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ip to content

단편 무제

2008.12.23 21:13

카와이 루나링 조회 수:552

시작은 언제나와 같은 평범한 날이었다.

소소하기 그지없는 날들.
아침에 일어나는 것은 평소와 같이 고역이었다.
시끄럽게 울어대는 자명종을 끄고 다시 이불 속으로 기어 들어가는 것을 세 번쯤 반복.
누군에게 그러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짜증을 내며 겨우 이불을 걷어낸다.

자신을 다그치고 타일러 흐느적거리며 욕실 앞으로 이동.
앞에 있는 체중계를 보고 인사를 건넨다. 안녕?
충격 요법이 먹히지 않는 것을 보니 아직은 안정권인 것 같다.
이전에 한동안은 덕분에 잠이 확 깼었는데 말이지.

욕실에 들어가 한참을 엉망이 된 머리와 싸운다.
머리를 감고 말리는 것도 한 세월.
머리를 자른다면 아침에 좀 더 여유가 생기겠지만...
아직은 딱히 자르고 싶은 생각이 없으니 패스.

아침 시간의 대부분을 몸단장 하는데 사용하는 덕에
식사는 어쩔 수 없이 거르게 된다.
딱히 안 먹어도 괜찮긴 하지만.

밖으로 나와 옷을 갈아입는다.
오늘은 어제 새로 산 핑크톤으로.
그리고 한참을 뒤적거려보지만 어울리는 것을 찾지 못해 결국 청바지.
왠간한 옷은 전부 커버해주는 푸른색 면바지의 위력에 감사를 올린 뒤

가방을 들고 학교로 출발.

 

... 했어야 했다.

 

언제나와 같은 수업을 받고
언제나와 같은 점심을 먹고
언제나와 같은 휴식을 취한다.

그래야만 했다.

무엇하나 달라지지 않고,
무엇하나 어긋나지 않고,
무엇하나 변하지 않는다.

그랬어야만 했다.

때로는 친구들과 함께 술을 마신다든지,
때로는 같이 밤을 새며 놀러 간다든지,
때로는 연인과 함께 데이트를 하고,
때로는 야한짓을 하는

그런 하루하루가 되었어야만 했다.

그런데...

그런데 어째서...

"무슨 일이지?"

편지를 받은 것은 오늘 아침.
막 문을 여는 순간.
우표조차 붙어있지 않은 편지가 한 통.

그 것만이었다면 별로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편지를 전해준 것은 한 마리의 올빼미.
어느 순간부터인지 날 빤히 바라보고 있는 올빼미.
그 올빼미의 발에 묶여있는 작은 편지를 빼어든다.

현실감과는 좀 동떨어진 느낌이지만, 그래도 별 문제는 없었을 것이다.

어디를 보는지 알 수 없던 새빨간 눈동자.
뒤쪽의 사물이 그대로 보이는 투명한 몸.
편지를 집어든 순간 연기처럼 사라져 버리는 모습을 볼 때만 해도,

그래.
익숙한 일인 만큼, 그러려니 할 만한 일이었다.
그 사람이 이런 식으로 편지를 보냈던 것은 가끔이지만, 없던 것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편지에 써 있던 것은 단 두 마디.

그 글귀를 보는 순간 '일상' 이라는 것이 부서져 버린다.

그 사람은 이런 편지를 보내지 않는다.

편지를 쓸 때는 항상 또박또박.
필체만으로도 사람을 매료시킬 수 있을 듯한 달필.
그 것이 이 곳에는 없었다.

순서와 형식을 그대로 따르는 고지식함.
마치 초등학생이 편지 쓰기를 배우는 것 처럼.
그 것이 이 곳에는 없었다.

때로는 동화같은, 때로는 서사시 같은,
시를 읽는 것 같은 느낌까지 주었던 아름다운 문장 역시
이 곳에는 없었다.

단지 그 것만으로도 어떤 일이 생긴 것인지 도저히 상상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이쯤 되면, 무섭다.
있어야 할 것이 없는 것 만으로도 궁금증은 가중되고,
그 궁금증을 일으킨 대상을 생각해보면,
그 것은 공포로 바뀐다.

떠오른다.

영원히 깨닫지 못했으면 좋았을 것 같은 자신의 이름.
영원히 잊은 채로 지냈으면 하는 세계.

그 것은 일상과의 단절을 뜻하는 복귀.

"아아, 이럴 줄 알았으면 어제 야한짓 세번 정도는 했어야 하는데."

손해잖아.
그런 생각을 하며 가방을 내려놓는다.

어제 고집 좀 더 부려줬으면 좋잖아.
투덜거리는 것도 잠시.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
하지만 그 것은 쓸데없는 미련.

이런 상황에 그런 것을 바라면 안되지.

어떤 일이 생긴지 상상할 수 없다.
그렇기에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는지 상상할 수 있다.

돌아온다는 생각,
그런 미련따위는 버리는 것이 좋겠지.


- 집결 심장


짤막하기 그지 없는 편지

달필로는 절대 보이지 않는, 폭력적인 느낌마저 주는 글씨.

잠시 그 것을 노려보다가 그대로 구겨버린다.

집결이란다.
그 어떤 시간도, 일시도 없었다.
다시 말한다면 '지금 당장'

안녕, 나의 친구들.
안녕, 나의 연인.
안녕, 나의 일상.

세 번쯤 말해주는 것으로 모든 미련을 버린다.
각오는 이전부터 하고 있었으니까.
아쉽기는 하지만, 그 아쉬움도 곧 느낄 수 없겠지.

더 이상 이 자리에 서 있는 것은 지금까지의 평범한 대학생이 아니었다.
꼭꼭 숨겨 놓았던 진짜 자신.

영원히 찾지 말았으면 했던 자신.
영원히 찾지 말았어야 했던 자신.

그가, 감겨 있던 눈을 뜬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1148 패스파인더33 [2] azelight 2008.12.24 468
» 무제 [2] 카와이 루나링 2008.12.23 552
1146 패스파인더32 [3] azelight 2008.12.23 436
1145 패스파인더31 [1] azelight 2008.12.22 468
1144 단편 - Canceler [2] 비렌 2008.12.22 573
1143 패스파인더30 [2] azelight 2008.12.21 508
1142 패스파인더29 [1] azelight 2008.12.21 448
1141 패스파인더28 [1] azelight 2008.12.19 553
1140 패스파인더27 [1] azelight 2008.12.18 514
1139 패스파인더26 [1] azelight 2008.12.17 487
1138 패스파인더25 [1] azelight 2008.12.15 557
1137 패스파인더24 [1] azelight 2008.12.14 509
1136 LF- be connected- prologue part2 [1] G.p 2008.12.13 457
1135 LF- be connected- prologue part1 [1] G.p 2008.12.12 748
1134 패스파인더23 [1] azelight 2008.12.12 516
1133 패스파인더22 [2] azelight 2008.12.11 560
1132 패스파인더21 [1] azelight 2008.12.10 586
1131 패스파인더20 [2] azelight 2008.12.09 468
1130 패스파인더19(수) [2] azelight 2008.12.07 575
1129 이윤걸 1 [1] 愛一李安 2008.12.06 560

Powered by Xpress Engine / Designed by Sketchbook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나눔글꼴 설치 안내


이 PC에는 나눔글꼴이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사이트를 나눔글꼴로 보기 위해서는
나눔글꼴을 설치해야 합니다.

설치 취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