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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어느 소년의 종말기

2009.01.30 17:32

악마성루갈백작 조회 수:538

  이것은 어느 소년의 이야기.
  이것은 그것뿐만 아니었던 이야기.
  이것은 단지 그것뿐이었던 이야기.
 
  낙엽을 닮은 어느 소년이 있었다.
  소년의 곁에는 언제나 가을 바람만이 불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 어느 때에도 그의 곁엔 황량한 바람만이 불고 있었다.
 
  소년은 혼자였다. 철저하게 홀로 버려졌다.
  부모라고 할 수 있는 자들은 언제나 싸우는 데에만 정신이 팔렸고,
  그나마 남은 대화도 언제나 '돈' 얘기뿐.
  친구라고 할 수 있는 자들은 언제나 그의 껍데기만 보고 웃어젖힐 뿐.
 
  그런 소년이 무엇을 바랄 수 있었겠는가.
  그는 자신의 마음속에 자라던 꽃을 짓 밟고 나비를 으깨어 죽였다.
 
  그는 알아버렸다.
  이 세상이라는 것이 추하다는 것을.
  정의라고 믿는 것은 악. 사랑이라고 보이는 것은 위선.
  태양은 따뜻한 듯하면서도 시리게 타오르고, 물은 투명한 척 하면서도 그 깊이를 알 수 없다고.
  그때부터, 그의 마음은 썩어 가고, 비뚤어져 가고, 서서히 일그러지고 있었다.
 
  그것에 침식된 순간부터, 마음은 썩어 가고, 비뚤어져 가고, 부정적으로 뒤틀리고,
  구부러지고, 눌리고, 꺾이고, 망가지고, 부서지고, 벗겨지고, 뚫어지고, 새겨지고,
  미치고, 미치고, 미친다.
 
 
  -세상이 나에게 차가움만을 준다면,
  그 차가움조차 느끼지 못하게 내 마음을 그보다 더 차갑게 하면 된다.
 
 
  소년은 세상이 너무 싫었다.
  그 세상에 얽매일 수밖에 없는 자기 자신이라는 존재가 싫을 정도로.
  언제나 노스트라다무스라는 미치광이의 예언, 멸망의 예언이 지금이라도 실현되었으면 하고 바랬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기에, 소년은 좌절했고.
  그러지 못했기에, 그는 현실과 동떨어져 갔다.
 
  도망치지도 못하고, 쇠사슬로 속박되고,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는다.
  아무것도 끝나지 않는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무의미하고 무가치인 시간만을 반복한다.
  반복할수록 마음이 망가지고, 다시 고칠수록 마음이 일그러진다.
  망가져서 마음이 사멸(死滅)하고, 일그러져서 부서지고, 비틀려서 왜곡된다.
 
  구원을 바랐지만, 그 어디에도 신은 없었다.
  적어도 인간이 바라는 그런 신은 존재하지 않았다.
  있다고 하면 그건… 사신(死神)뿐 일 테지.
  끝나지 않는다. 끝나지 않는다. 끝없이. 영원히. 영겁에.
 
  그러나 그런 그가 현실과 동떨어진 대가로 얻은 것은, 그만의 환상세계.
  그는 그곳에서만 미소 지었다.
 
  왜냐하면, 그곳에선
  그가 신이며, 그가 왕이며, 그가 법이었으니까.
 
  바야흐로 그는 환상에 취해 현실을 잊어갔다.
  그리하여 그의 현실과 환상은 어느 순간부터 바뀌어 나갔다. 그가 미소 짓는 곳이 현실.
  그가 좌절하는 곳이 환상으로.
 
  그는 이제 다시는 현실의 추함을 들추지 않았다. 한순간의 악몽이라, 그리 여겼다.
  모든 것이 부질없는 세상, 환상으로 취급해도 무슨 상관이냐고 되새겼다.
 
  그리고 어느 날,
  마른 나뭇잎이 모두 떨어졌을 때, 시나브로 그의 현실은… 다시는 보이지조차 않게 되었다.
 
  그러나,
  현실이라는 지반이 사라진 환상이라는 집은 얼마 가지 못한다.
  그는 알아버렸다. 자기 자신이라는 것은 결국 현실의 존재라고.
 
  잃어버린 자에게는 잃은 것만 보이고, 의심하는 자에게는 의심할 것만이 보인다.
  자신이 만든 현실의 미소.
  그 미소가 어느 순간부터 소년의 눈엔,
  현실 속에서 보였던 그 위선으로 보였던 것이다. 너무나도 추한 환상.
 
  아니다. 환상은 아무 문제도 없었다. 추한 것은… 현실이라는 곳에 찌들었던 자신의 더러움.
  현실이라는 존재로 태어난 자신의 저주스러운 운명. 그것이 환상을 오염시킨 것이다.
  그렇다고 소년은 생각했다.
 
  그의 마지막 보루인 환상마저도 현실의 가혹함에 더럽혀져 버렸을 때.
  다시 올려다본 잿빛 하늘. 돌아온 현실의 세상을 그는 증오하다 못해 저주했다.
  저주하고 또 저주했다.
 
 
  -어찌하여. 어찌하여… 세상은 이리도 더럽단 말인가!
 
 
  그는 그 더러움이 참을 수 없었다.
  세상의 시커먼 그 더러움이, 지워지지 않는 낙인이.
 
  그에게서는 파괴의 감정만이 들끓었다.
  모든 것을 파괴하고 싶다는 그런 극단의 감정.
  끓어오른다. 피가. 머리가. 마음이. 감정이.
  모든 것을 태워버리는 작열의 불꽃 같은 격정이 내면에서 터질 듯이 끓어오른다.
 
  그것은 바야흐로 저주. 반복되고 반복되는 저주.
  이 몸을 불태우는 증오만으로도 상대를 죽일 수 없는 것이 불가사의할 정도다.
  양손, 양다리를 잡아 뜯고, 내장을 도려내고,
  심장을 쥐어 터뜨리는 것 정도는 쉽게 해버릴 수 있을 것 같은 격정인데.
  왜 감정만으로 사람을 죽일 수가 없는 것인가.
 
  그것은 격렬한 노도. 그것은 미친 화룡.
  자신의 마음을, 몸을, 도려내고, 태우고, 베어버리고, 찢어버리고, 찌르는 격정. 증오. 증오. 증오!!
  인간 한 사람의 심장은 간단하게 뜯어내서 쥐어 터뜨릴 수 있다. 그 정도의 증오.
 
  그런데도, 어째서. 어째서 할 수 없는 것인가!? 간단한 일일 터인데!!
  육체를 찢고, 늑골을 부수고, 맥동하는 심장을 도려낸다.
  그뿐. 단지 그것만인 일을 왜 할 수 없는 거지!? 이 증오를 품고 해도!
 
  할 수만 있다면, 세계의 멸망도 그네의 손으로 이루고 싶어 했다.
  그게 불가능하다면 차라리 스스로 목숨을 끊어 이 망할 곳에서 사라지리라.
  그는 자소도 狂笑(광소)도 아닌, 그저 뒤틀린 입술로 死後硬直(사후경직)의 미소를 지었다.
 
 
  -다시 태어난다면 인간으로 태어나지는, 아니!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부서진 인형이 꾸는 소망.
  이것은 일그러진 결함제품이 바라는 기원.
  이것은 달콤한 절망. 어두운 희망.
  임종을 바라보는 마음. 종말을 기다리는 마음.
  안타까울 정도로 꺼려야 할 희망.
  소년이 원하는 단 하나뿐인 종막.
 
  그렇게 소년이 결심하고 어딘가 높은 곳으로 향하려 걸음을 옮기려 할 때.
  그때.
 
  소년은 자신의 앞에 놓인 작은 거울 하나를 무심코 보았다.
  작은 거울이었다.
  작지만, 세상의 모든 것을 좌우만 바뀐 채 보여주는 거울.
  그렇기에 더 진실에 가까울지도 모르는 하나의 거울.
 
  자신이 저주하는 잿빛 하늘, 자신이 저주하는 시든 꽃 한 송이,
  자신이 저주하는 발 벗은 나무,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 세상이,
  단지 좌우만 바뀌어 그 속에 있었다.
 
  그리고 소년은 거울 속에서 보고 말았다.
  세상의 모든 것을 저주하던 자신의 눈, 증오의 눈동자 안에는…
 
  오직 자기 자신만이 비치고 있다는 것을.
 
 
  -처음부터 그가 지닌 증오의 눈초리는 오직 한 곳만을 향해 있었다.
  -그가 보던 모든 현실의 모습은 결국, 자기 자신의 모습이었다.
  -그가 진정으로 증오해 마지 않던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
 
 
  …
  …
  …
 
 
  그전까지의 일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단지 자기 내면에서 무언가가 '부서졌다.' 그런 감각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어떤 사실을 깨달은 순간, 소년은 '부서졌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른다.
  한계까지 팽팽해져 있던 불안감인지.
  어쩌면 이제까지 계속 품어 온 희망인지.
  아니면 심장이 부서진 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다면─더는 이렇게 고통받지 않아도 될 텐데.
 
  '부서진' 곳에서는 여러 가지 것들이 흘러나왔다.
  찢어 짖듯 한 비명. 절규소리. 증오에 찬 욕지거리. 저주의 말들.
  통곡이자 증오이자 절망이자 광기!
  원념, 증오, 악의, 죽음, 탄식, 애통함, 고통, 슬픔, 괴로움, 원한, 분노, 살의, 저주, 광기!
  온갖 부정적인 감정. 재앙 투성이인 순수한 마음. 애절하고, 통절하고, 절실하게.
  그것들이 모두 흘러나오고 뒤에 남은 것은 소년이라는 빈 껍데기뿐이었다.
 
  그리고 그는 자학하는 듯한 웃음을 얇게 지었다.
  자기 자신도 상처입히는 그런 미소를.
  드디어 자신은 끝날 수 있다.
  드디어 자신은 이 모든 것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다는 듯한…
  그는 그런 것을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다.
 
  지금 자신에게 생각나는 것은 아버지와 어머니라는 명칭을 지닌 것들.
  소년은 어째서인지 자신을 외면하던 그들을 찾기 시작했다.
  이제는 품을 이유도 없는 희망을 그들에게서 찾아내려는 심산이었을까.
  그것도 아니라면 자신을 완전히 끝내주기를 바란 걸까.
 
  어느 쪽이든 간에 소년은 거실에 있을 부모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를 본 아버지와 어머니가 미소 짓는다.
  그것은 그가 처음으로 본 부모의 웃음이었다.
  그 미소는 너무나도 부드럽고, 따스하고, 온화하고, 또한 상냥했다.
 
  좌절하고, 절망했던 진짜 '현실'의 온기가 여기에 있다고 그는 생각했다.
  이미 늦어버린 지금이라도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거라고, 순간적으로 생각했다.
  자신은 아직 살아있을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자신을 필요로 해주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절대 그가 바라는 희망 따위가 아니다.
  그는 그들이 자신들을 둘러싼 큰일이 하나 해결되고 나서,
  남을 그의 '뒤처리'를 이야기하고 있었던 것이라곤 생각도 못할 것이다.
  그리고 그 형태가 최악의 방법으로 나타나리라는 것 또한.
 
  그들이 미소 지었다.
  어디까지나 투명할 정도의 광기를 보이면서, 그에게 고한다.
  온화하게, 상냥하게, 부드럽게, 따스하게, 무자비하게, 끔찍하게, 가차없이, 한 줌의 가책 없이 고한다.
 
 
  "엄마와 아빠는 이혼했으니까, ○○○도 이제 혼자서 살 수 있지?
  …그럼 ○○○. 잘 살아."
 
 
  처음 그는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 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이 자신의 목숨조차도 전혀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소년의 정신은 완전히 붕괴하여 미쳐버렸다.
 
  그는 그가 바란 대로 '끝나버린' 것이다.
  그 대신 아무것도 느낄 수 없게 되었지만….
  어느 쪽이든 그로선 해피엔딩일지도 모른다.
  이제는 괴로워할 필요도 없을 테니까.
 
  이것이 어느 소년의 이야기.
  이것이 단지 그것뿐이었던 이야기.
  이것이 그 뿐만은 아니었던 이야기.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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