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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권리

2009.05.24 19:19

악마성루갈백작 조회 수:615

  수업 시간에 늦게 들어가 앉았다. 날은 어두웠고 결석이 많았다. 빈 의자 위에 매달린 형광등은 빔프로젝터를 방해하지 못하도록 거세당했다. 겨드랑이와 등에 땀이 솟아난 것이 느껴졌다. 조금이나마 더 자리가 채워진 뒤에야 발표가 시작되었다. 창 밖에서 햇빛이 들어오지 않았다. 발표자는 연방 스페이스 바를 누르며 자살에 대해 말하였다.

 

 자료도, 말하는 이도 자살이란 것의 해악을 전제한 채 말하고 있었다. 나는 그 전제를 알 수 없었다. 사람이 스스로 죽는 것이 왜 악이 되어야 하는가.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 듯했다. 그저 물음으로써 얻을 수 있는 편익이 부족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의심하고 있었다. 질문했고, 답은 빈약했다. 되묻지 않았다.


  내가 나를 어디까지 마음대로 하는 것이 가능한지에 대해 생각했다. 그 경계는 취기에서 머물러 있었다. 내 소화기에 에탄올을 쏟아넣는 것이 내가 가진 자유의 한계였다. 내가 죽는 것이 다른 이에게 끼칠 영향을 고심하였다. 불의의 사고로 떠날 때와 얼마나 다른 상황이 연출될 수 있는 것인가를 가늠했다. 차이를 알 수 없었다. 애당초 주변 사람들과 관계가 깊은 편도 아니었기에, 가족과 주변 친지들 정도만 내 죽음을 알게 될 것이다. 연락을 주고받는 사람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나, 내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 정도로 나와 가까운 사이는 아니다. 어쩌면 알지 못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지만. 베르테르 효과가 타인의 자살을 유도하기에 자살이 해악이라면, 격발된 자살이 어떤 문제를 가졌는지를 먼저 말해야 할 것이다.


  죽음은 개인에게 생을 앗아갈 것이고, 주변인에게는 슬픔을 줄 것이며, 사회에는 그 개인을 키우는 데에 들어간 사회적 비용의 손실을 야기할 것이다. 그렇다 하여 사회가 개인에게 귀속된 생사 여탈권에 간섭할 수 있을 것인가. 그렇다면, 모든 생산 활동을 중단한 이후에는 가능한가. 투자한 만큼 생산하고 나서 사망하라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나는 적어도 내 머릿속에서는 노예가 아니었다. 내 의지대로 태어나지 못했으니 죽을 때라도 자신의 뜻으로 행하는 것이 합당하다 생각하였다.


  하지만, 자살하는 사람의 마음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때때로 모든 게 싫어질 때가 있다. 그런 때에는 잊어버리는 게 제일 좋지만, 그게 불가능할 때에는 그 싫은 기분에 마음이 빨려 들어가버린다. 그리고 완전히 빨려 들어간 사람은 죽음을 선택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그런 사람들이 나약한 인간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런 건 종이 한 장 차이다. 누구나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누구나 죽고 싶은 마음을 가지게 되는 순간이 있을 것이다. 단지 그 순간을 무사히 넘기느냐 넘기지 못하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나는 사후를 믿지 않았고, 죽음은 당연히 도피처가 될 수 있어 보였다. 더는 위로 올라갈 길이 보이지 않을 때 절벽 돌부리를 움켜쥔 손을 놓고 낙하할 권리를 정부가 앗아가려 하고 있었다. 자신의 의지에 따라 퇴장할 권리가 없는 무대는 비참하다. 마술사는 무작위의 관객을 무대 위로 끌어냈고, 관객은 되려 관에 들어가 허리를 잘리게 생겼지만 내려가는 것은 그의 선택이 아니었다. 내려가는 방법을 서로 일러주는 것을 방해하는 것은 대략 그러하다.


  그러나 지금의 삶이 행복하다면 죽는다는 생각은 엄두도 내지 못할 것이다. 애당초 행복이란 무엇일까? 현재 자신에게 있어 행복이란 무엇일지 생각해 본다.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예전엔 맛있는 음식을 먹거나, 원하는 물건을 가지게 되거나, 누군가와 함께 있거나, 그런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했던 것 같다. 그랬는데 성장하면서 사치스러워진다. 그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게 된다. 더욱더 많은 걸 원하게 된다. 하지만, 역시 인간이 원하는 행복이란 어릴 적에 느꼈던 그 느낌이 가장 본질적이란 생각이 든다. 나이를 먹어도 결국 같은 것을 바라게 되는 건 아닐까. 아니면 자신만 그렇게 생각하고 있고, 다른 사람들은 다르게 생각하는 것일까?


  나는 알 수 없었다. 애당초 자신에게는 행복해지고 싶다는 바람이 없었다. 결여되어 있다. 그것은 현재 상황에 만족하고 있어서일까. 아니면 체념하고 있어서일까. 언제 죽어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드는가 하면, 아직 죽고 싶지 않다는 생각도 들었다. 평균수명에서 거꾸로 계산해보면, 인생이 끝나려면 최소한 50년은 더 기다려야 한다. 정신이 아득해질 것만 같은 시간. 어쩌면 그전에 자신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사고? 사건? 병? 자살? 모두 있을 법한 일이다.


  모든 전제는 각 인간이 각자의 판단에 따라 행동했다는 것에 기초한다. 그래서 사고할 능력이 없다 판단된 이에게 책임이 경감되는 것이리라. 다른 이를 죽인 죄는 징역이나 사형으로 다스려졌다. 다른 이의 권리와 자신의 자유가 만나는 곳에서 자유가 타인의 권리를 넘어서는 것을 법은 막고 있었다. 법은 가시가 달린 철조망이었다. 자신을 죽이는 것은 다른 이의 권리가 차지한 땅을 밟지 않았다. 자살하는 이를 방해하지 않으면 처벌받는다는 그 괴이한 구절이 오히려 권리의 땅을 비집고 들어가 가시 끝을 번뜩이고 있었다. 나는 이해할 방법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혼자가 되지 않으면 잊어버리고 마는 사실도 있다. 자신이 어떤 인간인지, 얼마나 이기적인 인간인지, 언젠가 모두 사라지고 만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려고 한다. 어쩌면 그들은 계속 옆에 있어주지 않을까, 그런 허황한 기대를 해버리는 비열함이 정말 싫었다. 아무런 도움도 못 되어주는 주제에, 욕심만은 남들 못지않은 나. 정말이지 최악이다. 그럴 바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얼마 안 가 잃게 될 거라면 처음부터 필요 없다. 끝날 거라면 시작하지 않아도 좋다. 고통을 동반하는 쾌락 따윈 불필요하다. 슬퍼하지 않아도 된다면 기쁨 따윈 필요 없다. 실패하지 않고 끝낼 수 있다면 성공하지 않아도 좋다.


  어차피 제대로 된 어른은 되지 못할 것이다. 이루고 싶은 꿈도 없다. 후회할 게 아무것도 없다. 못다 한 일 같은 게 있을 리 없다. 그렇다면, 산다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내일 아침이 안 와도 그건 그것대로 상관없다는 말에 지나지 않는다. 살아 있으니까 시간을 보내고 있을 뿐인 거다. 아마도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채, 그저 늙어 죽겠지. 아니, 늙기 전에 어느 길거리에서 쓰러져 죽을지도 모른다. 누구의 간호도 받지 못하고 비참한 생애를 마칠 것이다. 거 봐라. 꼴좋다, 나.


  다만,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방향의 끝을 나는 지지하며 기대한다. 칼륨 몇 cc면 충분할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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