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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월야(月夜)

2009.01.19 20:53

악마성루갈백작 조회 수:537

가슴을 누르는 것 같지도 않으면서 마냥 막고 있는, 알 수 없는 답답함을 이기지 못해 밖으로 나섰다. 하지만, 멀리 나가면 또 성가셔지겠지. 그래서 적당한 돌을 하나 골라잡고 걸터앉았다. 단, 달을 볼 수 있는 곳에.

 

내가 앉은 곳으로부터 동쪽 하늘에 떠있는 달. 한 시간에 13°였는지 15°였는지 아무튼 움직인다고 했는데…. 예전 과학 시간에 배웠던 것이 머릿속에서 떠오른다. 어이어이, 이런 곳에서 수업시간의 내용을 상기시킬 필요는 없잖아? 15°일 거라고 대충 결론을 내리고 보름달에서 약간 기운 하현달을 바라본다. 또 이러는군. 옛날에는 상현이냐 하현이냐 따위는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아니, 몰랐다. 그저 보름달은 아니라는 것만 알고서도 만족했었다. 머릿속에 지식이 찰수록 뭔가가 자꾸 비어간다. 그래도 그 공백을, 공간을, 공허를 느끼면서도 계속 지식을 구겨 넣는다. 채워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 오히려 더 늘기만 하는 그 허무로 가득 찬 공간의 성향을 알면서도. 이런 걸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고 하던가? 자조하는 심정으로 웃었다. 자신이 듣기에도 섬뜩한 웃음소리가 목에서 새어나온다. 누가 듣기라도 했으면 정신 나간 녀석 취급받기 딱 좋은 상황이었겠군. 뭐, 그런 건 아무래도 좋지만.

 

왠지 모르게 달이 흔들리는 것처럼 보인다. 아니, 내 눈망울이 흔들린다. 아니, 달이. 아니, 눈망울이. 달이. 눈망울이. 달도. 눈망울도. 둘이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하늘은 돌고 나는 멈춰 있다. 나는 돌고 하늘은 멈춰 있다. 천동설과 지동설이 다를 것이 도대체 뭐란 말인가. 전 우주가 움직이고 있고, 내가 멈춰 있다. 부동(不動)의 한 점이 필요한가? 그렇다면, 푸코의 진자라도 구경하고 오시지그래. 까소봉이 느꼈던 것을 느낄 수 있을지도 모르지. 운이 좋다면. 정말 운이 좋다면. 이봐, 네가 가진 한 조각만 떼어달라고. 그 운이라는 거 말이야. …역시 무린가? 어차피 진심으로 바란다고 해도 이루어질 리는 없겠지만. 그냥 포기하면 편한 거다. 하지만, 온갖 이성적 판단, 논리적 귀결에 등을 돌리며. 오로지 터무니없는 희망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심정은 과연 어떤 걸까? 흠, 그 상황이 되어보지 않는 이상 지금은 답을 내릴 수 없겠는데.

 

어쩐지 엉덩이가 차갑게 느껴진다. 뭐, 특별히 입은 것도 없으니. 차가운 밤 공기를, 달빛을 머금은 돌을 깔고 앉아 있으니, 차갑기도 하겠지. 달빛도 차갑다. 달에 그려진 토끼 같기도 하고 뭐 같기도 한 무늬가 차갑다. 노란듯하면서도 하얀빛이 차갑다. 둥글면서도 어딘가 이지러진 형태가 차갑다. 주변으로 퍼지는 그 코로나가, 월광(月光)의 코로나가 차갑다. 안경을 잡으니 역시 차갑다. 혹시나 하고 벗어보니 달이 흐릿해져 보인다. 따뜻하다. 아니, 포근하다. 아니, 그냥 따뜻할 뿐이다. 포근한 맛은 없다. 느끼려고 마음만 먹었으면 벌써 느껴졌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내가 거부했다. 이 정도의 설명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그저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렸음이니.

 

그 옛날 원효가 깨달았던 것을 나는 알았다. 단지 알았을 뿐이다. 앎과 깨달음의 차이가 어찌 이리도 크단 말인가. 누군가 그랬던가, 세상에서 가장 먼 것이 머리와 가슴 사이라고 했다. 후후…. 어찌 달과 내 사이가 이리도 멀 단 말인가. 어찌 안경 너머로 보이는 달과 맨눈으로 보는 달이 이리도 다르단 말인가. 다시 안경을 쓴다. 여전히 차가운, 원래부터 차가웠을 것 같은 달빛. 다시 벗는다. 따뜻한 달빛. 어느 쪽이 본래의 진실이란 말인가. 좀 더 사실에 가깝게 보여주는 안경이 이제는 사실을 왜곡하고 있단 말인가? 정해진 역할대로 단순히 굴절시킬 뿐인가? 모르겠다. 하나도 모르겠다. 도무지 알 수 없다.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한다. 두통인가? 생각이 너무 많아서 뇌가 그것을 처리할 수 없었던 걸지도 모르겠군. 그래도 어쩔 수 없잖아? 누군가 대화할 상대라도 있었으면 모르지만, 지금 난 혼자니까. 그리고 혼자서 중얼거리는 것도 기분 나쁘니 그걸 생각으로 치환했을 뿐이다. …내가 왜 이런 자기합리화를 해야 하는 거지?

 

더 이상은 엉덩이가 차가워 견딜 수 없을 듯하다. 아니, 다른 이유로 견딜 수 없는 걸지도 모르겠다. 슬슬 돌아가도록 하자. 아무도 기다리는 사람이 없는 방으로. 거기서 난 또 자학적으로 웃었다. 그것에 특별히 감상을 품진 않는다. 이젠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졌다고 말하지 못할 것도 없다. 사람은, 혼자서도 살아갈 수 있다. 하지만, 그건 단지 그것뿐이다. 육체는 살아있어도 마음은 오래전에 죽어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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