게 오므렸다. 너무 멀어. 닿을 거리가 아니다. 소녀는 단 수 초간 생전의 일 년 간 했었던 정도의 고민을 한 후 으으, 하는 신음을 내뱉고는 휙, 손을 움직였다.
착. 샴푸 통은 아무렇지 않게 소녀의 손에 들어왔다. 마치 순간이동이라도 한 것처럼. 이런 사소한 일..이랄까, 손수 할 수 있는 일에는 마법을 사용하지 않기로 스스로 결심했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도 있는 법이다, 예외 사항. 이를테면 말이지. 이건 그런 경우니까. 시에라는 그녀 말년의 분쟁 때에도 사용하지 않았던 힘을 아무렇지 않게 쓰고는 다시 수증기 속에 숨어들었다. 아직은 어색한 손놀림으로 부드러운 거품을 내어 흐르는 머리카락을 잘 닦고── 린스를 조심스럽게 짜내어 머리카락에 착착, 그 후는 깨끗하게 행궈주면 되는 일. 이런, 양치질을 잊을 뻔했다. 치약을 이 정도 짜면 되는 것이었나. 윽, 알싸한 느낌에 소녀는 눈을 조금 찌푸렸다. 양치질의 권장 시간은 3분. 그리고는 제대로 입을 헹군다. 세수를 한 번 더 하고 얼굴을 수건으로 제대로 물기가 남지 않도록 닦는다. 그 다음은, 다음은...
아, 로션! 시에라는 생각났다는 듯 욕실의 선반을 열었다. 그녀의 동거인 중 한 명인 소환사 소녀가 이것저것 넣어 두었던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어디 보자, 로션. 로션, 로션이.. 이건 오 드 콜로뉴... 라고 씌여져 있다. 이건, 크림..? 크림이라면 음식의 종류가 아니던가. 욕탕에 잠겨 있으면서 먹으면 되는 음식인가, 이 나라는 목욕 중 크림을 먹는 것인가. 이제 슬슬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깨닫지 못하며 시에라는 열심히 뒤적였다. 이건, 클-렌-징- .. 이것이 무엇인지조차 시에라는 알지 못했다. 그녀의 머릿속에 빼꼼, 자그마한 의혹 하나가 튀어나왔다. 그 아이가 그랬었잖아. '이건 생략 가능'이라고. 그렇다면, 지금처럼 시간이 없을 때에는 '생략 가능' 해도 되지 않을까. 그리고 시에라는 그 머릿속 의문에 충실하게 따랐다. 그리고, 그리고, 물기를 다 닦았으니, 가운.. 가운이.. 순간, 소녀의 표정이 밝아졌고 그녀는 그녀의 체구에 비하면 해변의 천막이나 파라솔처럼 큰 가운을 로브를 뒤집어쓰듯 빙글 돌려 묶었다.
벌컥, 화장실 문을 열고 그녀가 튀듯 나가자 옆에서 이해할 수 없는 소리를 내지르며 구르는 권속 중 한 명의 목소리와 그를 놀리거나 비웃는 다른 목소리들이 들린다. 아몬인가, 딱하게도. 평소와 같았다면 그를 챙겨주었겠으나 유감스럽게도 지금은 여유가 없었다. 시에라는 재빨리 바닥에 널부러진 옷들을 적당히 챙겨 침대 위에 던져놓으며 '드-라-이-기'란 것을 찾아 뒤적였다. 보이지 않아! 어떻게 생겼는지 세밀한 것은 그녀의 '지식'에도 없기에 - 세상의 모든 지식이라 하여 전 가정의 드라이기 제품 종류까지 알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 그녀는 막연히 '알고' 있는 것만을 가지고 그것을 찾아 헤매는 중이었다.
───벽장 속, 없음!
───테이블 위, 없음!
───빨랫바구니 속, 없음!
으, 어디 있는 것인가. 또 '반칙'을 사용해야 하는 것일까. 시에라가 반쯤 울상이 되기 시작하자 보다 못한 것인지 권속 중 하나인 푸르푸르가 강한 바람 한 줄기와 함께 침대 아래의 상자에 들어 있던 드라이기를 꺼내어 가져와 내밀었다. 곧바로 표정이 풀어진 시에라가 마악 내민 받으려는 손을 막은 건 벨리알. 그는 문답무용에 가까운 태도로 시에라를 끌고 테이블 - 겸 화장대. 쓸 일은 없었지만 - 앞에 앉히고는 드라이기를 틀었다.
이것은 어떤 원리일까, 눈을 동그랗게 뜬 채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드라이기의 구멍을 바라보던 시에라는 스위치를 누르자 갑자기 확 나오는 건조하면서도 뜨거운 바람에 움찔 놀라 눈을 꼭 감았다. 그것을 보며 나즈막하게 쿡쿡 웃는 벨리알은 웃음과는 별개로 매끄러운 움직임으로 순백금으로 뽑아낸 듯 달빛을 베틀에 넣고 자은 듯한 은사를 조심스레 빗질하며 만지는 중이었다.
『아씨. 옷은, 옷은──』
"....아."
시에라는 그제서야 자신이 가장 중요한 것에 대해서는 완전히 잊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옷, 맞아, 그랬다. 옷. 그녀는 재빨리 고개를 돌려 아까 자신이 잠에서 덜 깬 채 한 곳에 쑤셔박듯 침대 위에 아무렇게나 던져 둔 옷뭉치를 쳐다보았다. 움직이지 말라며 벨리알이 볼멘소리를 했지만 들리지 않았다. 어어어어떡하면 좋은가. 그녀에게 다른 의복이 더 있었던가. 그녀의 소환사가 자금은 부족하지 않으니 가지고 싶은 것이 있다면 언제든 구입해도 좋다고 했었으나 그녀는 간혹 먹는 자잘한 요깃거리를 제외하고는 그의 금전을 쓰는 일은 없었다.
벨리알이 그 길고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건조시키는 작업을 끝내는 순간, 시에라는 반사적으로 튀어나가 옷장의 문을 열어젖혔다. 기대를 담은 십대 여자아이와 같은 반짝이는 눈으로. 분명히, 적어도 한 벌은 무엇인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보이는 것은 제례복 같은 - 현대 기준에서는 - 이질적이고 정중하기 그지 없는 치렁치렁하고 길고 깨끗한 순백의 의복 한 벌과.
"......."
'그'가 일전에 함께 나갔을 때 사 주었던 옷. '패스트 푸드'라는 것을 먹고 사 주었던 눈처럼 새하얀 옷. 그 때는, .... 순식간에 얼굴이 화끈거리며 열이 오르는 것을 깨닫고는, 그녀는 고개를 붕붕 돌렸다. 뺨을 아직 욕실의 열기가 가시지 않은 뜨거운 손으로 열심히 눌러보았지만 역효과 뿐이었다. 지금의 그녀는 분명, 거울을 본다면 커다란 토마토 같이 보일 것이라 그녀는 단정지었다. 아니, 아니. 그건 미루어두고. 뭘 어떻게 하지? 그녀는 잔뜩 곤란함을 담은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3, 2, 1 !
『아씨, 이건 어때!』
『아가씨. 이런 의복은...』
『이것도 사랑스러울 거에요!』
『아씨가 입으면 귀여울 것 같은데.』
『이거라면 그 놈도 홀딱이에요! ...아니, 이미 홀딱인가. 아무튼 뭐!』
도대체 그들은 게헤나에서 무엇을 쌓아두고 있는 것인가. 온갖 옷으로 추정되는 것들을 들쳐메고 나와 한번에 떠들어대는 통에 시에라는 귀가 울려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즉시 좌중이 조용해졌고 시에라는 가볍게 눈을 감은 채 고개를 몇 번 젓고는 새하얀 의복을 꺼냈다. 일단 되는 데까지 어떻게든 해 봐야... 침대 옆 서랍장 위에 올려둔 그려 두었던 스케치를 꺼내었다. 얼마 전부터 '어쩐지 모를 자그마한 예감'으로 그려 두었던 몇 가지의 옷본. 그리고 시에라는 재빨리 바늘코에 실을 꿰었다. 어어이, 아가씨. 설마 지금 자수 놓으려고? 그건 무리라고! 귓가에서 또 한 번에 여럿이 마구 떠들어대며 그녀를 말리기 시작했다. 아니, 괜찮다. 베짜기도 바느질도 왕위를 받기 전까진 착실하게 해 온 것이었다. 그리고는 황제의 것인 양 화려한 자수를 눈부신 속도로 놓고 또 실을 풀고 밑단을 고치기 시작하는 그녀를 보며 발을 동동 구르던 그녀의 권속들은 서로 눈을 마주쳤다. 물론 그들의 아가씨의 실력과 속도라면 더 아름다우면 아름답지 절대로 어색하지 않을 옷을 완성할 것이었다 : 하지만 그건 현대의 복식이 아니었다. 아무리 잘 어울리고 그림처럼 아름다워도 그것 하나는 부정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건 안 될 일이지. 이번 기회를 놓치면 또 언제 아가씨의 현대 복장을 볼 수 있을지 기약이 없는 것이었다. 그나마 아가씨를 움직일 수 있는 몇 명 중 하나인 남자는 분명히 뭘 입든 아름답다고 입에 발린 - 아니, 그들이 생각하기에도 사실이지만! - 찬사를 늘어놓을 테니까. 효과가 없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그들 중 한 명이 재빨리 소곤거렸다. 아가씨, 정말 예쁘지만. 악마들의 풍습에서는 여자가 남자를 만날 때 손수 자수를 놓은 옷을 입는 건 결혼 전 날 밖에 없다고. 결혼 전 날 결혼 상대를 만날 때! 이 말에 소녀의 손이 멈추었다. 그녀는 새하얗게 된 얼굴로 그녀에게만 보일 그들을 빙빙 둘러보았다. 진짜냐는 듯한 시선이었고, 그들은 짐짓 진지한 표정을 꾸민 채 고개를 열렬히 끄덕였다. 양심에 찔리지는 않았다. 그들은 악마인 것이다. 그것도 고위의 악마. 자잘한 악마는 사람을 고의적으로 해치는 것조차 할 수 없다지만 그들은 그러한 것에는 제한받지 않았다. 아니, 그 전에 이건 보는 인간들의 눈을 호강시켜주는 것일지언정 해치는 것이 아니니까. 거짓말? 그들은 악마다, 다시 한 번 강조하는데. 거짓말 따위 아무것도 아닌 것이었다.
"하..하지만 나는 악마..는 아니지만..."
아니, 그래도 안 돼! 종속 중 하나인 아몬이 조금 강하게 뜯어 말리듯 외쳤고, 움찔한 여자 아이는 곧 엉겁결에 재봉 도구를 내려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