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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패스파인더10

2009.04.08 12:12

azelight 조회 수:611

9
  야예이는 호숫가에 앉아 멍하니 호수를 바라보았다.
  해가 저물어가기 때문인지 하늘은 온통 주황빛이었고 지평선 너머로 갈수록 선명한 붉은 빛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선연한 분노의 색.
  야예이는 눈을 감았다. 하지만 여전히 그 때의 일을 떠올릴 수 있는 것은 단편적인 것들을 뿐이었다. 분노의 색과 뇌를 끓어오르게 만들 것 같은 진정한 분노, 경악, 살의.
  캐논은 야예이에게 그가 했던 일의 일부를 알려주었지만 야예이는 그 일에 대해 전혀 기억하고 있지 못했다. 야예이가 기억하고 있는 것은 에크로반이 쓰러져있던 순간과 그 때 자신의 등에 메인 도끼에 손을 가져가는 때 까지였다.
  [광신의 축복을 받았나 보군.]
  캐논은 야예이를 내려다보며 한숨과 함께 말했다. 내면에 깊은 분노를 가진 자들은 광신으로부터 갖가지 축복을 얻을 수 있었다. 끝없는 체력과 고통을 모르는 육체, 때로는 자기 자신을 초월하는 힘. 미르키엘의 축복을 받아 야수의 길을 걷는 레인저들처럼 그들은 자신의 내면 깊숙한 곳에서 힘을 끌어낼 수 있었다. 단지 야수의 길을 걷는 레인저들과 다른 점은 광신의 분노가 내면의 야성이 아닌 무분별한 폭력성에 기인한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결코 옳은 것이 아니었다. 도리어 사용자도 주변인도 슬프게 만드는 힘이었다.
  특히 자기절제가 부족할 때 분노에 휩쓸려 손쉽게 소중한 다른 뭔가를 파괴하게 될 때 광신의 힘을 업은 자는 나락과도 같은 고통 속으로 흘러들어갈 것이다.
  언젠가는 광신의 속삭임을 듣게 될 것이고 미쳐흐르는 격노의 흐름 속에 자신을 산산조각 쪼개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캐논의 생각이었다. 야예이는 다르게 받아 들였다.
  그가 분노로부터 힘을 이끌어낼 수 있다는 말은 야예이를 특별히 매료시키지 않았다. 하지만 힘에 대한 욕구가 그 분노를 인정케 했다.
  해가 기울고 밤이 찾아왔지만 따뜻한 시기이기 때문에 급격히 식은 공기 속에서도 그럭저럭 있을 만 했다.
  분노의 힘이 어떻단 말인가?
  야예이는 생각했다.
  처음부터 그런 힘을 가지고 있었다면 에크로반은 그를 미리 준비해뒀을지도 모른다. 예외적인 상황을 고려해 언제라도 자신을 도울 수 있는 위치에 뒀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야예이에게는 힘이 없었고 심지어 어리기까지 했다. 그는 자신의 내면 속에 무엇이 있는지 몰랐었다.
  야예이는 가끔 내면 속에서 끓어오르던 이해할 수 없는 분노에게 대해서 떠올렸다. ‘그것이 이것이었구나. 처음부터 이것을 인정했었다면 어땠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야예이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그 강렬한 힘을 다시금 불러올 수 있을까?
  야예이는 곧 자신이 어떻게 분노를 불러낼 수 있는지는 알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언제나 느끼는 소외감과 그로 인해 따라오는 절망과 부당함에 대한 감정들. 매번 절실히 느껴왔기 때문에 야예이는 잘 기억하고 있었다. 언제나 느껴오고 있기 때문에 야예이는 조금의 노력으로 그 감정들을 떠올릴 수 있었다.
  얼굴을 후려치고 땅에 발을 구르며 분노를 끌어올렸다. 그리고 잭에 대한 분노와 복수심을 통해서 야예이는 부족하나마 뭔가를 끌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화내는 일이라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특정한 감정을 의도적으로 끌어내는 일은 제법 훈련이 필요한 일이었고 무엇보다 야예이는 화내는 일에 익숙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래도 들을 수 있었다. 그것은 작은 속삭임이었다. 노랫소리처럼 들리기도 했고 비명소리처럼 들리기도 했다. 소리 없는 절규이자 고통 속의 침묵이었다.
  야예이는 정신없이 그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그렇게 끊임없이 분노 속으로 빠져들려고 하는 야예이를 말리는 존재가 있었다.
  [아서라. 그것은 너의 힘이 아니다. 제어할 수 없는 것을 소유했다곤 볼 수 없지.]
  어느새 동굴 밖으로 나온 캐논이 야예이에게 경고했다.
  [에크로반이 가르쳤던 것을 모두 잊게 될 것이다. 그가 가르쳤던 것들은 자연으로부터 흔적을 읽어내는 힘이었지 분노에 빠져 세상모든 것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다.]
   말없이 야예이는 자신에게 충고하는 캐논을 노려보았다. 평소라면 생각지도 못할 일이었지만 지금의 야예이는 정상이 아니었다. 광신의 힘의 일부를 끌어낸 그는 분노의 전사가 되어 있었다. 다만 야예이가 소극적인 면이 커서 자극이 없는 한 먼저 덤벼들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불완전하다고 해야 할까. 야예이는 스스로 의도했지만 익숙하지 못한 지금 상태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물론 그 분노를 가라앉히려는 의지도 보이지 않았다. 충혈 된 눈은 캐논을 노려보고 있었고 콧바람을 세차게 내뿜고 있었다.
  캐논은 잠시 야예이의 모습을 들여다보고는 ‘흥’하고 콧바람을 내고는 속으로 웃었다
  [네가 그 힘에 의존하고자 하는 기분은 알겠다. 하지만 분노의 힘이 보잘 것 없지. 막무가내로 해쳐나갈 수 있을 만큼 세상은 결코 만만치 않다는 것을 보여주마.]
  캐논이 으르렁 거리며 살의를 내뿜자 야예이는 즉각 캐논에게 달려들었다. 캐논은 털빛을 푸르게 물들이더니 앞발을 들어 땅을 내려쳤다.
  -쾅!
   지축이 흔들리는 듯한 충격이 퍼지며 야예이는 날려가 호수로 나가 떨어졌다. 캐논은 그 모습을 보고 껄껄거리며 웃었다.
  [머리가 좀 식었느냐.]
  캐논이 대소하는 사이 야예이는 물속에서 느린 동작으로 빠져 나왔다.
  “컥. 헉.”
  요란하게 기침을 하며 야예이는 캐논 앞에 주저앉았다. 야예이는 육체적으로 날려간 것만이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꽤나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분노에 물든 야예이를 깨우기 위해 캐논은 영적인 힘을 사용했기 때문이었다.
  [아직 정신을 못 차린 것 같군.]
  캐논이 정신이 없는 야예이를 툭툭 건드렸다. 몇 번을 건드리자 야예이가 고개를 들어 캐논을 바라보았다.
  [자, 들어라, 꼬마야. 그건 결코 네게 좋은 것이 아닐 거다. 네가 바라는 것이 뭔지 안다. 네가 바라는 것들을 그 힘이 가져다주진 않을 거다. 오히려 너를 그것들로부터 멀어지게 하겠지. 네가 에크로반의 일 때문에 죄책감을 가진다는 것은 알지만 그렇다면 좀 더 에크로반이 바라는 일을 하려고 해야 되지 않겠느냐? 물론 광신이 너를 선택했다는 것은 네 삶이 그리 행복하지 않았다는 뜻이라는 것을 안다. 그는 내면속에 깊은 분노를 가진 자들을 선택하지. 너 같은 아이들을 말이야. 하지만 그렇다고 그 분노에 이끌려 다닐 필요는 없는 거다.]
  야예이는 딱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캐논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물론 그의 눈에는 수많은 질문들이 담겨 있었지만 그것을 제대로 말로 만들지 못했다. 아직 야예이에겐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네가 힘이 필요로 한다면 내가 도와주마. 에크로반이 아는 것들의 대부분을 나 또한 아니까. 나와 생활하는 한 동안 내가 너를 돌보며 네가 배워야 할 것들을 가르쳐 주지. 어떠냐?]
  에크로반은 지금 큰 부상을 입어 마을에서 요양중이었다. 그래서 캐논은 에크로반이 회복 될 동안 야예이를 맡을 생각이었다.
  캐논은 야예이에게 잠재력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하프오크치고는 똑똑했고 인간을 오크의 생으로 바꿔보았을 때 정상적이라 할 수 있는 지능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육체는 오크보다 강인했고 컸으며 날렵함도 예사롭지 않았다.
  에크로반이 제대로 단련시킨 것도 있지만 육체적인 잠재력도 상당히 큰 것 같기도 했다. 그렇다면 어느 정도 가르쳐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예전부터 그와 교류했던 갈색 산맥의 레인저들을 가르쳤던 것처럼 말이다.
  “괜찮을까요? 저는 하프오크인데...”
  야예이는 주뼛거리며 캐논에게 물었다. 그는 대인 관계에 서투른 것을 모자란 에크로반 외의 사람과는 말문도 제대로 터 본적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캐논에게 말을 하는 것이 쉽지가 않았다.
  [안 괜찮을 것은 뭐냐. 하프 오크라도 숲의 이치를 따르는 자라면 관계없는 일이다. 너는 사람의 입장에서 자연을 이해하고 네가 얻은 조화의 이치대로의 삶을 살 수 있으면 되는 거다. 우선 넌 말투부터 좀 고쳐야겠구나. 유약해서 안 되겠다. 정신력부터 뜯어 고쳐야하겠어. 에크로반 놈. 아이를 너무 약하게 키웠군.]
  투덜투덜거리며 캐논은 일어섰다.
  [쭈뼛거리지 말아라. 당당해라. 그런 행동들은 널 약하게 보이게 할 뿐이다. 약하게 보이면 표적이 된다. 멀쩡한 토끼보다 다리를 저는 토끼를 사냥하기 쉬운 것처럼 말이다. 지금 너는 딱 다리를 저는 토끼처럼 보이는 구나. 따라와라. 잭의 문제도 있고 네가 성장하는 편이 여러모로 도움이 될 거다. 나는 아직 녀석이 포기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거든.]
  캐논은 중얼거리듯 정신파를 발산하며 어슬렁어슬렁 동굴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야예이는 캐논의 뒤를 따라갔다.
  에크로반의 오두막은 비어있지만 지금 그 곳에 가기는 좋지 않아 보였다.
  혹시나 마을 사람들이 대신 관리해주러 올 수도 있고 그 때마다 물건의 위치가 바뀌어있거나 하면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캐논에게서 뭔가를 배우게 된다면 오두막에서 호수까지 오가는 것보다 캐논의 곁에서 지내는 편이 더 좋을 것 같았다.
  다행히 자신은 잠자리를 그리 따지는 편도 아니었고 노숙에도 익숙했다.
  캐논의 동굴에 도착한 야예이는 일단 젖은 옷을 말리기 위해 벗어 놓았다. 그러고는 이곳에는 빨래걸이 같은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곳에서 생활하기 위해서 생활용품을 몇 개 정도 만들어 두거나 가져올 필요가 있다고 야예이는 생각했다.
  널따란 동굴이 웅크려 누운 캐논을 보고 야예이는 동굴 속의 바위틈에 몸을 끼워 넣듯이 앉았다.
  좁은 장소는 마음이 안정되는 장소였다.
  숲은 어두운 장소였고 동시에 누구라도 그를 노릴 수 있는 장소였다. 오두막을 제외하고는 안전한 장소는 없다시피 한 장소.
  등을 가릴 곳이 있다는 사실이 그를 안정시켜주는 장소가 숲이었다. 이 호수는 캐논의 영역이기 때문에 안전이 보장되는 장소였지만 역시 오두막이 아니기 때문인지 영 바닥에 드러누울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스스로 궁상맞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동시에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야예이는 조용히 눈을 감으며 에크로반에 대해 떠올렸다. 올슨 마을에 대해서도 깨달았다. 그들이 자신에게 있어 그토록 분노의 대상이 될 수 있었던 것일까? 소외감과 선망이 그의 내면에서 분노를 불러일으켰다는 것을 야예이는 알 수 있었다. 결정적인 요소는 에크로반을 상처 입힌 잭에 대한 분노였겠지만 차분히 그의 내면에 분노를 쌓아올린 것들은 바로 그 두 가지였다.
  만약 그렇다면 어떻게 되는 걸까?
  자신은 이곳에 더 이상 머무르면 안 되는 것일까? 특별히 답이 떠오르지 않는다.
  야예이는 자신의 삶 속에 너무 어려운 질문들이 많다고 생각했다.
  나의 삶이 좀 더 단순했다면...
  야예이는 부디 그랬으면 하고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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