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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비빅 삐비빅

또 아침이었다.

다시 지겨운 하루 일과의 시작이었다.

생각해보니 어제는 개학날이었는데도 불구하고 7교시까지 수업한 건 조금 이상한 일이었다. 어쨌든 잠들어서 상관없지만 말이다.

가끔씩 내 일상에 변화가 찾아올 때도 있다. 참아오다가 지독히도 심한 외로움에 종종 나는 방안 박힌 채, 울기도 했다. 물론, 그 반복적인 학교를 다녀 온 뒤에 말이다.

언제나 방은 낯설었다. 그리고 항상 식기는 새것 같았다. -마치 처음부터 아무 것도 없었던 것처럼.- 설거지는 매번 해놓지 않아 쌓여져있지만, 항상 깨끗하다는 느낌은 지워지지 않았다.

아마도 나는 설거지거리를 일부러 쌓아놓은 것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하지만 그 대상이 누구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리고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항상 나의 집에 사람은 살고 있지 않았다.

어제처럼 먹구름 가득 낀 하늘에서는 조금씩, 조금씩 비가 내리고 있었다. 잔잔하고 평화로운, 싸늘하고 외로운 그 봄비가 창 밖에서 내리고 있었다.

오늘 조금 다른 것은 그 비의 세기였다. 누구를 위함인지 빗줄기는 상당히 가늘었다. 언뜻 보면 마치 가느다란 실처럼 보드라운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래도 나에게는 비 온다는 사실 자체가 상당히 기분 나빴다. 비 올 때는 옷이 젖으니까 말이다.


내가 모든 준비를 마치고 학교로 가기 위해서 밖을 나왔을 때는 여전히 그 비가 내리고 있었다. 억센 비가 아닌 것은 불행 중 다행이지만 여전히 불편하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우산을 펼치고 현관 밖을 나갔다. 일전에는 말하지 않았지만, 지하철을 타기 위해서는 조금 걸어가야 한다. 시간이 그다지 걸리지 않지만 분명 걸어야했다.

비오는 날씨에는 소리가 좀처럼 들리지 않았다. 비 때문에 음파의 범위가 작아진다는 과학적인 사실에 내가 귀를 닫는 행동이 추가되어 비오는 날 만큼은 나는 귀머거리가 된다. 그만큼 시력은 좋아진다는 이야기가 된다.

오늘은 그래서 그런지 비교적 많은 동네 풍경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뿐이었다. 단순히 더 신경 써서 앞을 본다는 이야기이지, 정서까지 발달한다는 이야기는 아니기 때문이다.

비 내리는 거리는 조용한 만큼이나 무서웠다. 소리 없는, 기척 없는 거리가 우리 집을 닮았기 때문에 더욱 무서웠다.

문득 나는 머릿속에 몇 가지의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무언가를 외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도와줘. 꺼내줘...’

어디서 도와달라고? 누구를? 왜? 도대체 왜 너는 말하고 있는 거지?
스스로에게 질문했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 외침을 묵살했다. 아니, 정확히는 묵살하려고 했다.

하지만 신은 내가 궁금해 하는 모습을 참지 못했던 것이 틀림없었다. 그것에 대한 답이 내 눈앞에 펼쳐져 있었기 때문이다.

비 내리는 내 시야 앞에서는 나신의 소녀가 청초한 얼굴로 잠들어 있었다.
내가 당황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얼굴이 점점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이런 꼬맹이를 보고 흥분하는 걸까? 아니 그런 걸 떠나서 그 소녀가 그 자리에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었다.

무엇보다도 처음으로 내가 당황한다는 사실이 더 놀라웠다. 빗속에서 짧은 시간동안 기분을 정리한 후에 내린 결정은, 그녀가 누군지는 몰라도 이대로 내버려둔다면 죽게 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이미 보랏빛으로 변해버린 입술과 백짓장처럼 하얀 피부, 그리고 오들오들 떨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보면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런 생각이 머릿속에 떠오르자, 재빨리 나는 그것을 행동으로 옮겼다. 나는 소녀의 가녀린 팔을 들어서 등에 업어버렸다.

“차가워...”

빗속에서 온통 젖어있던 탓에 소녀를 업은 나에게도 온기가 아닌 축축한 물기만 등을 적시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그다지 중요한 사실이 아니었다. 이미 우산을 내다버릴 정도로 소녀의 상태는 안 좋아 보였기 때문이다.

일단은 근처 병원이 상당히 먼 탓으로 내 집으로 그녀를 옮기기로 결정한 나는 뛰기 시작했다.

철퍽 철퍽 철퍽

비오는 날이라 땅바닥은 발바닥과 빗물의 오묘한 마찰음이 발소리를 대신했다. 그때는 내가 왜 그런 짓을 했는지 모르겠다. 보통 때였다면 분명 구급차를 부른 채, 집으로 들어가서 내 할 일을 해야 했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은 내 몸으로 직접 소녀를 안고 간 것이었다. 흔히 말하는 기회일 수도 있었고, 하느님의 축복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하지만 나에겐 그때까지만 해도 소녀의 발견은 조금 특이한 ‘일상’일 뿐이었다.

신고한 뒤 어떤 조치를 취하든 바라보기만 하면 되었다. 적어도 그때까지는 그렇게 생각했다.

내가 그런 사치스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땐, 이미 소녀는 내 방으로 옮겨진 후였다.

물기를 마른 수건으로 조심스레 닦아주고, 운 좋게도 친척동생이-물론 여동생이다.-지난번에 두고 간 옷과 속옷을 꺼내어 개어 놓은 후에 이불을 덮어주었다. 몸은 아직 추위가 안 풀린 것 같지는 안지만 연신 천진한 얼굴을 한 채, 곤하게 자고 있었다.
다행인지, 소녀에게서는 열이 나지 않았고 다만 피곤한지 계속 자고 있었다.

“다행이야...”

아무 이상은 없는 것 같아 다행이다. 그제야 나는 소녀의 인상착의를 꼼꼼히 바라보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엷은 연두색을 띈 머리가 소녀의 등허리까지 자라나 있었고, 피부는 역시 아이답게 매우 깨끗하고 부드러웠다. 마치 이국의 아이처럼 특이한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는 소녀였다.

이 아이가 먼저 깨어나면 무어라고 말할까?

나는 그렇게 한참을 그 소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는 자고 있는 소녀를 향해서 인지, 더 멀리 있는 사람에게 인지 모를 혼잣말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당신 말이야... 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었던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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