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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그라낙 -1-

2010.01.11 02:28

azelight 조회 수:448

어둔 밤하늘 아래. 실렌스티의 열두 따님들 중 넷이 떠올라있는 드문 날. 남자는 모닥불을 피우고 벌레울음소리가 전부인 숲속에서 밤을 지새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숲의 무성한 가지들이 하늘을 가리지 않는 작은 공터는 대대로 이 대로를 지나가던 이들이 자주 사용하는 야영장이었다. 그래서인지 불을 지필 때를 대비한 안전을 위한 조치들이 확실히 되어 있었고, 그래서 남자가 모닥불에 불을 붙이기 위해서 한 일은 태울만한 풀잎과 나뭇가지들을 주워 모으는 일이 전부였다.

불빛을 쫓아 모여드는 벌레들을 쫓기 위해 향초를 태우며 남자는 야영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거창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망토를 바닥에 깔고 정좌를 하고 앉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약 네 시간 정도의 명상.

그것이 남자가 취하는 휴식의 전부였다.

언제부터가 잠든 적이 거의 없었다. 무를 추구하고 그 나름 극의라는 것을 체득한 후 그는 어지간해선 일상생활에서 피로라는 것을 느낀 적이 없었다. 사실 적수라고 부를만한 자들을 만날 기회도 드물었다. 어지간한 일은 혼자서 해낼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그는 언제나 혼자 떠돌아 다녔고 여행에 함께하는 동료를 만들지도 않았다.

물론 그에게 동지라고 부를 자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조화의 숙녀의 뜻을 추구하는 자연주의자였으며 그들의 무력이기도 한 송곳니의 일원이었다.

뜻을 함께하는 송곳니의 요원들은 그의 동지라면 동지라고 할 수 있는 자들이었다. 개중에는 특별히 인연이 있는 자들도 존재했다.

하지만 그 중에서 동지 이상의 의미를 지닌 자들은 없었다. 그런 자들은 그가 섣불리 다가갈 수 없는 곳에 남겨져 있었다. 산을 수호하는 자들. 지혜로운 짐승들을 따르며, 조화의 숙녀에게 특별한 운명을 받은 고산의 종족들. 하지만 그들은 은인일 뿐 친구가 아니었다. 물론 동지도 아니었다.

진실한 의미에서 그가 우정이라는 것을 나눈 사람은 없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는 우정이라고 할만한 것을 공유할 친구를 만들어보지 못했다. 잠시 임무를 함께하는 이들이 있을지라도 그는 최종적으로 언제나 혼자였다.

고독한 사냥꾼.

첸바라는 그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 손에서 활과 검을 놓을 때까지 그는 고독할 것이라고.

‘아마도 그것을 일생동안이라는 말이겠지.’

남자는 첸바라의 말을 그렇게 해석했다. 일생 동안 고독한 사냥꾼. 죽음이 오지 않는 한 그는 영원히 고독할 것이다. 안식하나 없이 오직 조화의 숙녀를 위해 헌신하며 그는 살아갈 것이었다.

그런 삶. 원하던 바다. 그는 생각했다.

쓰레기 같았던 그의 유년기.

희망 하나 없었던 시궁창 인생에서 그를 구원했던 것은 자연주의자이며 송곳니였던 스승과의 만남에서부터였다.

고아로서 길거리에 버려져 구걸 외에는 쓰레기통을 뒤지는 것 밖에 살아갈 기회가 없었던 그를 스승이 주워주었고 그로부터 새 삶이 시작되었다.

새 옷과 썩지 않은 제대로 된 음식. 그 이상 무엇을 바라겠는가?

스승은 그의 존재가 가치 있음을 알려주었다. 삶의 방향을 제시해주었다. 살아갈 수 있는 힘을 내려 주었다.

그가 스승의 뒤를 위어 자연주의자가 되고 송곳니의 일원이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스승은 그것이 지극히 고된 일이라며 말렸지만 그는 동경과 존경의 마음으로 스승의 뒤를 잇고 싶어 했고 조화의 숙녀로부터 신명을 받아 결국 송곳니가 되었다.

한 동안 그는 스승과 페어가 되어 임무를 해결했지만 곧 임무 중에 그의 스승이 죽음으로서 다시 혼자가 되었다. 그 이후로 그는 가끔 다른 이와 협력하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는 언제나 혼자였다.

어차피 송곳니는 조화와 균형을 위한 임무를 제외하고는 기본적으로 자유로웠기에 누구도 그런 그에게 참견해오지 않았다. 그나마 참견해온 것은 항상 그의 임무에 도움을 주는 마법사 정도뿐이었다.

멜프하겐.

탑의 마법사이며 송곳니의 협력자인 그는 어째서인지 그에게 흥미와 호의를 지니고 있었다. 그에게 송곳니로서의 일에 정보를 넘겨주는 자는 항상 그였고 때때론 함께 임무를 수행하기도 했다. 하지만 남자는 마법사의 그런 참견을 대체로 무시로 일관했다. 협력은 했지만 우정은 지니지 않았다.

그는 혼자로도 좋았다.

그는 최초부터 혼자였다. 어릴 적의 시궁창같던 그 때 이미 그는 혼자였다. 그때와 다른 것이 있다면 지금은 생존에 훨씬 더 능해졌고 처세술이 좋아졌다는 것 정도. 거기에 명확한 삶의 목표가 있다는 정도일 것이었다. 그러니 지금이 고독하진 않았다.

오히려 스승과 함께 했던 시간이 오히려 예외라고 느껴졌다.

그는 확신했다. 세상에는 분명 운명을 이끄는 손이 존재하며 그 손은 자신을 이끌고 있다고. 고독과 함께 그에게 힘을 주고 있음을.

나아갈 힘을. 살아갈 힘을. 그리고 운명을 타파하고 불합리를 무릎 쓰며 세상에 조화와 균형을 유지하고자 하는 관조의 시선을 준다고 믿고 있었다.

조화의 숙녀가 그를 이끌고 있다는 것을 믿고 있었다.

바로 지금과 같이.

‘지잉.’하고 머릿속을 파고드는 느낌에 그는 눈을 떴다. 그것은 단어와 화상의 나열이었다. 동시에 계시이기도 했다. 바로 대자연의 처녀이며 조화의 숙녀인기도 한 여신이 그에게 내려준 계시였다.

그가 가야할 곳은 수려한 운하 도시 랑그라드. 그리고 그가 타파해야할 적은 세상의 균형과 조화를 어긋나게 할 숨은 악의의 사도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휴식을 취하기에는 여유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있는 이곳은 제국과 에카난스 왕국의 국경. 랑그라드까지는 걸어서 간다면 아무리 빨라도 한 달은 넘게 걸릴 거리였다. 물론 그라면 그 절반의 시간만으로 충분히 갈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멀다는 사실이 변하는 것은 아니었다.

한시라도 빨리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한 그는 깔고 앉았던 망토를 털고는 다시 몸에 둘렀다.

그는 바쁘게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분명 긴 여정이 될 것 같았다. ‘지이이잉.’하고 머릿속이 울렸다. 마치 전조와 같이. 마치 예고와 같이. 기묘한 불길함이 가슴 속에서 솟아오르는 것을 그는 느꼈다.

이것은 조화의 숙녀의 경고인가?

그런 생각을 떠올린 것과는 달리 남자의 발걸음은 전혀 늦춰지지 않았고 망설임도 없었다. 걸음을 멈출 생각은 없었다. 이곳에서 랑그라드까지는 멀었다. 너무도 멀었다. 그러니 한시도 쉬어서는 안 된다.

임무가 부여된 그의 머릿속은 온통 그런 생각들뿐이었다.

마치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 존재의의인양. 그는 랑그라드를 향해 꾸준히 걸어 나갔다.

네달렉스의 정의

 

신상을 닦고 있던 엘리우스는 동기인 로한으로부터 꽤나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랑그라드의 함락. 랑그라드의 영주인 바로스 검공의 패퇴.

음미할수록 인상적인 이야기였다. 어떤 정도냐면 도저히 믿을 수 없는 헛소문이라는 느낌이었다.

랑그라드의 함락이라니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랑그라드가 전성은 아니었지만 거의 그에 준할 정도의 설비를 갖춘 준 요새도시였다. 그 수려한 외견과는 달리 속에 가시를 숨기고 있다고 해야 할까. 게다가 성의 병사들은 왕도의 왕도수호병들에 준할 만큼의 훈련을 받은 최정예부대이기도 했다. 사실상 남쪽의 개척지역을 제외하고는 최남단의 도시나 다름없기 때문에 훈련의 질이 상당히 높은 것이었다. 실제적으로 야만거인들로부터 왕국을 수호하는 방어선을 담당하고 있으니 왕도수호병들과 비교해도 중요성이 떨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 병사들을 가르치는 것은 에카난스 최강의 검사라고 불리는 바로스 검공인 것이다.

문무에 있어 최고라고 일컬어지는 바로스 이무라제 공은 그야말로 왕국의 수호자라는 이미지가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활약이 현재 에카난스의 안정을 가져왔기 때문이었다.

제국에서 떨어져 나온 유랑민들로부터 시작된 에카난스는 현재 터전이 된 평원에 자리 잡은 위험한 짐승들과 몬스터들을 몰아냄으로서 시작되었다. 그 중에서 가장 위험한 적은 야만적인 거인들이었다.

에카난스의 역사는 개척의 역사인 동시에 이 야만거인들과의 전쟁의 역사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바로스 검공은 바로 이 야만거인들을 완전히 몰아내어 왕국에 안정을 가져온 자였다.

야만 거인들은 바로스 검공이 이끄는 군대에 의해 남쪽과 동쪽으로 완전히 밀려났고 에카난스의 왕 페리놀그라체는 그 기념으로 준전성이며 운하도시인 랑그라드를 건설하고 야만거인들을 몰아내는 일을 주도한 바로스 검공을 영주자리에 앉혔다.

그 때 일이 약 20년 전.

20년이 지났어도 바로스 검공의 대쪽같은 성미는 변하지 않았고 여전히 왕국의 최강의 검사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게다가 사람들의 평으로는 랑그라드 군 이상으로 잘 훈련되어 있는 병사들은 없다고 한다. 실제로 1년에 한번 왕 앞에서 보이는 시연회에서 언제나 제식으로 1등을 차지하는 것은 랑그라드 영주군이었다는 것을 떠올려 봐도 좋을 것이다.

그런 랑그라드가 무너졌다는 것은 에카난스의 출신이라면 누구도 쉽게 믿기 힘든 이야기였다. 거기다가 바로스 검공이 거의 모든 병력을 잃고 도주해야만했다는 이야기까지 들린다면 더더욱.

하지만 로한은 진지한 얼굴로 말했고 우스갯소리로 넘겨버리기에는 출처가 무시할 수 없는 곳이었다.

자그마치 엘리머스 지부 지부장인 레리의 입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로한 자신도 믿기지 않는 듯 했지만 레리 지부장에게서 나온 이상 헛소리일리는 절대 없는 노릇이었다. 그덕에 엘리우스는 로한에게서 들었다는 것 자체가 거짓말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아니 진짜야! 진짜라고.”

드물게 신경질을 내며 로한은 말했다. 아무래도 엘리우스가 자신의 말을 믿기보다는 의심하는 쪽으로 가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챈 모양이었다.

“나도 듣고 무슨 소린가 하긴 했지만 막상 이런 취급당하니 열 받네.”

로한이 화내는 거야 어쩔 수 없이 엘리우스로서도 믿을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과연 어떻게 로한이 레리 지부장으로부터 그런 이야기를 엿들을 수 있었는가 하는 점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로한이 레리 지부장이 하는 이야기를 숨어서 엿듣는 것은 불가능했다. 대체로 그는 그의 집무실에 있는 경우가 많았다. 게다가 레리 지부장 정도면 로한이 아무리 발걸음 소리를 줄인다한들 예민하게 알아챌 것이다. 그는 그 정도의 경험과 실력을 쌓은 자였다. 로한이나 엘리우스처럼 잠입 훈련 같은 것을 전혀 해본 적이 없는 자들이 그의 이목을 속이고 엿듣는 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 생각을 그대로 입으로 말하자 로한은 손발을 휘두르며 대답했다. 아무래도 흥분한 것 같았다. 로한이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기에 엘리우스는 재미있다고 생각하며 그의 말을 들었다.

“나도 엿듣고 싶어서 엿들은 것이 아니라니까. 들린 거야. 들린 거. 창밖을 보고 이야기 하고 계시는 것을 목격한 것뿐이라고. 레리지부장님이 복도에서 창밖의 허공을 보며 말하고 계셨다고.”

묘하게 설명조인 로한의 말을 듣고 당장 엘리우스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레리 지부장이 정신병에 걸리진 않았냐는 것이다. 창밖의 허공에 대고 말할 수 있을 것이라고 추측되는 정신머리를 가진 사람이 정상인이라고 여기긴 힘들었다.

그러나 레리 지부장이 정신병에 걸렸을 것 같진 않았다. 허공에 대고 이야기한다는 것은 강렬한 정신장애의 증거같이 보이기도 했지만 세상에는 마법이라는 것도 존재하고, 대사법관의 지위에 있는 레리 지부장이니 어쩌면 봉사자인 자신들은 알 수 없는 이적을 부릴 수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허공에 대고 이야기를 하고 있었단 말이지.”

아직도 별로 믿을 마음이 들진 않았지만 엘리우스는 일단 유보해두기로 했다. 로한 역시 네달렉스의 봉사자. 질서의 수호자를 섬기는 자로 네달렉스와 만인을 위해 봉사하는 자이다. 평소에 좀 나사 빠진 듯한 모습을 보여주곤 하지만 신명을 지닌 그는 그런 평소의 모습을 초월한 신뢰를 받을 자격이 있었다. 신명을 받는 다는 것이 바로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허공에다가 말하고 있더라. 좀 단편적이라서 완전히는 못 알아들었는데. 일단 랑그라드 함락이랑 바로스 검공이 부상을 입은 것은 틀림없어.”

“그렇단 말이지”

“그렇단 말이다.”

로한이 씩씩 거리며 말했다.

“뭐, 사실이라면 곧 공지가 있겠지.”

엘리우스는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신상을 닦기 위해 몸을 돌렸다. 질서의 수호자 네달렉스의 신상은 금으로 도금된 고급스러운 것이었다.

신을 찬양하는 수단으로 금을 사용한다는 것은 어째보면 세속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엘리우스는 생각했다. 반대로 제국이건 왕국이건 지하세계건 간에 동등하게 높은 가치를 가지는 광물로 신상을 덧씌웠다는 점이 공경을 나타내는 것이라는 말도 있긴 했지만 엘리우스로서는 영 그 말에 공감이 가지 않았다.

그렇게 엘리우스의 머릿속 화재는 신상으로 돌아가 버렸다. 하지만 오한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야. 야. 이게 그렇게 쉽게 넘어갈 이야기냐. 들어보라고. 전쟁이란 말이다. 전쟁.”

로한이 집요하게 붙잡고 늘어지자 결국 엘리우스는 고개를 돌려 로한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 속에 로한이 기대하던 표정이 들어있는 것은 아니었다. 엘리우스는 사뭇 판단하기 미묘한 표정으로 로한을 돌아보고 있었다.

“혹시 랑그라드에 가족이라도 있었나?”

그에 로한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왜?”

“아니, 난 또 랑그라드에 가족이라도 있어서 그러는 줄 알았지.”

“아니...”

엘리우스는 질문에 대답하면 답답하다는 듯이 로한은 씩씩 거렸다.

“너는 전쟁이라는데 아무렇지도 않냐?”

“내가 필요하다면 위에서 명령이 전달되어 오겠지. 미리부터 신경 쓸 필요는 없는 일이지.”

“하? 전쟁이라고 혼란을 불러온다 말이야. 질서의 수호를 위해 봉사하는 우리들이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잖아.”

“신경 쓰여 봤자 할 수 있는 일도 없지. 그보다 네 할 일이나 해. 점심시간까지 얼마 안 남았다.”

엘리우스는 그렇게 대꾸하고는 다시 신상을 닦기 시작했다. 그에 로한은 푹하고 한숨을 쉬었다. 안타깝게도 그는 사람을 잘못 골랐다.

소위 우등생이라고 불리는 엘리우스는 그 별명답게 자신이 관심 있는 일 외에는 흥미가 없었다. 만약 전쟁이 아니라 전승지식에 관한 이야기였다면 반응이 달랐겠지만... 아쉽게도 로한이 가져온 화제는 전승지식에 관한 것이 아니었고 엘리우스는 흥미를 끌어내는 일에는 실패하고 만 것이었다. 혼자 전쟁이라는 말에 설레발치고 있었던 로한은 투덜거리며 자신의 일로 돌아갔다.

“아아. 뭐랄까. 김빠지네.”

엘리우스는 힐끗 로한이 걸레질을 시작하는 것을 보고는 자신의 일로 돌아갔다. 둘은 현재 성소의 청소를 하고 있었다.

네달렉스 교단 엘리머스 지부에서 봉사자들만이 이용하는 이 작은 성소는 둘의 담당이었다. 5년 전 처음 엘리머스 지부에 배속된 이후 줄곧 그랬다. 그래서 두 사람은 성소의 청소라면 도가 터 있었다. 일어나서 아침 식사를 하고 기도를 드리고 교의학을 배우고 나면 점심까지 남은 시간동안 봉사자들은 엘리머스 지부의 청소를 시작했다.

두 사람 역시 마찬가지 였다. 이 엘리머스 지부에서 지낸지 8년차이지만 여전히 봉사자인 그들은 언제나 이 성소를 청소해 왔었다. 그 덕인지 워낙 이골이 나서 그런지 번쩍번쩍 빛날 정도로 깔끔히 청소하는데도 많은 시간이 들지 않았다. 대체로 점심시간이 되기 전에 어느 정도 여유가 남을 정도였다.

이렇게 되면 그만큼 남는 시간은 자유 시간이었다.

엘리우스와 로한은 청소도구들을 전부 정리하고 성소의 맨 뒤에 놓여 있는 의자에 앉았다.

엘리우스와 로한은 말없이 휴식 시간을 보냈다. 로한은 가끔 한숨을 쉬었지만, 엘리우스는 로한과는 반대로 별 동요 없이 평소의 상태를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엘리우스라도 동료가 한숨만 푹푹 쉬고 있는 모습을 두고볼 수만은 없었다.

그러고 보면 걱정이라는 것은 신체에 악영향을 미친다고 하던가? 엘리우스는 어디에선가 본 적있는 것 같은 내용을 떠올렸다. 지금 로한은 건강해보지이만 아무래도 침략이 일어났고 그로인해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는 사실이 그의 마음을 짓누르고 있는 것 같았다.

마음의 병이라...

엘리우스는 천장을 한번 쳐다보고는 다시 땅을 쳐다볼 동안의 짧은 시간동안 생각했다.

그의 상태가 나빠지면 일과가 흐트러지게 되고 결국 피해를 보는 것은 엘리우스 자신이었다. 대체적으로 엘리머스 지부에서의 생활은 룸메이트와 2인 1조로 활동하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로한과 사이가 나빠지거나 해서 좋을 것은 없었다. 또 룸메이트의 고민하나 들어주지 못해서야 자신의 자질 역시 문제가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렇다면 역시 뭔가 관심있는 척을 해주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여겨졌다.

“전쟁이 일어나면 우리가 종군할 수도 있겠군.”

엘리우스는 혼잣말인양 입을 열었다. 거의 지나가는 듯한 말이었지만 로한은 엘리우스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게 문제라고 그게. 이제 떠올렸냐.”

핀잔하는 듯이 말하는 로한에게 엘리우스는 별말 하지 않았다. 하긴 아까 워낙 무심히 넘겨버렸으니 좀 심통이 나 있겠지 하고 생각한 것이다. 네달렉스의 봉사자들은 기본적으로 절제를 최고의 덕목으로 치지만 사람인 이상 감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아직 수행하는 입장이 그들이 그렇게 감성적인 면에서 강한 절제력을 보여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여튼 전쟁이란 말이야. 뭐, 나도 벌써부터 걱정해봐야 별 수 없다는 건 알고 있어. 그래도 말이지. 어엄청 신경 쓰인단 말이지. 우리가 갈 수도 있는 거잖아. 나도 질서의 수호자의 봉사자니까 이런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거 알지만 말이지. 솔직히 무섭다고.”

뒤 이어 긴 한숨이 이어졌다. 엘리우스는 그 모습을 보며 한숨을 쉬면 한숨 한 번 당 수명이 1초씩 깎여 나간다라는 사실여부 불명의 속설을 떠올렸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를 꺼낼 수 없었고 엘리우스는 일단 그 속설에 관한 지식을 저 멀리 뇌 속 창고로 밀어 넣었다. 고민하는 동기의 옆에서 그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라고 실례라는 생각이 바로 떠올랐다.

“정작 닥치면 의외로 아무렇지도 않을지도 모르지.”

“그럴지도 모르긴 하지만.”

로한은 영 찝찝한 표정으로 벽에 등을 기댔다. 방만한 자세. 만약 사법관보라던가 사법관들에게 걸린다면 한 소리들을 자세지만 엘리우스는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그런 사실은 로한도 잘 알고 있을 터일 거고 로한의 지금 기분을 생각하면 이것저것 지적해서 괜히 성질을 돋우고 싶지 않았다.

외모만 봐서는 건장한 신체와 함께 거칠 것 없어 보이지만 속은 섬세한 친구라는 것을 엘리우스는 알고 있었다.

“아아. 불안하다고. 불안해. 왠지 안 좋은 예감이 들어. 후우. 내가 겁쟁이인 걸까? 아직 종군한다고 확정된 것도 아닌데 그럴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러니.”

“전쟁이니 별 수 없지.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고 해도 내 생각에는 거의. 100% 종군할 것 같은데.”

“나도 그렇게 생각해.”

엘리우스가 말하자 로한은 동의한다는 듯이 말했다. 네달렉스는 질서와 법의 신. 혼돈에 철퇴를 가하는 존재였다. 그런 그가 왕국의 존재로서 성립되는 질서의 붕괴를 용납할 리가 없었다. 당연히 그의 대행자인 네달렉스의 봉사자들은 목숨을 바쳐 혼돈을 불러오는 이들과 대립해야 했다.

혼돈을 몰아내고 질서를 가져온다. 신민들을 보호하고 그들 사이를 중재할 법을 세운다.

그것이 바로 네달렉스의 봉사자들의 일이었다.

그렇기에 네달렉스 교단은 왕국과 밀접한 관련을 지니고 있었다. 바로 왕국의 사법권을 관리하는 것이다. 당연하게도 신으로부터 신명을 받는 이들인 만큼 봉사자들은 일절 부정을 저지르진 않았다. 동시에 제국의 법을 엄격히 관리하고 징벌을 행하기 위해 봉사자들은 극도로 힘든 훈련을 부여받았다. 그 모든 훈련을 이수하고 난 후에 사법관의 자격을 얻게 되면 질서와 법의 존속을 위해 그 스스로 헌신할 수 있게 되는 것이었다. 그것은 네달렉스의 봉사자라면 누구나 바라마지 않는 일이었다.

엘리우스와 로한은 아직 사법관이 되지 못한 봉사자였다. 현재 사법관이 되기 위한 교육을 받는 중으로 신명을 받았다는 사실만 제외하면 학생이라고 해도 되는 위치였다. 엄격한 네달렉스의 교단의 교육에서도 단 한 번의 낙제도 없이 올라오긴 했지만 그들은 이제 8년차였다. 앞으로 단 한 번도 낙제하지 않는다고 해도 2년을 더 연수받아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합격한다고 하더라도 사법관보로서 5년의 연수기간을 보내야 한다.

그렇게 되고서야 비로서 겨우 한 사람 몫을 하는 사법관이 될 수 있었다.

로한은 천장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을 이었다.

“몇 년 차 까지 종군할까? 뭐, 일단 8년차인 우리들은 반드시 갈 거고...”

“전 번에는 신명을 처음 받는 6년차까지 종군했었다던 것 같아. 그런 글을 읽은 적 있어.”

“전 번?”

“야만거인들과의 최종전 말이야. 엠필로스 평원전. 일 주 전쟁. 분명 총력전이었었지. 그 때 6년 차까지 종군했었다나 봐.”

엠필로스 평원전은 바로스 검공이 결정적으로 야만 거인들을 몰아냈던 전쟁이었다. 그때는 아직 네달렉스 교단의 봉사자이지도 않았던 둘은 겪어보지 못했던 전쟁이지만 그래도 기록은 남아 있었기에 엘리우스는 그 때 일을 알고 있었다.

“6년 차라...”

그때야 총력전이었던 만큼 네달렉스 교단 역시 충분히 전투가 가능한 모든 이들을 집어넣었었다. 하지만 이번은 어떨까?

역시 닥쳐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 하지만 엘리우스와 로한은 자신들이 꼭 포함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8년차라면 상당한 전력이다.이미 신명을 받아 이적 대행을 행할 수 있으며 그 수련도도

둘다 나란히 천장을 쳐다보고 있는데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땡땡땡땡땡!

요란하게 울리는 이 소리는 점심식사 시간을 알리는 소리였다. “웃샤.”하고 기합을 넣으며 로한이 단번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엘리우스는 절도 있는 동작으로 의자에서 일어났다.

휴식시간은 끝났다.

둘은 우선 식당을 향해 움직였다.

 

 

그날 하루 내내 평소와 같이 교육과 훈련의 시간이 기다리고 있었다.

뭔가 전달이 있을까 했지만 결국 모든 것이 끝날 때까지 아무 소식도 없었다. 이로서 엘리우스는 로한이 잘못 들었을 가능성을 제시했지만 로한은 절대 그렇지 않다고 대답했다. 그런데다가 정신적으로 어느 정도 수습이 되었는지 아까처럼 무턱대고 신경질을 부리는 것도 아니어서 그의 말에 어느 정도 신빙성을 부여해주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그런 큰 사건에 대해 아무런 전달이 이루어지고 있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자신에 대한 의심이 커져만 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지 않아고 대응이 빠르기로 유명한 네달렉스 교단이었다. 당연하게도 신의 의중을 따르는 사제들이다보니 결정을 내리는 일에 있어 망설임이라는 것이 없었다. 그저 신의 의중대로 결정하면 되는 것이었다. 또한 신의 의중이란 질서의 수호자 답게 혼돈에 대해 철퇴를 내리는 일일 터였다. 그런데 오후 일과가 끝나도록 아무런 전달이 없다니 너무 이상하다고 엘리우스는 생각했다. 적어도 랑그라드의 함락 소식은 알려줘야 하는 것 아닌가?

그 사실을 이상하게 여기는 사이에 오후 일과는 끝났다. 간소한 저녁 식사가 끝나고 명상의 시간과 야간 기도를 올린 이들은 마침청소를 하고 각자의 방으로 돌아갔다.

하루는 평소와 다를 바가 없었다. 단지 로한이 신경 쓰이는 이야기를 들고 온 것을 제외하고는 평소와 똑같았다.

“이상해.”

동기이자 룸메이트이기도 한 로한은 먼저 씻고 돌아와 늦게 돌아온 엘리우스에게 말했다.

“전달이 없는 거?”

“응, 그거.” 로한은 긍정하고 말을 이었다. “랑그라드 함락이면 엄청나게 중요한 이야기잖아. 종군할지도 모르는. 그런데 왜 전달이 없는 거지?”

엘리우스는 대답 대신 어깨를 한 번 들먹였다.

“잘못 들은 것은 절대 아닌데.”

여태까지 아무런 전달이 없자 슬슬 자신이 의심되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로한의 의심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중단되었다.

엘리우스는 그대로 몸을 돌려 문을 열었다. 문을 두드린 사람은 앞머리를 길게 기른 야위어 보이는 남자였다. 사번관보 오세. 말하자면 엘리우스와 로한에게 있어서 선배 격에 해당하는 인물이었다. 게다가 사법관보 4년차. 조만간 정식으로 사법관으로 임명될 것이다.

사법관보 오세는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엘리우스의 이름을 불렀다.

“엘리우스.”

“네.”

엘리우스는 이름이 불리자 차렷을 하며 대답했다. 네달렉스의 봉사자들에게 있어 사법관과 사법관보의 위치는 절대적인 것이었다.

“레리 지부장님께서 부르셨다. 따라 오도록 해라.”

오세 사법관보는 그렇게 말하고는 걸어가기 시작했다. 이미 오세 사법관보 뒤에는 엘리우스보다 먼저 불린 것으로 보이는 봉사자들이 서 있었다. 봉사자 피엘, 로도, 다리스. 그들은 엘리우스보다 1년 차 위인 봉사자들로 내년에 사법관보에 임명되기 위한 시험을 칠 사람들이었다.

엘리우스는 힐끔 로한 쪽을 돌아보았다. 로한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랑그라드의 함락과 관련된 일일지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사법관보 오세는 이미 불러둔 봉사자 네 명 외에 셀이라는 이름의 8년 차 봉사자를 부르고 레리 지부장이 있는 집무실로 향했다.

분위기가 상당히 오묘했기에 엘리우스는 일단 주변의 눈치를 살폈다. 일단 선배인 세 사람은 사태가 잘 파악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반대로 사법관보 오세는 착 가라앉은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심지어 비장감마저도 느껴졌다. 원체 어두운 분위기로 유명한 사람이긴 했지만 이건 정도가 지나치다고 생각될 정도였다. 사법관보 오세가 풍기는 그런 분위기 탓인지 선배 세 사람은 뭔가 큰 일이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까지 모르는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것은 동기인 셀도 마찬가지였다. 동글동글하고 통통한 외모의 이 소녀는 선배들과 사법관보 오세의 온도차에서 뭔가 불안감을 느끼고 있는 듯이 쉴 새 없이 눈동자를 움직이고 있었다.

집무실 앞에 서자 사법관보 오세는 절제된 동작으로 집무실의 문을 두드렸다. “탕. 탕.”하는 소리가 복도에 울려퍼지자 안으로부터 레리 지부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라.”

허가가 떨어지자 사법관보 오세는 즉각 집무실의 문을 열었다. 필수적인 가구 밖에 없는 살벌한 집무실 안에는 문을 마주보고 위치한 책상과 그 뒤의 의자에 앉아 있는 레리 지부장의 모습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 이미 앞서 온 듯이 사법관 그루모가 의자에 앉아 있었다.

사법관보 오세가 먼저 안으로 한 발짝 발을 들여놓더니 보고 했다.

“사법관보 오세 및 봉사자 오명 집무실에 부름을 받아 왔습니다.”

“어서 오게.”

머리가 반쯤 벗겨진 대머리인 레리 지부장이 말하자 사법관보 오세가 안으로 먼저 들어갔고 엘리우스는 비롯한 봉사들도 따라서 집무실에 들어갔다. 마지막으로 들어온 셀이 문을 닫자 레리 지부장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신체의 건장함에 비해 키는 그리 크지 않은 레리 지부장은 일어서봤자. 높이 큰 변화는 없었다. 하지만 쭈그려있던 몸을 펴자 넓은 어깨와 두터운 몸집에서 상당한 위압감을 느껴졌다. 하라드라는 종족적 특성상 왜소하고 키가 작은 사법관 그루모와는 지극히 대조적이었다.

“그루모. 자네는 앉아 있어도 좋네.”

레리 지부장이 허락하자 사법관 그루모는 의자에서 뛰어내리려는 것을 멈추고 그대로 앉아 있었다. 의자에 앉아 있지 않으면 레리 지부장의 책상보다도 높이가 낮아 올려다 보아야하니 그런 배려를 한 것일 것이다. 하라드의 평균 신장이 110정도고 커봐야 130이 못 된다는 것을 생각하면 정당한 배려였다.

“우선 자네들에게 비극적인 소식을 알려야겠네.”

레리 지부장이 그렇게 서두를 때자 엘리우스는 올게 왔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로한이 헛소리를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랑그라드가 무너지고 말았다는 급보가 오늘 들어왔네. 바로스 검공의 검은 꺾였고, 그는 병사들과 함께 랑그라드에서 물러나고 말았지. 일단 표면상 야만거인들이 이 일을 침공해왔다는 모양이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라고 하네. 야만거인들이 무기와 방어구에 지휘체계까지 갖추고 있다는 사실이 발견된 모양이니 말일세.”

레리 지부장은 담담히 말했지만 듣는 이들로서는 놀라운 사실이었다. 야만거인들이 대부분 힘을 쓰지 못하고 물러난 이유는 그들 사이에 전혀 체계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저 본능에 따라 비슷한 것들과 함께 무리 짓고 있을 뿐 집단이 가지는 체계는 전혀 가지고 있지 못했다.

우두머리는 존재했지만 일종의 착취 계급에 불과했다. 강한 힘으로 보다 약한 놈들을 공포로 지배하고 빼앗는 것이 우두머리가 하는 일의 전부였다.

그랬던 야만거인들이 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장비에 지휘체계까지 갖추고 돌아왔다고 하면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분명 말도 되지 않는 소리였다. 알려주는 사람이 레리 지부장이 아니었다면 무시해버렸을지도 모를 정도였다. 하지만 레리 지부장은 농담을 모르는 사람이었다. 네달렉스의 대사법관으로서 그는 질서를 어지럽히는 모든 혼돈적인 요소들을 증오했다.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농담조차 하지 않았다. 성실함을 강조하고 절조를 중히 여기는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엘리우스를 비롯한 사람들은 그 정보에 놀라고 있었다. 상식을 파괴하는이 정보는 어느 정도 그에 관한 학식이 있는 이들에게 상당한 충격을 줄 수 있었다.

레리 지부장은 봉사자들이 충격을 받은 봉사자들과는 달리 담담히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일단 페리놀그라체 왕은 어떤 적이건 물러섬 없이 대적할 생각이라고 하네. 그래서 우리 질서의 봉사자들이 종군해주기를 요청해왔네. 하지만 준비에는 시간이 걸리네. 그러나 랑그라드는 상태가 급박하지. 그렇게 되어 일단 선발대를 보내기로 이야기가 되었네.”

레리 지부장이 거기까지 말했을 때 사법관 그루모가 끼어들어 왔다.

“그렇다면 우리가 바로 그 선발대인 것이로군. 레리.”

“맞네. 그루모.”

레리 지부장은 고개를 끄덕이진 않고 말로만 긍정했다. 근엄한 표정을 유지하고 봉사자들을 훑어보았다.

“그렇게 된 거네. 자네들은 내일 새벽 엘리머스 영주군과 합류하여 랑그라드 탈환을 위해 종군하게 될 걸세. 그리고 인솔은 그루모 사법관이 맞게 될 거네. 질서의 수호자의 이름으로 혼돈을 칠 가장 첫 번째 검이 바로 자네들인 것일세! 이제 각자 돌아가서 짐을 싸도록. 이후 내일 오천 5시에 다시 집무실에 집합할 수 있도록 하게.”

레리는 그렇게 말하고 성인을 쥐어 보였다. 사법관 그루모를 비롯해 엘리우스와 봉사자들 전부 같은 성인을 만들었다.

“우리는 거대한 질서의 수호하는 봉사자들이니. 태초로부터 이어지는 의무로부터 물러서지 않을 지며.”

“물러서지 않을 지며.”

“고통으로부터 등 돌리지 말며.”

“등 돌리지 말며.”

“불의를 외면하지 않을지니.”

“외면하지 않을지니.”

“숭고한 질서를 위하여 헌신할지어다.”

“헌신할지어다.”

성인을 마치자 봉사자들은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처음 들어갔던 것과는 반대로 가정 먼저 나온 것은 셀이었고 그 다음이 엘리우스. 세 명의 선배들이 나오고 마지막으로 사법관보 오세가 보고를 하고 집무실을 나왔다.

집무실을 나오자 사법관 오세는 자신과 같은 명령을 받은 봉사자들을 둘러보았다.

“음, 레리 지부장님의 말씀대로. 다들 준비하도록 해라. 내일 일찍 일어나야 하니까. 밤늦도록 깨어있진 말고. 다들 방으로 돌아가라.”

사법관보 오세의 명령에 엘리우스를 포함한 봉사자들은 “네.”라고 대답했다. 대답 후 봉사자들은 흩어져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당연히 엘리우스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 문을 닫은 후 로한이 뭐라 묻기도 전에 먼저 상기된 목소리로 말했다.

“엄청난 소식이다. 엄청난...”

“뭐... 뭔데?”

엘리우스가 동요하는 모습을 보자 로한은 두 눈을 크게 떴다.

“야만거인들이 갑주를 입고 군대식 체계를 이뤄냈다더군. 그 놈들 지성을 생각했을 때 고작 10년 사이에 그 정도 변화를 이룩했다니. 인류학적으로 엄청난 일이야. 연구대상이다. 제국 210년에 있었던 카우나세츠의 등장도 이에 비하면 조촐할 정도야.”

“무슨 소리야?”

“무슨 소리긴. 랑그라드를 함락 시킨 놈들이 야만거인들이었단 소리야. 그것도 무장한 야만거인들.”

“뭐, 뭐라고?”

로한이 입을 크게 벌리며 반문했다. 무장한 야만거인들이라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적어도 그가 교육밖은 상식선에서는. 심지어 야만거인들이 문명을 이루는 것은 그들을 창조한 신인 가즈로크조차 포기한 일이었다. 그 때문에 대전쟁 후 천 년 간 그들은 최소한의 문명도 이루지 못하고 살아왔었지 않은가? 그나마 무리를 이루는 것이 그들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제국의 십현자들 조차 야만거인들을 13종의 선주 종족으로 분류하긴 했으나 그들이 문명을 가질 가능성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라는 입장을 취해왔다. 적어도 그들 자력으로는 다른 선주 종족들과 같이 문명을 창조할 순 없다고 여긴 것이다.

그러다보니 로한의 머릿속에 떠오른 결론은 단 하나였다.

“그거 아무리 생각해도 누군가 배후에 있다는 소리잖아.”

“뭐, 그렇지만. 로망이 없군.”

엘리우스는 팔짱을 끼고는 실망한 듯 고개를 흔들었다. 그 모습에 로한은 재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야, 너 평소에는 그딴 거 신경도 안 쓰더니 왜 그런 것만 로망 타령이냐. 에잇. 그딴 건 제쳐 놓고.”

“그딴 거라니.”

“그런 그건 제쳐 놓고. 일단 랑그라드가 함락된 건 사실이라는 말이로군.”

평소에는 냉정한 주제에 이상한 것에만 괜하게 신경 쓴다고 여기며 로한은 화제를 돌렸다. 엘리우스는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이 로한에게 이번 선발대에 합류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알려주었다..

“아, 그래. 그래서 이번에 소집된 사람들이 선발대로 랑그라드 탈환군에 합류하기로 했다.”

“그걸 먼저 말해... 읍!”

로한이 입을 쩍 벌리며 소리치려다가 황급히 자신의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언제나 그렇듯이 네달렉스의 봉사자들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바로 절제. 아무리 당황스러운 일이 있다고 해도 큰 소리로 소리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되었다.

특히나 8년차나 수행해온 자라면 더더욱.

로한은 입을 틀어쥐고 잠시 눈치를 살폈다. 누가 문을 열고 들어올 기미는 느껴지지 않았다. 로한은 좀 더 뜸을 들였다가 목소리를 낮춰서 말했다.

“후우. 이 봐 엘리우스. 그걸 먼저 알려줘야 하는 거 아냐?”

엘리우스는 그에 어깨를 들먹여 보였다.

“미안. 하도 놀라운 소식이 있다 보니. 일단 내일 엘리머스 영주군과 합류하기로 했다. 짐도 당장 싸라더라.”

“그러냐?”

“그래.”

“그렇다면 종군은 결정된 것이로군.”

“그렇지.”

엘리우스는 대답하며 자신의 관물장을 향해 움직였다. 수십 권의 노트들이 들어 있는 관물장안을 해치며 엘리우스는 무엇을 챙겨야 할지 생각했다. 세면용품은 쓸 수 있을지 알 수 없지만 일단 챙겨두기로 했다. 옷가지도 좀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성표는 반드시 챙겨야할 거고.

“그럼 네가 먼저 가는 건가?”

짐을 챙기는데 등 뒤에서 로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엘리우스는 돌아보지 않고 대답했다.

“일단은 그렇다고 하더라. 일단 급하게 숫자를 불리려니 그렇게 되었다나봐.”

“하긴 야만거인놈들은 선전포고고 나발이고 없었을 테니까. 대응하기에는 시간이 걸리기는 하겠군. 하지만 차라리 전력을 다 모아서 한꺼번에 출병하는 것이 낫지 않나? 오히려 각개격파 당하는 거 아냐?”

엘리우스는 로한의 의문이 꽤 타당하다고 생각했다. 바로스 검공의 정예병들이 깨질 정도의 적들이라면 차라리 모을 수 있는 최대한 병력을 모아서 치는 쪽이 타당할 것 같았다.

“아마 균형을 맞추려는 것이 아닐까? 거기도 성직자들이 있을 테니 바로스 검공도 회복했을 거고, 야만거인들은 그 신체능력만큼이나 세대교체 시기가 기니까 수도 10년 사이에 그렇게 많이 불어나지도 않았을 거야. 그걸 생각하면 일단 수적 균형부터 맞출 생각이라고 봐도 되지 않겠어?”

“일리는 있군. 어차피 거기서 야만거인들과 대치하고 있는 바로스 검공을 일단 지원한다는 건가?”

“그렇지. 거기다 바로스 검공이라면 뭔가 기적을 일으켜 줄지도 모르고 말이야.”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였다. 이야기 속에서나 등장할 영웅이 에카난스에서 존재한다면 그가 바로 바로스 검공이었다. 그의 업적은 말할 것도 없었다. 에카난스의 국민들이라면 아무리 벽촌이라도 바로스 검공이 지닌 영웅으로서의 명성을 들어봤을 정도였다.

그 명성으로부터 오는 신뢰는 고작 한 번의 패배로 잃어버릴 정도로 얄팍한 것이 아니었다. 비록 랑그라드는 함락 당했지만 다시금 그 땅을 되찾고 평화를 불러와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확실히 이야기 속에 나오는 사람 같으니 그럴 것 같기도 하다.”

로한은 고개를 끄덕이며 엘리우스의 말에 동의했다. 그럴 것이 정말 바로스 검공이 해온 일들은 옛 전설이나 서사지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들뿐이었다. 그의 업적들을 듣다보면 누구라도 그런 생각이 들 것이었다. 비록 과장이 좀 섞여 있을지 모르지만 그가 낸 결과들은 충분히 현세의 그 어떤 이들도 따라잡기 힘든 업적들이었다. 바로 그가 아니면 누가 해낼 것인가? 그런 의문을 지니게 될 만한 것들이 분명 존재했다.

“그런데 말이지.”

로한은 엘리우스의 말을 들으며 침대 위에 털썩하고 드러누웠다. 어차피 방에는 둘 뿐이니 이렇게 방만한 자세를 취한다고 해도 뭐라 할 사람도 없고. 로한은 어깨를 움직여 슬금슬금 침대 위를 기어 올라가 베게가 있는 곳까지 도착했다.

“나도 막상 닥치니 좀 긴장되긴 한다. 아아. 왠지 기분이 팍 가라앉는데.”

“하하. 닥쳐야만 반응이 오다니 너도 참 둔하긴 둔하다. 이제 오늘 낮에 내 기분을 알겠냐?”

“대충.”

꽉하고 가방의 끈을 묶은 엘리우스는 겉옷을 벗고는 침상 위에 주저앉았다. 로한은... 8년 동안 그와 한 방을 사용해온 친우이자 동기는 침대에 누워서 천장을 노려보고 있었다.

엘리우스는 자신이 참 한심스럽다고 생각했다. 아침까지는 꽤나 냉정했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그렇지 못하다. 바로 내일로 그 일이 닥쳐왔는데 문제는 그 일을 자신을 포함한 일부만이 겪는다는 사실 때문에 그런 것 같았다. 함께 할 것이라고 여겼던 동기가 남기 때문에 이렇게 두려움을 느끼는 것이라면 꽤나 병신같다고 생각했다. 꽤나 병신같다고.

사제라는 입장상 입으로 내뱉어서는 안도리 말이었지만 어차피 속생각이라는 점에서 엘리우스는 상관없다고 여겼다. 엘리우스는 털썩하고 자신의 자리에 누웠다.

“야.”

요한의 부름에 엘리우스는 고개를 들며 “왜?”라고 대꾸했다. 자신과 똑같이 고개를 들고 이쪽을 보고 있는 로한의 얼굴이 보였다. 진지하고 열성적인 동기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갈 때까지 살아있어라.”

“어.”

툭하고 베게위로 머리를 떨어뜨렸다.

눈을 감으며 소등까지 얼마나 남았지 하고 생각했다. 일괄적으로 불이 꺼질 시간이 오면 책을 읽기 위해 언제나 기름등에 불을 붙였었다. 하지만 오늘은 그럴 기분이 들지 않았다. 책에 집중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가슴으로 두근거리는 고동이 느껴졌다. 긴장하고 있다는 것을 엘리우스는 알고 있었다. 두려움만이 아니다. 기대감 역시 존재한다.

그것은 신의 뜻대로 혼돈을 척결한다는 것에 대한 기대감. 그가 질서의 수호자를 위해 헌신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기대감이었다.

두근두근하고 심장소리가 크게 울렸다.

 

 

사법관 그루모의 인솔하에 엘리우스는 함께 종군하는 5명과 함께 엘리머스 영주성으로 향했다. 어제 긴장으로 제대로 못 잔 탓에 좀 피로했지만 참을 수 있는 정도였기에 엘리우스는 표정관리를 하며 뒤따랐다.

영주성은 영지의 중심에 있었다. 도시 외곽에 있는 네달렉스 교단 엘리머스 지부에서 영주성으로 가기 위해서는 10여분 정도의 시간이 걸렸다.

사법관 그루모는 그의 출신 종족답게, 하지만 네달렉스의 봉사자로서는 드물게 수다스러운 인물이었다. 물론 하라드치고는 입이 무겁다고 할 수 있었지만 하루 내내 침묵으로 일관하는 봉사자들이 드물지 않은 네달렉스의 교단내에선 분명히 수다스러운 인물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고랄드 공정공의 일가가 영주성에선 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느냐?”

작은 키 때문에 봉사자들을 올려다보며 사법관 그루모는 입을 열었다.

제국에서야 인간들과 비등한 인구수를 차지하고 있는 하라드였지만 왕국 에카난스에서는 극히 드문 종족에 속하는 그를 엘리우스는 내려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하라드는 사법관 그루모 말고는 본적이 없었다.

“알고 있습니다. 고랄드 공정공의 일가는 영지에서 떨어진 북쪽 장원에서 살고 계시지요.”

사법관보 오세가 대답했다. 사법관 그루모는 “허허허.”하고 웃으며 흰 수염을 매만졌다.

“그렇지. 대대로 이스커시스 가문은 북쪽 장원에서 살았지. 그럼 어째서 북쪽 장원에서 살게 되었는지는 아나?”

사법관보 오세도 제법 역사에 빠삭한 이였지만 고랄드 공정공의 가문인 이스커시스 가문이 어째서 영주성이 아닌 북쪽성에서 살고 있는지는 알지 못했다.

“글쎄요. 잘 모르겠습니다.”

사법관보 오세가 일행을 대표해 대답했다.

엘리우스는 자신에게 흥미로운 이야기였기에 귀를 기울였다. 엘리우스가 평소 관심을 보이는 것은 질서의 . 어차피 영주성에 도착할 때까지 봉사자들끼리 잡담을 할 일은 없었다. 절제의 덕목은 엄격히 지켜졌고 침묵 역시 그 중 하나였다. 절제는 어디까지나 자의로 이루어져야 했기에 침묵의 여부는 어디까지나 자유였지만 봉사자들은 그들의 상급자 앞에서는 최대한 입을 열지 않는 쪽을 선호하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사법관 앞에 봉사자들이 모이면 모두 벙어리가 되기 쉬운데 그나마 스스로 분위기를 주도하는 사법관 그루모같은 인물은 봉사자들 사이에선 환영받는 타입이었다.

게다가 사법관 그루모는 네달렉스의 봉사자들 치곤 귀족과 왕족의 역사에 능하니 일방적으로 이야기를 듣는 입장이 되어도 특별히 지루할 것은 없었다.

물론 엘리우스로서는 그런 것은 학문이라기에는 너무나도 어중간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견해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모르는 이야기를 다른 사람의 입으로부터 듣는 것은 썩 나쁘지 않았다. 그 이야기가 재미있는지 없는지. 유익한지 그렇지 않은지는 제외하더라도 침묵으로 일관되는 상황보다는 훨씬 나을 것이었다.

“이스커시스 가문이 이 땅에 들어온 것은 3대 전이지. 그전에는 넓은 평원이었다. 왕도 에카난스가 탄생하고 221년 쯤 되었을 때 이스커시스 가문이 처음 이 땅에 자리 잡았지. 지금도 그랬지만 그 때도 이 집안은 무골이었는데... 그러고 보니 에카난스에는 유독 무골이 많군. 왕조차 자칭 기사였지.”

사법관 그루모는 수염을 쓰다듬었다.

엘리우스는 재빨리 에카난스의 왕과 여덝시조가문에 대해 떠올렸다. 왕인 알스터드 후인 에시커드는 제국의 서방을 맞고 있던 변경백이었다. 그가 이끌고 있던 여덝 종신의 가문은 이무라제, 에카난스, 이스커시스, 베라마무드, 오르산, 고로도드, 미리암리스, 베마드. 그 중에서 마법사 가문이었던 미리암리스를 제외하고는 전부 무인으로서 개척전쟁을 주도했던 자들이었다.

“이스커시스 가문의 오블리안이 처음 이 땅에 찾아왔을 때는 이미 이곳에는 지배자가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알았네. 그것은 지혜를 가진 짐승이요. 높이가 3미터요 머리부터 꼬리까지 길이가 6미터는 될 거대한 곰이었지. 그 곰은 야만거인들로부터 자신의 영토를 지키고 살았다고 하네. 그리고 그의 이름은 엘리머스였다고 하지.”

생판 처음 들어보는 이야기였기에 엘리우스 뿐만 아니라 다른 봉사자들로 사법관 그루모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이 영지를 개척한 자인 오블리안 이스커시스가 엄청난 크기의 말하는 곰을 만났고 거기다가 이 영지의 이름이 그 곰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는 사실은 봉사자들의 흥미를 끌기에 충분했다. 그들은 제법 오랜 시간을 이 영지에서 보냈었지만 처음 들어보는 이야기였다. 전승지식에 상당히 흥미를 지닌 엘리우스조차도 들어본 적 없는 이야기였다.

“다들 모른다는 얼굴이로군. 하긴 그건 가문의 불명예와 관련된 일이니 어쩔 수 없겠자. 알려고 하는 사람도 별로 없을 거고 말이야. 애초에 영지민들이야 영지가 어떻게 생겼는지 관심 없지 않나? 보통 산다는 지극히 일상적인 일에 치이기 마련이지. 우리들도 마찬가지네. 불민한 우리들의 신의 의지에 보다 다가가기 위한 수련으로 그런 이야기들에 관해서는 쉬이 관심을 지니지 못하기 마련이라네. 보다 더 큰 신의 뜻을 알리기 위해 우리는 매일을 갈고 닦아야 하지 않은가? 그렇듯이 무지가 당연한 것은 아니지만 부끄러운 일도 아닐세. 안 그런가? 오세군? 그렇지. 이야기가 좀 돌아갔는데 이 지혜로운 짐승인 엘리머스에게 오블리안 이스커시스와 내기를 걸었다네. 그 내기가 무엇인지까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것이 불명예스러운 일이었다는 글이 남아있으니 분명 속임수가 있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네. 지혜를 가졌으나 순박한 짐승을 속여 이 땅의 지배권을 빼앗은 것이지.”

불명예스러운 이야기라고 하자 엘리우스는 왜 자신이 그 전승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하는지에 대해서 납득했다. 조상의 불명예라니... 명예를 존중하는 기사의 입장으로서는 조상의 불명예가 널리 퍼지길 바라진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의도적으로 은폐되었음에 틀림없었다.

하지만 엘리우스는 그런 사정이야 어찌되든 새로운 전승지식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이 즐거웠다. 지혜로운 짐승에 대한 전승은 몇 가지 알고 있는 바가 있었다. 오래된 문헌에서는 가끔 신비로운 힘을 지닌 짐승들이 도움을 주거나 때로는 적으로, 때로는 경쟁자로 나오는 전승들을 본적 있었던 것이다. 몹시도 흥미롭고 관심이 끌리는 이야기들이었었다.

사법관 그루모는 잠시 뜸을 들이다 말했다.

“오블리안은 적어도 명예를 아는 이였지만 왕국을 생각하는 입장에서 그는 어떻게든 내기에서 이기지 않을 수 없었지. 생각해보게. 엘리머스는 연재 에카난스의 유이한 곡창지대야. 저 랑그라드의 임폴리아 평원을 손에 넣기 전까지는 유일한 곡창지대였지. 랑그라드까지 이어지는 세비어 강이 주는 많은 혜택을 제일 처음 얻을 수 있었던 장소가 바로 이 엘리머스라네. 적어도 오블리안 이스커시스가 얼마나 큰 부담감을 안고 있었을지 생각해 보게. 특히나 당시는 왕국의 건립의 첫시기였어.”

그러고 사법관 그루모가 사법관보 오세에게 눈짓을 던지자 오세는 그 눈짓의 의미를 파악하고는 즉각 해설을 늘어놓았다.

“동시에 왕도가 가장 빈곤했던 시기이기도 했지요. 제국으로부터 개척민들의 유입. 인구증가에 비해 식량 생산은 부실했던 시기였습니다. 최초에 제국으로부터 독립해 나왔을 때 제국의 지원으로 챙겨 나왔던 비축분이 남아있었지만 위대한 왕이며 현명한 기사였던 알스터드 후인 에시커드께서는 다음 해를 위해서라도 가능한 한 농지를 확보하라고 하셨던 때였습니다.”

사법관보 오세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사법관 그루모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우스는 마치 그 모습이 학생으로부터 만족스러운 대답을 들은 교사 같다고 생각했다. 하긴 그리 비약적인 상상은 아니었다. 실제로 사법관들은 봉사자들에게 있어 교사나 마찬가지였다. 봉사자들이 사법관이 되기 위해서 배우는 모든 지식과 기술들을 가르치는 자들이 바로 사법관들이었으니 말이다.

“그랬지. 어떻게 긴 겨울을 난다고 해도 기다리고 있는 것은 굶주림 가득한 잔혹한 봄이었단 말이야. 그래서 오블리안 이스커시스는 속임수를 써서라도 이길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 어쨌든 내기에 승리한 오블리안은 지혜로운 짐승이자 거대한 곰인 그에게 내기의 대가를 요구했지. 그게 바로 엘리머스 성이 바로 저기 있는 이유이자 이스커시스 가문이 영주성이 아닌 북쪽 장원에 사는 이유야. 어째서 그렇게 되었냐면 그는 이 땅의 풍작신이 된 것이지. 왜 있지 않은가? 시골에 가면 대지의 반석인 고결한 에덴버러가 아닌 토지신을 모시는 경우가 있지 않은가? 엘리머스는 이 땅의 토지신이 된 것이야. 그리고 그가 토지신으로서의 역할을 하기 위해 거대한 바위가 되었는데, 그 바위가 바로 저 엘리머스 영주성의 내성 지하에 존재하지.”

“어, 그렇다면 자실 엘리머스 영주성은 영주성이 아니라 제단 입니까?”

“제단이라기보다는 신전이라는 쪽이 더 어울릴지도 모르겠군. 지혜로운 짐승들은 그 이름대로 놀라울 정도의 지혜를 지니고 있지만 동시에 경이로운 이적을 발휘하기도 한다지. 말하지 않는가? 지혜로운 짐승들이야말로 미르키엘의 진정한 사제들이며 승천하여 세계의 파수꾼이 된다고. 아마 저 십현자들을 제외하곤 가장 신성에 가까운 존재들이 바로 그들일세. 그리고 북부나 남쪽에 아직 문명화되지 못한 선주종족들은 때때로 지혜로운 짐승들을 단순한 토지신이 아니라 진정한 신처럼 섬기기도 하지. 그렇다는 점을 감안해본다면 저 성은 영주성이라기보다는 풍작신에게 받쳐진 신전이라고 할 수 있다네. 자네도 가을 축제를 기억하지 않나?”

“그렇군요.”

이번에는 사법관보 오세와 같이 엘리우스도, 봉사자들도 공감할 수 있었다. 적어도 엘리머스 영지에서 이뤄지는 축제를 본 적은 있으니 말이다. 그들은 축제에 참여하지는 못했지만 먼발치에서 혹은 창을 통해 그 광경을 볼 순 있었다. 축제의 음악도 들어볼 수 있었다.

물론 그 시간에도 그들은 사법관이 되기 위한 모진 훈련과 교육을 받아야 했다. 물론 축제가 가진 유혹은 어마어마해서 어릴 때부터 마음을 정련하며 자라온 그들에게도 커다한 흥미를 끄는 대상이었다. 때때로 몇몇 어린 봉사자들이 축제를 구경하고자 몰래 신전을 빠져나가곤 했다. 그러면 대체로 사법관들은 알면서도 눈감아주곤 했는데 대신 돌아온 아이들에게 많은 양의 숙제를 안겨주었다.

그런 추억이 가득한 축제이지만 돌이켜서 생각해보면 축제의 테마가 곰이라는 사실은 손쉽게 떠올릴 수 있었다. 생각해보면 곰은 풍작과 관련된 상징성이 거의 없었다. 어렸을 때에는 아무 생각 없이 바라보았고 커서는 익숙해져서 의심해볼 생각조차 해보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의미라면 곰이 가을 축제의 상징으로 사용되는 이유도 납득할 수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였군요. 솔직히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만... 그런데 그런 것 치고는 엘리머스 영주성에 관한 전승 자체는 그리 유명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만.”

사법관보 오세의 지적에 사법관 그루모는 고개를 끄덕였다.

“300년의 시간은 그런 시간이지. 아마 일반인들에게는 축제의 상징 자체가 당연시되고 있을 걸세. 의미는 퇴색되고 전승은 잊혔다네.”

사법관 그루모는 교훈이라도 되는 양 잔잔한 웃음까지 머금으며 말했지만 이야기는 끝난 것이 아니었다. 봉사자들 중 다리스가 손을 들며 질문했기 때문이었다. 사법관 그루모의 태도에 분위기가 상당히 유해졌기 때문인지 다리스는 망설 임없이 사법관 그루모에게 질문을 던졌다.

“사법관님. 그렇다면 그럼 바위가 된 곰은 어떻게 된 것입니까? 여전히 성 지하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입니까?”

“성의 지하에 분명 존재하네. 성의 지하란 바로 지혜로운 짐승의 둥지였던 자리지. 지혜로운 짐승은 오블리안 이스커시스의 요구에 따라 이 땅에 풍요를 약속하고 돌기둥이 되었다고 하지. 그리고 지금도 그 약속을 이행하고 있다고 한다네. 그래서인지 엘리머스 영지에서는 대다한 풍년은 없지만 그렇다고 흉년도 없지. 원래라면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자연주의자들이 이르기를 토지가 가진 생명의 힘은 무한하지 않고 순환한다고 하지. 그래서 길어도 4, 5년마다 한 번 정도는 흉작이 오기마련이지. 하지만 이 땅에는 그런 일이 없어. 극단적일 정도로 풍작도 없고 말이야.”

사법관보 오세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봉사자들이야 농사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지 못했지만 오세는 어느 정도 지식이 있는 듯 했다. 엘리우스는 사법관보 오세의 별명을 떠올렸다. 독서광 오세. 엘린머스 지부 도서관의 모든 책을 읽었다는 그라면 별별 지식을 알고 있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지혜로운 짐승인 엘리머스는 오블리안의 요구로 이 땅의 토지신이 된 것이지. 하지만 그건 지혜로운 짐승으로서도 그리 나쁜 것은 아니었다네. 토지신인 이상 그는 여전히 이 땅을 수호하고 있는 셈이지. 거주자들은 바뀌었지만 이 땅에 존재하는 것들을 보호하고 조화를 맞춘다는 것은 전혀 변화지 않았으니 말이야. 그리고 오블리안은 왕의 권위가 지혜로운 짐승을 수호한다는 의미로 그 위에 영주성을 지었네. 동시에 짐승의 이름을 따 이 영지의 이름을 붙였지. 적어도 그가 불명예스러운 승부를 했다는 대가로서 말이네. 이로서 지혜로운 짐승은 설령 그 존재를 잊힌다고 하더라도 그 이름을 영원히 대대로 남기는 셈이지.”

하지만 이름은 남더라도 지혜로운 곰의 존재는 남지 못했다. 상징은 남지만 의미는 소실된다. 엘리우스는 언덕 위에 우뚝 솟아 있는 엘리머스 영주성을 쳐다보았다.

흥미로운 이야기였다고 엘리우스는 생각했다. 그런 비화가 이 성에, 이 영지에 있다고는 생각지도 못했다고 할까. 하여튼 의외의 이야기였다. 독특하다고 생각했다. 덕분에 지루함 없이 이 영지까지 올 수 있었고 도리어 호기심을 가지고 이 성의 존재에 대해서 다른 마음가짐으로 볼 수 있는 눈이 생긴 것 같았다.

사법관보 오세역시 같은 생각을 한 것 같았다.

“새로운 눈으로 이 성을 볼 수 있게 된 것 같습니다. 그루모 사법관님. 그런데 그런 이야기들을 어디서 읽으신 것입니까?”

“이스카시스 장원에서 보았네. 고랄드 공정공이 직접 보여준 것이지. 그러니 우리 지부의 도서관에서는 볼 수 없었을 거네. 아. 이런 이제 엘리머스 성에 도착했군.”

사법관 그루모는 언덕 위로 보이는 엘리머스 영주성을 쳐다보며 말했다. 5각형으로 추측되는 성벽이 세워져 있고 각 각마다 망루가 세워져 있었다.

엘리우스는 성을 올려다보며 가볍게 현기증이 이는 것 같았다. 영주성은 산을 깎아서 만든 듯이 절벽을 등지고 서 있었다. 원래 성이 있던 자리는 지혜로운 짐승이 살던 굴이라고 했던가? 그렇다면 어째서 저런 위치에 성이 지어졌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반대쪽 산을 타면 손쉽게 성안으로 침입할 수 있는 구조의 성을 다른 이유 없이 만들었다면 엘리머스 영주성을 만들자고 건의한 놈의 머릿속을 의심하게 될 터였다.

그래서인지 여러 가지 이유에서 엘리우스는 자신이 사법관 그루모의 이야기를 들은 것을 다행이라고 여겼다. 새로운 전승지식을 얻게 된 것도 즐거운 행운이었지만, 그보다 저 성의 괴악한 조건에 대한 의문을 품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었다. 몰랐다면 분명 성의 건설자에게 억울할지도 모를 비난을 속으로 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사법관 그루모는 그 이상 내성과 관련된 일화에 대해서 명예 운운하며 이야기를 이어주지 않았지만 대신 성의 역사와 일화에 대해 이야기해주면서 일행의 분위기를 띄워 주었다. 아마도 그런 재주는 다른 사법관들에게는 없는 재주일 것이고 아직 봉사자인 자들에게도 없는 재주일 것이었다.

엘리머스 영주성의 입구에 도달하자 경비병이 걸어 나와 일행을 맞이했다. 이스커시스 가의 문장인 방패 속에 뇌전을 방출하는 검을 자수로 새긴 겉옷을 입고 속에는 체인메일을 입은 병사는 허리에는 장검을 차고 등에는 방패를 메고 있는 것이 적어도 일반 병사는 아닌 듯이 보였다. 특히나 검이란 것이 사실 비싼 무기라는 것을 생각하보면 더욱 그런 추측에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병사는 양손을 벌려 영주성까지 찾아온 네달렉스의 사제들을 환영했다.

“어서 오십시오. 고귀한 법의 대행자들이시여. 저는 백부장 갈소입니다. 여러분들이 합류하시게 될 선발대의 지휘를 맡고 있습니다.”

“반갑소. 나는 그루모요. 미약하나마 네달렉스의 뜻을 대행하고 있소이다. 이 뒤에 있는 아이들도 훌륭한 봉사자들이지요. 그리고 환영해주셔서 감사하오.”

사법관 그루모가 인자하게 웃자 갈소는 표정에서 긴장을 조금 늦췄다. 분명 딱딱한 분위기를 생각하고 왔을 것이 틀림없다고 엘리우스는 생각했다. 물론 그 쪽이 정석이고 그루모가 예외인 것이지만.

갈소는 제법 일행에게 호의를 가지게 되었는지 나름 미소를 지으며 일행에게 두 팔을 벌려 환영의 뜻을 표현했다.

“자, 따라오시지요. 영주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갈소는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사법관 그루모는 갈소와 나란히 걸었고 엘리우스를 비롯한 남은 봉사자들은 그 뒤를 따랐다.

성문 안으로 들어가자 거대한 내성의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갈소는 내성으로 향하지 않았다. 갈소는 일행을 이끌어 오른쪽 방향으로 안내했다. 그루모를 제외한 모두는 잠시 내성 쪽을 바라보았다가 갈소가 일행을 안내해가려는 방향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딱 사각형의 단단해 보이는 건물이 시선에 들어왔다.

‘정말로 내성으로 안내하지 않는 구나.’하고 엘리우스는 생각했다. 사법관 그루모의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에 분명 다들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었다.

엘리우스는 이야기의 모든 부분을 듣지 못했다는 사실을 떠올리곤, 불만을 지니고 내성을 바라보았다. 불명예니 뭐니 하는 것 없이 오직 진실만을 전하는 것이 옳은 일일 것이지만 세상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은 한탄할만한 일이었다. 그러나 신의 뜻은 높고 곧으며 영원하니 언젠가 그런 진실한 질서의 시대가 오리라.

그런 생각하며 엘리우스는 다시 내성에서부터 갈소가 안내한 건물로 시선을 옮겼다. 건물은 커다란 상자마냥 직사각형의 형태로 지어진 큰 병영이었다.

엘리머스 영주군의 병사들이 병영에서 옆에 세워둔 수레들까지 짐을 들고 분주히 오가고 있었다. 엘리우스는 그 짐들이 병참이라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었다. 랑그라드까지 걸릴 1주하고도 반은 걸릴 시간동안 병사들의 배를 채워주고 편의를 돌볼 물품들 이었다. 또한 이제 엘리우스를 포함한 네달렉스의 봉사자들이 의지하게 될 물품들이기도 했다.

갈소는 병영으로 봉사자들을 데려가며 내성으로 가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 설명했다.

“원래라면 영주성으로 모셔야하지만 영주성은 누구도 들어갈 수 없습니다. 저 내성은 초대영주셨던 오블리안 이스커시스 고결공이 왕도의 동의를 받아 본디 이 땅을 지배했던 초자연적인 존재에게 받친 장소라서 그런 것이죠. 영주님께서도 오직 1년에 한번 축제날에만 안으로 들어가신답니다. 그러니 부디 이렇게 병영으로 모시는 결례를 용서해주셨으면 합니다.”

갈소는 그 사과와 함께 그렇게 설명하고는 병영의 정문으로 일행을 데려갔다. 갈소가 도착하자 양쪽 문 앞에 선 병사들 중 하나가 경례했다. 그에 갈소가 고개를 끄덕이자 병사는 병영으로 통하는 문을 열었다.

병영은 안에는 사람 두 명이 나란히 서면 꽉 찰 것처럼 보이는 좁은 복도가 나 있었다. 그 복도의 양 벽에 문이 있었고 문은 용도를 알려주는 명패를 제외하곤 아무런 장식도 없었다.

갈소는 그 방들을 전부 무시하고 복도 끝에 있는 계단을 올라갔다. 계단은 오래되었는지 삐꺽거리며 자신의 역사를 자랑했지만 불안감을 주지 않을 만큼 튼튼했다. 군데군데 보수의 흔적이 보이는 것을 보아 파손이 없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그래서인지 단호한 걸음걸이로 계단을 오르는 갈소와는 달리 봉사자들은 혹시나 모를 일에 대해 떠올리며 조심스럽게 계단을 밟아 올랐다.

계단을 올라 갈소는 접객실이라는 명패가 붙은 문 앞까지 걸어갔다. 그는 문을 두드리곤 차렷 자세로 “갈소입니다. 네달렉스의 봉사자들께서 오셨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곤 바로 문을 열었다.

레리 지부장의 집무실과 비슷한 크기의 방이 모습을 드러냈다. 다른 것이 있다면 오직 레리 지부장만을 위한 책상과 의자가 있는 집무실과는 달리 이 방은 접객실이라는 이름에 걸맞는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여럿이 앉을 수 있는 푹신한 소파가 준비되어 있고 소파들 사이로 다리가 낮은 탁자 역시 준비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분명히 상석이라고 부를 수 있는 자리에 고랄드 이스커시스 공정공이 앉아 있었다.

고랄드 공정공은 이제 장년을 넘어 슬슬 노년의 나이대에 들지 않을까 싶은 외견의 남자였다. 슬슬 벗겨지기 시작하는 듯 넓은 이마가 눈에 띄긴 했지만 깊은 미간과 콧수염은 여전히 그에게서 중후한 인상을 구축했다. 머리색은 엹은 갈색이었고 눈동자 색깔은 밤색이어서 중후함 속에서도 부드러움을 찾아볼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게다가 타고난 무골 집안이라서 그런지 많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대단히 정정해 보였다. 적어도 갑옷과 칼을 찬다 해도 전혀 이상하게 보이지 않을 정도는 되었다.

‘대단한 노익장.’ 엘리우스는 그런 소리를 들을만한 인물이 바로 이 고랄드 공정공이 아닐까하고 생각했다. 그런 고랄드 공정공은 봉사자 일행을 보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오. 그루모. 무척이나 오랜만이군. 잘 지냈는가?”

“물론 잘 지냈네. 고랄드. 3개월 만인가?”

“정확히 3개월만이네.”

사법관 그루모는 반가운 듯이 발끝을 들어 악수를 청했고 고랄드 공정공은 허리를 좀 죽여 그루모의 악수를 받았다. 그루모는 하라드 치고는 보통의 키에 속했지만 고랄드 공정공의 키는 인간치고는 상당히 큰 축에 속했기 때문에 서로의 편의를 위해서 그 정도 희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찌 보면 우스꽝스럽게 보일 수도 있는 장면이지만 봉사자들은 미소는 커녕 입술 한부분도 실룩거리지 않음으로서 그들이 숭앙하는 최고 덕목을 빛내 보였다.

하지만 공정공과 사법관 그루모가 친한 사이라는 사실은 봉사자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던져주었다. 사법관들은 그들의 판겨링 감정에 쏠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최대한 주변 관계에도 절제된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그루모는 그렇지 않은 것이다. 그는 고랄드 공정공과 그는 대단한 우애를 쌓은 것처럼 보였다. 오랜 친우라고 할까. 그래서인지 고랄드 공정공 역시 환대와 기쁨이 도는 표정으로 봉사자들을 맞이했다.

“자자. 다들 앉도록 하게.

고랄드 공정권이 소파에 앉을 것을 권하자 봉사자들 일행은 다들 자리를 잡고 앉았다. 고랄드 공정공에 가장 가까운 양옆에 사법관 그루모와 사법관보 오세가 앉고 그 다음에 년차에 따른 순서로 봉사자들이 앉았다. 봉사자 일행이 모두 앉자 고랄드 공정공은 갈소에게 이제 방에 물어날 것을 명했다.

“백부장 갈소. 이제부터 손님들은 내가 모실테니 자네는 물러가도록 하게. 아침식사 후 바로 출병이니 일을 마무리 지을 수 있도록 하게나.”

“알겠습니다.”

갈소는 가슴에 주먹을 올려 경례를 하고는 접객실을 빠져나갔다.

엘리우스는 빠져 나가는 갈소를 잠시 보았다가 고랄드 공정공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갈소에게서도 그들 네달렉스의 봉사자들 못지않은 강인함이 느껴졌는데 고랄드 공정공 또한 만만치 않은 기백을 품고 있어서 그 부하에 그 상사라는 느낌을 엘리우스는 받았다.

방 자체도 대단히 검소해 보였다. 레리 지부장의 집무실과는 달리 최소한의 품위를 위한 시설들은 갖추어 놓은 듯 했지만 그 이상의 사치품은 일체 없었다. 심지어 장식품들조차 모두 무기며 방패였는데. 의장용의 화려한 것이 아닌 실용 위주의 단순한 것들로 장식되어 있었다. 과연 무골 집안이라고 할까 엘리우스는 조금 감탄했다. 속세의 인간이 이토록 자기절제에 충실할 수 있는 경우는 드물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엘리우스나 네달렉스의 봉사자들은 그들이 믿는 실존하는 의지이자 그들 자신에게 실제적인 영향력을 미치는 신의 존재를 위해 절제하는 것이었지만 고랄드는 그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신념을 위해 절제하고 있었다. 스스로의 신념이라는 불완전한 요소에 대한 믿음을 통해서 자신을 절제 한다는 것은 절대적인 신의 존재로부터 동기를 부여받는 자신들보다 더 대단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랄드 공정공이 백부장 갈소가 나간 문에 눈짓을 하며 입을 열었다.

“저 갈소가 이번에 자네들과 함께 할 백부장이라네. 어떤가?”

“괜찮은 인물인 것 같군. 절도도 있고 신체도 강건하고. 무엇보다 질겨 보여.”

“그렇지? 괜찮은 친구라네. 게다가 유능하기도 하지.”

“그거 더 좋군.”

고랄드가 뿌듯한 표정으로 부하 자랑을 하자 사법관 그루모는 따라 웃었다. 그러다가 표정을 바꾸고는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상황이 심각하다고 들었는데.”

사법관 그루모의 말에 고랄드 공정공은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전까지 자랑스러움이 배여 있던 표정에 이번에는 깊은 수심이 깃들었다.

“좋지 않아. 삼 일전 랑그라드가 반나절만에 함락되었네. 바로스는 아직도 깨어나지 못했고 랑그라드 영주군은 현재 반토막 이하라고 하더군. 그루모. 자네도 알다시피 랑그라드 군은 우리 에카난스 최강의 무력이라고 할 수 있네. 바로스는 단 개인으로서도 일개 군단 이상이라고 평가받는 검사지. 어찌되었든 한번 크게 수가 줄었던 야만거인들이 어찌할 수 있을 존재들이 아냐. 만약 그들에게 그 정도의 능력이 있었다면 에카난스는 존재할 수도 없었지.”

“동의하네.”

“현재 왕도에서는 외부의 힘이 개입되었을 경우에 대해 의심하고 있네. 혹시 야만거인들의 창조자인 포학자가 수작을 부리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말이야. 왕도는 불안해하고 있어. 이해하지 못할 일에는 신력이 따라붙기 마련이니 말일세. 이 세계는 신들의 놀이터라고 하지 않나.”

“셀모어의 말이군. 하지만 놀이터라는 것은 불충분한 표현이야. 차라리 전쟁터가 더 낫지 않겠나? 항상 으르렁거리고 싸우는 것인 신이라는 것들 아닌가. 성직자인 내가 할 소리는 아니지만.”

그루모의 말에 고랄드는 “껄껄껄.”하고 웃었다. 엘리우스를 비롯한 봉사자들은 그루모를 놀란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둘이 나누고 있는 대화는 불경스럽기 그지없는 대화였다. 신을 인간의 수준에 맞춰 생각한다는 점보다는 그걸로 농담을 했다는 점이 더 놀라웠다.

“정말 성직자가 할 소리는 아니군. 뭐, 좋네. 왕도가 급히 선발대를 보내려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네. 최소한 무너진 랑그라드 영주군을 보강할 생각인 것이지. 일단 랑그라드 영주군은 후퇴하고 있지만 추격대가 왔다간 당장에 소실될 수 있을 정도의 피해를 입은 모양이야. 게다가 부상자도 많아서 후퇴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듯 하더군. 당장 지원이 없다면 정말 희망이 없어질지도 모르는 일이라네.”

“그래서 그리 서두르는 것이로군.”

“그러네. 우리 엘리머스 영주군에 대해서 말하자면 상비 영주군 375명 중 125명을 보낼 생각이네. 본대는 거기다 더해 징집도 생각하고 있지만 여름이라서 알 수 없군. 게다가 병참을 옮길 수레도 부족하고 말일세. 영지를 수비할 부대도 남겨야 하고.”

“바쁘군. 그래서 출발은 정확히 언제인가?”

“일단 아침 식사 후 곧 이네. 아, 그러고 보니 자네들은 식사 했나?”

“우리는 들고 왔네. 걱정 말게나.”

“그런가? 그렇다면 일단 여기서 기다리게. 출발 할 때 병사를 보내 알려주도록 하겠네.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했으니 그 동안이라도 좀 쉬게나.”

“알겠네.”

사법관 그루모가 대답하자 고랄드 공정공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난 출병식이 있어 나가보겠네. 좀 더 이야기하고 싶지만... 아쉽게도 랑그라드 일로 정신이 없어서. 자네와 좀 더 대화하고 싶지만 어쩔 수 없군.”

고랄드 공정공은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바쁜 것은 진짜인 듯싶었다. 그가 일어나자마자 문을 두드리면서 고랄드를 찾는 병사가 나타난 것이었다. 고랄드 공정공은 그루모에게 인사를 하고는 병사와 함께 방을 나섰다.

사법관 그루모는 그런 친우의 뒷모습을 보며 수염을 쓰다듬었다.

“무척 바쁘신 것 같군요.”

사법관보 오세는 고랄드 공정공이 나간 문을 바라보았다.

“그렇겠지. 실제로 고랄드 공정공에게 공문이 내려온 것은 어제 저녁이니 말이야.”

“아? 네. 그렇군요. 하지만 상당히 빠르군요.”

“마법이라는 것이 있지 않나. 에카난스에는 그만큼 마법이 보급되어 있지 않으니 그리 알려져 있지 않지만 말일세.마법 중에는 먼 곳에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전달할 수 있는 힘이 있다네. 그렇기 때문에 공식 지원요청이 이리도 빠를 수 있었던 것이지.”

“그렇군요.”

오세는 알아들었다는 듯이 대답했다.

엘리우스는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봉사자들을 둘러보았다. 이제 출병이 코앞. 물론 에카난스까지는 일주정도 걸리니 시간이 길면 길게 남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출병이라는 단어만으로도 긴장감이 느껴졌다.

동기인 셀은 줄곧 굳은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고 한 기수 위인 세 명의 봉사자들도 서로 눈빛을 주고받고 있지만 그 속에서 긴장감을 읽을 수 있었다.

네달렉스의 봉사자들은 출병이 있을 시간까지 말없이 기다렸다.

침묵은 구도요 절제는 수행이므로 말은 아낄 수 있는 한 아끼고 감정은 죽일 수 있는 한 죽인다. 이미 대부분의 삶을 그런 식으로 살아온 그들에게 있어 침묵은 삶의 일부였다.

엘리우스는 창밖에서 고랄드 공정공의 목소리가 작게 들려오는 것을 깨닫고 창문 쪽을 바라보았다. 슬슬 출병식이 시작인 모양이었다.

출병식이 어떤지 호기심이 들었지만 밖을 살펴보지는 않았다. 엘리우스는 긴장하고 있었고 외부보다는 내면 쪽으로 몰입하고 싶었다. “들어오시오.”

“실례합니다. 그루모 사법관님. 이제 곧 출병식이 끝나고 우리 엘리머스 영주군은 랑그라드로 출발할 것입니다. 갈소 백부장님께선 그루모 사법관님과 함께 네달렉스의 봉사자분들을 안내하라고 저를 보내셨습니다. 자, 저를 따라오시지요.”

병사의 안내로 사법관 그루모와 엘리우스를 비롯한 봉사자들은 왔던 길을 반대로 이동해 병영을 나왔다. 병영에서 떨어진 장소에 있는 내성 마당의 사열대에서는 출병을 위해 열을 맞춰 움직이고 있었다.

병사는 사법관 그루모에게 선두 자리의 마차를 내주었고 사법관보 오세에게는 말 한필을 내주었다. 나머지 봉사자들은 짐마차의 빈자리로 각자 안내되었다.

엘리우스는 마지막으로 마차에 올라타게 되었다.

그가 배정받은 자리는 건조식량을 푸대에 담아 모아둔 곳으로 등을 받칠 것이 나름 푹신한 자리였다. 언제나 삶을 수행으로 여기며 살기 위해 스스로 불편을 찾는 네달렉스의 봉사자로서 그리 마음에 들지 않는 자리였지만 엘리우스는 불평 없이 등을 세우고 자리에 앉았다. 어떤 자리건 결국 마음가짐과 행실을 통해 수행을 길을 찾을 수 있는 법이었다.

눈을 감고 엘리우스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이 느껴졌다.

 

랑그라드까지 가는 여정 중 가장 큰 적은 전쟁에 대한 두려움도, 대로의 군데군데에 나타나는 몬스터들도 아닌 더위와 습도였다. 특히 전쟁 수행을 위해 갑옷을 입고 있는 병사들도 병사들이었지만, 그 갑옷 위에 로브까지 껴입은 네달렉스의 봉사자들은 말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땀을 흘리고 있었다.

애초에 몬스터라고 불리는 존재들이나 환수들도 이 정도나 되는 무리에게 덤비지 않을 지능은 있었고, 전쟁에 대한 감상은 모호하기 그지없었지만, 더위를 유발시키는 저 태양빛이라는 놈은 당장 병사들의 짜증 지수와 피로함을 상승시키고 있었다.

엘리우스는 눈살을 찌푸리며 손바닥으로 그늘을 만든 후 태양을 올려 보았다. 하라스티아의 은총이기에 태양빛은 감사히 여겨야할 은총이었지만 이렇게 더워서야 하라스티아의 신관들조차 이 축복에 기뻐할 마음이 안들 것 같이 느껴질 정도였다.

이제 더 이상 병사들의 잡담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처음 엘리머스 영주성을 출발할 때 들려왔던 멋진 그늘도 행군 중 들려오던 잡담소리도 이제는 완전히 그쳐 있었다.

더위는 병사들의 웃음을 뺏고 곧 그들의 체력을 뺏고는 행군 속도조차 늦춰 버렸다.

현재 랑그라드까지 거의 다 온 시점에서 영주군은 본래 일정보다 약 하루하고도 반나절 정도 처져 있었다. 열기가 가득한 낮을 피해 밤낮을 바꿔 행군한 덕이었다. 밤낮이 바뀐 덕에 조는 병사들에 의해 작은 사고들이 몇 번 있긴 했지만 다행히 큰 문제가 되진 않았다. 모두가 짜증지수가 올라 민감했지만 열기는 짜증을 낼 체력조차 앗아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처음 몇일 동안에는 하루 종일 소리를 지르며 명령을 내리고 병사들을 독려하던 백부장 갈소와 그의 부관 벅도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게다가 지금 뒤처진 거리를 만회하느라 좀 속도를 내고 있으니 더더욱 입을 열 맛이 나지 않겠지. 예정에서 한나절 반. 이제 하루도 남지 않은 거리에 들어선 지금에 와서야 별 의미는 없겠지만 그럼에도 백부장 갈소는 열심히였다.

‘근본적으로 성실한 사람이라서 그런 걸 거야.’

엘리우스는 갈소를 그렇게 보고 있었다. 말을 해본 적은 몇 번 없지만 자기 일에 열심이인 사람이었다. 은근히 인망도 있고. 부관인 벅이 좀 강박적인 면을 가지고 있지만 갈소는 그 면도 부드럽게 받아 넘길 수 있는 소양을 지니고 있었다.

딱딱한 사람들이 많은 교단내에서는 보기 힘든 사람이었다. 아니 아예 없다고 말하는 편이 옳다고 할까.

대화는 거의 해본 적 없지만 관찰을 통해 엘리우스는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별로 틀렸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자신이 그렇게 사람을 많이 대해본 것은 아니지만 사람보는 눈이 없다고 생각되진 않았기 때문이었다. 네달렉스는 질서의 수호자이지만 동시에 법의 신이기도하기에 사람의 진실과 거짓을 살피는 일에 있어 놀라울 정도로 뛰어난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이능력이야말로 네달렉스의 사제들이 사법관으로서의 직무를 수행하게 해주는 결정적인 능력이자 신의 뜻을 대행할 수 있도록 해주는 가장 고결한 축복이었다.

그것은 하라스티아의 사제들이 어디에서나 태양의 빛을 그들 속에 간직할 있고 시고스의 사제들이 어디에서건 길을 잃지 않을 수 있는 것과 같은 축복이었다.

말하자면 네달렉스의 봉사자들이 여전히 질서의 수호자를 위해 봉사한다는 증명과도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엘리우스는 자신의 눈을 완전히 신뢰했다. 자신이 판단한 타인의 진실함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것은 바로 자신이 숭앙하는 질서의 수호자 네달렉스를 의심한다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만약 자신을 의심한다면 그것은 불경을 저지르는 것과도 같았다. 신앙심 깊은 자라면 그 누구도 알며 지키는 가장 기본적인 규율과 같은 것이었다.

엘리우스는 갈소의 행동에서 진실을 보았다. 때론 모호한 부분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병사들이 그에게 보내는 신뢰와 그가 병사들에게 보내는 신뢰는 분명 진실한 것이었다.

‘선발대로 나와서 좋았어.’하고 엘리우스는 여겼다. 적어도 고랄드 공정공은 선발대인 이상 그가 평가하기에 가장 유능한 지휘관을 내보낸 것이 틀림없는 것 같았다. 다른 이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거의 대화를 안 해봐서 모르겠지만 그들도 그렇게 여기고 있을 것 같았다.

사색이랄 것도 없는 그런 잡생각들에 빠져있는 동안 영주군은 낮은 둔덕의 사이를 지나고 있었고 슬슬 그들이 우선 목적으로 하고 있던 마을이 지평선 너머로 나타나야할 때였다.

하지만 나타난 것은 마을이 아니었다.

“쿠자작!”

뭔가 부러져 오르는 것 같은 강렬한 소리가 엘리우스의 귀에 들려왔다. 동시에 마차가 갑자기 멈춰 섰고 엘리우스는 앞으로 한 번 나뒹굴어 질 뻔했다. 단련된 균형 감각과 하반신의 힘 덕에 추한 상황은 변한 엘리우스는 서둘러 고개를 들어 정면을 주시했다.

앞의 짐마차에 가려 제대로 된 상황은 보이지 않았지만 엘리우스는 흙더미와 천막이 치솟아 오르는 모습을 목격할 수 있었다.

‘매복인가?’

그 추측을 확인해주듯이 선두에서 “기습이다!”하는 외침이 들려왔다. 하지만 매복이라니. 이런 상황에 이런 곳에서?

엘리우스는 혼란을 느끼며 마차에서 내려섰다. 이미 마차를 몰고 있던 영주군 병사는 옆에 걸려있는 창을 쥐고 한창 달려 나가고 있는 중이었다. 엘리우스는 허리춤에 달고 있던 메이스를 꺼내들고 마차의 옆면에 달아 두었던 원형 방패를 꺼내들고는 기원을 올림과 동시에 무기와 방패에 신성을 불어넣었다. 이로서 그의 방패는 강철 이상으로 단단해지고 메이스는 혼돈의 무리들에 대한 철퇴로서 힘을 발휘할 수 있게 되었다.

네달렉스는 질서의 수호자이며 질서를 위한 법을 수행하는 자이며 동시에 질서와 법을 어기는 자에 대한 징벌자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신권이면서 국가의 사법을 책임지는 것은 바로 그런 의미에서이며 징벌자로서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네달렉스의 봉사자들은 전투적인 면에서도 몹시 뛰어났다. 특히 개인단위의 전투력은 일개 분대 이상이라는 평가가 있을 정도였다. 물론 그 정도의 전투력과 함께 사법관련 지식들을 습득하는 하드한 일정 덕에 네달렉스의 봉사자는 대체로 엘리트인데다가 수도 몹시 적었다.

물론 그 정도는 해낼 수 있는 열정이 있지 않고서야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네달렉스의 봉사자들은 믿었기 때문에 낙오하는 이들은 대부분 드물었다. 분위기도 분위기이다 보니 더욱 그랬는지도 모른다.

엘리우스는 한번 숨을 들이쉬고 뱉었다.

이상하게 마음은 차분했다.

한 눈에 선두의 마차가 파괴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흙더미 밑에선 속속들이 거대한 그림자들이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야만거인.

한 때 이 평원을 지배하고 있었던 것들.

태초의 시원자로서 탄생한 거인들과 선주 종족으로서 포학자 가고록스에게서 태어난 눌들이 이 평원의 주인이었었다.

‘눌이군.’

흙더미 속의 윤곽만을 보고 엘리우스는 그렇게 판단했다. 가고록스의 선주종족으로 제국의 십현자들이 이르길 소사나에 존재하는 13종의 선주종족들 중 하나라고 부르는 존재들이었다. 신이 이 세계의 패권을 겨룰 수 있도록 허락한 존재들. 존재함으로서 그 창조자인 신을 섬기는 열세 종족.

그러나 안타깝게도 포학자의 판단 미스로 눌은 이성이라곤 거의 없는 괴물이 되어 세상에 뿌려졌다. 이미 세상에 뿌려진 이상 돌이킬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은 선주종족으로서 어떠한 문명도 이루지 못하고 세상에 포학한 괴물로서 남게 되었다. 대신 육체적인 능력 하나만은 최고라서 어떤 종족도 넘볼 수 없는 잠재력을 얻게 되었지만 단련할 줄 몰라서야 그조차도 의미가 없는 일이었다.

그런 것들이지만 위험도는 정말 높아서 한 마리라도 출몰하면 그 마을에는 비상이 걸리는 것이다. 에카난스의 역사 속에서 훨씬 덩치 큰 거인들보다는 눌들이 훨씬 더 위협적이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 있다. 그만큼 악랄하고 강력한 적인 것이다.

그런 눌들이 나타난 것만으로도 사기가 꺾일 만한데 이번 눌들은 죄다 무장이라는 것을 하고 있었다.

이미 들은 이야기지만 엘리우스는 여전히 두 눈이 휘둥그레지는 것을 느꼈다. “뭐야. 저거.” 그런 소리가 절로 입으로 나오는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눌들만이 아니었다.

“키에. 캬아.”

작은 남쟁이 같이 생긴 녹색 피부의 괴인들이 몇 마리 나타났다. 그림샬이라고 불리는 그림자의 요정들. 환상과 속임수에 능한 그들은 사람들을 헤매게 만들어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들이었다. 아마 환상으로 눌들이 숨어있는 장소를 가린 것일 터였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렇게 커다란 것들이 땅을 파고 숨어 있는데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엘리우스는 긴장을 느끼며 숨을 들이켰다. 무엇보다 안 좋은 상황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부서진 선두의 마차. 그 속에 사법관 그루모와 사법관보 갈소가 타고 있었다는 것을 엘리우스는 기억하고 있었다. 게다가 백부장 갈소의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벌써 당한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퍼뜩 떠올랐다. 그런 허무한 상황 따윈 상상도 하기 싫지만 세상에는 곧잘 그런 일이 벌어지는 법이었다. 하지만 정말 그렇지 않기를 엘리우스는 간절히 바랐다. 만약 그의 생각대로라면 지금 영주군은 그들이 가진 최강의 전력을 먼저 잃어버리고 전투를 시작하는 것과 같은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무슨 일이야? 엘리우스 봉사자?”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기에 엘리우스는 멈춰서고는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생각할 것도 없이 엘이었다. 이 영주군에서 여성은 엘말고는 없었다. 엘은 마차가 멈췄을 때 부딪쳤는지 뒷머리를 매만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엘리우스는 두 눈이 번쩍했을 테니 지금 한 멍청한 소리는 용서해주자고 생각했다.

“기습이다. 엘 봉사자. 이미 선두의 마차가 당했어.”

그 말을 듣자마자 엘은 마차 속으로 들어가더니 자신의 무장을 쥐고 나타났다. 양손에 각각 메이스가 하나씩. 대단히 공격적인 그 무장에 엘리우스는 조금 놀랬다. 병사들이 앞으로 달려가면서 그의 몸에 부딪친 덕에 휘청하느라 그 표정으 보여주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분명 멍청한 표정이었을테니 말이다.

“가자. 사법관님과 어서 합류해야 해.”

엘은 마차에서 뛰어내린 후 엘리우스를 재촉했다. 엘리우스는 고개를 끄덕이고 선두를 향해 움직였다. 이미 전방에서는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함성과 괴성. 각종 명령과 욕설, 외침이 난무했다. 그 사이에서 엘과 엘리우스는 상당히 뒤처져 있는 상태였다.

“대응이 빠르네.”

엘은 병사들을 보면서 말했다. 영주군 병사들은 이미 진형을 갖추고 눌들과 그림샬들에게 대응하기 시작한 상태였다. 하지만 엄청난 갑주를 입은 눌들과 환상을 사용하는 그림샬들에게 있어 영주군 병사들이 만들어낸 진형이란 별 의미가 없었다. 하지만 영주군 병사들의 상황이 절망적인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이곳에 있는 자들의 네달렉스의 봉사자들로서 질서를 수호하는 자이자 법을 집행하는 자들.

허상과 거짓에 있어 가장 강력한 대응책을 가진 자들이었다. 거기다 이미 보다 앞의 마차에 타고 있던 세 명의 선배들이 엘리우스와 엘에 앞서 거짓을 타파하고 진실을 내비치는 강력한 이적을 보이고 있었다.

병사들은 그들의 축성을 받고 그림샬들의 거짓과 혼란에 주의를 빼앗기지 않고 싸울 수 있었다. 하지만 눌의 존재는 너무나 압도적이어서 파죽지세로 진형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그런 눌들에 비해 이쪽은 대응 수단이 너무 부족했다. 이래서야 용에게 습격당하는 마을 사람들하고 별반 차이가 없다는 소리였다.

“흩어져라! 사각을 노려라!”

“녀석들의 시선을 끌어!”

하는 외침이 들려왔고 병사들은 그 외침에 맞게 움직였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눌들은 기계적일 정도로 정확하게 진형대로 움직였고 목표가 된 것을 파괴했다. 목표의 대부분은 보급물자가 들어있는 마차였다.

“말도 안 되는군.”

엘리우스는 상식을 초월한 광경에 입을 쩍 벌렸다. 지능이 낮은 야만거인들은 쉽게 흥분하는 것으로 유명한데 이들은 지금 병사들의 도발에 신경도 쓰지 않고 그들의 임무를 묵묵히 수행하고 있었다. 앨리우스는 이 말도 안 되는 상화에 대해서 고민하기 보다는 대응책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그때 엘이 소리쳤다.

“저 녀석. 저게 지휘관이야.”

엘리우스는 엘이 가리킨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대형을 이룬 눌들 뒤에 서 있는 한 명의 눌의 모습이 보였다. 특별히 눈에 띄는 특징은 없었지만 저 녀석 혼자 뭔가 역할이 달랐다. 척 보기에도 지휘라고 할 만한 것을 그 놈은 하고 있었다.

엘리우스는 엘이 가리킨 대상을 확인하고 엘과 재빨리 눈빛을 교환했다. 그 직후 엘리우스가 뛰어나갔다. 뒤에서 엘이 기도문을 외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질서의 수호자시여. 세상의 질서를 위해 헌신하는 봉사자가 바라옵니다. 혼돈의...”

엘로부터 조금 멀어지자 함성소리에 뭍혀 그녀의 기도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엘리우스는 곧 자신의 몸에서 새로운 활력이 등 뒤로부터 불어넣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네달렉스가 질서의 수호하고 법을 집행하기 위해 자신의 봉사자들에게 그 힘의 일부를 내려준 것이다.

엘리우스는 솟아오르는 힘과 용기를 느꼈다. 마치 용과 싸워도 능히 이길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으오오오오!”

왠지 끓어오르는 전의를 느끼며 엘리우스는 병사들을 밀치고 눌들에게로 뛰어들었다. 눌이 들고 있는 거대한 해머가 엘리우스의 머리 위로 내려쳐졌지만 엘리우스는 방패를 비스듬히 들어 그 공격을 비켜냈다.

저릿저릿하고 팔에 충격이 느껴졌다. 찌이잉하고 떨림이 팔을 타고 올랐다. 엄청난 타격이었다. 엘리우스는 한순간에 자신이 실수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눌들이 지닌 힘은 너무나도 강력하여 네달렉스의 가호를 받아 훨씬 단단해진 육체로도 감당하기 힘들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었다.

이 축복을 받으면 그 육체는 마치 강철같이 변화하는데 그럼에도 눌의 공격은 견디기 힘들 정도였다. 그 덕에 공격을 쳐내며 반격하려했던 의도는 실패하고 오히려 뒤로 물러서버리고 말았다.

엘리우스는 주춤주춤 뒤로 물러 난 다음 그 다음 공격은 주먹 하나 정도의 차이로 피했다. 풍압이 안면을 덮치고 진동이 발로부터 느껴졌지만 엘리우스는 앞으로 내디딘 다리를 알프로 내밀려 뒷발을 끌듯이 전진해 신성이 부여된 메이스를 안쪽에서 바깥으로 후려쳤다.

손아귀로 묵직한 느낌이 전달되어 왔다. 그야말로 단단하고 무거운 바위를 두드린 느낌이었지만, 눌은 바위처럼 무거우면서 그보다 훨씬 질기고 탄력이 있었다.

“투웅!”하고 메이스로부터 일어난 충격의 후폭풍이 엘리우스의 얼굴에 와 닿았다. 반면 눌은 그 거대한 거체로도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부웅 떠오르고 있는 상황이었다. 엘리우스는 밖으로 뻗었던 팔을 위로 들어 올려 그대로 내려쳤다.

굉음과 함게 병사들의 함성이 일었다.

갑작스러운 기습. 거대하고 강한 적의 존재에 압도당한 병사들이 엘리우스의 등장에 열광했다. 엘리우스는 그 열광을 뒤로 하고 쓰러진 눌을 뛰어 넘었다. 병사들과 함께 싸울 수도 있겠지만 그 전에 저 지휘관처럼 보이는 녀석을 잡아야겠다는 생각이 엘리우스의 머릿속에 가득했다.

엘리우스는 숨을 가득 들이쉬더니 소리쳤다.

“멈춰라!”

그 외침에 눌 지휘관은 멈칫하더니 엘리우스 쪽으로 돌아보았다. 그러곤 입술 안으로 커다란 송곳니를 드러내며 씩 웃었다.

“아아. 어리석은 자가 왔구나. 너, 질서의 개구나.”

흠잡을 데 없는 제국어였다. 발음도 새는 곳 없이 완벽했다. 에카난스 왕국 역시 제국에서 분화된 만큼 제국어를 사용하니 그 정도 사실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엘리우스가 놀란 것은 그들이 말을 했다는 사실이었다. 언어를 사용할 정도의 지능.

이 평원에 살던 거인들이 야만거인이라고 불릴 만큼 미개하고 포학했지만 눌들은 그 중에서도 저능하기론 으뜸이었다. 포학자가 무슨 생각으로 그들을 창조한 것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육체적인 능력에만 치우쳐진 이들이었다.

그런 것들이 말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은 눈앞에서 일어난 일일지라도 믿기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엘리우스는 이 학문적 쇼크보다는 지금 눈앞에 일어나고 있는 학살의 현장을 막아야만 했다. 방금 엘리우스가 구멍을 꿇은 자리를 시작으로 혼전이 시작되려고 하고 있었다. 하지만 혼전이 시작된다고 해서 영주군이 유리해지는 점은 없었다. 다만 눌들이 효율적으로 학살할 수 있는 기회를 잃는 것뿐이었다. 즉 상황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징벌자의 가호여.”

엘리우스는 힘을 모았다.

눌 지휘관이 먼저 엘리우스에게로 달려들었다. 눌 지휘관은 공성추 만큼이나 거대한 대검을 횡으로 휘둘렀다. 엘리우스는 급히 몸을 숙여 그 공격을 피했고 방패를 들어 달려들었다. 평소 연습 때도 이런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이상적인 반격이었지만 눌 지휘관은 조금 뒤로 밀려났을 뿐 전혀 타격을 받지 않은 듯 “크흐흐흐흐.”하고 웃더니 되려 엘리우스를 걷어 차버렸다.

방패 위를 걷어차인 것이지만 엘리우스는 단숨에 방어타세를 해제당하고 뒤로 나가 떨어졌다. 낙법을 뒹구르는 자세 그대로 일어선 엘리우스는 달려드는 그림샬을 메이스를 으깨버리고 다시 눌 지휘관과 대치했다. 눌 지휘관은 거치적 거리던 같은 눌도 취우고 그림샬도 발로 차며 엘리우스를 향해 걸어왔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영주군 병사들은 걸음걸음마다 휘두르는 대검에 치이어 두 쪽이 나고 있었다.

빨리 손을 쓰지 않으면 혼자서 영주군을 쓸어버릴 기세였다.

엘리우스는 일단 달려들기로 결심했다. 눌 지휘관이 다가오도록 기다렸다간 훨씬 큰 피해를 영주군이 입게 될 것 같았다. 엘리우스는 오른어깨를 앞으로 내밀며 방패를 세워 들었다. 그리고 메이스는 비스듬히 뒤로 뻗은 후 다릴 박차고 달려나갔다.

눌 지휘관은 엘리우스가 달려드는 순간 동시에 대검을 높이 쳐들었다. 그리고 종베기.

강렬한 검풍에 엘리우스는 주춤했지만 그대로 버텼다. 자세를 정돈했을 땐 이미 눌 지휘관이 쇄도해 들어와 있었다. 또 다시 종베기. 엘리우스는 시계 반대 방향으로 피하자 눌 지휘관은 그대로 올려베기를 시도했다. 재빨리 고개를 숙였지만 방패 끝이 검에 걸리자 엘리우스는 몸을 휘청거렸다.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들어오는 눌 지휘관의 자루치기를 엘리우스는 균형이 흩트려진 상태에서 방패로 막았다. 넘어지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게다가 자세도 안 좋았다.

방패를 낀 팔에서 예리한 통증이 느껴졌다.

‘부러졌나?’하고 생각하며 엘리우스는 통증을 참으며 억지로 몸을 굴렸다. 연이어 눌 지휘관의 대검이 엘리우스가 쓰러져 있던 자리에 내려 꽂혔다.

세 바퀴쯤 굴렀을 때 엘리우수는 구르던 힘을 이용해 일어선 다음 거리를 벌렸다. 그러나 그 정도는 이미 눌 지휘관의 예측 안. 눌 지휘관은 순식간에 엘리우스의 지척까지 다가왔다.

죽음의 예감에 엘리우스는 격통이 느껴지는 팔을 들어올렸다.

눌 지휘관은 엄청난 충격에 무릎을 꿇었다.

그것은 여태껏 경험해보지 못한 강력한 힘이었다. 물리적인 힘이 아닌 정신에 적용되는 강력한 힘.

“혼돈을 창조자여! 질서의 힘 앞에 무릎 꿇어라!”

쩌렁쩌렁하게 목소리가 울려 퍼졌을 때 눌 지휘관은 이미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있었다. 자아아악. 무릎이 흙을 긁는 소리가 들려왔다.

엘리우스는 마지막 공격을 기다리다가 고개를 들었다. 아는 목소리였다. 바로 이번 봉사자들의 인솔자인 네달렉스의 사법관 그루모였다.

그루모는 마차의 더미 속에서 걸어 나와 당당이 서 있었다. 비록 키가 작은 하라드이지만 지금 그는 눌들같은 거인족과 비할 수 있을만큼 거대해 보였다.

영적인 위대함.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그런 어떤 것이 그루모의 등 뒤에 휘광으로서 존재하고 있었다.

“음, 사법관. 살아있었군.”

품위있는 어조로 눌 지휘관이 그루모를 향해 말했다. 그에 그루모는 씨익 웃으며 “그런 조잡한 기습에는 당하기도 쉽지 않은 법이지.”라며 여유를 부렸다.

엘리우스는 사법관 그루모덕에 여유가 생기자 일단 부상당한 자신의 팔부터 살폈다. 부러지진 않은 것 같지만 금이라도 갔는지 통증이 극심했다.

“크으. 부디 질서를 위해 봉헌할 수 있도록 제게 다시 일어설 힘을 주시옵소서. 수호자시여 바라나이다. 나 질서를 위해 헌신하겠나이다.”

엘리우스는 다친 팔을 감사 쥐고 기원을 올렸다. 네달렉스는 재기를 위한 치유를 바라는 그의 기도를 들어주었다. 엘리우스는 고통이 가신 팔을 털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지만 그와 함게 눌 지휘관 역시 일어섰다.

“크하! 정복자께서 함게 하시는 길이다. 우매한 질서의 개들. 그대들은 태어날 새 질서의 탄생을 방해마라. 그대들은 질서의 개가 아니냐?”

포효와 함께 눌 지휘관이 일어서자 사법관 그루모는 코웃음을 쳤다.

“눌치고는 제법 말할 줄 안다만 그 소리를 네가 첨 한줄 알면 오산이다. 당연히 우리는 질서를 신봉한다만 그 질서가 어떤 것인지 선택할 수 정도는 있다는 것을 알아라.”

사법관 그루모는 그렇게 말하고 자신의 성표를 쥐어 올렸다. 그를 따라 거대한 빛의 주먹이 나타나 그루모의 팔이 움직이는 움직임대로 들어 올려졌다.

“내 일격이 네달렉스의 일격이다! 신의 주먹이니 불매한 것들이여! 참회하라!”

들어 올려진 주먹이 그대로 눌 지휘관에게로 내려쳐졌다. 하지만 눌 지휘관 역시 얌전히 공격을 받지만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대검을 들어 기합성과 함께 주먹을 받아쳤다. 폭음과 함께 폭발이 일고 흙먼지가 흩날렸다.

그루모는 즉시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영성을 일깨웠다.

질서를 지킨다는 것은 혼돈과의 영원한 투쟁과 같은 것. 네달렉스의 이적들 대부분은 전쟁과 투쟁에서 태어난 것들이었다. 그 봉사자들이 법의 집행을 위해 혹독한 훈련을 하듯이 네달렉스의 이적들 역시 전쟁과 투쟁 사이에서 보다 전투에 적합한 형태로 구현되어 왔었다.

지금 사법관 그루모의 손에 맺어진 거대한 빛의 검 역시 그러한 것의 일환이었다. 이 검으로 산을 베어냈다는 성인의 일화가 있는 만큼 유명한 이적이며 질서의 편에 선자는 해치지 않고 오직 세상을 혼돈으로 빠뜨리려는 자들만을 베어낸다는 신성한 검이었다.

사법관 그루모는 지금 제국의 시작, 여명기에 있었던 세멧라마와 제국의 대전에서 나타났던 신화적인 이적을 현세에 구현하고 있었다.

네달렉스의 신자라면 누구나 감동할 것이며, 당시 활약했던 성자들에 대해 이름이라도 들어봤다면 누구라도 감명받을 그런 순간이었다.

엘리우스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눈앞에 적들이 아니었다면 그 역시 한참을 들여다보았으리라.

하지만 엘리우스는 금세 정신을 차리고 몸을 움직였다. 이미 그의 선배, 동기들은 각자 눌들에게 대항하고 있었다. 병사들을 이끌고 용기를 고취시키며 혼돈에 대항하고자 하는 힘을 불어넣고 있었다.

그루모의 바로 뒤로는 콜록거리는 갈소와 그를 부축하고 있는 사법관보 오세가 서 있었다. 오세는 방어막을 유지하며 서 있어서 영주군과 네달렉스의 봉사자들은 그들이 무사할 수 있었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엘리우스는 그 모습을 확인하고 자신에게 덤벼드는 눌의 공격을 방패로 쳐냈다. 여전히 묵직한 공격이었지만 엘리우스는 버텼다. 그리고 메이스로 눌의 무릎을 노리고 후려쳤다. 눌은 다리를 들어 올려 정강이받이로 메이스를 막아냈다. 그리고 그대로 넘어짐으로서 충격을 줄였다.

넘어지는 눌을 추적해 쓰러뜨리려고 엘리우스는 메이스를 들었지만 주변에서 덤벼오는 그림샬들을 상대하기 위해 휘둘러야 했다. 들어 올려진 메이스가 그림샬의 머리를 부쉈고, 방패와 발길질이 덤벼드는 그림샬들을 내쫓아 냈다.

공간을 확보한 엘리우스는 일어난 눌을 향해 방패를 세우고 돌격했다. 아직 자세를 바로 잡지 못한 눌은 엘리우스의 돌진에 다시금 쓰러졌다. 엘리우스는 쓰러진 눌 위로 즉각 올라타고는 방패로 눌의 머리를 후려치고 메이스로 연달아 찧었다. 3번 정도 두드리고 엘리우스는 몸을 날려 자신을 잡으려는 눌의 손길을 피했다.

눌은 얼굴을 쥐어 감싸며 일어났다.

엘리우스는 정말 엄청난 맷집이라고 생각했다. 다른 선주 종족. 아니, 다른 야만거인들도 저렇게 많으면 두개골이 으깨질 텐데 눌은 얼굴 살이 뭉개졌을 뿐 멀쩡하게 일어났다. 하지만 시야 역시 잃었는지 엘리우스는 포착하지 못하고 엉뚱한 곳에 팔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 순간 또 다시 그루모의 질타가 울려 퍼졌다.

한 순간에 병사들의 사기가 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엘리우스는 신이 나서 시야를 잃었지만 여전히 침착하게 팔을 휘두르며 전진하는 눌을 공격했다. 눌의 이상 행동에 관해서 의문이 피어올랐지만 지금 엘리우스에게는 그 이상의 감정에 도취되어 있었다. 질서를 수호하고자 하는 의지. 혼돈을 타파하고자 하는 의지. 적을 넘어뜨리고자 하는 의지.

그루모의 기원이 웅변과 질타로 평원에 울려 퍼졌고 그때 마다 그림샬들의 숫자는 줄어들고 눌들은 걸음걸음 물러서고 있었다.

병사들의 함성, 병장기들이 부딪치는 소리 속에서도 그 목소리는 정확히 들려왔다.

“그 분께 최초의 용이 도전하였으니. 네달렉스께서 단 일격에 산과 용을 허물었도다.”

성충의 이적을 구현하여 엘리우스는 분연히 고개를 들었다. 대전쟁 때의 전승을 구현한 이 이적은 시원의 용 켈타브리스와 네달렉스의 전투에서 나온 일화였다. 네달렉스는 질서의 철퇴로 검은 혼돈의 용을 처부셨고 그 일격에 천지가 울리고 산이 용과 함께 가라앉았다했다. 그리고 그 흔적이 대륙 앙트알키스 북쪽에 있는 용의 등뼈 산맥이었다.

성충의 이적은 그런 네달렉스의 엄청난 용력을 소규모나마 구현하는 것이었다. 물론 그러기 위해선 엄청난 영성과 함께 신성의 흐름을 유지하는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했다. 아직 봉사자인 엘리우스가 쉽사리 사용할만한 것은 아니었지만 사법관 그루모가 지닌 저 성표의 엄청난 광채 덕인지 엘리우스는 생각보다 수월히 성충의 이적을 구현할 수 있었다.

몸에서 평소와는 비할 수 없는 힘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승리가 눈앞에 있음을 의심할 필요가 없었다. 적은 무너지고 질서의 기치는 곧게 세워질 것이다. 저 사법관 그루모의 존재가 바로 그 증거였다. 분명 누구라도 믿을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이들이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게 모든 용기와 승리에 대한 희망이 고취된 순간 일이 일어났다.

눌 지휘관에 맞서 싸우며 아군을 격려하고 질타하던 그루모가 갑자기 뒤로 나자빠졌다. 순식간에 그루모를 중심으로 엘리머스 영주군 병사와 네달렉스의 봉사자들에게 피어오르던 용기가 사그러 들어갔다.

힘겹게 사법관 그루모가 일어났을 때 병사들과 네달렉스의 봉사자들은 그의 가슴에 박혀 있는 화살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루모는 자신에게 회복의 이적을 사용해서 어떻게든 일어섰다. 다행히 즉사는 면한 것 같았다. 그러나 일어나기 전에 또 한발의 화살이 날아와 그의 미간을 꿰뚫었다.

볼 것도 없이 절명이었다.

다음 눌을 방패로 후려치고 있던 엘리우스는 전장 전체에 충만했던 그루모의 영기가 사라지는 것을 느끼곤 그 광경을 보았다. 사법관 그루모를 보조하고 있던 사법관보 오세의 절규하는 듯한 표정도 보였다.

하지만 당황한 것은 눌들 쪽도 마찬가지처럼 보였다. 눌 지휘관의 멍청한 표정. 그는 이 새로운 기습자를 찾기 위해서 화살이 날아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려고 하고 있었다.

짧은 순간이지만 많은 생각이 들었다.

엘리우스는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예감을 느꼈다. 모든 것이 끝장났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아마 모든 이들이 그렇게 생각했으리라. 심지어 적인 눌 지휘관조차도 그렇게 생각했었을 것임이 틀림없다. 하지만 분명히 제 3자가 존재하고 있었다. 그가 무엇을 생각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는 사법관 그루모를 살해했다.

그리고 이어 눌 지휘관마저도 쓰러졌다.

눌 지휘관의 가슴에는 거대한 구멍이 나 있었다. 어떤 수단을 사용했을 지에 대해서 엘리우스로서는 도저히 짐작이 가지 않았다.

사법관 그루모에 이어 눌 지휘관의 죽음.

무차별적이라 여겨지지만 동시에 각 진영의 주도 인물을 노렸다는 점에서 계획적이었다고 밖에 말할 수 없는 공격에 대해 엘리우스는 어떻게 설명할 수도 말할 수도 없었다.

지금 이 순간에 무엇을 해야하는 것인가? 눌들과 단합해서 저 새로운 적을 몰아내야 하는가? 아니면 적에게 이득이 있을지 뻔해 알면서 계속 싸워야 하는가? 그런데 눌들이 지휘관을 잃은 상태에서 통제가 과연 될 것인가? 아니, 그 이전에 그런 지능이 있는 것인가?

지독시리 떠오르는 의문은 눈앞의 눌이 일으킨 이변에 의해 엘리우스의 머릿속에서 사라져버렸다. 지금의 엘리우스의 눈앞에서 방금 전까지 냉정히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던 눌이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단 한 번도 소리지른 적 없고 상처입어도 비명도 안 지르던 눌들이 이상 현상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었다. 그것도 하나만이 아니었다. 모든 눌 병사들이 그런 현상을 보이고 있었다.

이 급작스러운 사태에 사법관보 오세도, 백부장 갈소도 어떻게 대처하지 못했다. 뒤늦게 갈소가 “전원 멈추지 말고 공격해라!”라고 명령을 내렸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눌들의 포효가 울려 퍼졌다.

 

소녀는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냉혹한 살육에서 영웅적인 전투로. 마지막으로 야만적인 혈투로 변모하는 전장의 모습을 소녀는 계속 지켜보고 있었다.

“불쌍해라.”

마음에도 없는 말을 입에 담으며 소녀는 빙그시 웃었다.

이제 전투는 끝날 것이다. 양쪽 중 어느 한 쪽도 남지 않을 싸움이었다. 에카난스군과 눌 집단의 대결은 어느 쪽도 승리하지 못하고 끝나 버릴 것이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살아남는 쪽은 눌들 쪽이겠지만... 글쎄.., 살아남는 것을 승리로 부를 수 있다면 그렇겠지만 전쟁이라는 조건에서 대게 그렇게 말하긴 힘든 법이다. 양쪽이 전투를 벌인 후 그들 전부를 합쳐서 생존자가 하나 남았다고해서 생존자가 있는 편이 승리했다곤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더구나 그 생존자가 제대로 된 사고조차 할 수 없는 야만거인이라면 말이다.

소녀는 앉아있던 바위에서 일어섰다.

최후의 병사가 최후의 눌에게 살해당하고 있었다. 눌은 병사가 하나라는 사실이 못내 불만스러운 듯 병사를 높이 들어 상체와 하체로 분리시켜 버렸다.

피보라가 흩날리고 눌의 몸 위로 핏물이 주르륵 떨어졌다. 그리고 승리의 함성을 질러 올렸다.

“우어어어어어어어!”

소녀는 그런 눌을 재미있다는 듯이 쳐다보며 곁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우아한 태도였다. 백색 로브에 달린 후드를 깊이 눌러쓰고 있었기 때문에 소녀의 얼굴은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수려한 턱선으로 어느 정도 외모를 추측해 볼 수 있었다. 거기다가 후드사이로 삐져 내려온 긴 금빛 머리카락은 구태의연한 표현으로 황금에 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거기에 우아한 걸음 걸이. 단출하지만 금색 수가 놓인 고풍스러운 로브.

소녀는 피로 만들어진 진흙탕에 새하얀 로브자락이 끌렸지만 전혀 신경도 쓰지 않는 듯 미소를 잃지 않고 계속 다리를 움직였다. 신가하게도 소녀가 지나간 자리에 로브가 끌린 흔적은 있지만 신기하게도 로브에는 흙 한 점, 피한방울 묻은 흔적이 없었다.

눌은 다가오는 소녀의 기척을 감지하고는 몸을 돌려 소녀 쪽을 향했다.

소녀는 눌이 자신을 향해 위협적인 몸짓을 해보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점이 눌을 혼란케 하고 있었다. 왜소하지만 두려움이 없으며 동시에 자신으로서는 절대 이길 수 없을 것이 명백한 무언가.

외견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강력함을 숨긴 존재라는 것을 눌의 야성적 본능이 알려주고 있었다.

눌은 한 순간 당황했지만 결단을 망설이지는 않았다. 일견 지성체라는 존재들은 외견의 선입관에 휩싸여 판단을 그르칠 수 있겠지만 눌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야성을 믿었다. 아니, 야성밖에 존재하지 않았기에 그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돌아볼 것도 없이 눈을 몸을 날려 달리기 시작했다.

그 판단은 틀린 것은 아니었지만 오산이 존재했다. 소녀 쪽에서 눌을 전혀 놓아줄 생각이 없었던 것이었다.

도망치려는 눌의 이 디딘 바닥이 폭발해 올랐다. 눌은 다리에 끔찍하게 찢겨지며 벌러덩 넘어졌다.

소녀는 일어나기 위해 버둥거리는 눌의 곁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본래 자신보다 약한 상대를 괴롭히기 보다는 그대로 숨통을 끊어주는 것을 예의로 생각하는 소녀였지만 이번만은 그럴 수 없었다. 그녀에게는 알아내야할 것들이 존재했기 때문에 눌을 놓아 줄 수 없었다.

최근 1년간 추적해온 한 명의 마녀. 한 때 탑에서 녹의 칭호를 가지고 있던 충술사 레지세아의 단서가 분명히 이곳에 있을 터였다. 그리고 그 단서를 이 곳에서 찾아낼 수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소녀는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곳에 온 것이었다. 와야 했기 때문에 온 것이었다.

소녀는 숨을 몰아쉬었다.

소녀는 레지세아와 친했기에 지금부터 해야 할 일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숙주가 사망하기 이전에 그 머릿속에 부착되어있을 뇌충을 뜯어내야 했다. 물론 이런 일에 전문가는 따로 있었다. 소녀가 아니라 또 다른 소녀.

소녀의 미소가 뒤틀리고 우아하던 움직임이 점차 경박스럽게 변했다.

소녀가 변화할수록. 다가올수록 눌은 미친 듯이 몸부림을 쳤지만 결국 소녀가 다가올 때까지 도망갈 수 없었다.

씨익하고 소녀는 미소 지었다. 후드 아래에서는 은청빛의 주흔광 두 개가 형형히 빛나고 있었다.

그것은 주문을 사용한다는 근거.

주흔이라고 불리는 것을 주문을 사용하기 위해 주문사의 뇌면 속에서 창조된 구성이 사용되어 현세에 현현한다는 증거였다.

주흔은 주문사의 정신적, 신체적 특성에 따라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가장 먼저 그 흔적을 드러내는 쪽은 대체로 눈이었다. 그리고 주문의 강도와 범위에 따라 다른 부위에서 주흔이 나타나는 경우도 존재했다.

하지만 소녀에겐 그런 흔적이 없는 것으로 보아 그녀에게 있어 손쉽게 사용할 수 있는 주문인 듯 했다.

소녀의 안광이 형형히 빛남에 따라 눌의 공포도 비례하듯이 상승했다.

이미 없는 다리는 어쩔 수 없으니 눌은 버둥거리다가 소녀에게 손에 잡히는 대로 마구잡이로 물건을 집어 던졌다. 하지만 소녀는 뚝뚝 끊어지듯이 눌의 코앞으로 다가왔다. 마치 물체를 투과해버리는 것처럼 던져진 물건체가 가까이 날아오면 어느새 그 물체를 건너 뛴 장소에 나타나는 것이었다.

눌은 그런 것까지는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압도적인 존재에 대한 공포는 알고 있었다. 그것이 해를 끼칠 의도가 있건 없건, 과도하게 가까이 있는 포식자에겐 누구라도 공포를 느끼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지금 소녀는 충분히 해를 입힐 의도를 지니고 있었고 눌은 그 의도 역시 느낄 수 있었다.

결국 소녀는 눌의 곁으로 다가왔다.

허우적거리던 허벅지가 소녀의 손날을 따라 쓸려나가는 것이 눌의 눈에는 보였다. 그리고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소녀가 허벅지를 베어낸 다음 순간 눌은 어느 사이에 머리까지 절단이 나 있었다. 소녀의 손에는 이미 그녀가 노리고 있던 뇌충이 손에 들려 있는 상태였다.

소녀가 장애가 되는 허벅지를 잘라내고 뇌충을 드는 사이의 과정은 마치 생략이라도 되어버린 듯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소녀 자신은 전혀 문제없다는 듯이 아직 붉은 안광이 남아 보랏빛을 띠는 눈동자로 뇌충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예전 소녀가 기억하고 있던 형태와는 많이 변해 있었다.

좀 거 크기도 작아졌고, 색도 보라색으로 변했으며, 등에 새겨져 있던 레지세아의 인장도 보다 복잡하고 섬세하게 첨가되어 있었다.

소녀는 그런 벌레의 형태를 보고 레지세아의 발전도를 짐작했다. 비록 탑을 나갔다고 해도 마법에 대한 증진은 게을리 하지 않고 있는 모양이었다.

사실 문제가 있다면 바로 그것이었지만...

소녀는 1년 전의 일을 떠올렸다.

레지세아가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녀의 실험실 자체를 파기하고 탑을 나가버렸다. 그 과정에서 그녀의 제자들 중 몇 명이 사망했고 탑의 상급 마법사들 역시 피해를 입어야 했다. 소녀 역시 그런 피해를 입은 이들 중 하나였다.

물론 소녀에게 역시 죄는 존재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탑은 굳이 우수한 재원인 소녀를 이런 추적 임무에 파견하지 않았을 것이다.

“레지세아. 어디 있는 거예요. 만나고 싶어요. 이유를 들려줘요.”

중얼거리듯 소녀는 현재 심정을 내뱉었다.

한참 동안 서서 소녀는 뇌충을 바라보았다. 겉으로 봐서야 징그럽기 그지없는 벌레이지만 소녀에게 있어서는 추억을 상기시키는 요소들 중 하나였다. 게다가 레지세아의 곁에서 수천 종류의 벌레들을 다뤄왔기 때문에 특별히 유충이나 다리가 많은 종류들에 관해 거부감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다.

소녀는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그리고 허공에 대고 입을 열었다.

“네. 스승님. 네. 찾았어요. 그녀는 그들에게 협력하고 있는 것 같아요. 틀림없어요. 네. 제가 잘 못 볼 리가 없잖아요? 그것은 제가 만든 것이기도 해요. 네. 돌아가도록 하겠어요. 할 일이 많지요? 그래요. 알고 있어요. 걱정 마세요. 제가 누구인지 알고 계시잖아요.”

고개를 몇 번 끄덕이고 살포시 미소 지은 소녀는 구성을 짜기 시작했다.

눈동자에서 안광이 다시금 피어오르고 심지어 몸 전체에 청은빛 후광을 둘렀다.

소녀가 지금 사용하려는 것은 강대한 탐지 주문이었다. 단서를 지배함으로서 주문 사용자는 대상에 대한 영구적인 추적기능을 가지게 되는 주문으로, 상위술식으로서 탐지 주문의 최고봉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었다.

소녀는 구성을 창출하고 벌레를 집어 삼켰다.

지릿한 피맛을 입에 감돌았지만 삼키는 것 자체는 그리 힘들지 않았다. 당시 소녀가 알던 시절의 크기였다면 아마 삼키는 일에 크게 고생하지 않았을까? 쓴웃음을 지으며 소녀는 억지로 벌레를 삼켰다.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끔찌한 감촉에 한 번 인상을 찌푸린 소녀는 복부에 손을 대고 조용히 기다렸다.

곧 감각이 왔다. 하지만 멀었다.

저 먼 곳이었다. 방향 밖에 알 수 없을 정도로 멀었다.

소녀가 돌아본 방향은 제국이 있는 곳이었다. 힘겹게 추격해서 에카난스 남부까지 내려왔는데 다시 제국으로 돌아가야한다는 사실에 소녀는 조금 맥이 빠졌다.

무엇보다 불만스러운 것은 당장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녀를 따라온 또 한명의 스승인 적의 레드우드와 소녀는 탑의 주문사였다. 그리고 탑의 역할은 제국 뿐 아니라 신성으로부터 이 세계의 독립권을 유지하는 것으로 제국의 창설한 십현자의 이념을 지키는 것이었다.

지금 이 땅에는 과도한 신성의 침범이 일어나고 있었다.

정복자이며 야망을 관장하는 자. 야욕과 지배욕의 신. 강탈자이며 으르렁거리는 자. 코른.

눌들의 배후에 그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리고 소녀가 추적해야하는 전 스승 녹의 레지세야 역시 그들의 배후에 존재하고 있었다.

한숨을 쉬며 소녀는 이 시체와 피로 점철된 전장을 벗어나고자 움직이기 시작했다. 할 일은 많지만 몸은 하나다. 그녀는 여섯이지만 동시에 하나라는 사실을 매번 떠올리게 된다.

‘몸도 여섯이었으면 좋았을라나.’

그런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불가능하니 문제다. 문제인 거다.

어느새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있던 소녀는 피바다를 벗어났을 때쯤 멈춰 섰다. 그리고 뒤로 돌아섰다.

신음 소리를 들은 것만 같았다. 착각일까? 한 번 생각해보지만 그건 아닌 것 같았다. 분명 신음 소리를 들었고 지금도 들리고 있었다.

곧 소녀의 시야가 한 것으로 고정되었다.

아아. 알고 있어.

소녀는 찾게 될 것이었기 때문에 손을 내밀었다. 바닥에 쓰러져 있던 눌 시체들 중 하나가 들어 올려 지더니 한 쪽 구석으로 내동댕이쳐졌다. 그리고 눌이 있던 자리에 한 청년이 쓰러져 있었다. 촌스러운 일자머리를 한 그는 피범벅이 되어 기절해 있었다.

소녀는 그를 기억하고 있었다. 네달렉스의 봉사자들 중 한명이었다.

목적 불명으로 생각되는 누군가에게 습격당해 눌들고 영주군들고 지휘체계를 잃고 우왕자왕하기 시작했던 사실을 떠올렸다. 그리고 혼전.

눌들은 뇌충으로 제어되고 있었었지만 일종의 제어단말이라고 할 수 있는 지휘관 계급이 쓰러짐으로서 일제히 제어를 잃고 폭주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는 보다시피 양쪽 모두 피박살이 날 때까지의 전투였고 결국 최후에 남은 것은 눌 하나였었다.

그런데 영주군 족에서도 한 명 살아남은 것이다.

운이 좋았던 것일까? 그 궁수는 몇 번이고 화살을 쏘아 전장을 조율했었다. 완전한 평형을 이루도록. 양쪽모두 소모되어 사라져버리도록. 그렇게 말이다.

그러고도 살아남았다.

소녀조차 방금에서야 알아차릴 수 있었던 일이었다. 어지간해서야 이미 앞으로 일어날 일의 대부분을 알고 있는 그녀인데도 전혀 눈치 채지 못했었다.

악운일까? 행운일까?

그걸 선택하는 쪽은 분명 저 청년일 것이다.

소녀는 방금 자신이 떠올린 의문임에도 전혀 궁금할 것 없다는 듯 그녀가 해야할 일을 하기 시작했다.

다시금 소녀는 시체와 피로 범벅이 된 전장으로 내려갔다. 우선을 그를 꺼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기 않았다간 저 핏물에 익사해버릴 지도 모를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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