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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Antares[0.5막] - Follow me 16 -

2006.07.28 10:32

히이로 조회 수:16401

"몸 상태가 말이 아니군. 눈은 또 왜 그런 건가? 상태가 좋아 보이지 않는걸 자네."

헬무트가 짐짓 유쾌한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하지만 필립은 여전히 경계를 늦추지 않은 채, 마르니에를 쥐고 네르바의 곁을 지킨다. 말로는 자신의 몸을 걱정한다지만, 유쾌한 목소리와 필립이 처한 상황은 헬무트의 목소리와는 전혀 맞지 않았다. 자신들의 승리를  확신한 상태에서 표면상의 예의를 차리고 있다. 필립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재미없는 친구로군. 말을 걸면 대답 정도는 해줘야지 필립군."

"…네가 내 이름을 어떻게 알지?"

"이봐, 그렇게 살벌한 눈빛으로 말하지 말라고. 아까 자네 입으로 스스로 말하지 않았나? 그리고…현재 내 입장에선 자네의 이름을 잊어먹어선 안되기 때문이지."

"무슨 소리냐?"

필립의 말에 답변 대신 품속에서 구겨진 종이를 꺼내드는 헬무트. 그것은 개전하기 직전, 상퀼로트를 도발하기 위해 필립이 써 보낸 서찰이었다. 그걸 확인한 순간 필립의 이마에 식은땀이 송글송글 맺히기 시작했다. 자신이 보낸 서찰을 가지고 있다는 뜻은……. 이 자가 이번 발사로크 군대의 총사령관이라는 것을 뜻했기 때문이다.

"자네의 명문장이 한동안 아군 지휘관, 물론 나도 포함이네. 모두의 피가 끓어올랐었지. 자네를 어떻게 죽여야 분이 풀리고, 국가의 위신을 세울지를 고민하면서 말이야."

"……."

헬무트의 말을 들으며 필립은 무의식적으로 네르바에게 더욱 밀착한다. 하필이면 이런 상황에서 최악의 상대를 만난 자신의 운 없음을 원망하면서 말이다. 상대가 자신을 살려둘 이유가 전혀 없었다. 지금 자신을 가지고 이러는 건, 치욕에 몸부림치다 죽으라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한 필립은 이빨을 지그시 깨물었다.

"어쨌튼간, 만나서 반갑네. 나이는 28세. 발사로크군 상퀼로트와 케클론 중기병단의 총지휘관, 헬무트라고 하지. 과거 귀국에서의 신분이 노예라 성은 없네."

"…죽일 테면 어서 죽여라. 호락호락 갈 생각은 없지만 말이다."

"하아, 뭐랄까, 젊은 사람 치곤 상당히 답답하군."

"이런 상황에 처하면 10살 먹은 꼬맹이라도 이럴 것이다. 그리고 아직 30대도 안된 녀석이 그런 말을 하다니 기가 차는군."

헬무트가 한숨을 쉬며 중얼거리자 필립이 거칠게 응수한다. 네르바 만큼은 아니었지만, 필립도 귀족이었고, 자존심은 강한 편에 속했기에 이런 식으로 모욕을 당하는 것은 참을 수 없었다. 한편,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상대가 계속 비협조적으로 나오자, 헬무트도 짜증이 치미는지 표정이 굳어가기 시작했다.

"너무 그렇게 말하지 말라고. 내가 이렇게 친히 나온 건 제안을 하기 위해서다."

"제안?"

"그렇지. 어떤 조건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너와, 옆에 기절한 여자가 사느냐 죽느냐가 결정되지. 들어보겠나?"

"…지금 상황이면 네 말 한마디에 모든 걸 결정할 수 있을 텐데 이런 짓을 하는 의도가 뭐냐?"

"자꾸 짜증이 치밀게 하지 마라 꼬마. 지금 네가 그런 걸 따지면서 나한테 개길 상황이 아니라고 보는데. 그 정도 상황파악도 안 되는 놈이 제국의 지휘관이었나?"

헬무트의 목소리에 짜증이 섞이기 시작하자 필립은 입을 굳게 다문다. 저 헬무트라는 작자가 이런 일을 함으로써 얻는 이득이 무엇일지 도저히 짐작 가지 않았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시간을 끌면 끌수록 자신들이 유리했다.
조금만 더 버틴다면 전열을 정비한 나인발트, 익시드 나이츠가 밀려들어 올 테니 말이다. 머릿속으로 여러 가지 이득을 따져본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헬무트도 표정을 풀고는 시원한 미소를 짓는다. 그리고 필립을 향해 입을 열었다.

"조건은 크게 4가지다. 우선, 협곡을 내 놓는다면 모두의 신병을 보장하마. 물론 지휘관들은 예외다. 두 번째, 한 쪽이 전멸할 때까지 힘을 겨뤄보는 것이다. 참고로 이걸 선택하는 순간, 본보기로 너와, 그 여자를 죽여버리겠다. 세 번째, 일단 너희 둘을 풀어 줄 테니 정확히 3일 동안 휴전 후, 다시 전투를 재개한다. 이것도 친절히 귀띔해 주자면, 그때쯤에는 너희뿐만 아니라 우리도 지원군이 도착해 있을 걸."  

필립의 표정이 굳어갔다. 대충 자신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조건을 내걸 것이라 생각은 했었지만, 막상 귀로 듣고 보니 상황의 암울함을 다시 한번 뼈저리게 느꼈던 것이다. 마음 같아서는 2번째 조건을 선택하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자신은 물론, 네르바도 처참하게 살해당할 것이다.
죽는 건 두려운 일이다. 그리고, 네르바가 죽는 다는 것은 필립으로써는 생각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네 번째, 너와 나, 총지휘관끼리 결투를 하는 것이다. 아, 착각하지는 마. 이기는 쪽 마음대로 하는 것은 아니니까. 하지만 만약 네가 이긴다면, 협곡을 점령한 후 생기는 포로에 관해서는 관대한 조치를 내려주……."

"세 번째로 하겠다."

헬무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조건을 선택한 필립은, 한 팔로 힘겹게 네르바를 들쳐업고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당황해서였는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는 헬무트의 뒷모습을 뒤로하고 말이다. 주변을 포위하고 있던 상퀼로트들도, 필립의 당당한 걸음걸이에 슬금슬금 길을 비켜주고 있었다.
필립의 입장에서는 더 이상 그의 말을 들어볼 것도 없었다. 첫 번째 조건은 당연히 거절이고, 두 번째 조건은 네르바를 위해서 포기했다. 확실히 기사단 전체가 지친 상황에서 혈전을 벌이기보다는, 휴식을 취하는 것이 바람직했다. 또한 진군 중인 나인발트 나이츠 본대를 끌어들일 수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젤리크 나이츠에게 공격당하지 않는 상황을 만들 가능성도 있었다. 네 번재 조건은 생각할 가치가 없는 제안이었다. 자신은 왼팔이 부러진 상황. 절대로 이길 리가 없었다. 또한, 그 제안 이면에는 상대의 승부욕과 오만함, 이미 발사로크의 승리를 확신한 상태에서의 여흥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풍겨서, 필립으로써는 내키지가 않았던 것이다.

'나인발트 나이츠가 있다는 것을 알면……함부로 행동하진 못하겠지.'

어차피 자신은 독단적으로 나인발트 나이츠 본대를 이곳에 끌어들였다. 전투에서 승리한다해도 분명 군사재판에 회부될 것이다. 자신의 앞날이 어느 것을 선택해도 비슷하다면…한 사람이라도 더 살릴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것에 투자하는 것이 옳다고, 필립은 생각했다. 반면, 헬무트는 필립이 뒷모습을 보이자 다급했는지, 빠른 목소리로 끊어진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세 번째를 선택한 건가. 뭐 당사자의 결정이니 내가 할 말은 없지만…실망이군."

"…네가 제시한 조건 중에 선택한 것뿐이다. 더 이상 토를 달지 않았으면 좋겠군."

"아아, 알고있네. 하지만 말야……. 자네의 아버지는 이렇지 않았기에 난 아들인 자네가 그런 결정을 내릴 줄은 생각도 못하고 있었네. 하긴, 부자라고 해서 성격까지 똑같아야 한다는 법은 없느니 말이야. 훗."

비아냥이 섞인 헬무트의 말에서 그의 아버지 필로스 후작이 거론되자, 필립의 발이 멈춰 섰다. 이런 그의 모습을 보면서 헬무트는 자신의 의도대로 되었다는 듯, 득의양양한 표정이다. 여전히 네르바를 업은 채로 그가 뒤를 돌아본다. 아직까지도 원상태가 아닌 그의 붉은 눈이 섬뜩한 느낌을 자아냈다. 하지만 아직 그 속에 살기가 묻어있지는 않았다.

"아버지는 아는가?"

"물론이다."

"어떤 사이지?"

"그다지 좋은 관계는 아니었다고 말해두지. 스쳐 지나가는 작은 인연 중 하나였을 뿐."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줬으면 한다."

상황이 역전되어 이젠 필립이 묻고 헬무트가 답변을 한다. 헬무트는 필립의 마지막 질문에 자신의 배틀 엑스를 들어 그가 서 있는 쪽으로 내밀었다. 헬무트가 내미는 배틀 엑스는 상당히 낡아 보였고, 무기의 질 자체도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다.
하지만 한가지 특징이 있다면, 낡은 티가 팍팍 나는 손잡이 부분과는 달리 날 부분은 그다지 오래되어 보이지 않는다는 정도.

"수많은 사람이 이 녀석에게 목숨을 빼앗겼지. 너는 귀족이라 모르겠지만, 발사로크에서 일반적으로 한 부대의 총지휘를 맡으려면,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다 해도 나이가 30대 후반이 되어서야 가능하다. 그런데 자네와 나이 차가 그다지 나지 않는 내가 왜, 이 자리에서 이 직책을 가지고 서 있을까? 그건 바로 작센성에서……."

"그만! 더 이상 말하지 마라!"

헬무트의 말을 끊으며 필립이 발작하듯 소리친다. 헬무트가 친절하게 설명해주지 않아도 말하고자 하는 내용의 뭔지는 알 수 있었다. 혼란스러웠다. 아버지가 저런 어린 상대에게 목숨을 빼앗겼다는 것은 도저히 필립의 머릿속에서 용납이 되지 않고 있었다.
아버지의 실력은 항상 그분에게 검을 배워온 자신이 가장 잘 안다. 저런 뜨내기 따위에게 돌아가실 리가 없었다.

"헉! 헉! 헉!"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군. 이거 원, 날 그렇게 우습게 봤었다니 기분이 좋진 않군. 하지만 사실이다. 네 아비의 목을 벤 자는 네가 막연히 상상하던 인물이 아닌 바로 나다."

"닥쳐!"

네르바를 떨어트리듯 땅에 내려놓으며 한 팔로 마르니에를 뽑아 소리치는 필립. 예상외로 격정적인 상대의 반응에 약간 당황스러워 하는 헬무트였으나, 결론적으론 자신이 원하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필립의 마르니에를 바라보며, 헬무트는 자신의 말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담담한 어조였다.

"지금 그 행동이 의미하는 바가 뭔가?"

"몰라서 묻는 건가!"

"후…좋아. 자네의 뜻을 존중해주지. 단, 시작하기 전에 몇 가지 해줄 말이 있다. 후작, 그러니까 자네 아버지의 최후에 관한 것들 말이다. 듣겠는가?"

헬무트의 말에 필립은 슬그머니 마르니에를 아래로 내린다. 성이 함락된 직후, 발사로크에서 들려오는 소식들 중 아버지에 관한 걸 찾아보려 노력했으나 허사였었다. '후작이 전사하고 성이 함락되었다.'라는 간단한 문장 뿐이었지 아버지의 최후에 관한 소식은 단 한 건도 없었다.
오히려 후작의 시신이 눈앞에서 사라졌다 따위의 허무맹랑한 거짓말만이 한때 필립의 주변을 에워쌌던 것이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상대는 아버지의 마지막을 그 누구보다 가까이 에서 보았을 것이다. 그러니까 정확하게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아버지가…아버지가 어떻게 생을 마감하셨는지를!

"시작하기에 앞서, 자네의 아버지 필로스 후작은 적이지만 훌륭한 인물이었다. 우리 발사로크에서도 후작을 기려 장례를 예를 갖추어 치뤘고, 저택 등은 계속 보존하기로 결정했다는 것을 알기 바란다."

"그런가…그 부분에 있어서는 진심으로 감사를 표한다."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지……."

필립이 감사를 표하자 별일 아니라는 듯 손짓을 하는 헬무트. 그리고 그는 잠시동안 생각에 잠기더니, 성이 함락되던 날 자신이 겪은 후작과의 결투 등을 자신이 경험한 그대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처음, 포위된 상태의 후작의 모습을 본 것에서부터, 후작과 겨루게 된 내용까지를 세세히 말이다. 그리고 필립은 여기서 알지 못했던 새로운 사실을 하나 접할 수 있었다. 그것은 자신이 어렸을 적 자주 봤던 기사, 이즈루트경의 아들인 미첼형이 살아있다는 소식이었다.

"후작은 어차피 승산이 없는 걸 알고, 나머지 부하만이라도 살리려고 했다. 또한 우리 군 역시 애초부터 일반 병사들까지 처벌할 생각은 없었기에 그 약속을 지켰고. 이제 후작과 내가 겨룬 내용을 말할 차례인가? 그 당시 철없는 어른에 불과했던 나는 전사한 귀족의 이름을 들먹이며 네 아버지를 건드렸지. 뭐, 결론적으로는 내가 나중에 도발 당한 꼴이 되었지만."

"그래서? 그래서 그 다음은?"

"네 아버지. 그러니까 후작과 결투를 했다. 내 실력은…당시의 내 실력을 솔직히 밝히자면 난 후작의 실력에 한참 못 미쳤고, 최후에는 무기가 부러지고 그의 검에 생사가 달린 운명이 되었었지."

필립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이 자의 말대로 라면 아버지가 패할 이유가 전혀 없지 않은가? 그런데 결과는 어이가 없게도 아버지의 전사였다. 그렇다면 결국, 상대가 부정한 방법을 썼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분명 비열한 방법을 썼을 것이라 짐작하는 필립. 더욱더 헬무트에 대한 적개심이 짙어지고 있는 그 였다.

"분명 후작은 날 이겼고, 지체없이 나를 베려고 했지. 이상한 일이 일어난 것이 그때였다."

"이상한 일?"

"날 베려고 검을 치켜든 상태에서 후작의 몸이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그것은…후작이 스스로 움직임을 멈췄다기 보다는, 무언가에 의해 온 몸이 마비된 것 같은 느낌을 풍겼지. 짧은 시간이었지만 내 눈에 비친 그의 모습은, 살아있지만, 움직이지 못하는 이상한 모습이었다. 산 채로 돌이되었다고나 할까."

"그럴 말도 안돼는……."

헬무트의 말을 들은 필립은 힘없이 중얼거렸다. 그의 말은 지금까지 들어온 허무맹랑한 소문들과 다를 것이 없었다. 마법이라도 순식간에 사람을 돌로 만들거나 굳게 하는 것이 있다는 것은, 듣지도, 보지도 못하였다. 헬무트가 자신을 가지고 논다는 의심도 들었지만, 그의 표정은 거짓을 말하는 자의 얼굴은 아닌 듯 했기에 필립은 더욱더 혼란 속에 빠져들고 있었다.

"믿지 못한다고 해도 사실은 사실. 내가 이 상황에서 자넬 속여 얻는 이득이 뭐가 있길래, 이런 거짓말을 지어냈겠나. 계속 말하겠네. 후작의 몸이 굳어졌을 때, 나는 죽음에 대한 공포로 제정신이 아니었다. 이미 내 하의는 축축하게 소변까지 적신 상태였지. 그런데, 눈앞에 선 나의 목숨을 쥔 자가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난 주저 없이 일어서, 반 토막이 나버린 이 배틀 엑스를 들어 후작의 목을 쳤다. 그리고 이 자리까지 오게 된 것이다."

"믿을 수 없다! 분명 발사로크의 계략일 것이다! 요사스런 말로 날 현혹시키려 하지 마라!"

애써 헬무트의 말을 부정하며 필립이 소리쳤다. 몇 시간, 몇 분전까지만 해도 금속음과 고함소리만이 가득 메우고 있던 협곡은 쥐죽은듯이 고요했다. 이따금씩 울려 퍼지는 필립의 고함소리를  제외하고 말이다. 자신이 직접 경험한 일이었지만 황당했는지, 헬무트도 필립의 행동을 이해한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 부분이 더욱 믿기지 않겠지만……. 내가 후작의 목을 치는 순간, 갑자기 후작을 중심으로 알 수 없는 마법진이 발동되었다."

"마법진이라니? 그건 또 무슨 헛소리냐!"

"나도 모른다. 한가지 확실한 건, 그 마법진이 발동되는 순간, 주변에 엄청난 빛이 퍼졌고, 그것이 사라진 후 유일하게 그 자리에 남아있던 것은 후작의 목뿐이었다."

그의 말이 끝나는 순간 필립은 중심을 잡기 어려웠는지, 가까스로 마르니에를 땅에 딛고 휘청거리는 몸의 중심을 잡았다. 표정에는 허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지금까지 헛소문, 과장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모두 사실이었다.
어쩌면, 헛소문의 근원지가 눈앞에 서있는 헬무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가능성은 희박했다.

"덧붙이자면 당시 우리 군에 마법사는 없었다. 설령 내 말을 믿지 않는다 해도, 그때 그 자리에 있었던 자들도 나와 같은 말을 할 것이다. 뭐 나라고 해도 자네와 같은 반응을 보였겠지만, 인정해야 할 것은 인정 하는게 좋을 것 같군. 필립 폰 에르네오."

"크윽."

침음성을 내뱉으며 헬무트를 노려보는 필립. 부러진 왼팔이 그의 모습을 우스꽝스럽게 하고 있었지만, 내뿜는 기세와 강렬한 눈빛은 다른 요소들을 가볍게 눌러버린 상태였다. 더 이상 말 같은 건 필요 없었다. 그렇게 필립과 헬무트는 각자의 무기를 든 채, 한동안 서로를 뚫어지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시작하기 전에 한가지만 묻자."

"말해봐라."

"아버지의 일. 내가 들려준 진짜 의도가 무엇이냐?"

"후작의 아들이나 된다는 녀석이 말 꼬락서니 하곤."

"뭣이?"

"너희 귀족들이 썩었다는 건 예전부터 알았지만, 부모의 죽음에 관해서 까지도 아예 관심이 없었나보지? 물론, 곧 있으면 아비를 따라갈 널 동정한 측면도 있고……. 가장 중요한 것은 이전에 후작에게 당한 수모를 갚을 기회가 생겼는데 이 정도 서비스는 해줘야 하지 않겠나 큭큭."

말문을 열었던 필립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부끄럽기도 하고 분노가 치밀어 오른 탓이었다. 적이긴 하지만 최소한의 부분에서 호의를 베푸는 상대를 모욕한 것이다. 하지만 상대는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원수, 거기다 자신 역시 손쉽게 처리할 수 있을 것이라 자신만만해하는 모습이 은근슬쩍 그의 심기를 건드리고 있었다.
결국, 상반된 감정을 동시에 느끼며 얼굴을 붉힐 수밖에 없었던 필립이었다. 그런 필립을 재밌다는 듯이 바라보던 헬무트는 낮은 톤으로 천천히 중얼거렸다.

"벌써부터 흥분되는 걸. 후작에 이어 그 아들까지 상대하게 되다니. 이번에는 반드시 실력으로 쓰러트려 출세와, 명예, 지금까지 눌려지냈던 3년을 보상받을 것이다. 큭큭큭."

그가 중얼거리는 순간, 필립의 붉은 눈이 날카로워졌다. 이유는 모른다. 하지만 붉은 눈으로 변한 이후, 그의 신체적 능력은 보통사람보다 월등히 뛰어난 상태로 변해있었다. 그 중 청력도 예외는 아니었던 것. 헬무트는 혼잣말로 중얼거린 것이나 필립의 귀에는 그의 말이 똑똑히 들려왔던 것이다.
상대는 단순하고 오만하다. 자신이 이기지 못한 후작에 대한 열등감을, 아들인 자신을 통해 풀려고 한다. 아버지와 상대할 때도 철이 없었지만 지금도 철이 없는 건 마찬가지라고 필립은 생각했다. 헬무트의 입에서 나오는 연륜과, 신중함은 일종의 거짓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본성을 허울좋은 가면 속에 숨기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자신을 죽이는 순간, 그 개 같은 기질을 다시 내뿜을 순간을 기다리면서 말이다. 방금 전까지 반쯤 죽여놓은 라펜드라는 놈과 틀릴게 전혀 없는 인간이었다.

"너만 흥분 되는게 아냐. 이 빌어먹을 자식아."

필립이 들릴 듯 말 듯 헬무트를 노려보면서 중얼거렸다. 동시에 자신의 왼팔을 힐끗 쳐다본다. 아무리 오만하고 빌어먹을 놈이라고 해도, 실력까지 함부로 평가할 수는 없었다. 기본적으로 일개 병사부터 시작해서 저 지위까지 갔다는 것은, 아버지의 목숨의 대가도 컸지만 실력 역시 받쳐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버지의 죽음이 고작 저런 녀석에게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하자 다시 한 번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필립이었다. 하지만 분노와 현실사이의 거리는 컸다. 자신은 한 쪽 팔 밖에 쓰지 못한다. 상대와 맞붙는다면 절대로 승리는커녕, 자신의 목숨도 보장할 수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물러날 수는 없다.

"제기랄! 이젠 나도 모르겠다. 각오해라!"

덤비면 개죽음, 도망치면 영원한 패배자. 필립은 더 이상 생각하기도 싫다는 듯, 오른 손으로 있는 힘을 다해 마르니에를 움켜쥐고 헬무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자신을 다잡겠다는 듯, 소리를 지른다. 그러면서 헬무트를 향해 달려들 자세를 취했다. 헬무트 역시 배틀 엑스를 쥐고 상기된 표정으로 필립을 노려보고 있다. 마침내, 긴 침묵을 깨고, 필립이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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