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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에는 18금적인 요소라고는 코딱지만큼만 있습니다.
   안심하고 보셔도 될거라고 생각합니다.
   남녀 관계가 꼭 18금만 있는건 아니지만.

   ...안심하십시오. 적어도 제글은 18금입니다(?).


키스까지의 거리 - 세번째

  
   선배를 다시 만난 건 그로부터 일주일 후였다. 둘째누나기 사랑의 도피를 해버린 것이
들킨 탓에 둘째누나는 집으로 돌아갔고, 간만에 혼자가 된 기분을 만끽하고 있을 때 누군가
에게서 전화가 왔다.

  “예. 심유신입니다.”

  [나야, 유신아.]

  “시현선배?”

  산뜻하다고 말할 수 있는 목소리. 내가 알고 있는 여성의 목소리 중에서 가장 맘에 드는
목소리의 주인공은 다름없는 선배였다. 반갑다기보다는 조금 놀랐다. 선배에게는 집 전화번
호를 가르쳐준 적이 없었는데.

  [놀랐니? 핸드폰은 안 받길래. 상천이한테 집 전화번호를 물어봤어.]

  문득 핸드폰을 바라보자 충전을 잊었는지 전원이 꺼져있었다. 나는 핸드폰을 충전기에 꽂
으며 선배에게 대답했다.

  “조금은 놀랐지만…그런데 무슨 일이세요?”

  [응? 아, 그게 그러니까…… 오늘 시간 있니?]

왠지 모르게 주저하며 말하는 선배. 나도 갑자기 시간이 있냐며 물어오는 선배의 말투에
잠시 멍하니 있다가 서둘러 대답했다.

  “예, 있어요. 선배.”

  [그래? 그럼 좀 있다 6시쯤에 늘 만나던 곳에서 보자.]

  “에…예. 6시죠?”

  [응. 6시. 그럼 있다가 봐.]

  전화가 끊어진 후에 조심스럽게 수화기를 내려놓고, 의자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시간은
아직 많이 남아있고, 할 일은 그다지 많이 남아있지 않았다. 선배와 나의 관계는 거의 일방
적이었다. 선배는 늘 갑작스럽게 전화해서 술이나 한잔하자며 불러낼 뿐, 미리 약속을 정하
는 것도 다른 약속을 잡는 일도 없었다. 나는 어지간히 시간이 없으면 선배의 부름을 거절
하지 않았고, 선배는 내가 바쁘다고 하면 절대로 억지로 불러내지 않았다.
  
  “약속이라. 시간이라.”

  나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담배를 피우고, 집안을 좀
정리한 다음에는 말도 안 되게 일찌감치 약속장소에 나가서 기다리자. 사람들한테는 연인이
바람맞힌 것도 모르고 계속 기다리고 있는 남자처럼 보이게.



  내 계획은 금방 무산되었다. 깔끔한 둘째 누나가 머물고 간 터라 청소는 생각보다 금방
끝났고, 약속시간보다 4시간쯤 일찍 집을 나섰다. 늘 선배와 만나던 커피숍에 들어가서 창
가자리에 앉아 커피를 하나 시키고 30분을 멍하니 앉아있었다. 하지만 그게 내가 기다린 시
간의 전부였다.

  “어머? 유신아.”

  놀란 선배의 목소리. 그 목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자 선배의 놀란 얼굴이 눈앞에
있었다. 하지만, 진짜 놀란 건 나였다. 시계가 잘못됐다거나, 내가 앉은 채로 세 시간을 자
버린 게 아니라면 분명 지금은 오후 3시. 약속시간까지는 아직 3시간이 남아있었다.

  “서, 선배?”

  멍하니 선배를 부르자, 선배는 내 앞의 의자에 몸을 앉히고 나와 같은 걸 주문하더니, 곧
재밌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일찍 와서 유신이가 여기로 오는 모습을 보고 싶었는데.”

  “아니, 아무리 그래도 세 시간이나 일찍 나오는 건 좀…….”

  무심코 말을 하다가 문득 내가 할 말이 아니란 걸 깨달았다. 선배는 말을 멈추는 나를 보
며 빙긋이 웃었고, 나는 멋쩍은 얼굴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날씨는 겨울답지 않게 좋지만,
평일이라 그런지 지나치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 팔짱을 낀 채 몸을 붙인 커플이 창 아
래를 지나쳐갔다.

  “유신아, 이제부터 뭐할까?”

  고개를 돌리자 김이 피어오르는 커피를 앞에 두고 턱을 괸 채, 창밖을 바라보는 선배의
모습이 있었다.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준채 선배의 말에 대답한다.

  “뭔가 하실 일이 있어서 부르신 게 아니었어요?”

  “저녁 사주려고 한 건데……. 지금부터 저녁을 먹을 수는 없으니까.”

  난감한 목소리의 선배. 왠지 모르게 그 목소리가 즐거워 보여서 피식 웃었다. 기분 좋은
침묵. 그냥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누군가와 마주앉아 있는 것뿐인데도 알 수 없이 즐거웠다.
창밖에 눈이 내린다. 붉은 풍선이 하늘거리며 걷는다. 끝을 쥐고 있는 것은 머리를 두 갈래
로 땋은 조그만 여자아이. 그리고 그 작은 몸을 업고 있는 오빠 같이 보이는 남자아이. 눈
을 맞는 모습인데도 따듯해 보이는 그 모습. 고개를 돌려 선배를 보자 서내도 미소를 지은
채 나를 바라보았다. 나와 같은 것을 보고 있던 거였을까.

  “선배. 이렇게 된 거 저랑 데이트나 하죠.”

  “데이트?”

  “저녁시간까지 커피하나로 버틸 수는 없으니까요.”

  식어버린 커피를 들어 올려 입에 머금는다. 쌉싸름한 커피의 감촉이 입 안 가득 퍼져나간
다. 선배는 나를 지그시 바라보다가 곧 고개를 끄덕였다.



  배우는 스타급이지만 정작 볼만한 건 특수효과인 재미 꽤나 없고 시간만 긴 영화를 선배
와 낄낄거리면서 보고 나오자 얼추 6시에 가까워져 있었다. 겨울이라 짧은 해는 금세 떨어
져 버리고 내리던 눈은 이제 만만히 보기 힘들 정도로 커다래져 있었다. 선배는 와아, 하고
웃으며 눈을 바라보다가 눈 속으로 뛰어나갔다. 양팔을 벌리고 눈 내리는 한 가운데에 서서
어린아이처럼 눈을 맞는 선배.

  “나, 이렇게 눈 많이 오면 굉장히 기분 좋더라!”

  팔을 벌린 채로 빙글 돌며 웃는다. 그 웃는 얼굴을 보니 왠지 다시 가슴이 두근거렸다.
추위로 빨갛게 된 뺨으로, 손안에 떨어지는 눈을 모아 다시 공중으로 흩뿌린다. 소녀 같은
모습의 선배에게 한걸음을 내딛었다.

  “눈은 좋구나. 하얗고, 깨끗하고, 게다가 아무도 만질 수 없으니까.”

  “더러워지지 않는 걸 좋아하는 거네요. 선배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던 선배는 곧 손을 들어 차가운 손바닥을 장난스럽게 내
뺨에 대어왔다. 차갑고 부드러운 감촉에 조금 움찔하자, 선배는 웃으며 손을 떼었다. 왜인
지, 선배의 손이 떨어져나간다는 것이 아쉽게 느껴졌다. 차가운 손을 감싸 쥐고 입김을 불
어넣던 선배는 고개를 들어 물었다.

  “그럼. 이제 슬슬 저녁 먹으러 갈까? 맛있는데 알아.”

  “아아…예.”

  앞서 걷는 선배의 뒤를 따라 걸었다. 하나로 묶은 머리칼이 걸음에 맞춰 흔들린다. 가느
다란 뒷모습에 어깨에 쌓여나가는 눈송이.

  “선배. 어차피 저녁은 선배가 사실거지요?”

  “응. 그러려고 부른 거잖아.”

  “그럼 선배 집으로 가요.”

  걸음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는 선배. 오늘 자기가 한일에 많이 놀라는 날이군. 나는 속으
로 그렇게 투덜거리고는 선배에게 말했다.

  “선배가 사는 저녁보다는, 선배가……짓는 저녁을 먹고 싶은데요.”

  선배가 사는 저녁보다는, 선배가 먹고 싶어요. 라고 말할 뻔했다. 겨우 뒷마디를 바꾸기는
했지만 결과는 왠지 더 나빠진 듯, 선배는 당황한 표정을 보이더니 조금 후에야 주저하면서
입을 뗐다.

  “나, 요리 굉장히 못해.”

  “그럼 제가 할게요.”

  “고맙긴 한데……그럼 내가 사는 게 아니잖아?”

  피식거리며 웃던 선배는 손을 내밀었다. 반사적으로 내민 손을 잡자, 차가운 손가락이 손
을 감싸왔다.  

  “그럼 가자. 늑대라도 한 마리 데려가는 건 아닐지 몰라?”

  “덮치지 않게 노력해볼게요.”

  장난스럽게 대답하자, 선배는 깔깔거리며 손을 잡아끌었다. 눈 내리는 길을 나란히 걸어
가며, 선배의 차가운 손에 잡힌 손바닥이 왠지 모르게 따듯했다.



  선배의 집은 의외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허름한 옥탑방. 마당에 서면 공중정원의 경
관이라던 선배의 말에 떠올라서 웃음이 나왔다. 집안은 깔끔하고, 솜씨 좋게 정리되어 있어
전혀 좁다는 인상을 받을 수가 없었다.

  “거기 앉아있어. 금방 저녁 할게.”

  “도와드릴까요?”

  “앉아있어, 먹는 게 도와주는 거야.”

  굉장히 자신 없는 목소리로 말하고 주방 쪽으로 걸음을 옮기는 선배의 뒷모습. 나는 피식
웃으며 선배가 말하는 대로 아무데나 주저앉았다. 경이적일 정도로 공간을 잘 활용한 선배
의 집안을 대충 둘러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쓸데없이 시끄러운 주방을 보면 요리가 얼
마나 엉망진창이 될지는 안 봐도 뻔했다.

  “선배. 저거 저렇게 해놓으면 먹는 것보다 넘치는 게 많을 텐데요.”

  “에, 저. 정말?”

  황급히 가스레인지의 불을 줄이는 선배. 도마 위에는 애들 조립완구로 써도 될 두께로 썰
린 당근이 구르고 있었다. 나는 한숨을 쉬고 싱크대로 다가갔다. 냉장고에 걸린 앞치마를
입고 조심스럽게 냄비를 들여다보는 선배의 몸을 잡아 뒤로 슬쩍 밀었다.

  “못하는 정도가 아니네요, 선배.”

  “아무래도, 혼자 살다보니까, 그래.”

  “선배, 그건 보통 홀아비들이 하는 대사란 거 알아요?”

  키득거리며 말하자, 선배는 말문이 막힌 듯 했다. 나는 결국 선배에게서 강제로 바톤을
넘겨받아 선배의 부엌을 점령했다.



  “아아, 잘 먹었다. 웬만한 음식점 카레 안 부럽다.”

  숟가락을 놓고, 숨을 내쉬는 선배. 저 마른 몸에 넣은 밥의 양이 나와 비슷할 정도라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배불러, 배불러 하면서 상에서 물러나 배를 탁탁 두드리는 선배의 모
습을 보자, 웃음이 나왔다. 집에서는 굉장히 홀아비 같구나. 선배.

  “유신이는 요리 정말 잘하는구나.”

  “혼자 사니까요.”
  
  식기를 치우며 대답하자, 선배는 신기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접시를 치우며, 그
러 선배에게 넌지시 말했다.
  
  “카레 넉넉히 해뒀으니까, 또 드시고 싶으면 데워서 드세요.”

  “정말?”
  
  정말로 기뻐하는 표정의 선배. 뭐랄까, 뿌듯하군. 나는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싱크대에
접시들을 넣고 물을 틀었다.

  “아, 설거지 내가 할게.”

  재빨리 다가와 소매를 걷고, 내 옆에 서는 선배. 좁은 계수대안으로 밀어 넣어진 나와 선
배의 손은 접시와 함께 부딪쳤다.

  “선배. 괜찮아요. 할 게 많지 않으니까.”

  “그러니까, 내가.”

  한순간, 선배의 눈길과 마주쳤다. 안경아래의 부드러운 눈동자. 미소 지은 얼굴. 아름다운
입술. 입 맞추고 싶다. 키스하고 싶다. 선배에게. 키스하고 싶다.

  “유신아?”

  하지만, 안 돼. 나는 고개를 저으며 젖은 손으로 선배를 안았다. 놀라는 선배의 몸. 나는
그 몸을 품에 안은 채 선배에게 말했다.

  “선배. 안아도 되요?”

  “에, 지금 안고 있잖…….”

  멍하니 말하던 선배는 말을 멈추었다. 등을 쓰다듬는 나의 손길에 몸을 긴장시키던 선배
는. 곤란한 표정을 짓다가 곧 내 가슴을 밀어냈다.

  “아, 안돼. 유신아.”

  아쉬운 마음보다는 홀가분한 마음이 더 컸다. 나는 조용히 선배의 몸을 놓고 뒤로 물러났
다. 상황에 곤란해 하는 것 같은 선배의 모습.

  “미안해요, 선배. 그만 가 볼게요.”

  “아….”

  뭔가 말하려는 선배에게서 등을 돌리고 그대로 선배의 집을 나섰다. 택시를 잡아타고, 집
에 돌아올 때까지. 나는 뒤를 돌아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어째서, 선배 앞에서는 이렇게
충동적이 되는 걸까. 선배를 사랑한다는 감정인지는 불확실하다. 물론 사랑이 확실한 감정
이냐고 한다면 대답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모르냐고 묻는 다
면 그것 또한 아니다.
  ……알 수 없다. 나는 선배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걸까.
  

  
  [어, 저기 유신아. 나 시현……인데. 새벽이라 자는구나. 응, 하긴 당연한 걸까. 아, 저
어……오늘 밤에 만날 수 있을까? 오늘이라도 좋다면……아직도, 그…나를 안고 싶은 마음
이 남아 있다면. 그렇게……하자.]

  아침에 일어났을 때 핸드폰에 와있는 음성 메시지. 재떨이에 쌓여있는 담배가 툭하고 무
너져 내렸다.





--연재가 늦어서 송구스럽사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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